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 3815190
#
두 명의 군주2
*
스킵턴.
왕국의 동쪽 대지를 굳건히 지켜왔던 이 요새와 같은 성채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열리고 말았다.
옛 시대의 전쟁이었더라면 그들은 절대로 쉽게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은 1만이 넘는 병력이 밀고 들어와도 쉽게 떨어질 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전장에 나섰던 귀족들은 보았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날아드는 불꽃을.
어둠 속을 헤집는 거인을.
높은 성벽과 해자만으로는 그걸 절대 막을 수 없다.
도시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귀족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 위로 펄럭이던 스키터니안 후작가의 깃발은 이제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후작은 어디에 있나? 그의 의지에 따른 항복이 아니라는 건 다 알고 있다. 안내하도록.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으니.”
고개를 조아린 귀족들은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일견 풋내기로 보이는 이 젊은이가 그 소문의 철혈의 백작이라니.
“굼뜨군. 자기들의 처지를 모른다는 거겠지.”
딱.
제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손끝에서 푸른색 섬광이 날아들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좌측의 한 사람이 널브러졌다. 반쯤 뭉개진 머리에서 핏물을 머금은 허여멀건 뇌수가 쏟아졌다.
“허억!”
귀족들이 기겁하며 주저앉았다. 그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흘려야 할 피가 더 필요할까 싶은데.”
“아, 안으로 바롱 안내하겠습니다! 후, 후작은 죽었습니다! 시체가, 시체가 저 안쪽에 있습니다!”
대도심 스킵턴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 치솟은 바위산. 그곳을 지나는 이들은 삼십 명이 조금 넘었다. 하나같이 로브를 걸친 그들은 카드란 마탑의 마법사들이었다.
“······추락은 순식간이란 말인가.”
원로 마법사 타블론은 허망한 듯 중얼거렸다.
스키터니안이 어떤 가문이던가. 그들은 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이었다. 그리고 카드란 마탑은 그들의 조언자가 되어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타블론은 며칠 사이에 10년은 늙은 얼굴이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바위 거인과 그 포격 마법.
처음엔 라르곤 마탑이 배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흘러가는 상황을 보고 타블론은 알았다.
‘라르곤 마탑이 그런 걸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토르가 왕국의 마법사들이 골렘을 가져왔을 때, 그가 느낀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카드란과 라르곤이 마탑의 문을 틀어막고 전통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혀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바로 이웃 국가인 토르가에서는 믿을 수 없는 마법적 진보를 이루어냈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문으로는 토르가에서 마법사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었고, 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결과를 만들어냈노라고 그랬다. 골렘이라는 전쟁병기가 그랬고, 정제법이 그러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늘. 이미 시대의 흐름은 우리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었구나.’
“원로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다고 해서 다른 게 있겠나.”
“······이제 어떻게 하실 요량이십니까?”
“무엇을 말인가.”
“카드란 마탑이 스키터니안 후작가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저들도 알아차리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식으로든 마탑에 불똥이 튈 게 자명하겠지요.”
“으음.”
타블론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랬다. 일이 틀어진 이후는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중요할지도 몰랐다.
“서두르는 게 좋겠군.”
타블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힐긋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인을 끌고 왔던 토르가의 마법사들. 그들은 살아서 돌아갔을까?
그 의문은 짧았다. 지금은 그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당장 그들의 앞일조차도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
쭉 뻗은 도로를 달려나가는 마차가 있었다.
이틀째 거의 쉬지도 않고 나아가는 마차는 라이곤 왕국의 국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접경지대를 지나서 햄벨로 향하고 있었다.
빨리 가기 위해서 고르지 않은 길로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마차는 심하게 덜컹댔다. 하지만 지금 이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의 목숨의 가치를 생각하면 그것도 모자라다.
“호, 호흡이 약해지셨습니다!”
“빌어먹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햄벨이 코앞이야.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다!”
마법사들의 얼굴이 다급했다.
