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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는 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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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판단이로군. 파비앙 오스터.”
대형을 갖추고 후퇴하는 적 골렘을 본 제드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고 곧장 퇴각을 결정한 것이다.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그 냉철한 판단력과 결의가 돋보였다. 그는 동료일 때에는 든든한 인물이나, 적으로 만나면 썩 골치 아픈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대는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제드는 포병대에 좌표를 재전달하였다. 물러나는 골렘들 너머로 포착된 마법사들. 목표는 그들이었다. 이제 마지막 카드까지 다 펼칠 때가 됐다.
‘오베르.’
제드는 자신과 연결된 스톤 골렘의 이름을 불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물러나는 적 골렘을 밀어붙이던 매섭게 몰아붙이던 제1 기갑중대의 골렘들 사이에서 외뿔의 골렘의 안광이 무서운 빛을 내뿜었다.
콰앙!
“······!”
루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던 골렘이 그의 명령과는 무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쾅하고 땅을 구르더니 빠른 속도로 적 골렘의 측면을 잡았다. 그 속도는 다른 골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더 육중하고 큰데도 빨랐다.
말을 타고 추격하던 제1 기갑중대의 마법사들도 그 광경에 깜짝 놀라는 가운데, 오베르는 그 달려가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최후위의 적 골렘을 견갑으로 들이받았다.
꽈아앙!
포격을 받아내던 그슬린 적 골렘의 몸이 그대로 우그러지면서 상체가 푹 꺼졌다. 짓눌리면서 부서진 코어에서 연기가 치솟았으니 그대로 적 골렘 1기가 침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오베르의 사냥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오베르다. 적들이여, 그대들의 이름을 말하라.]
우우우우우.
일렁이는 녹색 안광과 울음처럼 퍼지는 소리. 그 광경을 목도하는 토르가 왕국의 마법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골렘은 다른 골렘과는 뭔가가 달랐다.
꽈아앙!
“고, 골렘이 쓰러졌습니다!”
후위를 맡으며 시간을 벌어야 할 골렘이 또 쓰러졌다.
그 잠깐 사이에 골렘이 두 기나 당한 것이다.
파비앙이 신음하였다. 벌써 3기가 후퇴를 결정한 직후에 연이어 허망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저 골렘!’
추격해오는 골렘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골렘.
교전 중에는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거나 하지 않았던 골렘이었다. 근데 후퇴하기 시작한 뒤부터 뭔가가 달라졌다. 출력, 파워, 속도······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
저 골렘에만 두 기가 파괴되어 대지를 나뒹굴고 있다.
‘전력을 아끼고 있었다는 건가!’
우우우우.
저 소리는 또 무엇인가. 골렘에 발성기관이라도 달았다는 건가. 알 수 없었지만, 그게 어떤 공명음처럼 울려 퍼지며 등줄기를 쭈뼛 서게 하였다.
콰콰콰!
막아서는 골렘을 우월한 힘으로 밀어붙이며 그대로 밀어 넘기는 외뿔의 골렘. 한 기로는 저 괴물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최소 두 기 이상은 붙어야 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면 다섯 기 정도의 골렘은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비앙은 이제 알았다. 그마저도 오판이었음 말이다.
‘다섯 기로 끝난다면 다행이다. 아니, 살아나가는 것 자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야.’
콰아앙!
또다시 최후위를 막아섰던 골렘이 쿠당탕 쓰러졌다.
“이익! 일어서!”
골렘을 조종하는 마법사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외뿔 골렘은 몸을 일으키는 골렘의 가슴팍을 짓누르더니 그대로 주먹으로 머리를 깨부쉈다.
콰지직.
“어서 연결을 끊어요!”
파비앙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가슴팍을 힘껏 짓밟는 외뿔 골렘에 쓰러진 골렘의 가슴팍이 짓뭉개졌다. 코어인 노심이 펑하고 터졌고, 연결이 강제로 끊기면서 마법사는 피를 토하며 달리던 말 위에서 떨어졌다.
