북부의 계승자6
*
록시는 눈앞의 인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카일 자이러스라는 몰락한 왕국의 계승자였던 사내는 전혀 엉뚱한 이름으로 자신을 밝혀왔다.
제드 크레인.
토르가 왕국의 안팎으로 그 이름은 유명하다.
라이곤을 평정한 권력의 핵심 인물.
토르가 왕국 내부의 정보를 모으는 것만으로도 힘이 벅찼으므로 정보는 한정적이었지만, 뚜렷하게 알려진 행보들이 한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제드 크레인이 아주 무서운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라이곤 왕국은 근 수년 사이에 급변하였다.
병환으로 오늘내일하며 국력을 갉아먹던 국왕이 서거했고, 왕위에 여왕이 올랐다. 그 전후로 내로라하는 권력자와 지방영주들이 여왕과 반목하였고, 가차 없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이 피바람의 중심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제드 크레인이었다. 그는 별안간 나타났고 이젠 라이곤 왕국의 실세가 되어 있었다.
“내가 제드 크레인이라는 게 그렇게 안 믿기는 모양이지.”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게 당연하지. 일국의 재상. 그것도 전쟁 중인 국가의 최고위 권력가가 지금 이런 곳에 혼자 나타나다니 말이야.”
“반대로 말해서 그런 부분이 틈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명확한 사실조차도 때때로 그 상식이라는 잣대가 왜곡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 지금처럼 말이야.”
“후······. 좋아, 도무지 이해가 가진 않는 얘기지만, 일단 그건 넘어가자고. 카일······ 아니, 제드 크레인. 조금 전에 외교회담이라고 말했었지. 그게 무슨 말이지?”
“라이곤과 연합. 같은 적을 가진 두 세력의 화합은 정치적으로 큰 이득이 있다.”
“그 말인즉 우릴 방패막이로 삼겠다는 건가?”
“정확하다.”
제드의 긍정에 록시가 미간을 모았다.
“잘도 말하는군. 그게 당신이 말하는 외교야?”
“외교란 나라와 나라가 주고받는 것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그게 불만이라면 역으로 묻지. 북부왕국연합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라이곤 왕국이 얻는 게 무엇이지?”
“······.”
록시는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승리를 그대들이 이루어낸 것이란 착각을 하진 않을 테고. 나의 제안이 지극히 점잖은 방식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군.”
“좋아, 인정할게. 이 외교에서 우리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게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걸 말이야. 하지만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솔직하게 말하자면 포부르크가 이대로 독립한다고 해도 토르가 왕국을 상대할 정도의 힘은 없어. 당신이 말하는 방패막이는 어렵다는 얘기지.”
“그건 걱정할 것 없다. 협력관계가 된다면 북왕국연합에 대한 지원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지금처럼 북부왕국연합의 독립을 위해서 움직이는 데만 주력하면 되는 거야.”
록시는 머리를 굴렸다. 이야기가 그들에게 너무나도 좋기만 한 까닭이다. 균형이 무너진 일방적인 관계는 종속으로 이어지곤 한다.
‘하지만 리스크 없이는 얻는 것도 없어.’
록시는 그걸 잘 알았다. 이건 기회였다.
“좋아,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잘 생각했다. 그러면 이 외교적 성과에 대한 친선의 의미로 이 도시를 그대들에게 넘기도록 하지.”
제드는 선심 쓰듯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틀린 게 아니다.
이 도심을 되찾은 건 그들이 아니라, 제드였으니까.
록시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가 과거에 어떤 이름을 가졌던들, 그것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이제 제드 크레인. 라이곤 왕국의 재상이었다.
*
포버의 소요사태는 금방 수습됐다.
성탑 높이 펄럭이던 토르가 왕국의 깃발은 꺾였고, 그 자리에는 멸망한 포부르크 왕국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고, 승리를 노래했다. 억압과 압제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음을 말이다.
한편, 제드는 남부광장에서 쓰러진 골렘을 모두 회수하고 코어가 파괴된 골렘에서는 술식을 지우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이 승리는 해방전선이 일구어낸 승리로 알려졌고, 동원된 골렘의 수는 약 10기 이상이라는 얘기가 거의 사실처럼 전파되었다.
‘자, 이 사실을 두고 이제부터 토르가 왕국이 어떻게 움직일까. 가만히 두고 보다가는 북부의 지배권이 날아가겠지. 그렇다고 최전선의 병력을 뒤로 물렀다가는 더 큰 걸 잃을 수도 있다.’
