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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군주1
땅이 진동했다.
완연히 떠오른 동녘의 햇빛을 받으며 도심으로 다가오는 스톤 골렘의 존재감이 위압적이다. 간밤에 2만 명에 육박하였던 귀족연합군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포격의 불꽃에 사라진 주둔지를 넘어서 천여 명의 병력이 도심 내부로 들어왔다. 도심은 숨을 죽였다. 지금 그들의 앞길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그긍. 성채에 다다랐을 때, 문은 알아서 열렸다. 남아있던 병사들이 투항하였기 때문이다.
“샅샅이 뒤져라.”
“옛!”
빌의 서슬 시퍼런 명령에 병사들이 우르르 움직이며 성채 내부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아마 귀족연합의 사람들이 발견되지는 않을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미 빠져나갔을 테지.’
가진 병력을 다 잃은 마당에 여기서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다. 적들의 우두머리인 스키터니안 후작은 거성인 스킵턴으로 향하고 있으리라.
“패잔병을 그러모은다면 그 수가 적지 않을 겁니다. 귀족연합의 수뇌부를 잡아들여야 하는 만큼 그들의 병력을 운용하는 게 어떨는지요.”
로톤이 수도에서 데리고 온 수비대를 도심 곳곳에 배치한 후에 제드에게 돌아와 제언하였다.
유지할 수만 있다면 병력은 있는 게 좋다. 치안유지 및 수색은 머릿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렇게 하죠. 하지만 너무 많은 병력은 필요 없습니다.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요.”
로톤은 그 다른 방법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 뒤로 제드는 남부의 각지로 보낼 사람 열 명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똑같이 쓴 서신을 각자에게 전달했다.
“으음. 그게 통할지 모르겠군요.”
“통합니다. 구심점을 잃은 집단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죠.”
제드의 확신에 로톤은 혀를 내두를 따름이다.
꼭 그의 말투가 백전노장의 그것처럼 느껴진 까닭이다.
“그보다 이제 로톤 경께서는 폐하께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적들이 최후의 저항을 하지는 않을까 염려되는군요.”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수도로 돌아가겠습니다.”
로톤이 방을 나서기 전에 잠깐 멈추더니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각하.”
그 말투는 전보다 훨씬 더 정중해져 있었다.
제드의 서신은 남부 각지로 전달됐다.
스킵턴, 뮐른, 코르센.
남부의 귀족연합의 주축 가문의 발원지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서신을 받아서 볼 이가 마땅찮았다.
스키터니안 후작가를 제외하면 현재 귀족연합의 수뇌부 중에 살아 있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 전투를 지휘했던 그들 태반은 전투 중에 놀랍도록 정밀한 저격에 심장이 관통되었고, 그대로 즉사했다.
이미 각 영주 가문은 전투의 결과를 듣고 발칵 뒤집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총독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한 것이었다.
총독으로부터의 서신 내용은 이러했다.
-자칭 귀족연합이라고 칭하는 반란군은 즉각 무조건 항복을 명한다. 만약 나흘 안에 항복 선언이 없을시, 이 일에 가담한 귀족가문은 물론이고, 인척을 비롯한 우호 관계에 있는 모든 귀족까지 참형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항복한다면 주요 가문에 한정하여 그 죄를 물을 것이며, 최소한의 선처를 할 것이다.
이 서신의 내용에 각 영지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영주의 생사는 알 수가 없었고, 전투에서는 대패하여 병사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거기다 전장에서 도망친 병사들로부터 그 작열하는 밤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새까만 밤. 진동하는 대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불지옥. 시시각각 진격해오는 거인.
그 전장에서 살아서 도망친 이들은 그 끔찍했던 순간을 공포에 벌벌 떨면서 전하였고, 이 이야기는 귀에서 입으로, 입에서 귀로 전달되면서 더욱 부풀려졌다.
대개 소문이라는 것은 금세 부풀려졌기에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으나, 중요한 사실은 귀족연합군 2만의 군대가 고작 하룻밤 사이에 무너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귀족들은 눈치를 봤다.
