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계승자3
*
도시의 거리가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남부의 광장에서부터다.
아이스본의 한 명이 쓰러졌다.
은색갑주의 해방자들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해방의 때다!”
“포부르크여 일어나라!”
억압되었던 사람들이 한둘씩 모여서 집단을 이루었고, 그들은 곧 무장을 시작했다.
들불이 번지듯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저녁놀이 드리우는 도시로 사람들은 한둘씩 횃불을 들었고, 그 수는 점차 더 많아졌다.
그 군중들의 사이에는 록시와 트릭스도 있었다.
“록시, 결정해야 해. 일이 커졌어.”
“이제야 알겠어. 그가 해야만 한다고 했던 게 이거였구나.”
록시는 전율했다.
무모하게만 보였던 순간이 사실은 함정이었다.
그리고 아이스본이 고꾸라졌다.
“이번 기회를 놓쳐선 안 돼.”
“결정을 내린 거야? 이 일에 가담하면······ 뒤는 없을 거다.”
“카일이 보여줬잖아. 이제 우리 차례야. 누가 북부를 해방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우리 역시 그냥 시간만 보내고 있었던 건 아니야. 지금이 궐기의 때야.”
록시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 철두철미하고 용의주도한 카일의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눈동자는 꼭 모든 걸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지금 이 순간의 결단조차도 계산했을지도 몰라. 그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야.’
록시와 트릭스는 곧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적들의 시야를 피해서 갈아왔던 칼날을 들이밀 때가 됐다.
“이럇!”
말을 박차고 해가 저무는 서쪽의 에이버. 과거 에이부르크라고 불렸던 도시를 향해서 두 사람은 달려나갔다. 해가 지기 전에 그녀는 돌아올 것이다.
그 무렵, 남부광장의 은색갑주의 해방자들은 이 작은 승리에도 기뻐하는 일이 없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드 아래에 감춰진 투구 속에서 일렁이는 녹색의 안광.
그들은 나이트 급이라고 명명된 아이언 골렘이었고, 현재 도시 북부에서 움직이는 제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적을 이 남부 광장으로 끌어들이고 몇 명이 나타나든 해치우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으아악!”
“악!”
북쪽의 대로에서 별안간 비명이 터졌다.
승리의 함성은 금방 지워졌고, 이내 공포가 전염됐다.
서로 밀치면서 북쪽 거리에 가득 모였던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들 사이로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과 칼 따위를 거침없이 휘두르며 눈앞의 군중을 베어 넘기는 모습. 그들의 행동에는 주저가 없다.
그들의 앞에서 군중은 저항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칼을 들었다고 해도 그들은 병사가 아니었다. 반면, 이 도시를 정복한 사일러스의 군대는 말단에 이르는 병사까지도 약탈자다. 사람을 죽이고 재화를 훔치고 피로 온몸을 뒤집어쓰며 정복자의 군대로 불리게 된 것이다.
싸움의 때가 되면 그 차이는 극명하게 갈린다.
군중은 겁에 질려 주춤주춤 물러났고, 광장으로 우르르 쏟아져나온 병사들은 금세 주변을 에워쌌다.
“어이! 이것 봐. 정말로 그렉이 죽었는데.”
“똑똑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긴 했어도 이렇게 죽을 놈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러게. 아주 헤집어놨군. 얼굴도 못 알아보겠어.”
거구의 기사들이 담담하게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의 상태를 살폈다. 팔다리가 잘리고 몸이 꿰뚫리기는 했어도 시체를 더는 건들지 않았던 아이언 골렘들이다. 나머지는 쏟아져나온 군중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억압됐던 분노를 쏟아낸 것이리라.
“네놈들, 각오는 되어 있겠지.”
“그래, 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아이스본이라는 게 그리 만만한 이름이 아니란 걸 보여주지.”
채채챙.
아이스본 여섯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타합!”