이게 적의 행동을 강요하는 적절한 수라는 건 명백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다음 수다.
제드는 이번 포버의 전투를 겪으면서 공간의 틈에서 여러 기의 골렘을 빼내서 동시에 운용한다는 게 전략적으로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는지 실감하였다.
지금까지 생각지 못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운용할 수 있었고, 조기에 전투를 끝낼 방법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약점 역시 명확하다.
‘네임드 골렘의 마나 소모량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막대하다. 짧은 전투라면 모를까, 장시간 전투가 되면 곤란해.’
제드는 지금껏 네임드 골렘을 제대로 운용한 적이 없었다.
첫 네임드인 오베르는 루카스와의 연동을 통해서 마나의 소모 부담을 덜었고, 아우로렐은 네임드로 거듭난 이후로는 아직 정규전을 치른 적이 없었다.
사실상 자크를 통해서 처음으로 네임드 골렘의 마나 소모량을 경험한 것이다.
물론, 동시다발적인 교전을 벌여서 마나 소모가 훨씬 더 컸던 것도 있었지만, 전장에서는 항상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최악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토르가의 국왕을 잡고, 토르가 왕국의 주요 왕족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면 토르가의 국력은 단번에 꺾일 터. 그 혼란을 수습하려면 앞으로 10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위험하다는 거다. 정보가 없어. 거기다가 발트 테바인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도 그렇다.’
미래의 역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참고 정보일 뿐이었다. 제드는 냉정하게 그 전략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리스크가 너무 큰 작전은 오히려 손해다. 급한 건 적이다.
제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깨어났소?”
“아직 의식은 없지만, 곧 깨어나십니다.”
제드의 물음에 대답하는 중년의 사제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지금 이 신전에 의식없이 누워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사일러스 발베르트.
이 도시의 총독으로서 군림하던 포악한 정복자가 바로 그였다. 그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만인의 생명을 공평하게 여기시는 주께서는 차별하시는 게 없으시나, 안에 계시는 분이 이곳에 있다는 게 밖에 알려진다면 작은 소란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거라면 너무 걱정할 거 없소. 그가 깨어나면 금방 이곳을 떠날 참이니.”
제드는 사제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거구의 사일러스는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어느새 몸에 가득했던 상처는 온데간데없었다. 사제의 능력과 사일러스 그 자신의 초월적인 생명력 덕분이다. 잘려나갔던 팔조차도 잘 붙었다.
제드는 가만히 사일러스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 포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를 죽일 참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생각이 바뀌었다. 마스터라는 초월적인 경지는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라이곤 왕국엔 강습전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자가 없었다.
‘사일러스는 기사가 아니야.’
사일러스가 토르가 왕실을 따르는 이유는 단 하나다.
토르가 왕국의 위대한 마스터 하인리에게 졌기 때문이다.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인 하인리 엘스우드는 사일러스를 수 없이 쓰러뜨렸으나 절대로 죽이진 않았고, 기어이 3년에 한 번씩 대련의 기회를 주는 대신 그를 왕실의 기사로 만들었다.
표면적으로는 국왕을 따랐으나 자신을 쓰러뜨린 하인리에게 도전하기 위해서 계약을 맺은 거나 다름없다. 따라서 그에겐 약속이나 신뢰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사내새끼가 얼굴을 자꾸 보고 있으니, 잠이 다 깨는군.”
불쑥 사일러스가 사납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자크가 한 발 앞으로 나섰지만, 제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일어났나?”
“오랜만에 푹 잤다. 개운하군.”
뚜두둑. 몸을 비틀며 일어나는 사일러스.
“팔도 멀쩡히 붙여놨군. 흐흐흐. 겁이 없군. 내 팔이 하나 정도는 없어야 부리기 편할 텐데.”
“온전하지 못한 짐승을 쓸데가 있겠느냐?”
“흐흐흐. 재밌구나. 뭐, 좋다. 네놈이 꽤 재밌는 놈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 근데 내가 한 가지를 깜빡하고 말하지 않은 게 있어서 말이야.”
“뒤늦게 조건이라도 달겠다는 건가.”
“그래. 생각해보니까 갚아줘야 할 빚이 있는 놈이 있었다. 나는 그놈을 쓰러뜨려야 해. 너희는 그다음이지.”