‘정체가 뭐냐. 내가 이렇게 실패하다니!’
실패? 그건 파비앙의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의 형제는 둘이서 모든 것을 이루어왔다. 아직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왕국의 마도공학의 미래를 책임지게 되었다.
실패는 단 한 번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그런데······.
“파비앙 님, 정신 차리십시오!”
정신이 번쩍 든 파비앙이 고함을 지른 마법사를 보았다. 마법사의 뒤로 다급한 현재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파비앙 님이라도 이곳을 벗어나셔야 합니다! 10기 이상의 골렘으로 붙잡고 늘어지겠습니다. 그동안 도망치셔야 합니다.”
“파비앙 님께서는 토르가의 미래! 가십시오. 무조건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절대로 이런 곳에서 허망하게 당하셔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
파비앙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였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이럇!”
말 배를 차며 전력으로 내달리는 파비앙. 그 뒤로 대여섯 명의 마법사만이 뒤따랐다.
뭉쳐서 움직이던 마법사들이 앞뒤로 나뉘는 가운데, 중년의 마법사를 필두로 약 열 명의 마법사가 고삐를 당기며 멈춰 섰다.
“오너라! 그리 쉽게 지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
과감하다.
퇴각하면서 그들이 조금 전에 보여준 냉정한 결단은 그야말로 정답이었다. 10기나 되는 골렘이 죽기 살기로 남는다면 추격대는 발이 잡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드가 주목한 점은 그 사실이 아니었다.
‘뭔가가 있었구나. 마법사가 희생정신이라니?’
국제적으로 마법사라는 존재가 국가에 귀속되는 건 아직 한참 먼 미래의 일이었다.
‘토르가에 어떤 일이 발생했다. 내가 역사를 바꾼 것 이상으로 뭔가 거대한 변곡점이 있었던 거야.’
생각은 거기까지다.
그렇다 한들 놓칠 생각은 없다.
‘오베르. 뚫고 쫓아라.’
제드는 오베르에게 명령을 내리며, 포병대에는 좌표를 재전달했다. 당장 1킬로미터 안팎이라면 어디든 포격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콰콰콰콰쾅!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포격음이 한꺼번에 터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불꽃이 대지에 떨어져 화염 폭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적중은 없었다. 파비앙과 여섯 명의 그 포격을 꽤 여유롭게 피하고 있었다.
‘포격의 간격, 궤도, 속도를 계산하고 있군.’
역시 오스터인가.
제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제 직격으로 맞추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진로를 방해할 따름이다.
포격이 재차 이어졌다. 화염폭풍은 그들이 달려나가는 앞길로 떨어지며 길을 방해하였으나, 솟구치는 화염 속에서도 그들의 말은 두려워하지 않고 불길을 헤치고 달려나갔다.
한편, 오베르는 붙잡고 늘어지는 적 골렘을 뚫고 달려나갔다. 전속력의 말과 비교하면 느린 적 골렘들이 오베르를 막아섰다.
‘안 되겠군.’
제드는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이내 그 결론에 다다랐다. 모든 걸 내던지고 도망치는 적을 추격할 방법이 더는 없었다.
‘추격기병대가 있었더라면.’
완전히 갖춰지지 않은 편제가 아쉬울 따름이다.
후위대의 필사적인 저항. 그리고 포격의 계산까지.
파비앙의 결단성과 능력이 빛을 발했다.
제드는 오늘의 작전을 되짚어 보았다.
실수는 없었다. 골렘이라는 변수가 있긴 했지만, 대응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오베르를 처음부터 전력으로 투입했다면 파비앙은 절대로 길게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곧장 퇴각했겠지. 그렇다고 수비적인 태세로 끌어들였다고 해도 의심부터 했을 거다.’
가진 패를 가지고 최선의 전술과 전략을 펼쳤다.
좌측 전선의 적 연합의 보병부대가 한 번에 무너지면 베른과 자크가 자연히 측후방을 잡을 터였다.
그게 파비앙을 잡을 방법이었다.
