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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레스의 유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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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르곤 마탑의 최심부.
공간이 굴절된 이 공간에 제드가 찾아온 것은 이로써 두 번째였다. 적막이 내려앉은 탁자에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마탑의 원로 마법사들이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제드가 웃으며 인사했다.
공손한 태도였으나, 마탑의 원로 마법사들은 이전처럼 그를 대할 수 없었다. 짧은 시간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썩 길지 않은 시간 사이에 많은 것들을 이루셨소.”
“그게 어디 제가 한 일이겠습니까. 이 시대가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겠지요.”
제드는 그렇게 대답했으나, 원로 마법사 중 누구도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이가 없었다. 그의 태도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처음부터 그러했지.’
“그래서 공사다망하신 분께서 굳이 이 마탑에 직접 찾아온 까닭은 무엇이오? 미리 말씀드리오만, 왕정과 본 마탑 사이에는 어떤 유감도 없소.”
먼저 그걸 분명히 해두는 원로 마법사.
제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유감은 없습니다. 다만, 전례라는 게 있지요.”
“전례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카드란 마탑이라는 전례를 말하는 겁니다.”
제드의 말에 원로 마법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꿀꺽.
그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들도 저 남쪽의 카드란 마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들은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탑이 공격을 받았다는 것 자체도 충격적인데, 마법사들이 그런 식으로 굴복했다는 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카드란 마탑은 반역자들과 손을 잡고 반역을 모의했습니다. 본래라면 모조리 죽여야 했습니다만, 폐하께서는 그들에게 은덕을 내려 국가를 위해 헌신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
“그리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카드란 마탑이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인가. 그 생각의 결론은 마탑의 독립성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비약이 너무 심하오! 카드란 마탑과 라르곤 마탑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소.”
“없다고 말한들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제드가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천천히 원로 마법사들의 면면을 훑는 그의 눈빛이 날카롭다.
“나는 여러분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심사숙고했습니다만, 라르곤 마탑이 본국에 계속 있어야 할 이유가 없더군요.”
“일선을 넘고 계시오. 마탑은 라이곤 왕국에 귀속되지 않았음을 모르는 이가 없소. 만약 그것이 왕정의 뜻이라면 이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우스운 얘기로군. 이 나라의 모든 땅이 폐하의 것이거늘. 어찌 마탑이 왕국에 귀속되지 않았다는 소리를 늘어놓는가?”
제드의 말투가 변했다. 높낮이가 크게 없는 차분한 어투였으나, 치켜뜬 눈빛과 태도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기세가 서릿발과 같았다.
“왜 말을 못하지? 이 나라의 풀 한 포기와 자그마한 먼지 티끌조차도 라이곤 왕국령의 일부인 것을. 그대들이 자랑스럽게 쌓아올린 이 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억지요. 마탑의 독립성은 아주 먼 예로부터 유지되었소. 그걸 이런 식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오.”
“그 예로부터 유지되었던 독립성을 이제 이 나라는 더는 보장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 특권을 거두겠다는 것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원로 마법사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하는 것은 이 눈앞의 젊은 재상이 저 남부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좋소. 무슨 말씀인진 알겠소.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어떻겠소.”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원로 마법사가 한 명이 입술을 뗐다.
“귀하께서 그럼에도 굳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단순한 통보가 아니라, 협상 혹은 거래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 아니오?”
“유일한 선택지라고 정정하는 게 좋겠군.”
“좋소. 그 선택지가 무엇인지 말씀해보시오.”
“왕정이 라르곤 마탑에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다. 마탑과 마탑의 마법사들이 이 나라에 완전히 귀속되는 것.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왕국 재상으로서는 이 라르곤 마탑을 왕국의 위험요소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유예는 하루면 충분할 것 같군.”
제드는 마탑을 나왔다.
“자크 경, 아이언 골렘들 전원을 라르곤 마탑 주변에 배치하도록 해.”
[정말로 마탑을 공격할 생각이오?]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래야겠지.”
[겁만 줄 생각인 줄 알았소.]
“이건 협상이 아니야. 나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쳐낼 따름이다. 마탑이라는 변수를 지금처럼 그냥 둘 수는 없어.”