은색갑주의 해방자들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대검을 쥔 아이스본 기사 한 명이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방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고, 광장은 병장기와 불똥이 튀는 전장으로 변했다.
*
블라르가 검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배회했다.
‘좋아, 이것으로 도시의 모든 이목은 광장에 쏠렸다.’
북쪽의 여관에서부터 인파 속에 스며들어 유유히 성채의 코앞까지 다다른 제드는 한적한 거리 속에서 어딘가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내리기 시작한 어둠을 등진 채로 그는 이윽고 하늘 높이 뻗은 성채의 앞에 섰다. 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은 곧장 병장기를 겨누었다.
“당장 물러서라. 만약 한 발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내일의 해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병사들의 태도는 사나웠다.
그러나 제드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오히려 이런 말을 해왔다.
“그대들에게 한 가지 자비로운 제안을 하지. 그 병장기를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에서 도망쳐라.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약속하도록 하지. 기회는 한 번뿐이니 잘 생각해 보도록 해.”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병사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겨눈 창을 제드의 목 언저리까지 가져다 댔다. 조금만 힘을 더 준다면 그대로 목이 꿰뚫리고 말리라.
“다시 말해봐. 뭐라고 지껄였지?”
“그럴 수는 없지. 기회는 한 번뿐. 그렇게 말했을 텐데.”
“이 새······.”
퍽.
말을 하던 중 병사의 머리가 터졌다.
머리를 잃은 몸뚱어리가 간헐적으로 떨며 바닥에 널브러지는 가운데, 나머지 병사가 급히 덤벼왔다. 하지만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병사의 창끝이 제드에게 닿기 전에 마탄의 섬광이 병사의 머리를 먼저 터뜨렸기 때문이다.
“역시 사일러스 장군의 직속 병사들인가.”
제드는 짧게 감탄했다. 부지불식간에 동료 병사의 머리가 터지는 걸 보고서도 덤벼들 생각을 하다니.
전생에도 사일러스가 이끄는 군대가 용맹하기로는 토르가에 당할 군대가 없다고 그랬다.
강습대 보병전술교리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이후로 사일러스의 군대는 더 소수정예화되어 적의 진영을 파고들었던 까닭에 제드와는 접점이 별로 없었지만, 그 명성은 워낙 자자하여 제드도 익히 들었을 지경이었다.
“상대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
제드의 눈동자가 빛을 머금었다. 성벽의 너머로 다양한 마법술식이 얽혀있는 게 보였다. 결계형 마법진이다. 공격이나 방어용이 아니라, 적의 침입을 알리는 알람 계통의 마법.
그걸 어쩔 생각은 없다. 성채에 숨어 들어갈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정문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와라.”
제드가 트리거로 공간의 틈을 열었다.
그 순간, 어둠보다 더 어두운 공간이 쩍 열렸으니, 그 너머에서 4미터가 넘는 골렘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견갑에는 부대를 상징하는 문장도 무엇도 없다. 그저 토르가 왕국의 그것처럼 검은 페인트로 어둡게 칠했을 뿐. 그것은 일견 토르가 왕국의 골렘처럼 보였다.
유령.
제드는 골렘을 그렇게 불렀다.
라이곤 왕국에서 만들어졌으나, 정확한 재고와 숫자가 기록되지 않고, 오직 제드의 직속으로 움직이는 골렘.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그것은 그야말로 유령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골렘은 기존의 다른 골렘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카가가각.
쇠를 갈아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고, 이내 등에서 거대한 무쇠 자루가 뽑혀 나왔다.
그것의 형상은 검과 같았다.
3미터가 좀 안 되는 묵직하고 거대한 검.
안톤 라그노푸스가 만들어낸 골렘의 병장기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등에 걸고 있던 원형의 방패를 쥐었으니, 검과 방패를 든 기사의 모습이 딱 그러할 터였다.
“길을 만들어라.”
제드가 지시했고, 검은 골렘은 쿠웅 무거운 걸음을 내디디며 나아갔고 이내 거대한 칼로 어둠이 내린 공간을 가르고 그대로 성문을 내려쳤다.
