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레스의 유산5
*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산맥 깊숙한 곳.
별안간 숲 안쪽에서 푸른빛이 점멸하였다.
파지지직!
푸른 번갯불이 요란한 굉음과 함께 터졌고.
화아악.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성난 대기가 천천히 얌전해지는 가운데, 그곳에는 바로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존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조금 전까지 레지앙에 있었던 제드와 골렘들이었다.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에 미간을 찌푸린 제드는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레지안 산맥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땅. 우거진 나무와 수풀은 이곳이 조금 전과 다른 곳임을 말하고 있었다.
제드는 검게 탄 수풀의 아래로 대지에 새겨진 마법진의 흔적을 살폈다. 불로 지져서 새겨넣은 것처럼 만들어진 마법진의 술식이 보였다.
“자크 경, 주변을 경계하도록.”
[알겠소, 주군.]
절그럭대며 아이언 골렘들이 움직이는 가운데, 제드는 술식을 점검했다.
밀집된 마나의 폭풍이 일으킨 열풍에 다 타버린 수풀 사이로 새겨진 마법진의 술식은 레지앙에 만든 대규모 마법진과 똑같다.
‘오차는 없다. 이제 이 마법진은 문으로서 존재한다.’
주변을 슥 훑는 제드.
쩍 쪼개진 나무와 불탄 대지.
모두 공간이동 마법의 여파였다.
공간이동마법은 이를테면 공간과 공간을 접어서 이어붙이는 것. 따라서 그 문은 반대편에도 존재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 마법은 한쪽에밖에 문이 없었기에 반대편에서 이런 부작용 아닌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정상적인 방식으로 문을 만들었더라면 레지앙의 공간이동마법진처럼 여러 준비를 해야 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제드는 주변의 풍경을 훑었다.
우거진 숲은 사람의 흔적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이곳은 아직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군.’
전생에 이곳은 철광 개발로 나무가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온통 벌거숭이에 여러 광산이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다. 이 일대가 철광의 밭이었기 때문이다.
제국 골렘의 재료의 상당 부분에는 철이 소모됐고, 후기형 골렘은 강철을 주조하여 방어를 더 강화하였으므로, 제국 각지의 철광은 정말 쉴새 없이 돌아갔다.
그중 이곳이 가장 철이 많이 나는 곳이었다.
란틀리. 그게 이곳 지명의 이름이었다.
제드는 꼬박 하루가 지난 뒤에야 움직였다.
아무리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공간이동마법진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몇 가지 마법진과 마석을 활성화하고 연결해, 감춰두었다.
“아우로렐, 나 이외에 마법진을 넘어서 접근해오는 모든 존재는 배척해라.”
우우우.
아우로렐이 낮게 울었다.
함께 움직이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근 4미터에 달하는 거인을 데리고 움직이면 눈에 띈다. 은폐막을 씌운다고 해도 소음이나 흔적 역시 감출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이동에 많은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정보부터 모아야겠지.”
[주군, 아이언 골렘까지 이곳에 두고 움직일 거라면 왜 데리고 왔소?]
“불만인 모양이군.”
[이곳은 적국의 한복판이 아니오.]
“그들을 다 데리고 움직이면 눈에 너무 띄어. 그렇잖아도 경 하나만 데리고 다녀도 이목이 쏠릴 지경이야.”
[주군이 잊어버린 듯해서 다시 말하겠소. 지금의 육체로는 내 전력은 다 낼 수 없소. 분명하게 말하지만, 마스터급 상대가 나타나면 나는 주군을 지키기 어렵소.]
“불만스러운 것 같군.”
[그걸 부정하지는 않겠소.]
“경에 관해서는 잊지 않았으니 그렇게 상기시켜 줄 필요 없다. 그대의 능력을 모두 끌어낼 방법은 이미 찾았다. 계획이 잡혔다는 얘기지.”
[그게 정말이오?]
“오베르나 아우로렐을 봤을 텐데.”
[그들과 나는 다르지 않소.]
“다르지. 그래서 더 준비기간이 길어진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나라고 경이 갖춘 능력을 다 끌어내고 싶지 않을 리가 있을까.”
[음. 알겠소. 부끄럽소. 어린애처럼 굴었으니.]
“욕망은 사람의 원천. 나는 경의 그러한 면을 긍정한다. 경은 아주 잘하고 있어.”
제드는 그렇게 말하며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푸른 하늘의 저편에 새 한 마리가 날았다.
블라르였다. 이곳의 숲길은 길을 잃어버리기 쉬웠으나, 제드는 그럴 일이 없다. 블라르의 시야를 통해서 높은 고도에서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쪽이군.”
*
위틀리.
