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계승자5
*
제드의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보다 더 지치는군. 동시에 여러 상황에 여러 골렘을 홀로 운용한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야.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마나의 소모량이 늘어난 게 크다. 자크 경만 해도 기존의 세 배 이상으로 마나를 사용하기 시작했어.’
상향된 자크의 능력은 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났다. 이제 마스터 중에서도 상당한 역량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저 사일러스를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니던가.
물론, 아직 상황은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부 광장의 접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괜찮소? 전달되는 마나가 불안정해졌소, 주군.]
“괜찮아. 다만, 예상보다 훨씬 더 마나를 많이 썼다.”
[나 때문이오?]
“부정하진 않을 셈이다. 그대가 마스터 급에 이르는 힘을 얻은 만큼 마나 소모도 막대해졌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아이언 골렘의 마나 소모가 전체적으로 많아졌어.”
[왜 그렇소? 나 이외에 다른 아이언 골렘의 갑주에는 아무 변화도 없지 않았소.]
“그것도 역시 경 때문이겠지.”
[그게 무슨 말이오?]
“아이언 골렘은 경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에 레지앙의 대장간에서 그들과 대련하면서 아무것도 느낀 게 없던가?”
[그러고 보니 내 검술을 흉내 내는 것 같았소.]
“정확히 봤다. 아이언 골렘은 간접적으로 경에게 영향을 받아서 학습하고 있어. 최초의 상태와는 전혀 달라졌다는 거다.”
전에 자크와 아이언 골렘이 충돌하는 광경을 보고 제드는 확신했다. 자신의 가설이 맞았음을 말이다.
‘바로 그렇기에 지금 저 광장의 전투도 성립되는 거다.’
기절한 사일러스를 신전에 맡긴 후에 남쪽 광장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제드는 계속 블라르를 통해 광장의 전투양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일러스가 자랑하는 7인의 아이스본 중에서 살아남은 건 이제 셋뿐이었다. 그리고 휘하의 기사단과 병사들 태반은 시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싸움은 명백하게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아이언 골렘도 다수가 파괴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완전히 파괴된 골렘의 수는 다섯 정도. 나머지는 충분히 수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럼 주군이 결정하시오. 내가 저 앞의 상황에 개입하면 상황은 금방 끝날 것이오. 하지만 주군의 마나 소모도 막대할 것이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제드는 잠깐 생각했다.
자크를 투입하는 게 좋을지, 그게 아니면 지금 광장의 아이언 골렘만으로 이 상황을 마무리하는 게 좋을지 말이다.
자크를 투입하면 상황은 금방 마무리될 테지만, 이후의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통제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아니, 따로 이쪽에서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들이 시간을 너무 늦지 않게 맞췄어.”
제드가 피식 웃었다. 바로 조금 전의 순간에 광장을 비추는 블라르의 시야에 나타난 이들이 있었다.
수십······ 아니, 수백 명이 넘는 수의 인파였다.
그들은 사방에서 광장의 전투 상황으로 뛰어들었고, 순식간에 포위하였다.
그들 중 몇 명은 하늘 높이 자기 몸보다 더 큰 깃발을 크게 휘둘렀다. 전생에 지겨울 정도로 보았던 포부르크 왕국의 깃발이다. 큰길의 너머에서 어둠을 뚫고 다가오는 거인도 보였다. 골렘이었다.
“그래도 자격이 없지는 않군. 이 무대의 막을 내리기엔 그들만큼 가장 잘 어울리는 이들도 없겠지.”
*
“크아아악!”
아이스본은 최후의 순간까지 싸웠다.
온몸에 창이 꽂힌 채로도 악귀처럼 고함을 질러댔고, 기어이 덤벼드는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모습이 흡사 악귀나 다름없다.
병사들은 질린 기색으로 포위를 풀지 않았다. 이미 아이스본의 직속 병사들과 기사들은 다 죽거나 항복한 이후였다.
“다 끝났다! 투항하라!”
“무의미한 싸움이다!”