그들이 온갖 회복마법을 사용하는 상대.
그 인물은 앳된 기색이 역력한 청년 마법사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바르르 떠는 그 마법사는 바로 파비앙이었다. 케미트론의 북부 평야에서 제드와 일전을 벌였던 그는 가까스로 살아서 자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비록, 왼팔을 잃긴 했지만 말이다.
마지막에 날아든 투창. 그 공격에 마법사 셋이 죽었고 가장 중요한 파비앙은 왼팔을 잃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로, 그들은 계속 이동만 하고 있었다.
-본국에 패전 소식을 전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본국으로 움직여야 해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팔을 잃은 직후에 도심을 거쳐 빠져나가면서 파비앙이 악에 받쳐 외친 말이었다.
그 뒤로 줄곧 이동하였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파비앙은 이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마법사들은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불행중 다행이라면 적의 추격대가 따라붙진 않은 듯했다.
그러나 부상이 심각한 파비앙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 불세출의 천재 마법사. 그는 절대로 이런 곳에서 죽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마, 마법사님! 저 앞에······.”
마부의 부름에 고개를 들고 저 앞을 확인한 마법사의 안색이 굳었다. 반대편 길에서 달려오는 다수 무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설마, 앞질러 온 것은 아닐 테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른다. 공격 마법을 준비할 때였다.
“후.”
저 앞에서 달려오는 무리의 머리 위로 펄럭이는 문양의 깃발을 발견한 순간, 마법사는 긴장을 풀고 안도하였다.
“어, 어떻게 할까요?”
“마차를 멈추게.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게 마중을 나왔군.”
곧 마차가 멈추었다. 반대편에서 달려온 이들은 이내 주변을 철통같이 경계하였고, 마차에 여러 사람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그들 중에는 마차에 쓰러진 파비앙과 똑같이 생긴 얼굴의 젊은 청년도 있었다.
“파, 파비앙!”
기절할 것처럼 놀란 그는 바로 오스터 형제 중에서 동생인 루베 오스터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
“파비앙 공, 지금은 치료가 우선이오.”
“아, 알겠습니다.”
같이 온 사제가 다급하게 신성력을 사용하였다.
루베는 충격에 잠긴 얼굴이었다.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그런데 파비앙이 조런 처참한 몰골로 돌아오다니.
“루베 님, 그렇게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파비앙 님께서는 이제 무사하십니다.”
“······아이작, 그쪽이 직접 말해봐. 대체 라이곤 왕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충격은 이윽고 분노로 바뀌었다.
루베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물어왔다. 항상 냉정한 파비앙과 달리 오스터 형제 중에서 동생인 루베는 성격이 불같았다. 그리고 아이작이라고 불린 마법사는 지난날, 작열하는 밤에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모두 설명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루베의 얼굴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끌어들인 거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적의 유인책에 꼼짝없이 당한 거라고! 놈은 처음부터 완전히 포위해서 한꺼번에 다 잡을 생각이었어. 아마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우리의 전력을. 하지만 어떻게? 유산 계획은 기밀 중의 기밀이었을 텐데······.”
“······.”
루베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입술을 질근 거리며 깨무는 그는 분한 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제드 크레인.
그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의 형제가, 왕국이 당한 수모는 반드시 되갚아줄 것이다. 반드시 말이다.
*
귀족연합의 패배. 그리고 스키터니안 후작의 죽음.
라이곤 왕국의 남부 귀족들은 숨을 죽였다.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피의 숙청.
모두 토바스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제드는 그리하지 않았다.
후작가의 직계만 모두 목을 베었을 뿐, 그의 가신이었던 귀족들에겐 손을 대지 않았다.
서신의 내용을 지킨 것이다.
‘정치엔 강약이 필요하다.’
제드는 그걸 알았다.
항상 강하게만 나가서는 안 됐다.
토바스 때와는 상황이 좀 달랐다.