토르가 왕국의 동부 끝에 있는 도시.
이곳은 예로부터 사냥꾼과 용병이 머물면서 성장한 곳이었다. 도시 동부에 회색 숲이라는 인간의 침입을 허락지 않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늘 몬스터가 들끓는 회색 숲이었기에 이곳엔 용병, 사냥꾼, 모험가 등 다양한 부류가 도시에 모여들었다. 이곳엔 항상 외지인이 있었고, 그건 썩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도시의 동부 초소에서는 경계 등급을 올렸다.
밤은 위험하다. 몬스터에게 밤은 사냥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금방 어둠이 내렸다.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별안간 숲에서 두 사람이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겁도 없군. 이 시간까지 숲에서 있다가 나오다니 말이야. 거기다 두 명밖에 안 되고.”
경비병이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실력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겠군. 저봐. 저 큰 그레이 팽을 혼자 끌고 오잖아.”
“그레이 팽이라고?”
위병소 건물 내부에서 그 말을 들은 다른 병사들도 밖으로 나왔다.
“허. 정말로 그레이 팽이잖아. 힘이 어마어마하군.”
멀리서 봤을 때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명확해졌다.
그건 틀림없는 그레이 팽이었다.
그레이 팽은 회색 숲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몬스터 중 하나다. 외관은 늑대와 비슷했지만, 덩치가 거의 두 배는 더 되었고, 교활한 데다가 빨랐고 맷집이 워낙 좋아서 웬만해선 잡기가 어려웠다.
그런 그레이 팽을 처음에 알아보지 못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레이 팽을 끌고 오는 거구의 사내가 워낙에 큰 까닭에 그 크기를 체감하기 어려웠던 까닭이었다.
그 사내의 옆에 있는 인물은 로브와 후드로 자신을 완전히 감추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마법사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평범한 마법사보다는 거구 사내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 인물의 외관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
2미터가 넘는 신장의 거구. 갑주로 전신을 감추고 있었으나, 그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흠흠. 그레이 팽을 잡으신 모양이오. 다치진 않으셨소? 아무리 그래도 밤에 움직이다니.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위험한 일이오.”
병사가 슬쩍 말을 걸면서 그레이 팽을 살폈다.
‘허. 참 큼 놈이로군. 이 정도면 제법 무리를 이루었을 터인데.’
“도시에 들어가려면 달리 뭔가 필요한 게 있습니까?”
거구의 사내에게 말을 걸었는데, 대답은 마법사가 해왔다. 목소리와 얼굴을 보니 아직 젊다.
“아, 위틀리에 처음 온 모양이오. 여긴 달리 그런 건 없소. 그것보다는 그놈, 숨통은 확실히 끊은 거요? 이런 놈이 혹시라도 도시에서 날뛰었다가는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당신들이······ 크흠. 아, 알겠소. 확실히 숨통이 끊어졌군.”
말을 하던 중에 거구 사내가 한 손으로 그레이 팽의 목덜미를 잡아당겨서 펼쳤다. 정확히 턱 아래부터 가슴팍까지 파헤쳐진 예리한 상처에서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 고생하셨소. 들어가시오.”
병사들이 비켜서자,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지나온 길목에 핏물이 떨어져 있었다.
이런 일은 꽤 잦은 까닭에 말단의 병사들이 알아서 길을 닦는 가운데, 죽은 그레이 팽을 확인한 병사가 한동안 미간을 찌푸린 채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조장님.”
“······아니, 조금 전에 그레이 팽 말이야.”
“예, 꽤 큰 놈이었죠.”
“그놈, 아무래도 외눈박이인 것 같단 말이지.”
“예에? 그, 그럴 리가요. 외눈박이는 그레이 팽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놈이 얼마나 무서운 놈입니까.”
“그걸 내가 모를까! 근데 지금 저놈의 오른쪽 눈이 파여 있었다고. 상처가 길죽하게 파여 있었어. 그거 외눈박이 특징이잖아.”
“외눈박이라니······.”
그 말에 병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이미 그 두 사람은 거리의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금세 이 위틀리에서 유명세를 떨치게 되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1,500골드. 그게 우리 가게의 전부야.”
무두장이는 고심 끝에 대답했다.
마법사는 가만히 눈앞의 근육질의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2,000골드까지는 나오는 모양이군.’
표정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젊은 마법사를 속이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일개 그레이 팽 따위가 천 골드 단위를 넘어가다니. 이곳에서 제법 유명한 녀석이었던 모양이군.’
[몬스터가 오러까지 사용하지 않았소. 꽤 특별한 놈일 것 같았소. 무리의 우두머리쯤으로 보이기도 했고.]
