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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마법사의 회귀-124화 (완결) (69) (69/124)

북부의 계승자2

*

꽈앙!

검과 방패의 충돌이었다.

쏟아지는 대검의 기세를 받아내는 아이스본의 그렉의 눈동자가 사납게 번들거렸다.

“좋군. 아주 좋아.”

혀를 날름거린 그는 방패 너머에서 불쑥 칼을 들이밀었다.

그가 익힌 검술은 야생과 실전을 통해 벼려진 검. 수없이 이어온 싸움과 전쟁 속에 단련된 기술은 단순하지만, 날카롭고 빠르다.

카각!

칼끝에 실린 오러가 갑주를 갉아대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힘으로 그렉을 밀치며 물러나는 상대.

자세를 다잡는 그렉이 히죽댔다.

“괴력이로군. 이런 놈이 있었던가.”

흐흐흐.

오랜만이다. 이런 즐거운 느낌은.

“그렉 경, 가세하겠습니다!”

“내 칼에 베여 죽고 싶으면 어디 그래 봐.”

이곳의 소란에 뒤늦게 달려온 병사들에게 으름장을 놓는 그렉. 이런 즐거운 기분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내 사냥이다.”

그렉이 자세를 낮추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도시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이었다.

정복자 일원인 아이스본. 저 무시무시한 지배자에게 감히 검을 뽑은 이가 있었다.

포부르크를 기억하는 무수한 사람은 그 이름 모를 은색갑주의 기사를 응원했다. 그가 휘두르는 대검에 염원을 담았다.

그리고 그것은 멸망한 국가의 출신인 록시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틀림없어. 자크 경이야.’

저 큰 키와 은색의 갑주. 그리고 특유의 대검까지.

나풀거리는 로브로 자신을 감추고 있다고 해도 록시나 트릭스가 그걸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함께 공통의 목표를 위해서 싸웠던 동료였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얘기는······ 카일 자이러스. 그도 이 도시에 있다는 건가?’

록시는 속이 답답하였다. 만약 그 둘이 이번 일을 벌인 거라면 이건 해방을 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크의 실력은 빼어나다. 그는 포부르크 왕국의 천재 기사라고 불렸던 배신자 페이오드를 너무나도 손쉽게 제압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사일러스의 아이스본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하나가 아니었고, 하나하나가 이미 마스터에 다다랐다고 하는 무시무시한 실력자였다.

거기다 그 아이스본의 대장인 총독 사일러스는 마스터였다.

마스터와 마스터에 다다른 실력자 사이에는 하늘과 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록시와 그 일행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이대로라면 자크 경이 위험해.”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 록시. 자칫하다가는 우리까지 다 휘말려들 거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끝이야.”

트릭스가 냉정하게 현실을 말했다.

록시는 입술을 질끈질끈 깨물 따름이었다.

방법. 뭔가 방법이 없을까.

이렇다 할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에도 두 초인의 대결은 아주 조금씩 한 쪽에게 기울어가고 있었다.

아이스본 그렉 베르손. 그의 단단한 방어와 날카로운 칼끝에 은색갑주를 감추었던 로브는 이제 넝마 조각이 되어 있었고, 갑주 곳곳에는 날카로운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큭큭. 어떻게 된 거냐. 조금씩 무뎌지는 것 같은데?”

그렉이 낮게 웃으며 거리를 좁혀나갔다.

이 싸움은 일견 대등해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검세는 묵직하고 위력적이야. 몸도 날렵하고. 하지만 경험이 너무 부족해. 너무 직선적이고 단조롭다.’

다만, 그 검술의 근간은 조금 기묘하였으니, 북부왕국의 검술과는 그 궤를 전혀 달리한다는 점이 바로 그렇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연인지 무엇인지, 한 번씩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검세가 예리하게 파고든다. 그건 흡사 다른 사람이 흩뿌리는 일격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어디서 보고 들은 건 있는 모양이지.’

“뭐, 충분히 즐긴 것 같으니, 슬슬 끝내자고. 적당히 날뛰어라. 네놈 정도나 되는 실력자를 죽이지 않고 잡는 게 썩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렉의 근육이 맥동했다. 이제부턴 전력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을 노린 듯, 적이 땅을 쾅 박차고 쇄도하여 부웅 대검을 쏟아냈다.

