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레스의 유산6
*
“나는 록시, 그쪽은?”
주점에 자리를 잡은 뒤에 여인은 불쑥 그렇게 말해왔다.
꽤 늦은 통성명이었다.
“카일이오.”
“카일이라. 이름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은데. 뭐,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그럼 덩치 갑옷 쪽은?”
“자크.”
“그쪽이 대답을 대신하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자크는 말을 못하오. 나와 사념을 통해 소통하지.”
“호오. 그런 게 된단 말이지?”
록시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두 사람, 위틀리엔 무슨 일이야?”
“떠돌이가 실력 외에 가진 게 없으면 위틀리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소.”
“하하하. 맞는 말이긴 하지. 외눈박이를 사냥할 정도면 실력은 확실한 것 같은데······. 어디 쪽에서 왔어?”
“꼭 취조를 받는 기분인데, 뭘 묻고 싶은 것이오?”
“아,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 그냥 내가 호기심이 좀 많아서. 아, 그러고 보니 내 동료들과는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
록시가 자연스럽게 물러나며 자기 동료들을 소개했다.
“나는 버키.”
“트릭스다.”
“티리라고 해.”
두 명의 남자는 삼십 대 언저리. 여성은 록시와 비슷한 또래인 것 같았다. 평범한 용병처럼 보인다. 외관은 말이다.
[꽤 제대로 배웠소, 이 셋.]
자크가 그렇게 말해왔다.
제드도 이미 눈치챘다. 허물없이 대하는 록시와는 달리 셋은 몸을 살짝 비틀고 앉아서 일정한 공간을 확보해두었다. 언제든 칼을 뽑을 수 있도록 말이다.
경계를 풀지 않았다는 증거고, 그들이 얼마나 단련되어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바로 저런 것들이었다.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군.’
처음에는 분에 넘치는 정보를 쥐고 있는 애송이들인 줄 알았는데, 단순히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북쪽에서 왔어. 최근 여러 일이 있었잖아. 고향을 잃은 셈이지.”
록시가 어깨를 으쓱하였다.
대수롭지 않은 듯한 태도였지만, 그 말 속엔 그냥 넘길 수 없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설마, 북부왕국연합이 벌써 정리됐단 말인가? 골렘이 나타났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역시 역사의 흐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제드가 알고 있는 역사대로라면 토르가가 북부의 도시국가 연합을 흡수하는 건 앞으로 10년 더 이후의 일이었다.
“우연치곤 묘하군. 나 역시도 북쪽에서 왔소.”
“그래? 어디였는데.”
“에이부르크에서 왔소.”
록시는 별로 놀라지 않은 듯했다. 이미 제드가 북부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그도 그럴 게 제드의 억양은 전형적인 토르가 북부의 그것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나에게 접근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억양 때문일 테지.’
한편, 록시는 나름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에이부르크.
그 말은 에이부르크 왕국의 국민들이 자기 나라가 독립된 자치왕국임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에이버.
그곳은 이제 그렇게 불렸다.
록시의 장난스러운 눈빛 너머로 진중한 기색이 스쳤다.
“용맹한 국가였지. 그 나라의 기사는 한 명이 백 명을 상대한다는 말이 있었으니까.”
“그건 허명이 아니오.”
“그런 모양이네. 그 악명 자자한 회색의 외눈박이가 저런 몰골로 끌려온 걸 보면 말이지.”
록시는 경계를 다소 누그러뜨린 듯했다. 그녀의 일행 역시 마찬가지. 북부왕국연합의 이야기가 나오자 하나같이 분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버키라고 불린 근육질 사내는 콧방귀까지 내뿜으며 흥분한 듯했다.
“날 도운 이유는 무엇이오. 당신들에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을 텐데. 목적은 돈이오?”
“그럴 리가.”
록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힐긋 동료를 보았다. 동의를 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했다.
‘이런 식이라면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겠군.’
강수를 둬야겠다.
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 용무가 없다면 우린 그만 일어나겠소. 식사나 술값은 전부 내가 여유롭게 낼 테니, 충분히들 드시오.”
“잠깐만. 일거리가 하나 있어. 같이 해보는 건 어때. 그대가 북부왕국연합 출신의 사람이라면 말이야.”
록시가 제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
자리를 옮겼다.
도심의 안쪽. 널찍한 방은 열 명도 더 넘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 곳에나 앉아.”
록시는 제드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자, 처진 눈매에 부드러운 인상의 티리가 몇 권의 책을 가져왔다.
‘마법이 걸려있군.’
