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 마법사의 회귀-124화 (완결) (58) (58/124)

안타레스의 유산7

*

“좋은 아침, 카일.”

카일.

그게 지금 제드의 이름이었다.

이른 아침, 주점 구석의 그에게 다가온 록시가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래서 생각은 좀 정리했어?”

-우리와 뜻을 함께하지 않겠어?

어제 모든 이야기를 끝마친 록시가 한 말이었다.

북부왕국의 독립을 위해서 함께 싸우자는 얘기다.

그리고 그 말이 뭘 뜻하는지, 제드는 알고 있다.

전생의 그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생에 토르가 왕국은 북부왕국연합을 무너뜨리고 제국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겪으면서 이들 분리주의세력의 결집으로 크게 열병을 앓았었다.

‘록산느 리베라. 그녀는 그들의 구심점 중 하나였지. 자유해방전선의 록산느.’

록시가 그 록산느 리베라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꽤 놀라웠다. 전생에서 제드는 그들과 정반대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록산느와 자유해방운동을 벌이던 분리주의세력은 매우 극단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들로 유명했다.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변했겠지.’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한 싸움이 잃지 않기 위한 싸움이 되고, 잃어버린 것들을 위한 복수의 싸움이 되는 건 썩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죽는 그 순간까지 싸웠다.

“어째서 나였소?”

“여러 이유가 있는데······ 감이라고 할까? 느낌이 왔어. 내가 이런 촉은 꽤 좋은 편이거든.”

“감만 믿고서는 큰일을 할 수 없는 법이오.”

“그래서 사람을 모으고 있지. 우린 실력자가 필요해. 이번 일은 시간을 다투는 문제이기도 하고.”

“그렇잖아도 그걸 묻고 싶던 참이오. 어제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폐광에 접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오. 강력한 전쟁병기인 골렘이 지키고 있음은 물론이고, 기사단과 정예병, 그리고 마법사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것이오. 그런 상황에 사람 몇 명을 모은들 뭘 할 수 있겠소?”

“날카롭네.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진 않았어.”

제드의 지적에 록시는 오히려 더욱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야. 우리도 얼마 전까지는 엄두도 내지 못했지. 하지만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어. 천재일우의 기회가 말이야.”

“기회?”

제드가 되묻자, 록시가 주변을 경계하더니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였다.

“전쟁이 터졌어. 라이곤이랑.”

“······.”

제드가 미간을 모았다. 골렘을 동원한 내전 개입. 그건 국가기밀에 해당할 정도로 은밀한 기동작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보를 파악했단 말이지.’

“믿기 어려운 얘기겠지만,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라이곤 왕국이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는 건 왕국 서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왕정이 옆 나라의 내전에 꽤 깊숙이 개입했어. 골렘이 동원됐거든. 그리고 이건 아직 정확하지는 않은데, 그 내전 개입 중에 그 유명한 쌍둥이 마법사 중 한 명이 크게 다쳤다는 얘기도 있고.”

‘놀랍군.’

그녀는 정확하지 않다고 했지만, 그건 모두 정확한 정보였다. 제드가 놀란 표정을 짓자, 록시가 씩 웃더니 눈을 빛냈다.

“요컨대 왕국은 지금 전력을 서쪽에 집중해야 한다는 얘기지. 양국의 긴장감이 팽배해지면서 폐광에서 사람이 다 빠졌어. 지금 폐광은 노려볼만한 곳이란 얘기지. 거기에 무엇이 있든 북부왕국을 다시 재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란 건 분명해.”

제드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매만졌다.

‘생각보다 정보력이 탄탄하다.’

원래는 그들이 가진 유산에 관한 정보만 알아낸 후에 따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인물이 ‘록산느 리베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꽤 정확하고 탄탄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제드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무엇보다 분리주의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라이곤 왕국도 나쁠 게 없다.’

전생에 토르가 왕국은 북부왕국연합을 무너뜨리고 북부의 넓은 땅을 완전히 자기 영향력에 놓은 이후로 본격적인 식민지 전쟁의 교두보로 삼았다.

‘분리주의세력이 내부에서 힘을 모아서 독립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토르가의 팽창주의를 억제할 수 있겠지. 안타레스의 유산이라는 내가 알지 못하는 역사적 변곡점이 토르가의 시간을 수십 년이나 앞당긴 지금, 이 나라의 발전을 억제하는 장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제드가 고개를 들었다.

“결정을 내렸소. 그대와 함께하겠소.”

“정말 잘 생각했어, 카일. 넌 우리와 함께할 줄 알았어. 저기, 그래서 말인데······.”

