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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마법사의 회귀-124화 (완결) (52)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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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레스의 유산1

축제는 성대하게 열렸다.

크고 긴 전쟁으로 이어질 듯했던 내전은 제드가 귀족연합을 단번에 분쇄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여왕은 이번 승리를 통하여 이제 중부만이 아니라, 저 왕국 남부의 모든 땅에 대한 완전한 영향력을 손에 넣었다.

“제드 경이 모두 이루어냈어요.”

“별말씀을.”

제드는 여왕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미 적잖이 취한 듯 발그스름한 라니아의 얼굴이었다.

“그리 겸손할 필요 없어요. 온 나라가 제드 경의 전공을 칭송하고 있답니다. 저토록 거대한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 스키터니안 후작가가 몰락했어요. 모두 경이 이루어낸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요.”

라니아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달 뜬 숨을 내뱉었다.

“저는 아직 그 모든 게 현실처럼 느껴지지가 않아요.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고 있어요.”

“모든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일 따름이지요.”

“시작······. 그도 그렇군요. 라이곤이 이제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면 이제 뭘 할 생각인가요, 폐하?”

제드는 대답 대신에 여왕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진중한 시선에 라니아는 그만 취기가 달아나는 걸 느꼈다.

“······기분 나빴나요?”

“그럴 리가요. 제가 보기엔 폐하께서 더 그 말에 신경을 쓰고 계신 듯하군요. 무슨 말을 들으셨습니까?”

“······.”

제드의 높낮이가 없는 차분한 목소리에 라니아는 쓴웃음을 했다.

“누구랄 것도 없어요. 삼삼오오 모이면 그런 얘기가 나와요. 직접 제게 그런 얘기를 하는 이도 있죠. 왕좌라는 게······ 내가 알고 싶지 않은 것들도 다 들어야만 하는 자리니까요. 제드 경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이 나라에는 두 명의 군주가 있다고 합니다.”

“그거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훗. 그렇죠. 아시겠지만, 한 명의 군주는 바로 저를 이야기하는 거고. 다른 한 명의 군주는 바로 제드 경을 이르는 말이랍니다.”

“그게 신경 쓰이십니까?”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아주 조금은요.”

라니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술잔에 담긴 포도주를 입술에 적셨다. 거짓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게 통할 상대도 아니다.

“폐하, 그럼 반대로 생각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진정으로 이 나라에 정말로 두 명의 군주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 말에 라니아가 눈을 크게 뜨고서 제드를 보았다.

제드의 눈빛과 표정은 여느 때와 같다.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눈동자와 무미건조한 표정.

그 모습을 보면서 라니아는 풋 웃었다.

“······맞네요. 처음부터 그랬었죠. 두 명이면 어떻고 세 명이면 어떻겠어요.”

이상했다. 제드의 말을 듣고 있으니, 자신의 고민 같은 건 너무나도 하찮게 느껴졌다. 그게 부끄러워진다.

“어째서일까요? 저는 스스로 왕좌에 오른 게 아닌데도, 이 자리에 있다 보면 자꾸만 이상한 욕심 같은 게 생기네요. 어리석게도 말이에요.”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겁니다.”

“제드 경도 그렇나요?”

“예, 저도 그렇습니다. 다만, 제가 추구하는 방향은 권력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겠지요.”

“그렇겠죠. 그렇잖았으면 진즉 왕좌 같은 건······.”

라니아가 기댔던 몸을 일으키다가 그만 비틀하였다. 제드가 그녀를 부축하였다.

“많이 취하신 모양입니다, 폐하.”

“네, 그런 것 같아요. 과음했네요.”

라니아는 배시시 웃다가 제드의 품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체취를 맡았다. 풀냄새. 흙냄새. 그리고 남자의 냄새다.

심장이 요동쳤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제드의 숨결까지 손에 잡힐 듯 느껴지는 거리였다.

꿀꺽.

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불꽃처럼 치솟는 이 강렬한 욕망을, 그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뭘 원하는지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저 입술, 이 남자의 입술이 탐이 났다.

“······하늘에 해가 둘일 수 없듯이 한 나라에도 군주가 둘일 수는 없어요, 제드 경.”

“세간에서 떠드는 자들의 입까지 모두 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폐하.”