싸움은 끝났다.
그리고 영주 가문은 어차피 화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지의 토호 귀족들은 얘기가 달랐다. 영주 가문이 항복하면 그들에게만 책임을 묻는다고 하지 않던가.
“항복을 선언하시지요.”
“이, 이게······ 이게 무슨 짓인가! 감히 그대들이 어떻게······? 나, 나는 영주에 오를 후계자다! 그런 나에게 칼을 들이밀다니. 이, 이건 반역이다!”
가장 먼저 밀레안 백작령에서 그 일이 일어났다.
밀레안 가문의 거성 뮐른에서 가신 귀족들이 얼마 안 되는 병사를 끌어모아서 영주 후계자에게 항복을 강요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은 코르센 남작령도 마찬가지였다.
패배한 귀족연합은 이렇게 내부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연합의 수좌인 스키터니안 후작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쾅!
“누가 졌단 말이냐! 누가!”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
핏발이 선 눈동자로 좌중을 훑는 그의 시선은 흡사 불을 내뿜는 듯했다.
살기등등한 기세. 초췌한 눈빛. 며칠을 굶주린 늑대의 모습이 이러할까.
가신들이 모두 눈치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을 말이다.
2만의 군대가 무너진 마당에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불과 1,000명 남짓의 병력을 다시 그러모았으나, 2만을 모으고도 진 마당에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야. 나는 지지 않았다. 후작가는 패배하지 않았어······. 내겐 기사단이 있다. 나의 이빨. 그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저 비천한 놈들은 단 한 순간에 잡아 죽일 수 있다. 모두 그때까지만 버텨라! 버티기만 하면 저깟 놈들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후작의 말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기사단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리라.
이미 전쟁은 끝난 것이다.
야심한 밤이었다.
달조차 구름에 가린 밤.
복도의 어둠 속을 조용히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어둠 속을 유영하듯 움직이는 그림자는 이윽고 조심스럽게 모퉁이를 지났다. 어쩐 일인지 복도를 밝히는 불은 꺼져 있었다.
복도를 지나치는 그림자는 단숨에 문 앞까지 다다랐다.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드르렁. 문 너머에서 간헐적인 코골이가 들렸다.
문고리를 살짝 당기자, 문은 손쉽게 열렸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불빛이 없는 넓은 방에는 독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술에 취하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곧 침대 언저리에 다다르자, 그곳에 장신의 귀족이 반라의 상태로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구름에 모습을 감춘 달빛이 슬며시 모습을 비추었으니, 창가로 잠든 사내의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이 남부 전체를 호령하였던 귀족 가문의 우두머리. 왕위를 차지하겠노라며 크게 소리쳤던 스키터니안 후작이 바로 그였다.
평소의 그였더라면 절대로 이렇듯 깊이 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는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부드러운 여자를 옆에 끼고 오늘 죽을 것처럼 술에 진탕 취하였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런 그의 바람은 오늘 이루어질 것이다.
후작의 얼굴을 확인한 인물은 품에서 서슬 시퍼런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목젖의 정중앙에 찔러 넣었다.
“꺽! 끄르르르.”
눈을 뒤집은 후작은 발버둥을 쳤다. 핏물이 줄줄 흐르며 침대를 적시는 가운데, 삶을 향한 세찬 움직임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부릅뜬 눈동자에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암살자는 이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아주 은밀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
“각하, 스킵턴에서 서신이 도착하였습니다.”
제드는 고개를 들었다.
딱 하루를 더 기다릴 참이었다.
뮐른과 코르센에서는 이미 서신이 당도하였다.
항복하겠다는 서신이 말이다.
남은 건 귀족연합의 수좌인 스키터니안 후작뿐이었다.
‘결단을 내렸나?’
서신의 내용은 투항하겠다는 의사만 있었다. 하지만 그 내막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후작은 죽었으리라.