간단한 마법이었다. 곧 록시가 주문을 외웠고, 여러 권의 책이 한꺼번에 열리면서 그 안에서 양피지 여러 장이 쏟아져나왔다. 제드가 그 내용을 훑을 때였다.
“안타레스의 유산. 들어본 적 있어?”
“마법사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소?”
“좋아,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 바로 본론을 꺼낼게. 우린 안타레스의 유산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
“무슨 이야기를 이토록 무게를 잡고 이야기하나 했더니······. 혹 안타레스의 유산을 발견하기라도 했소?”
제드가 비웃듯 말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 그게 저들의 경계심을 더욱 누그러뜨릴 것이다.
“그래, 맞아. 발견했어. 안타레스의 유산을 말이야. 정확히는 유산이 잠들어 있는 던전을 말이지.”
“······.”
던전이라고.
아주 먼 옛날, 마탑이 형성되기 이전의 마법사 사회는 아주 폐쇄적이었고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연구와 비전을 꼭꼭 감추기만 했다. 그래서 마탑 이전 시대의 마법사 공방의 형태는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던전 형식을 취한 경우가 많았다.
“이제 좀 흥미가 생기는 모양이지?”
“글쎄. 그 정도의 이야기는 누구라도 할 수 있소. 대마법사 안타레스의 유산에 관한 소문은 어느 시대곤 항상 뜬소문처럼 떠돌곤 했지.”
“맞아. 그 말을 부정하진 않겠어. 근데 이건 그냥 떠도는 소문 같은 게 아니야. 앞뒤가 명확한 정보야.”
“그렇게 확신하는 까닭은 무엇이오?”
“골렘.”
제드가 눈에 이채가 드리웠다.
“북부왕국연합을 무너뜨린 골렘이라는 존재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다고 생각해? 마법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야.”
“······.”
“에이부르크의 용맹한 기사들이 어떻게 쓰러졌지?”
“골렘이오.”
“그래, 맞아. 우린 모두 그 망할 거인이 나타난 후에 고향을 잃은 거야.”
“지금 귀하는 이 나라에 나타난 그 전쟁병기가 바로 안타레스의 유산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앞뒤 상황이 그래. 왕정이 안타레스의 유산을 발견했고, 마법계가 왕정과 손을 잡았어. 그게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이야기야. 그리고 오늘날, 북부왕국연합은 완전히 사라졌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긴 시간이 걸려서 겨우 특정할 수 있었어. 안타레스 유산이 어디에 있는지 말이야.”
“유산은 어디에 있소?”
제드가 그렇게 물었을 때, 록시는 호흡을 가다듬더니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전에 카일, 네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걸 조금 더 확실히 알아야겠어. 그 이상은 네가 동료라는 확신이 들어야만 얘기할 수 있어. 내 동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이야.”
“동료라. 그대들의 적이 이 나라의 왕실이오?”
“그래, 맞아. 나나 내 동료 모두 지금은 사라져버린 왕국 출신들이지. 그리고 너 역시 그렇다고 했어. 에이부르크.”
“맞소.”
“좋아, 그럼 몇 가지 묻겠어. 너와 덩치······ 자크의 실력은 평범한 수준이 아니야. 오자마자 회색의 숲에 들어가서 외눈박이를 처치할 정도니까. 그 정도면 귀족 가문의 일원이거나 왕가를 섬기고는 있었겠지. 뭐든 좋아. 말해봐. 네가 누구인지. 그리고 네 나라에 관한 걸 말이야.”
“······.”
록시의 말투가 날카롭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그녀의 행동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제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는군.’
버키, 트릭스, 티리.
저들 셋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조금 전까지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언제든 곧장 칼을 뽑아들고 덤빌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베는 건 어렵지 않소. 언제든 말만 하시오, 주군.]
자크가 그렇게 말해왔다.
그 말대로다. 저들 세 명의 검사의 수준이 아무리 높다고 한들 라이곤의 정예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자크 혼자서 다섯 합 이내에 모조리 그들의 목을 날릴 수 있었다.
‘이 공간도 나름대로 공방화한 것 같지만, 기껏해야 2써클 수준의 마법. 술식 파괴까진 2초도 걸리지 않겠어.’
제드의 평가는 냉정했다. 그들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냉정한 실력의 격차가 그러했다.
즉, 그들의 존재는 제드에게 아주 작은 위협조차도 못 된다는 얘기였다.
한편,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들이 내뿜는 살기도 점차 짙어졌다. 의심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
“자이러스 자작가. 나는 그 가문의 생존자이오.”
제드가 말했다.