“하인리 엘스우드를 말하는가?”
“그래. 바로 그 자식이다. 나는 아직 그놈을 못 죽였어.”
“이해가 일치하는군. 돕도록 하지.”
“필요 없다! 놈은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어.”
사일러스가 고함을 지르며 으르렁댔다.
그러나 제드는 뒷짐을 질 따름이었다.
“유감이지만, 네 능력과 무관하게 하인리 엘스우드의 수명은 그리 길게 남지 않았어. 그는 단명한다. 즉, 내가 판을 만들지 않는다면 그와 네놈의 대결이 다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얘기다.”
“뭐라고?”
사일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토르가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였던 하인리 엘스우드.
안투르프 가문의 푸른 늑대 파스칼의 이름이 널리 울려 퍼지기 이전에 동부 대륙의 최강의 기사라고 널리 알려졌던 인물. 전생에 제드는 그가 10년을 더 살았더라면 토르가 왕국의 패도는 더 빨리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종종 듣곤 했다.
그는 제드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즈음에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기에 실제로 만난 적은 없던 인물이었다.
‘이 무렵이었지. 그가 죽은 게.’
정확한 때를 기억하고 있진 않았지만, 수년 안팎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믿든 믿지 않든 자유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면 네놈의 빚이란 것도 영영 갚을 수 없게 되겠지.”
“크으으으! 놈이 죽는다고!”
사일러스가 핏발이 선 눈으로 이를 뿌드득 갈아댔다.
“그러니 내 말을 따라라. 하인리 엘스우드. 그가 멋대로 죽어버리기 전에 네놈과 싸워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겠다는 것이다.”
제드의 말에 사일러스가 핏발이 선 눈을 부라렸다.
“똑똑히 들어라. 놈은 내 거야. 알겠어?”
“네놈이야말로 다음 기회는 없다는 걸 알아둬라. 하인리는 맹세와 신뢰를 깨버린 너를 절대로 살려두려고 하지 않을 거다.”
“흐흐흐흐. 좋지, 좋아. 죽고 죽이는 게 싸움이다. 나는 놈을 죽일 생각인데, 응당 놈도 나를 죽이려고 해야지. 그래서 뭘 어떻게 할 참이냐. 나는 기다리는 게 싫다! 할 거면 어서 해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다. 네놈이 깨어나는 즉시 말이야. 하루는 더 기다릴 참이었는데, 덕분에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됐군.”
밖에서 기다리던 사제는 멀쩡하게 걸어나오는 사일러스를 보더니 움찔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내 시선을 피하였다.
“사제님께서 많이 고생해주셨소. 그리고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이곳에 우리가 있었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제드는 신전을 나섰다.
신전의 앞에는 두 기의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뭐냐, 왜 말이 둘 뿐이야!”
사일러스가 버럭 소리를 친 순간이었다. 자크의 뒤쪽 공간이 쩍하고 열리더니 그가 곧 모습을 감추었다.
“뭐, 뭘 한 거냐.”
“설명한다고 네놈이 알겠느냐?”
사일러스가 깜짝 놀란 얼굴로 허공을 휘젓고 주변을 두리번댔다. 기척을 감추거나 마법으로 투명해진 것 따위가 아니다. 완전히 사라졌다.
제드는 어느새 말에 올랐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참이냐.”
“그놈은 어딜 간 거냐!”
“찾을 필요 없다. 자크 경은 언제든 나의 부름에 응해서 돌아올 테니까.”
사일러스는 영문을 알 수가 없다는 듯 끝까지 두리번거리다가 말 위에 올랐다. 곧 두 사람은 길을 따라 남부의 라그나르 평야를 향해 나아갔다.
“애송이!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냐!”
“전장으로 간다.”
“전장이라고. 흐흐흐. 그거 좋구만.”
사일러스가 크게 웃어댔다.
*
수일 뒤. 라이곤과 토르가의 국경지대.
어둠이 내린 숲 속을 은밀하게 걷는 이들이 있었다.
하이렐의 숲 지대를 지나 남부로 우회하여 스키터니안 지방의 군영을 굽어보는 산자락에 포진한 이들이 있다.
곧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인물이었으나, 바로 그 인물이 이번 작전의 핵심인물이자, 이들을 이끄는 지휘관이었다.
스르릉.
칼이 뽑혀 나왔다.
그게 신호였다.
“악몽 작전을 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