[알겠소. 지금 막 아이언 골렘들을 불렀소. 다만, 주군도 이미 알고 있을 거요. 마탑이 무력행사를 벌인다면 우리만으로는 막기 어렵소.]
“그렇겠지. 하지만 그러면 역사 속에서 라르곤 마탑은 완전히 사라질 거야. 그들도 그걸 모르지 않을 거고.”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적었다.
그 거리로 은색의 기사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걸음걸이로 오와 열을 맞추어 북쪽으로 들어왔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절로 좌우로 길을 비켜섰다.
멀리서 봤을 때도 그들의 위압감은 대단했지만, 가까이에서는 그 느낌이 또 전혀 달랐다. 하나같이 2미터가 넘는 그들은 수십 명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그러게 말이야. 전쟁은 끝난 거 아니었나?”
“무섭군. 저들이 그 소문의 은색 기사단이 아닌가.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이라더니······. 겉모습만 봐도 알겠군.”
그들을 본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그렇게 떠드는 가운데, 대로를 따라 들어온 은색 기사단은 마탑의 거리에 다다라서 각 길을 포위하듯 지키고 섰다. 마탑에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이들도 그들의 모습에 움찔하여 한둘씩 물러날 정도였다.
쿠르르릉.
하늘이 다시금 요란하게 비를 쏟아낼 것처럼 크게 우는 가운데, 이 대응은 마탑에도 전해졌다.
“······거침없군.”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벌인단 말입니까?”
“왕국에 귀속된다는 것은 마탑의 마법사가 신하가 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가 있을 수가······.”
원로들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모든 원로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그야······.”
언성을 높이던 원로 마법사가 더 말을 잇지 않고 헛기침하였다. 그러자 끓어오르던 좌중의 분위기도 한결 차분해졌다.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재상은 그냥 말만 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걸. 카드란 마탑과 같은 전례가 이미 있지요.”
“마탑을 힘으로 짓누르려고 하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왕정엔 그럴 명분이 없습니다.”
탑주는 그 말에 고개를 저을 따름이다.
“힘이 곧 명분임을 왜 모르십니까. 이미 이 나라는 변했습니다. 그리고 세상도 변하고 있어요. 못 들었습니까. 당장 토르가 왕국의 마법사들이 중앙정치의 관료직에 앉았음을. 그들의 마도공학기술력은 이미 본 마탑이 가늠할 수조차도 없는 수준입니다.”
“······.”
원로 마법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르곤 마탑은 이미 시대의 흐름에서 뒤처져있고 고여서 썩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새로운 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지켜왔던 전통적 가치를 벗어던져야만 비로소 오를 수 있는 새로운 길. 저는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
꼬박 하루가 흘렀고, 라르곤 마탑이 제드의 제안을 수락했다. 간밤 사이에 무섭게 내리던 비는 그쳤다.
탑주를 필두로 원로 마법사들과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탑에서 나와 궁전으로 향했다. 그 광경이 자못 웅장하였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대전의 왕좌 앞에서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광경에 대전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랐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절대로 이런 충성의 예를 갖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르곤 마탑의 마법사들은 지금 이 시간 이후부터 라이곤 왕국과 폐하를 섬길 것을 맹세할 것입니다.”
“짐은 그대들의 충성과 헌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에 마땅한 대우를 할 것을 약조하겠노라.”
라니아조차도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녀는 힐긋 저 옆에 서 있는 제드를 보았다. 전날, 마탑의 거리에서 있었던 일련의 소동. 그것과 지금의 이 상황이 어떤 연관이 있음은 명백했다.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마탑의 원로들과 제드의 시선이 허공에서 읽혔다. 제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습니다.”
“······또 말투가 바뀌셨소.”
“적과 아군은 구분해야지요. 탑주께서 뜻을 분명히 하셨으니, 예우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재상께 예를 갖추어야겠군요.”
마탑주와 마주하는 것은 제드도 처음이었다. 전생에서 라르곤 마탑은 금방 공화국에 흡수되었기에 제드도 아는 바가 적었다.