‘그래서 이목이 그렇게 쏠렸던 건가.’
젊은 마법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 마법사는 바로 제드였다.
숲을 가로지르던 도중 몬스터 무리에 공격을 받았다.
일대를 지배하던 그레이 팽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크는 놈들의 우두머리를 죽이더니 번쩍 들었다. 돈이 굴러 들어왔응니, 경비로 쓰자는 취지였다.
제드가 경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위틀리라는 곳이 사냥꾼과 용병의 도시인 점을 생각해볼 때, 오히려 하나라도 잡아서 들어오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았기에 긍정하였다.
근데 하필 잡은 게 유명한 놈이었다니. 제드는 무두장이와 드잡이나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좋소.”
“자, 잘 생각했소. 크흠.”
무두장이가 반색했다.
사람을 속이기엔 제 감정에 너무 솔직한 사람이다.
바로 그때였다.
“잠깐!”
별안간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무두장이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뭔데, 갑자기 끼어들어?”
“이봐. 양심이 아무리 없어도 그렇지. 몇 백 골드를 그렇게 날름 떼먹을 생각을 해? 이거 외눈박이인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말에 무두장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쪽도 문제야. 실력이 있으면 뭐해. 제대로 알아보고 제값에 맞게 팔아야 할 거 아니야. 1,500골드? 웃기지 말라고그래. 이거 가격만 잘 맞추면 2,100골드 이상은 족히 받는 녀석이라고!”
제드는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여성을 보았다.
붉은 끼가 감도는 머리칼을 뒤로 깔끔하게 묶은 이십 대 여성은 당찬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마법사군.’
겉으로 보이는 건 검사 같았으나, 마법사 특유의 정제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수준이 다소 미흡하지만 말이다.
제드는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처음엔 제드에 관해 뭔가 알고서 접근하는 줄 알았다. 꽤 전부터 제드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근데 그건 아닌 것 같군. 함께 다니는 인물들의 수준도 썩 대단한 수준이 아니야.’
“고맙소.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돈이 급한 까닭에 실수할 뻔했소. 그래서 이걸 얼마에 산다고 하셨소?”
무두장이가 열이 단단히 받은 얼굴로 여성을 노려보는 가운데, 겨우 화를 삭이며 말했다.
“······2,000골드에 사들이겠소.”
“좋소. 아까보다 훨씬 괜찮은 가격이군.”
근육질의 무두장이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얼굴로 자루에 골드를 담기 시작했다. 자루는 금방 묵직해졌다. 자크가 그 자루를 가볍게 들자, 참견하였던 여성이 히죽 웃었다.
“도와줬는데, 식사 정도는 그쪽이 대접하지?”
“좋소.”
“도리를 아는 사람이네. 자, 그럼 갑시다.”
여인이 씩 웃으며 앞장섰고, 그녀가 포함된 그룹의 남녀 셋이 뒤따랐다.
“······너무 섣부른 거 아니야? 조금 더 지켜보고 접근하는 게 맞았어.”
“너무 신중하면 될 것도 안 돼. 실력이 좋잖아. 저 흉악한 외눈박이 못 봤어? 깔끔하게 죽었다고. 저 검사도 검사지만, 저 마법사도 상당한 실력이야.”
“그럼 더 조심해야지. 떠돌이 출신의 실력이 보통 그 정도로 좋은 경우는 없잖아.”
“아아, 잔소리 말고! 일단 고기 좀 뜯으면서 이야기를 해보자고. 내 촉 알잖아. 이번에 느낌이 좋다니까. 정말이야.”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들의 목소리는 군중의 소음과 뒤얽혔지만, 제드는 그들의 목소리만 걸러내서 들을 수 있었다.
‘그룹의 리더는 저 여자인 모양이군.’
혹시나 제드에 관해 뭔가 아는 게 있어서 엿들었는데, 별로 영양가가 없는 이야기였다. 앞뒤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그들은 뭔가 일을 하려고 하고 있었고 실력자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제드는 그런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돈을 쥐여주고 헤어져야겠군. 수중의 골드를 써서 정보 길드를 이용해야겠어. 안타레스의 유산에 관한 정보가 라이곤 왕국에 알려질 정도라면 쓸만한 정보가 꽤 있겠지.’
제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근데 말이야. 그 안타레스의 유산이라는 게 뭐라고 그랬었지? 우리 지금 그거 때문에 이러고······.”
“버키!”
“이 자식, 또 생각 없이 헛소리나 하고 말이야.”
희희낙락하던 그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들은 이내 주변에 누가 들었는지 경계하듯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제드는 그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안타레스의 유산.
그들은 그것에 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후드 아래, 제드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