항복한 귀족들은 어쨌거나 자신들이 모시던 영주를 배신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구심점을 버린 것이다. 그걸 고려해야 했다.
‘만약 그걸 전부 다 무시하고 귀족들의 목을 다쳐낸다면 당장은 편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은 반발을 이끌어내게 된다.’
항복해도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면 아예 반역할 생각도 못 하거나 그게 아니면 끝까지 싸우다 죽을 각오로 반역을 일으킨다. 공포 정치는 당장은 편하지만, 필연적으로 문제를 야기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드는 쓸데없는 공포를 조장하고 싶은 게 아니라, 체제에 혁신을 일으키고 싶을 뿐이었다.
“이 영지의 자치권은 왕국에 몰수될 것이다.”
스킵턴의 귀족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제드가 불쑥 꺼낸 말이었다. 그 말에 귀족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그렇다면 이 영지가 앞으로 왕국 직할령으로 분류된다는 얘기가 아니던가.
“이곳만이 아니다. 남부의 모든 지역에 대한 행정구역 개편 제정안이 머잖아 수도에서 발표될 것이다. 앞으로 각 도시의 행정은 시장과 마이스터, 그리고 귀족의 연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고, 군사에 관한 권한 역시 왕권으로 엄격히 통제할 것이다.”
“지엄하신 여왕 폐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귀족들은 직감했다. 그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것들이 한밤의 꿈처럼 사라졌다는 것을.
그런 그들에게 제드는 한 마디를 더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단순히 귀족이라는 출신성분 하나만으로 대접을 받는 시대가 아니란 얘기지. 격변하는 시대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면 그대들 역시 쇄신하여 자신을 증명해야 할 거야.”
제드는 스킵턴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모두가 직감했던 피바람은 없었다. 그 때문일까. 철혈의 백작이 자비를 베풀었노라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제드의 군대가 스킵턴을 나서는 날, 도시의 온 귀족과 평민들이 길거리로 나와서 배웅을 하였다.
군대가 도시에 들어왔던 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제드는 고개를 돌려 스킵턴이라는 도시를 눈에 담았다. 긴 시간, 차곡차곡 인간 문명이 쌓아 올려진 웅장한 도시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름다운 도시야. 그대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바로 그렇습니다, 각하. 스킵턴은 예로부터 라이곤 왕국의 남부에 있는 수도라고 할 만큼 웅장하고 거대한 도시이지요.”
“그대의 이름이 가리온 남작이라고 했던가?”
“옛, 그렇습니다. 각하께서 기억해주셔서 영광입니다.”
바로 그때, 한 걸음 다가온 제드가 나직이 속삭였다.
“앞으로 그대 임무가 꽤 막중해. 이 아름다운 도시가 불타 사라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
“이번 일에 가담한 귀족들의 목을 싹 치고 싶은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니 그대들 모두가 나와 폐하께 목숨을 빚진 셈이지. 알겠나?”
꿀꺽.
가리온 남작이 사색이 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서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나도 이런 아름다운 도시를 내 손으로 불태우고 싶진 않군. 아름다운 건 후대에 전해야지. 안 그런가?”
“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좋아, 그대와는 말이 통하는군.”
제드가 씩 웃으며 말 위에 올라 길을 따라 나아갔다. 병사들과 거구의 은색 기사들. 그리고 거인까지 그 뒤를 따랐다.
한참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리온 남작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등골이 오싹하였다.
저건 겁을 주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만약 선을 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남작의 가문 사람들은 물론이요, 이 도시의 귀족들은 스키터니안 후작가의 사람들처럼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모조리 목이 베일 것이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가리온 남작이 고개를 홰홰 저으며 고개를 돌리다가 별안간 우뚝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갈림길. 저 앞의 갈림길에서 제드의 군대가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향하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 길의 끝.
그곳엔 카드란 마탑이 있었다.
군대가 그곳으로 향하는 이유야 명확하다.
‘그는 저 마탑마저······ 굴복시킬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