록시가 별안간 겸연쩍게 웃었다.

“혹시 실력을 좀 볼 수 있을까? 먼저 권해놓고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염치가 없긴 한데, 작전을 짜려면 실력을 좀 알아야 해서 말이지.”

*

회색 숲.

숲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록시의 그룹이다.

“이쪽이야.”

앞장서서 나아가던 버키가 별안간 숲길로 들어갔다. 따로 표식이나 흔적 따위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숲길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널찍한 언덕 평원이 나타났다.

‘감각이 좋은 모양이군.’

“어때. 여기라면 실력을 드러내도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 쓸 필요도 없지.”

“그가 길잡이였소?”

“그런 셈이지. 버키는 저래 보여도 침투전을 잘하거든. 본능적으로 적의 약점을 알아챈다고나 할까?”

“흐흐.”

버키가 부끄러운 듯 웃는 가운데, 제드는 이 일대를 눈에 담았다. 단순히 탁 트인 것만이 아니다. 이곳은 자연스럽게 마나가 모이는 장소다. 땅 깊숙한 곳에 지맥이 아니라, 바람과 공기의 흐름이 그렇다.

‘좋은 곳이군. 아마도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한 거겠지.’

“이제야 묻소만, 폐광의 전력은 다 파악했소?”

“글쎄. 전부 다 파악했다고는 못 말하겠네. 얼마나 예비전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주전력, 주요 인물이 그곳에 없다는 건 확실해.”

“발트 테바인. 그도 그곳에 있소?”

“그를 알아?”

“이야기를 들었소. 그가 최초의 유산 발견자라고.”

“음, 그건 맞아. 근데 뜻밖인걸. 유산에 관한 부정확한 정보들이 그렇게 많은데, 그중에서 그 이름을 딱 골라내다니 말이야. 그는 왕국의 중앙 마법부의 고위 인물이야. 유산과 얽혀있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 쌍둥이와 긴밀하게 얽혀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지.”

“그렇다면 그가 폐광에 있을 가능성은 적단 얘기이오?”

“모르지. 그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어. 최초 발견자라는 것 외에는 달리 알려진 게 없는 마법사야. 근데 그 마법사는 왜? 대단한 실력자야?”

“앞으로 그를 주시하는 게 좋을 거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안타레스의 유산. 그걸 발견했다는 건 그 역시 특별한 존재라는 얘기일 테니.”

“흐음. 좋아. 그 충고 기억해둘게. 어쨌든 폐광에 남은 전력이 썩 대단치 않다는 건 확실해. 방진중대 두 부대에 마법사 전력 약 열 명. 그리고 기사단도 하나.”

방진중대 하나가 약 병사 300여 명에 마도사가 다섯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면 최소 600명 이상이 있다는 얘기다.

“영지전을 치를 정도의 전력이로군.”

“숫자만 보면 그렇지. 근데 제대로 된 병력이 아니거든.”

록시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다 방법이 있다는 듯한 미소. 그리고 제드는 그 말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정규전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던 분리주의세력의 기본적인 전투 방침은 바로 철저한 유격전술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유격전술은 항상 내부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병력들 태반이 용병인 모양이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록시가 화들짝 놀랐다. 조금 전 제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 핵심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그냥 짐작해본 것뿐이오. 그렇게 많은 수의 군대를 적은 수로 감당하고자 한다면 내부부터 무너뜨려야 할 테니까.”

“······.”

고작 이 간단한 대화만으로 작전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가 있다니.

제드의 말대로였다. 여기저기서 모은 용병집단은 규율이라는 게 거의 지켜지지 않았으므로, 부대 내부에서부터 혼란을 유도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게 아니었다.

문제는 이건 그들이 구상한 작전의 핵심이었다.

‘보통내기가 아닌 건 알았지만, 이건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는걸. 카일리 자이러스. 왜 이 정도의 인물이 알려지지 않았던 걸까.’

“실질적으론 기사단과 마법사가 상대겠군.”

“······뭐, 일단은 파악한 정보로는 그런 상황이야. 그래서 실력 좋은 사람이 필요한 거고. 거기다 막상 작전을 시행할 때 어떤 문제가 어떻게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

“적들 사이에 대마법사가 있을 확률이 있소?”

“뭐?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런 고급 인력이 이런 후방에 있을 때가 아니라고 그랬잖아.”

“그러면 마스터나 최정예 기사단이 폐광에서 있을 확률은 어떻소.”

록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지금 왕국은 언제 전면전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래도. 왕정은 서부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 유산을 탈취하는 데에 달리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소. 나와 자크 경이 이 일에 낀 이상, 실패할 확률이 없으니까.”