‘쯧. 빠르다.’

그렉은 피하지 않고 받아내기로 했다.

큰 기술엔 큰 틈이 생기는 법이었다.

‘받아내고 팔 하나는 받아가 주마.’

꽈앙.

방패 위로 쏟아진 대검의 기세에 그렉의 흰자위의 핏줄이 터지며 붉게 물들었고, 코에서 핏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치켜든 방패는 굳건하였다.

쩌저정!

방패와 대검의 사이에서 발생한 오러는 이내 천둥과 같은 굉음을 터뜨리더니 성난 파도처럼 충격파를 일으켰다.

그렉조차도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주르륵 뒤로 밀려났을 때였다. 은색갑주의 적이 그 여파를 타고 대로로 달려나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도주하는 것이다.

“잡아라! 놈을 추격한다!”

그렉의 얼굴이 악귀의 그것처럼 일그러졌다.

전사의 싸움에서 등을 보이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상대의 실력을 인정한 그렉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나갔고, 대기하던 기사단 역시 거침없이 그 뒤를 쫓았다.

“버러지 같은 놈. 수치도 모르는 놈이 검을 쥐어? 검을 쥘 자격이 없는 그 팔, 찢어서 짐승에게 던져주마!”

그렉도 곧장 말을 타고 거리를 주파하였다.

*

그렉의 직속 기사단은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그들의 말은 준마 중의 준마.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단거리면 몰라도 장거리면 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수없이 해온 듯 능숙하게 마상에서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사냥감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그렉과 대등한 공방전을 벌였던 실력자답게 좌우에서 날아드는 칼을 튕겨내고 피했다.

“치잇! 멀대같이 큰놈이 더럽게도 날렵하구나!”

우측을 잡은 기사가 오기가 치민 얼굴로 칼을 연신 휘둘렀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는 칼끝. 조금만, 조금만 더 붙는다면 고꾸라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맥스 경, 피해!”

별안간 고함에 기사가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바로 저 앞에 어중간하게 멈춰있는 마차가 보였다.

“헉! 머, 멈춰!”

뒤늦게 고삐를 잡아당기지만, 그 빠른 속도가 한 번에 멈춰질 리가 없다. 결국, 말에서 튕겨 나간 기사는 그대로 마차를 온몸으로 들이박으며 무너졌고, 바로 측면을 쫓던 기사단은 하는 수 없이 속도를 늦추고 돌아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머저리 같은. 모두 섣불리 덤비지 마라. 그렉 대장님과 대등하게 싸운 놈이다. 놈의 발목을 묶는 데만 주력한다. 측면을 잡고 포위해서 도심을 빠져나가기 전에 잡아 세운다고 생각하란 말이다!”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적은 하나였다.

그리고 바로 저 뒤에서는 그렉이 쫓아오고 있었으므로, 길이 막히는 그 순간, 상대는 막다른 골목에 선 것과 같았다.

기사단은 그때부터 공격이 아니라, 포위에 주력했다. 그리고 포위진형은 금방 갖춰졌다. 남은 건 이제 발목을 묶는 일뿐.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달려가던 녀석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지친 게로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스본인 그렉과 맞서 싸운 상대였다. 그런 데다가 저 갑주를 입고 이 거리를 달렸으니 진이 빠지는 것도 당연하다. 마침내 당도한 이곳은 포버의 남부 광장이었다.

“흐흐흐. 네놈이 비참하게 고꾸라질 곳을 잘도 골랐구나. 그래, 이 정도는 보고 있어야 본보기가 되는 셈이지.”

곧 당도한 그렉이 이죽거리며 말에서 내렸다.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웅성거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렉은 그들의 눈빛에 드리운 기대와 희망, 그리고 두려움 따위를 읽었다.

“네놈이 뿌린 헛된 희망이 이곳에서 비참하게 짓밟히겠구나. 모두 똑똑히 봐두어라! 북부의 계승자? 그 허울만 좋은 이름이 어떻게 고꾸라지는지를 말이다.”

그렉이 소리치며 자세를 잡았을 때였다.

꿈틀. 그의 눈썹이 휘었다.

그렉의 시선이 인파의 너머에 닿았다.

