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계승자1
라이곤과 토르가의 국경이 단절됐다.
공식적인 외교회담 이후의 일이었다.
라이곤 왕국은 동부전선의 스키터니안 지방의 길목으로 병력을 집중했다. 흑기사 부대라고 명명된 루카스의 제1 기갑중대 역시 이곳으로 향하였다.
이에 대응해서 토르가 왕국 역시 마주한 국경지대인 하이렐 지방에 병력을 집중했다.
일촉즉발.
외교회담에서 선전포고를 한 이상,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병력이 집결하였고 양국의 첩보전은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라이곤의 기갑중대 마법사들은 제드가 전파한 은폐장 마법을 모두 익히고 있었으므로 골렘의 숫자를 정확하게 세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그건 토르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이렐 지방의 길목은 좁았고, 좌우에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어서 병력을 매복시키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은폐장 정도의 마법은 아니더라도 왜곡장 마법 정도는 토르가의 마법사들도 모두 펼칠 수 있었고, 숲까지 있다면 정확히 매복지를 찾아내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이렇게 양쪽 군대가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제드는 엉뚱하게도 북쪽에서 홀로 움직이고 있었다. 국경은 모두 폐쇄됐지만, 모든 곳이 다 막힌 것은 아니었다.
야음이 짙은 시각이었다.
달조차 어둠에 지워진 밤에 모습을 감춘 제드는 손쉽게 국경 부근의 길목을 비추는 초소를 지나쳤다.
전시 상황에 들어갔음에도 경계가 느슨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양국의 이목은 모두 스키터니안 지방과 하이렐 지방의 국경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쟁이 터진다면 그곳에서 터질 것임을 아무도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 상황을 이용하면 국경을 넘는 건 손쉬운 일이다.’
푸르륵.
산길을 거칠게 오르는 흑마가 거친 숨결을 토했다. 녀석이 고생이다. 제드는 목을 쓰다듬어주고 건초와 물을 충분히 먹이면서 이동하였다.
“조금만 더 고생해다오. 일단 국경지대만 넘으면 손쉬운 길로만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제드의 말귀를 알아듣는 것처럼 흑마는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동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올 즈음 제드는 토르가의 북부의 땅을 밟았다. 인접한 도시인 리스턴 그냥 지나쳤다. 국경을 넘으면 나오는 대도시에는 군인이 많았다. 자칫 문제가 생기면 피곤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제드는 그 길을 따라 북부로 나아갔으니, 그곳은 라그나르 대평야였다. 바람이 불면 초원평야에 자란 풀숲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오랜만이로군.”
제드는 감회에 젖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생의 그는 북부왕국연합을 부수기 위해 토르가의 병사로서 이곳을 나아갔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 그는 북부왕국연합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곳에 돌아왔다.
“아이러니로군.”
제드는 피식 웃다가 이럇 고삐를 튕겼다.
흑마는 바람을 가르며 초원의 평야를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이 평야의 너머는 북부다.
*
포버.
과거 이곳의 이름은 포부르크 왕국이라는 도시국가가 존재하였던 곳이다.
성탑에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국기가 있었고, 그 국기 아래엔 왕가와 유서 깊은 여덟 공신 가문의 문장기가 펄럭였다.
북부왕국연합의 중심이었던 국가 포부르크는 이웃도시국가인 에이부르크 왕국과 혼인동맹으로 연합의 맹주로서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연합이 무너지기 전까지도 핵심국가로서 존재했다.
그러나 그건 다시 말하면 북부왕국연합은 포부르크 왕국이 무너지면 도미노처럼 붕괴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골렘이라는 전쟁병기 앞에서는 그 높은 성벽도 깊은 해자도 튼튼한 성문도 의미는 없었다.
멸망한 포부르크 왕국 대신에 지금 성탑 높은 곳에서 펄럭이는 것은 토르가 왕국의 국기였다. 그리고 그 국기 아래에는 새로 부임한 총독 사일러스 발베르트의 가문기가 당당하게 펄럭대고 있었다.
성채 깊숙한 곳의 회의실.
지금 이곳에선 간단한 식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서 소문의 근거는 찾았나?”
“찾기는 했습니다만, 아직 잡아내지는 못했습니다.”
“형편없는 대답이로군.”
“죄송합니다.”
사자의 갈기처럼 산발한 머리칼의 사내가 맨손으로 고기를 으적으적 씹어 삼켰다.