“네, 저도 그걸 어쩔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에요. 하늘엔 해만 있는 게 아니죠. 달도 떠 있어요.”

제드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라니아의 눈빛은 아주 뜨거웠다.

“그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죠. 제드 경은 나에게 해와 같은 존재예요. 내가 밝힐 수 없는 세상의 어둠을 구석구석 밝힐 수 있는 사람. 누구보다도 찬란하게 빛나죠. 나는 그런 당신의 달이 되고 싶어요.”

라니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제드의 턱을 매만졌다.

“······그러니 나를 품어주세요. 그러면 나는 기꺼이 당신을 위해서 모든 걸 하겠어요.”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렸을 겁니다. 저는 폐하의 자리를 탐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도 알아요. 그 말에 거짓이 없다는 걸.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러니 내가 당신의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세요. 내겐 그런 증거 같은 게 필요해요.”

라니아의 손가락이 제드의 턱에서 얼굴로 목을 타고 흐르듯 미끄러졌다. 더욱 깊이 파고드는 그녀의 몸짓은 서툴렀지만, 몹시도 교태로웠다.

꽃피우기 시작하는 여성의 활기가, 그 체취가 제드의 코끝을 타고 스며들어 그의 신체를 뜨겁게 만들었다.

‘젊음인가.’

제드는 자신의 몸 깊숙한 곳에서 들끓는 활력을 느꼈다. 폭발할 것처럼 고개를 치켜든 남성이 격정적인 욕망을 부추겼다. 이런 느낌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아.”

라니아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까지 돌처럼 가만히 서 있던 제드가 그녀의 얇은 허리를 잡더니 잡아당긴 까닭이다. 라니아의 젖은 눈동자가 제드의 불꽃 같은 눈빛에 스며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폐하를 제가 취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제드가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으로 덮었다. 열락의 불꽃이 피어올랐고, 남녀의 그림자가 한데 뒤섞이기를 반복했다.

*

드넓은 대전.

궁전에서 가장 넓은 이곳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쓰이는 곳이었다. 왕위에 오를 때 이후로, 라니아 여왕은 이곳에 사람들을 불러 모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좌우로 늘어선 근위대 기사들과 귀족, 그리고 마이스터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자리에는 왕실의 정치를 뒷받침하는 사람들이 모두 와 있다. 여왕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모두가 있을 수 있도록 한 인물이 나타날 차례가 되었다.

저벅저벅. 대전의 적막을 깨고서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에 하늘의 그것처럼 푸른색 눈동자가 엿보이는 젊은 사내. 이십 대 남짓에 불과한 어린 나이임에도 이 대전에 모인 사람 중에서 그를 허투루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드 크레인. 렌토의 총독이자 크레인 백작.”

왕좌의 여왕이 근엄하게 그를 불렀다.

대전의 가운데에 선 제드는 그녀의 부름에 앞으로 나서서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경은 라이곤 왕국을 위해서 어떤 곤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헌신과 충성을 보여주었다. 짐은 이 나라의 군주로서 귀하의 능력과 공로를 널리 인정하여, 왕국 재상의 직위를 하사하겠노라.”

여왕이 왕좌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와 제드의 앞에 섰다.

근위대장 로톤이 곁으로 다가와 검 한 자루를 내밀자, 그녀는 칼집째로 제드에게 건넸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제드가 칼을 받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여왕이 근엄한 표정을 지속 있다가 이내 입가를 씰룩였다. 대외적인 자리였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런 말투를 사용하는 게 어색했던 까닭이다.

그녀는 홱 몸을 돌렸다. 계속 제드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는 웃음을 참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다시 왕좌에 앉을 때, 여왕의 얼굴은 근엄하게 돌아와 있었다.

제드는 천천히 일어나 계단을 올라 여왕의 오른쪽에 섰다.

왕과 같은 높이. 그는 비록 왕좌에 앉지는 않았으나, 새삼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제드의 말이 곧 여왕의 말이라는 것을 말이다.

제드가 재상에 올랐다는 사실은 금세 왕국 전역에 퍼졌다. 온갖 이야기가 다 나왔다. 심심찮게 떠들던 두 명의 군주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모르는 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재상에 오른 제드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여왕이 적극 자신의 영향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남부 영지에 대한 행정지구개혁안 집행이 그것이었다. 기존 남부 영주들에게 존재하였던 자치권은 모두 왕권에 의해 몰수됐다.