“······이곳에 나를 끌어들이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그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파의 저편에서 한둘씩 걸어나오는 이들.

그들은 하나같이 은색갑주에 대검을 들고 있었다.

그 수가 열. 아니, 스물을 넘어서고 있었다.

“날 너무 얕봤구나. 이 그렉 바이손을 말이다. 모조리 베어라! 놈 하나만 살려두면 충분하다.”

그렉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을 때였다.

“끄악!”

“컥!”

비명이 울려 퍼졌고, 핏물이 흩날렸으며 제 위치에서 벗어난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모든 것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그렉의 얼굴은 불신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절그럭대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존재들을 훑었다.

“뭐, 뭐냐. 네놈들······.”

휘몰아치는 대검의 속도와 그 움직임. 그 모든 것들은 전부 조금 전까지 그렉이 상대하던 적 기사의 그것과 똑같은 수준이었다. 터무니없다. 모두 다 비슷한 실력자란 말인가? 그렉은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나고 말았다. 그게 그렉의 자존심을 긁었다.

“달라지는 건 없다!”

그가 성난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고, 은색 갑주의 해방자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푸확!

“꺼으······.”

그렉의 몸이 허망하게 무너졌다. 팔다리가 잘리고 부서진 방패의 틈으로 칼이 몸을 헤집어놓았다. 핏발이 선 눈으로 벌벌 떨던 그렉은 이내 피 웅덩이에 널브러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망한 최후였다.

“해, 해방자가 이겼다!”

“북부의 계승자가 돌아왔다!”

곧 사방의 병사들을 향해서 은색 해방자들의 대검이 쏟아졌으니, 광장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 광경을 하늘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한 마리의 푸른 새가 있었다. 바로 블라르였다.

시작된 소요는 마른 장작으로 옮겨붙는 불길 같다.

포버라는 도시 전체가 해방자의 등장을 두고 들썩거리는 가운데, 도시의 북쪽의 작은 여관에서 한 젊은 남자가 시끄러운 거리로 걸어나왔다.

그는 제드다.

국경과 평야를 넘어서 포버에 들어온 그는 지금 이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 있는 장본인이었다.

‘슬슬 시작해볼까.’

해가 저물고 있다. 머잖아 저녁놀이 도시에 가득해질 것이다. 사람들이 거리를 가로질러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해방자가 왔다!”

“북부의 계승자가 돌아왔다!”

“포부르크 왕국이여 일어나라!”

환희와 광기의 사이에서 제드는 유유히 그 틈에 녹아들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아직 진짜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제드는 계속 움직였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는 이 도시의 심장부인 성채가 있었다. 성채야말로 정복의 상징이다.

저 멀리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로 펄럭대는 토르가의 국기를 눈에 담는 제드의 눈동자가 서늘하였다.

*

“그, 그렉 경이······.”

꿈틀.

사일러스의 두꺼운 눈썹이 휘었다.

“그렉이 죽었느냐?”

“그, 그렇습니다.”

“그래. 그렉이 당했다고.”

사일러스가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7인의 아이스본. 그들 하나하나는 그가 고르고 고른 전사였다. 그 정도의 전사가 당했다는 건 상대가 그만큼 강하다는 거다.

“골렘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적은 약 20명에서 30명 남짓으로······ 그들 하나하나가 엄청난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 하필이면 광장에서 그 사태가 벌어진지라······ 도시의 소요사태도 점차 커지는 중입니다.”

사일러스가 턱수염을 매만졌다. 귀를 기울이면 밖에서 고함과 외침이 들린다.

과연.

사일러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재밌군! 피가 아직 부족했다는 거겠지. 아이스본, 너희의 전우가 적들의 손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 말은 놈들이 내 얼굴에 똥을 처발랐다는 것과 같다는 얘기지.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마라! 필요하면 마법사든 골렘이든 다 가져다 써. 그리고 싹 다 죽여라. 동조하는 놈들까지 전부.”

그 외침이 꼭 사자의 포효와 같았다.

그 순간, 곁을 지키던 아이스본 6인의 기사들이 움직였다. 인사도 대답도 없었다. 그런 건 그들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명예는 승리와 약탈. 그리고 정복뿐이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즐거운 밤이 되겠어.”

사일러스의 눈이 광기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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