해방전선의 병사들이 소리쳤지만, 피범벅이 된 아이스본의 기사는 살기등등하게 눈동자를 치켜뜰 따름이다.
“모두 서두를 것 없다. 놈은 죽어가고 있어. 대치만 하면서 체력을 뺀다!”
딱 둘 남은 아이스본. 그들은 지금 상처 입은 짐승이다. 죽기 전에 더더욱 발광하는 짐승. 이런 때에는 섣불리 숨통을 끊으려다가 역으로 당한다.
‘무시무시하군. 저런 괴물 같은 놈을 상대했었다는 건가.’
트릭스는 힐긋 저편을 보았다.
같은 갑주에 똑같은 대검을 들고 있는 은색갑주의 기사. 하나같이 멀쩡한 이가 없었지만, 전투를 속행할 수 있는 이가 7명이나 됐다.
‘정말 엄청난 전력이다. 아이스본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라니. 자크 경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 순간을 준비했단 말인가.’
트릭스가 혀를 내두를 때였다.
피를 뒤집어쓴 아이스본의 기사가 별안간 고개를 돌리더니 트릭스를 노려보았다.
“크아아악! 네놈은 데려가야겠다!”
고함을 내지르며 곧장 쇄도한다. 해방전선의 병사들이 바로 그 앞을 막아섰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최소 기사급 이상의 실력자는 나서야만 했다.
“트릭스!”
티리가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하지만 시간을 맞추진 못하리라. 트릭스는 각오를 다지며 칼자루를 꽉 쥐었다. 피할 수 없다면 베어버리면 될 일이다!
“타아아압!”
마주 달려나가며 칼로 공간을 베어 나갈 때였다.
트릭스는 보았다.
어둠을 가로지르며 불쑥 시야로 뛰어든 은색의 궤적을.
써걱.
비명조차 없는 죽음이었다. 몸이 두 동강이 나버린 아이스본의 일원. 그곳엔 은색 갑주의 기사가 서 있다. 후두둑. 피에 흠뻑 젖은 대검을 붕 휘둘러 피를 털어내고 고개를 돌린다. 그대로 하나 남은 적까지 해치울 참이리라.
“······.”
트릭스는 이를 악물었다. 분한 일이다. 그들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왔던 게 아니다. 언젠가 다가올 이 순간을 위해서 치열하게 준비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지켜보는 게 전부란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모두 비켜!”
쿠웅.
땅이 무섭게 진동했다. 골렘이 별안간 기동하면서 앞으로 나오자, 광장의 병사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그러자 은색의 기사들도 이내 물러섰다.
“흐흐흐. 재밌구나. 그 인형으로 나를 어찌하겠다는 거냐! 좋다. 아주, 좋아. 마지막 싸움으로서 이보다 더 화려할 수는 없겠지! 사냥감으로서는 부족함이 없다!”
피범벅이 된 채로 숨을 헐떡이는 최후의 아이스본이 덤벼들었다. 두꺼운 칼에 맺힌 오러가 줄기줄기 솟구쳐 날아들어 골렘의 다리에 쩍 박혔다.
콰가가각!
표면이 무섭게 갈려나가는 가운데, 놈은 그 상처 입은 몸으로 날렵하게 다리 사이의 틈으로 들어와 뛰어오른다. 코어가 부서지면 골렘도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 골렘을 조종하는 마법사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일이었다.
콰가각!
우악스러운 손이 가슴팍으로 날아드는 칼과 함께 뛰어든 기사를 붙잡았다.
“크아악!”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잠깐이었다.
우드드득!
이윽고 온몸을 뭉개는 손아귀의 힘에 비명은 끊어졌고, 최후의 아이스본의 머리가 뽑히며 바닥에 떨어졌다.
핏물이 줄줄 흐르며 광장의 바닥을 굵게 물들였다.
“이겼다.”
“해방군이 아이스본을 무찔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군중 사이에서 환호가 터졌다.