콰아아앙!
또다시 성문이 강제로 개방되는 순간이었다.
*
성채가 무너질 것처럼 진동했다.
어둠이 내린 공간.
왕좌와 같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사일러스는 눈을 천천히 떴다.
“재밌군. 양동작전이란 말이렷다.”
흐흐흐. 이런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가 않았다.
오늘 밤은 유난히 즐거울 것 같더라니.
아이스본이 출격하자마자 성채를 친다는 것인가.
“제법이야.”
머잖아 복도에서 다급히 달려오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차분하고 가벼운 걸음 소리다.
곧 대전의 저편에서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적의 숫자는.”
“골렘 한 기입니다.”
“고작 한 기라고.”
피식 웃는 사일러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사납게 빛났다.
“아니, 모를 일이지. 저놈들이 또 뭘 준비했을지 말이야. 가라. 그리고 전력을 다해서 해치워라.”
“알겠습니다.”
수긍하며 대답은 했지만, 고작 한 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성채에 있는 골렘의 수는 10기가 넘었다. 그 정도의 숫자의 차이면 방심을 논하기 이전의 문제였다.
그러나 골렘 마법사들의 리더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일러스 경의 말씀이 옳다. 모두 절대 방심하지 마라. 안타레스의 유산은 적의 손에 들어갔다. 이 상황 자체가 예기치 못한 이변이라는 얘기다.”
마법사들은 빠른 걸음으로 회랑을 빠져나갔고, 이내 마나를 개방하였다.
쿠웅. 쿵.
성채의 안쪽에서 공간이 일렁이며 왜곡장을 걷어내고 나타난 여러 기의 골렘은 저 아래의 성문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골렘이 움직이면 지축이 진동한다.
수십 톤에 육박하는 거인들이 충돌하는 일이니 당연하다.
바닥에서부터 심장까지 전달되는 그 진동은 거칠고 투박했다. 사일러스는 이 진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흘렀다.
그럼에도 진동과 굉음은 계속 들려왔다.
적이 썩 만만치 않다는 얘기였다.
“이 소리는 심장을 뛰게 하질 않아. 안 그렇더냐?”
사일러스는 대전의 저편을 향해 물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저 먼 곳에서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절그럭대는 쇳소리.
희미하게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뼈에 스며드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전의.
사일러스는 히죽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그래, 이게 전장의 공기지. 잊고 있었어.”
사일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과 칼이 부딪치고 살가죽이 찢어지고 뜨거운 핏물을 들이마시는 것. 살과 근육을 찢고 뼈를 분쇄하는 그 영역은 삶을 증명하는 순간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설인족의 후예로서 사일러스가 자신을 증명해온 방향성이었다. 기사도, 충성심, 예절. 그런 것들은 배운 적도 없고 배우려고 한 적도 없다. 그는 오직 싸움을 쫓았고, 이곳에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피비린내와 탄내, 그리고 역한 악취.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말발굽과 대군의 발걸음 진동. 오직 그 진동만이 진짜였다.
“나는 너무 오래 굶주렸다.”
사일러스가 갈증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가죽 망토를 벗어 던지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땅에 박힌 투박한 쌍검을 손에 쥔 그는 어둠 속에서 걸어나오는 존재를 눈에 담았다.
2미터가 넘는 키. 설인족의 후예인 자신과 비교해도 작지 않다. 온몸을 가린 검은색 갑주. 그리고 투구에서 일렁이는 섬뜩한 녹색의 안광.
적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즐겁군. 네게서는 전쟁의 냄새가 난다. 피비린내가, 피부를 저미는 전의가 내 피를 끓게 하는구나!”
사일러스가 포효하듯 소리치며 마나를 개방했다.
쿠웅.
대전의 공기가 변했다.
마스터의 영역에 다다른 초월자가 내뿜는 농후한 마나가 대전을 가득 채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