이 시대의 기사도라는 것은 대개 이런 것이다.
“스킵턴으로 간다.”
스킵턴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루가 채 안 걸리는 거리.
그동안 제드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난날의 전투.
작열의 밤을 되짚어 보았다.
전체적으로 예상했던 것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전투 양상이었고, 전과도 훌륭하였다.
피해는 거의 전무하다.
스톤 골렘 중에 대파된 골렘은 없었다.
빌의 보병대 역시 사망자는 없었다.
피해는 아이언 골렘뿐이다. 코어인 노심이 완전히 녹아서 쓰러진 골렘만 10기. 폭주 때문이다.
‘충분히 감안한 피해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제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모두 오베르 때문이다.
새로 거듭난 오베르는 강하게 의사를 표현하였고, 그것은 지난 날의 전투에서 빛을 발했다.
‘오베르의 탄생이 내가 나아갈 방향성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 앞은 미지의 영역이야.’
자아가 강해진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제드의 말에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우선 그 점을 확실히 파악해둬야만 했다.
‘오베르.’
제드가 머릿속으로 오베르를 불렀다.
[말하라, 제드.]
‘그대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무엇을 알고 싶은가.]
‘너는 다른 골렘에 깃든 정령과는 다르다. 그걸 이해하나?’
[알고 있다. 나는 오베르다. 하지만 저들에게는 저마다의 명확한 개체로서의 존재감이 희박하다.]
‘좋다. 그럼 물어보겠다, 오베르. 너는 왜 나를 따르지?’
[제드, 그건 이상한 질문이다.]
‘무엇이 이상하지?’
[나를 태어나게 한 건 제드다. 나의 존재의의가 그렇다. 그렇기에 이상한 질문이다.]
제드가 힐긋 고개를 돌렸다.
대열의 가장 뒤. 그곳에서 줄지어 쿵쿵거리며 걸어오는 스톤 골렘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베르는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외뿔에 견갑이 거대한 골렘은 오직 녀석뿐이었으니까.
제드는 턱을 매만졌다.
‘존재의의라고? 오베르여, 내가 그대의 부모라는 것인가?’
[그렇다, 제드.]
‘그건 이상한 말이로군. 오베르, 그대의 본질은 정령일 터. 나는 그대를 불러 육체에 깃들게 하고 이름을 준 것뿐이다. 그런데 내가 너를 태어나게 했다는 것인가?’
[제드의 말은 틀렸다. 이 몸에 들어오기 전의 나는 오베르가 아니다. 오베르가 오베르로서 존재하는 것은 제드가 나를 오베르라고 불렀을 때부터다.]
그 대답에 제드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오베르의 말을 따르자면 정령은 골렘이라는 육체에 깃들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성립한다는 얘기였다. 제드는 그동안 뭉뚱그려서 그 모든 것을 정령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제드의 부름을 받아 골렘에 깃든 순간부터 그들은 오롯이 제드를 통하여 새로이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얘기였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어. 오베르가 특별한 개체가 된 것은 내가 그걸 바랐기 때문이었다.’
제드가 낮게 신음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오베르는 처음부터 대장기로서 만들어줄 참이었다. 루카스가 기갑중대를 이끌며 타의 모범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러한 제드의 의지가 골렘에 깃든 정령에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이다.
즉, 오베르를, 오베르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제드였다.
‘내 의지를 통한 변화. 그렇다면 모든 골렘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다는 건가? 연구가 필요하겠어.’
“갑자기 왜 그러는가?”
베른이 불쑥 물어왔다. 항상 표정이 없는 제드의 얼굴이 흥분으로 요동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알 수 없었던 길이 보이는 것 같군요.”
길. 길이라.
베른이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한 듯 턱을 매만지는 가운데, 어느새 제드의 시선은 저 멀리 보이는 장대한 도시를 눈에 담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서녘으로 질 무렵이었다.
스킵턴은 이제 목전이었다.
왕실의 깃발이 그들의 머리 위로 크게 나부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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