앉아있었음에도 2미터는 족히 넘는 듯한 그는 매부리코에 거대하게 발달한 전신의 근육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사일러스 발베르트 후작.
설인족의 후예인 그는 왕가의 사나운 이빨이라고 불렸다.
북부왕국연합을 무너뜨린 장본인이자, 북방군의 사령관.
그는 설인족의 후예답게 압도적인 괴력으로 유명하였고, 왕국의 세 명밖에 없다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초월자이기도 했다.
지금 이 회의실에 모여 있는 일곱 명은 바로 그와 같은 설인족의 후예였고, 소위 아이스본이라고 불리는 그의 최측근이었다.
“이미 정복한 땅에 언제까지고 처박혀 있는 건 내 성미에 안 맞는다. 그건 네놈들도 마찬가지겠지.”
“예, 맞습니다.”
“그러면 그 해방자인지 분리주의인지 뭔지 하는 잔챙이들을 어서 잡아오란 말이다!”
콰앙!
별안간 고함을 내지르며 탁자를 내리치는 사일러스.
그 무시무시한 주먹질에 탁자가 산산이 조각나서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일곱 명은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자신이 먹던 고기를 쥐고서 으적으적 씹어 삼키고 있었다.
불같은 성미의 사일러스는 종종 저러곤 했다. 오랜 시간 그와 함께했던 아이스본들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아 그러고 보니 대장, 최근에 떠도는 이야기와 관련해서 하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뭐냐, 말해라.”
“분리주의자라고 하는 그 잔당 놈들이 열흘 안에 포버의 성채를 탈환하려고 한답니다. 쉽게 말해서 쳐들어온다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사일러스가 뒤로 고개를 젖혀가며 크게 웃어댔다. 그의 눈동자에 포악한 살기가 소용돌이쳤다.
“버러지들이 겁쟁이처럼 숨어서 숨 쉬는 게 싫어지기라도 했나? 믿기지 않는 이야기군. 그렉, 네 녀석이 꺼낸 이야기이니 꽤 믿을만한 얘기는 맞을 텐데 말이야.”
“예, 첩보부에서도 경계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흐흐흐. 경계? 개가 짖는 걸 두려워하는 사냥꾼도 있나?”
“그게 그리 간단한 것 같진 않습니다. 수개월 전에 저 멀리 동쪽에서 소란이 있었다더군요. 듣자하니 골렘을 빼앗기고 그 안타레스의 유산이라는 것도 적들이 손에 넣은 것 같다고 합니다.”
“짧게 말해라. 그래서 놈들한테 골렘이 있다는 거냐?”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흐흐흐. 재밌군. 그 정도면 전투라고 할 수 있겠어. 열흘이라. 그래, 드디어 이 지겹기만 한 곳에서 그나마 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군. 어디 놈들이 그 말을 지키는지 보자고. 모두 몸 좀 풀어둬. 그리고 그렉, 계속 추적해. 그 재미있는 소문을 풀 놈, 일이 터지기 전에 먼저 잡아서 내 앞에 끌고 오란 얘기다.”
*
최근 포버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소위 해방자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도시를 되찾기 위해서 돌아왔다는 얘기였다. 포부르크의 사람들은 이 사실에 몹시 기뻐하였으나, 감히 내색은 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곱게는 못 죽기 때문이었다.
포부르크가 멸망하던 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자비하게 죽었던가. 사일러스와 아이스본은 악명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정복자들이었고, 잔인무도한 억압자였다. 폭력과 저항에는 더 큰 억압과 폭력으로 대응했다.
도시에는 후작의 직속부대인 보병 여단이 머물고 있었고, 감시와 폭력은 도시의 활기를 좀먹고 있었다.
바로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중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 것이었다. 북부의 계승자가 돌아온다는 소문은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열흘.
앞으로 열흘이면 그들이 모두를 해방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근거 없는 희망이 되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을 짓밟는 아이스본의 만행 역시 극에 달하였으니.
“저, 저는 억울합니다! 전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로 아닌지 맞는지는 천천히 조사해보면 알겠지.”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저는 정말로 아닙니다. 저는 그냥 상인······. 꺼억!”
겁에 질려 벌벌 떨던 사내의 얼굴로 우악스러운 주먹이 꽂혔다. 코뼈가 내려앉은 상인은 코피를 줄줄 쏟아내며 신음하였지만, 순찰대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 떠들면서 저항한다면 팔다리를 부러뜨려서 질질 끌고 가겠다. 그리되고 싶으면 계속 떠들어봐.”