“흐음. 자신감이 좀 과하네. 앞서 말한 수준의 고급 전력은 있어야 둘을 막을 수 있다는 거야?”

“그렇소.”

“좋아, 어디 그 실력을 한번 보자고.”

록시가 히죽 웃으면서 힐긋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기다리다 지쳤다는 듯 버키가 기지개를 켜면서 목을 좌우로 꺾었다.

“재미없는 얘기는 이제 다 끝난 건가?”

“그래, 버키. 아이언발러 기사단의 명성은 너도 들어봤지?”

“그 명성을 못 들어본 북부 왕국의 기사는 없지.”

버키의 눈빛이 호승심으로 불타올랐다.

제드가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자크 경은 몸에 상처가 심해서 갑옷을 벗지 않소. 그러니 필요하거든 얼마든지 갑주를 걸치시오. 그편이 좋을 거요.”

“흐흐. 필요 없어. 움직이는데 방해만 될 뿐이야. 자크 경, 실력 좀 보자고. 아이언발러의 검술 실력 궁금했거든.”

스르릉.

칼을 뽑는 버키. 크고 긴 칼을 한 손으로 붕 휘두르며 왼손에는 원형의 방패를 드는 모습. 검과 방패다.

제드가 옆으로 물러났다.

[지금 나더러 저 풋내기와 일대일로 싸우라는 것이오? 지금 저 셋의 수준이면 50명이 와도 우습소.]

‘그걸 저들에게 알려주는 자리다. 적당히 상대하도록.’

자크는 못마땅한 듯한 태도로 대검을 뽑았다. 절그럭대는 소리와 함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한 자크와 버키.

록시는 자신만만했다.

버키는 정교한 검술을 펼치는 검사는 아니었지만, 본능적인 감각으로 약점을 파악하고 그걸 파고들어 단숨에 짓누르는 실력자였다.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서는 제대로 움직이기도 어려울걸. 아이언발러가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다른 북부왕국 기사들의 실력도 절대로 밀리는 수준은 아니야. 현실을 알게 해주라고, 버키.’

록시는 기다렸다. 지켜보는 트릭스와 티리도 마찬가지다.

곧 버키가 먼저 달려나갈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간의 대치가 흘렀음에도 버키는 움직이지 않았다. 호승심이 가득했던 눈동자엔 어느새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뭐지? 틈이 보이지가 않는다.’

저토록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압박감에 섣불리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내가 겁을 먹었나. 아이언발러라서? 아니,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뭘 망설이는 거냐. 아직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버키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거리가 가까워졌고, 버키가 호흡을 조절했다.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그가 자크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말이다.

쐐액!

별안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고.

쾅!

자크의 대검이 수 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와 쏟아졌다.

“끄으으윽!”

방패와 칼을 교차로 해서 가까스로 막았지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방패는 우그러졌다. 오러를 씌웠음에도 이렇다.

‘무, 무슨 놈의 검이······.’

단 일격에 버키의 전의는 완전히 꺾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투구 너머로 자크의 녹색 안광이 들어왔다.

꿀꺽.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사람이 저런 눈빛을 내뿜을 수 있단 말인가.

‘······적이었더라면 죽었을 거다.’

그 사이, 대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는 자크.

팔짱을 끼고 있던 록시는 깜짝 놀란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켜보던 트릭스와 티리도 마찬가지다.

“······록시. 아이언발러의 이름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덜 알려진 모양인 것 같은데요. 저 정도면 트릭스 경이나 저나 상대 못해요. 어림도 없다고요.”

“카, 카일! 혹시 괜찮다면······ 버키, 트릭스, 티리 이 세 사람이 함께 자크 경을 상대해도 될까?”

“그러시오. 그편이 시간 낭비가 덜하겠지.”

곧 트릭스와 티리가 앞으로 나왔다. 스르릉 그들은 칼을 뽑았고, 버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그의 눈동자에선 전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절그럭.

머잖아 자크가 움직였고.

이내 광풍이 몰아친 직후에 세 사람은 땅바닥에 널브러져 헛구역질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과정과 결과.

록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의 지척에 다가온 제드가 여느 때와 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증명은 충분한 것 같은데, 시간을 더 끌 이유가 있겠소?”

“······아니. 그쪽 말대로야. 그럴 필요 없겠어. 카일과 자크 경. 두 사람이 함께라면 이 일, 실패할 것 같지가 않거든.”

“잘됐군. 되도록 서두르시오. 시간은 아주 가끔 쓸데없는 변수가 되기도 하니까.”

일행, 여섯 명은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나아갔다. 목적지는 칼베이 폐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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