더 나아가 왕국 전역에 사병을 엄금하는 법안이 추가로 공포되었다. 일정규모 이상의 군대를 모으는 행위를 모두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일련의 모든 제정안은 지방 귀족의 권한을 축소하고 약화하는 형태로 이어지리란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한편, 이 느닷없는 법령에 정작 당황한 것은 바로 용병들이었다. 이게 그대로 집행되면 그들의 주요한 밥줄은 끊기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곧 활로가 열렸다. 수도에서 연이어 육군이라는 새로운 상비군 체계를 뒤이어 바로 공포했기 때문이다.

모병제를 통한 전문 군인의 육성.

앞으로의 전쟁 양상은 기존의 전쟁처럼 압도적인 다수 군대가 불필요했다. 정예화된 군대만이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기회의 장이었다.

용병, 떠돌이, 모험가 등등 수많은 이들이 수도로 밀집했다.

왕정은 그런 그들을 맞이할 준비에 착수했다. 수도 남부의 빈민촌 지대에 육군 본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여러 긍정적인 경제 효과를 일으켰다. 도로 포장과 건설 현장에 투입된 대규모 인부들은 빈민가 출신의 노동자들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상인들이 남부에 자리를 잡으면서 오랜 시간 낙후되었던 땅이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새로운 군부의 책임자는 모두가 당연히 예상했던 것처럼 재상에게 돌아갔다.

육군 원수. 또다시 새로운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순간이었다.

*

제드는 오랜 시간 수도에 머물렀다.

“제드 경, 따로 수도에 관저를 만드는 건 어때요.”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군요. 궁전에 제가 지낼 곳은 많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상에 군부의 책임자인 경의 위엄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지 않겠어요?”

“제게 그런 대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생기면 쓸데없는 파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건 폐하가 꾸려나가는 정국에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절 생각해서란 말이군요? 후훗.”

제드는 자신의 품에 안긴 반라의 여인을 눈에 담았다. 한 번 그에게 안긴 뒤로 여왕은 이제 제드에게 순종적이다 못해 의존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그게 썩 나쁘지 않다. 그녀는 제드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었으니까. 희고 고운 등을 닿을 듯 말 듯 살짝 쓰다듬자, 라니아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조만간 콜렉 남작령으로 떠날 생각입니다.”

“꼭 직접 가야 하나요? 이제 재상의 명령이라면 따르지 않을 이가 없을 거예요.”

“이건 제가 직접 확인하고 검수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도 매번 경이 직접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볼멘 소리를 했다.

그러자 제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으시고 계속 어리광을 부린다면 저는 더는 폐하와 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 알았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철없이 굴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말은 말아요. 전 그냥 제드 경과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대외적으로는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라니아였지만, 제드의 앞에서 그녀는 품격도 품위도 내세우지 않았다.

그녀가 애타는 얼굴을 보이자, 제드는 라니아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폐하께서 국정을 잘 운영해나간다면 제가 할 일도 적어지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알겠어요, 제드 경. 그렇게 할게요.”

그녀의 대답에 제드는 그녀를 천천히 안았다.

착한 아이에겐 상이 필요한 법이다.

이튿날, 제드는 궁전에서 빠져나왔다.

수도를 떠나기 전에 정리해놓을 일이 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고, 제드는 후드를 눌러써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총독 때부터 재상이 된 지금까지도 제드는 이런 식으로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을 선호했다. 알려지지 않은 움직임은 예측할 수도 없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십니까?”

라르곤 마탑의 문지기가 그렇게 물어왔다.

이곳에 찾아오는 건 두 번째였다.

그런데 이 마탑 앞에 섰던 과거가 이제 아주 멀게 느껴졌다. 이제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게 달라졌다.

“제드 크레인이 찾아왔다고 전해라.”

“제드 크레인이 누구······. 헉!”

문지기는 깜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왕국 재상. 육군 원수.

라이곤 왕국의 또 다른 군주라고 불리는 그 인물이다.

문지기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내가 기다려야 하는가?”

“그, 그럴 리가요. 어,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마법사는 다급히 문을 열었다.

제드의 뒤를 자크가 뒤따랐다.

곧 마탑의 문이 닫혔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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