핏물과 시체의 사이에서 광기를 담은 그 환호성은 공포가 전염되었을 때처럼 똑같이 아주 빠르게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 속에서 록시는 차분하게 걸어나왔다. 골렘은 바로 그녀가 조종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죽인 아이스본의 처참한 몰골을 눈에 담았다. 이건 복수였고 되찾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야. 이제부터야. 모든 건 이제부터라고.”
그녀는 그렇게 자신에게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저편에 서 있는 은색갑주의 기사들에게 걸어갔다. 지금은 상념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만나서 대화를 해야 한다.
“자크 경!”
그녀가 자크를 불렀다. 하지만 그 거구의 기사 중에서도 누구도 그 부름에 응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대답조차도 말이다.
“······.”
그들의 앞에 선 록시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투구 속에서 빛나는 저 녹색의 안광이 살아 있는 인간이 내비치는 그런 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대체······.”
록시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였다.
은색기사 한 명이 어둠의 저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어둠에 잠긴 성채가 있었다.
“······.”
부족한 설명이었으나, 록시는 그 손짓만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만나야 할 사람이 바로 저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가자.”
쿠웅.
록시를 따라서 골렘이 움직였다.
*
성채는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록시는 무너진 성문의 입구와 성벽. 그리고 해자를 넘었다.
‘이곳에서 골렘전이 일어났었구나.’
성벽 안팎으로 보이는 흔적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바닥에 찍힌 골렘의 발자국과 무너진 성벽, 그리고 그 너머에 골렘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최소 10기 이상의 골렘이 이곳에서 싸웠어.’
록시는 혀를 내둘렀다.
카일, 그리고 자크가 이번 일을 일으키기까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였는지를 직감하게 됐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된다. 이 나라 곳곳에는 그들의 눈과 귀가 있었다. 그것은 왕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만한 전력을 준비했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지? 거기다가 이 정도의 골렘전이 벌어졌더라면 그 전부터 어떤 동선이 있어야 옳아.’
생각할수록 이해가 안 되는 일투성이다.
곧 록시의 걸음은 회랑에 다다랐다. 성 내부로 이어지는 이 회랑에 그녀가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이야. 꿈에서도 바랐던 일이건만,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곳곳에 널브러진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를 지나서 회랑을 넘어서 복도로 나아가는 동안, 록시는 점점 더 긴장했다. 골렘도 저 밖에 두고 온 데다가 이 성채에는 다른 이도 아니고 바로 그 사일러스가 있기 때문이다.
토르가를 대표하는 마스터 급 기사 중 한 명이라고 불리며 북왕국의 정복자라고 불리는 잔인무도한 억압자가 바로 그였다.
“록시, 이건 너무 위험해.”
그녀의 호위역으로 따라붙은 티리가 그녀를 다시금 말렸다. 하지만 록시는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그녀는 해방군의 수장으로서 이 도시에서 일어난 일의 시작과 끝을 알아야만 했다.
머잖아 대전이 나타났다. 고성의 대전은 한때, 그녀가 수없이 오갔던 장소였다. 많은 귀족들이 그곳에서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진언했고, 무수히 많은 기사가 충성을 맹세하였던 곳.
“······.”
록시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대전을 눈에 담았다. 희미하게 들어온 달빛이 드리우는 대전의 풍경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흉하게 갈라진 바닥과 무너진 기둥. 그리고 찢겨나간 휘장. 그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가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참상의 너머.
멸망한 왕국의 왕좌이자, 지금은 총독의 권좌의 앞 계단에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생각보다 늦었어.”
나직하게 들려온 목소리.
그 목소리를 록시가 어찌 까먹었으랴.
“카일. 카일 자이러스.”
록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곧 푸른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록시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역시 그다.
록시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틀렸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 이름은 버렸다고,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그럼 지금 당신은 누구지.”
“나는 제드 크레인이다.”
록시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 당신이 제드······ 크레인······ 이라고?”
“라이곤 왕국과 북부왕국연합. 두 나라 간의 외교회담 장소로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는 것 같군. 록산느 리베라여, 동의하나?”
제드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 미소는 저 푸른 눈동자보다 훨씬 더 마성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