록시의 눈매가 꿈틀했다. 에이부르크 왕국의 자이러스 자작가의 이름은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가문의 성씨였다.
“정확히 가문과는 무슨 관계지?”
“자이러스 자작가의 차남. 카일리 자이러스. 그게 나의 본명이오. 그리고 자크 경은 아이언발러 기사단의 일원이었소. 내 고국이 무너졌음에도 여덟 창의 혈통이 완전히 끊어져선 안 된다는 게 내가 지금 살아서 이곳에 있는 이유요.”
“······.”
록시는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동료들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에이부르크의 이웃 도시국가였던 포부르크의 사람이었기에 비교적 그 나라에 관한 걸 많이 알고 있었다.
자이러스 자작가는 에이부르크 왕국가 형성될 때의 주요 가문 중 하나였고, 아이언발러는 그들 기사단의 명칭이었다.
무엇보다도 여덟 창이라는 에이부르크의 건국 초기의 여덟 부족에 관한 이야기는 그 지역의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알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억양과 말투도 북부의 악센트 발음이 강해. 틀림없다. 그는 북부의 사람이야.’
록시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같은 북부인. 그것도 부르크 지방에 이웃국가의 사람을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역시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았어.’
그녀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시 소개하지. 난 록산느 리베라. 포부르크 출신이야.”
제드는 그녀의 소개를 들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어느새 제드를 향해 쏟아지던 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저 뒤에 있었던 셋은 언제 경계했었느냐는 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같은 북부인을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운이 좋군.”
트릭스가 손을 내밀었고, 버키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티리는 헤헤 웃었다.
“나도 만나서 반갑소. 어쩐지 당신들의 억양이 모두 이상하게도 익숙했소. 동부 억양은 이상하게 늘어지니까 말이오.”
“하하하. 맞아. 북부의 억양 만큼 멋진 말투가 없지.”
록시가 킥킥 웃자, 제드도 웃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제드 크레인이 아니라, 아주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북부왕국 에이부르크의 카일리 자이러스가 되어 있었다.
*
새벽이 깊었다.
제드는 널찍한 방에 자크와 함께였다.
두 사람이 쓰기엔 훨씬 큰 방이었지만, 자크가 워낙에 큰 까닭에 오히려 방이 작아 보일 지경이었다.
[무서운 사람이오, 주군은.]
‘꽤 갑작스러운 말이로군.’
[그들을 도대체 어떻게 속일 수 있었소?]
‘진실과 거짓이 섞이면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걸 꿰뚫어보는 건 쉬운 게 아니야. 하물며, 저들처럼 목적하는 바가 명확한 이들임에야 더더욱 그 미혹에서 벗어나기 어렵지.’
[그럼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이오?]
‘모든 것이 진실이다. 내가 카일리 자이러스가 아니라는 것만 빼면 말이지.’
[그 말은 곧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얘기이기도 하오.]
제드는 피식 웃었다.
설명해도 자크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제드가 그 정보를 아는 건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으니까.
전생에 토르가에 투신하였던 제드는 북부방면의 병사였으므로 북부왕국연합과 싸웠다. 그리고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했다.
그리하여 제드는 몇 가지 반응과 억양을 통해서 록시와 그들의 출신을 쉽게 가늠했고, 그 후부터는 쉬웠다.
거기다 그 번거롭기까지 한 과정을 통해서 알아낸 정보는 제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값졌다.
‘안타레스의 유산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고급 정보다.’
록시와 동료들은 북부왕국의 독립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그랬다. 소위 분리주의세력이라고 왕국에서 명명하는 반역자들이라는 것이다. 록산느 리베라. 그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갑작스럽게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전쟁병기 골렘과 천재라고 불리는 두 명의 마법사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서 그들의 행적을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 수상한 점을 포착했다고 했다.
“폐광이란 말이지.”
제드는 턱을 쓰다듬었다.
제드도 한 가지 짚이는 바가 있었다.
-각하, 혹시 칼베이라는 폐광을 아시는지요. 그곳에 마석이 꽤 매장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곳의 개발을 제게 맡겨주십시오.
발트 테바인은 언젠가 그런 말을 해왔다.
그를 신뢰했던 제드는 별 의심 없이 그러라고 했었다.
‘칼베이 폐광.’
훗날 그곳엔 칼베이 마법연구소가 들어섰다.
극동의 연구소라고 불렸던 곳.
그곳에서 세기의 마법이 연구되어 발표됐다.
바로 공간이동마법진이 말이다.
후후후. 제드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전생과 지금의 정보가 한데 맞물리며 본래라면 알 수 없는 정보가 제드의 앞에 길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