그 말은 허풍이 아니다. 그들은 한다면 한다. 밧줄에 묶여서 끌려가면서도 상인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정말로 무관했다. 그저 생계를 위해서 에이부르크를 오가며 몇 가지 물품을 사고판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지켜보는 이들도 분한 듯 이를 짓깨물었지만, 그저 고개를 숙이면 외면하는 것 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들에겐 아무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군중 속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빠드득.
“진정해, 록시. 지금은 때가 아니야.”
“······알아. 알고 있어.”
분을 삭이는 여성. 그녀의 이름은 바로 록시였다. 그 옆에 있는 사내는 트릭스. 분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다.
수개월 전 극동의 칼베이 폐광 습격사건의 배후에 있었던 그들은 바로 분리주의세력 혹은 자유해방전선의 핵심 인원들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린 거야.’
최근 이 포버에서 퍼지고 있는 소문. 열흘 안에 북부의 계승자가 돌아와서 모든 것을 탈환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그들이 퍼뜨린 게 아니었다.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 악의적이야. 이런 식으로는 경계가 더 심해져서 포부르크의 백성들만 고통받을 뿐이야. 총독 그 개자식이 꾸민 걸까. 우리를 꾀어내기 위해서?’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함정에 반쯤은 걸린 셈이었다.
그들은 본래 하이렐 지방에서 머잖아 터질 전투의 상황을 집중하다가 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는데, 이 느닷없이 퍼지기 시작한 소문 때문에 이 포버까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는 록시.
‘그런 계략을 쓸 만한 자들이 아니야. 짐승이나 다름없는 그자들이 이 정도로 정교한 심리전을 걸 리가 없어.’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무성한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 헤매는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병사들은 모여든 사람들을 물리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병사들은 이곳에서만 사람을 잡아들인 게 아닌 듯, 이곳저곳에서 포박된 모습의 사람들이 합류하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남성에 키가 180센티미터가 조금 안 되는 호리호리한 이들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 무성한 소문을 흘리는 자의 외관적 특징이리라.
모두 울분만을 삼키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순찰대의 뒤로 불쑥 한 사람이 따라붙었다.
나타난 이는 병사들보다도 더 큰 거구였다. 2미터가 넘는 듯한 큰 키게 등에 커다란 대검을 찬 모습.
용병일까.
로브로 가린 몸 아래에서 절그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
지켜보던 록시가 별안간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어찌 이 소리를 잊으랴!
“어라. 이건 뭐하는 놈이야?”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병사가 눈을 치켜떴다. 막 허리춤의 칼자루에 손을 얹을 찰나 거구의 로브가 펄럭이면서 은색 건틀렛이 튀어나와 병사의 목을 틀어쥐었다.
“꺽! 끄르륵.”
18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들렸다. 그리고 벌게진 얼굴로 발버둥을 친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그 거구의 사내가 온몸을 버둥대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새끼, 죽여!”
채채채챙. 동시에 칼을 뽑는 소리가 터지기가 무섭게 목을 잡힌 병사의 목이 우드득 부러졌다. 펄럭 다시금 로브가 나부꼈고 그 너머에서 두껍고 커다란 대검이 횡으로 뻗어 나왔다.
콰앙!
굉음과 함께 덤벼들었던 병사가 벽에 처박혀 눈깔을 뒤집고 널브러졌다.
“이, 이 새끼······.”
병사들은 그제야 눈앞의 존재가 예사 실력자가 아님을 알았다. 저 움직임과 괴력. 저건 기사급 실력자가 아니면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너, 뭐냐. 재밌는 놈이네.”
저편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무거운 마나가 실려 있었다. 저편에서 구운 돼지 뒷다리를 들고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그, 그렉 경!”
그렉 베르손.
아이스본이라고 불리는 사일러스의 최측근 기사 중 한 명이 바로 그였다.
“흐흐. 이 방법이 맞긴 맞네. 여기저기 쑤시니까 결국 이렇게 튀어나오는 걸 보자면 말이야. 뭐, 아무튼 네놈이 그 소문 무성한 북부의 계승자라는 잡놈이라는 거잖아. 안 그래?”
챙.
그렉이 뜯던 고기를 내던지고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그러자 뒤따르는 병사가 자기 몸 크기만 한 방패를 건넸다.
“오랜만에 그 북왕국의 잘난 검술, 견식 좀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