“곧 왕국의 내각 중 마법부가 생길 겁니다. 귀하와 원로 마법사들께서는 그곳을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카드란 마탑의 마법사들도 그곳에서 함께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 마탑이······ 아니, 이 왕정의 안에서 마법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다만, 이제 마법부가 연구하고 이뤄내는 결과가 마탑이라는 작은 우물에서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썩어가는 게 아니라,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쓰이게 된다는 점이 다르겠지요.”
탑주는 쓰게 웃었다.
작은 우물이라. 마탑이 그에겐 그렇게 보였던가.
“허허. 알겠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바뀐 나머지 적응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까요. 하물며, 세계의 비밀을 연구하는 분들이 그걸 못할 리가 없지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릴 때였다.
“골렘과 화포.”
제드를 불러 세우는 탑주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라르곤의 탑주 프란첼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정도의 마도공학기술이 이토록 세상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것은 절대로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굳이 돌려서 할 필요 없습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여쭙지요. 동부왕국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전설의 대마법사 안타레스의 유산. 재상께서는 그것을 손에 넣으신 게 아닌지요.”
제드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이건 절대로 흘려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안타레스의 유산이 동부왕국에서 발견되었단 말입니까?”
“아니라고 말씀하실 참이십니까. 그러면 귀하가 이루어낸 그 마도공학의 산물은 그 근간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안타레스의 유산이 발견되었다고······.”
제드는 그 말을 곱씹었다.
토르가 왕국의 역사적 변곡점. 어쩌면 안타레스의 유산이 그 실마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 좀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요. 어디에서 어떻게 흘러들어온 정보입니까?”
전설의 대마법사 안타레스.
약 천 년 전에 활약했었다고 전해지는 마법사.
아직 마법이 널리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에 안타레스는 처음 인간이 불을 발견했을 때처럼, 온 세상에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을 전파하고 다녔다.
그가 돌아다니는 곳마다 마법이 뿌리를 내렸고, 그곳엔 머잖아 마법사라고 불리는 이들이 나타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많은 제자를 들였고, 그 제자들도 마법을 열심히 전파했다. 역사적으로 마법사의 수는 이때 가장 늘어났다.
이 무렵, 그와 관련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았으므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만, 대마법사 안타레스는 천 개가 넘는 마법을 익히고 있었고, 그 제자들은 겨우 그 한두 가지조차도 익히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안타레스가 사라졌다.
인류 역사에서 모습을 감춘 것이다.
훗날의 사람들은 안타레스가 전설 속의 드래곤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사료에 의하면 그는 인간치고 아주 긴 시간을 살았는데, 근 3세기 동안 이곳저곳에서 그 이야기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조차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전설의 대마법사 안타레스가 사라진 뒤로 소문처럼 떠도는 한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그가 남긴 유산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자신의 비전을 세상 곳곳에 숨겼다는 것이다.
위대한 대마법사 안타레스의 유산.
근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많은 이가 그 유산을 찾아 헤맸으나 누구도 그것을 찾지 못했다. 아주 가끔 안타레스의 유산이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뜬 소문이었다.
전생의 제드도 위대한 유산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제드도 그게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그게 발견됐다는 것이다. 거기다 그 위대한 유산을 최초로 찾아냈다고 하는 마법사의 이름이 낯익기까지 하다.
“발트 테바인.”
전생에 그 마법사는 제드의 수석보좌관이었고, 제국 골렘연구의 으뜸가는 권위자였다.
그러나 그가 활약할 시기는 앞으로 근 30년 이후다. 지금이면 고작 막 뛰기 시작했을 즈음의 나이에 불과하리라.
‘이게 단순히 우연이란 말인가?’
완벽히 똑같은 이름. 세상에 똑같은 이름은 많다. 하지만 발트 테바인이라는 흔치 않은 성씨와 이름은 동부의 방식이 아니었다.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고, 제드는 그 의심의 너머에서 한 가지 그냥 넘길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제가 잘 안 늙는 편이긴 하지요. 하하.
발트 테바인.
그가 전생의 제드와 함께 하는 근 10년 동안, 거의 늙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