그러나 적은 전황을 읽었고, 퇴로가 막히기 전에 얄팍한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다음을 기약하지. 파비앙 오스터.”
제드가 전생에는 동료였고, 지금은 적이 된 마법사가 너울거리는 포격의 불꽃 너머로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음?’
파비앙을 뒤쫓던 오베르가 기묘한 행동을 보였다.
앞을 틀어막은 골렘 세 기를 차례로 쓰러뜨려 기동불능으로 만든 직후였다.
별안간 마나가 쑤욱 빠졌다.
‘뭘 하려는 거냐, 오베르.’
[제드, 그대의 적을 놓치지 않겠다.]
오베르가 기동 정지한 골렘을 내려쳐 부순 뒤에 손을 뻗어 파편을 끌어모았다. 그 파편은 순식간에 크고 거대한 투창의 형태가 되었다. 재구축이었다.
“놀랍군.”
제드가 적잖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릴 때였다. 오베르가 허리를 비틀더니 그대로 튕기며 투창을 하늘로 쏘아 날렸다.
쐐애애애애액!
허공을 찢어발기며 날아간 거대한 창은 수백 미터를 순식간에 주파하였고, 어느새 케미트론의 도심지 인근까지 다다른 파비앙과 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제드가 숨을 죽이고 그 결과를 지켜보는 가운데, 곧 먼지 속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마법사들이 비틀거리며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말에서 떨어져 비틀대는 모습으로 도심으로 모습을 감춘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것이다.
곧 두 기의 골렘이 그 뒤를 완전히 틀어막았고 도심의 어둠 속을 헤치며 계속 움직였다.
오베르가 다시 재구축을 시행하려고 하였다.
‘오베르, 거기까지다.’
제드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행동을 멈추는 오베르.
파비앙은 빠져나갔다. 하지만 제드는 웃고 있었다.
아쉬움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전 그가 경험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제드는 드물게도 흥분한 기색이었다. 조금 전 오베르는 제드가 포착한 적의 좌표를 읽고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투창을 시도했다. 목표, 방법, 판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말이다.
‘정령의 가능성을 이끌어낸다면 이번에야말로 나이트골렘. 아니,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적 골렘 마법사들이 투항했다.
더 싸우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이미 10기의 골렘 중 남은 건 4기뿐이었고, 어느새 주변에 포진한 7기의 골렘과 은색 갑주의 기사단까지.
끝까지 싸우면 모두 죽지만, 투항한다면 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왜냐하면, 골렘 마법사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골렘의 조종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고, 마법사를 키워내는 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소만, 우리는 토르가 왕국 출신의 마법사들이오. 국제적인 협약에 따라 대우해주길 바라겠소.”
투항한 마법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의 마법사가 베른을 향해서 당당하게 요구해왔다. 베른이 상대 골렘 마법사들의 대장인 줄 알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베른은 허허 웃으며 힐긋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아주 젊은 마법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협약에 따른 대우를 요구인가.”
“큼. 나는 베르거 베르망티. 왕실 마법사이오. 이들 역시 왕실 마법사 출신임을 나의 이름을 걸고 보장하겠소. 협약에 따른 신변의 안전을 요구하는 바이오.”
“거절하겠다.”
“그, 그게 무슨······.”
“본국의 영토에 멋대로 발을 들이밀고 무분별한 전쟁 도발을 일삼은 자들과는 어떤 거래도 대화도 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토르가 왕국을 적대한다는 것이 어떤······!”
퍽.
중년 마법사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터져버린 까닭이다.
“헉!”
“그대들도 더 할 말이 있는가?”
“우, 우리는 투항했소! 어, 어찌 이런······.”
“본국을 침략한 적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지. 선택에는 늘 책임이 따르는 법이 아니던가? 나는 그대들에게 투항하라고 한 적이 없다. 자비를 멋대로 바란 것은 그대들이야.”
“우, 우리는 골렘을 조종할 수 있소! 충분히 도움이······.”
제드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솟구치는 마탄이 차례로 마법사들의 머리를 깨부쉈다. 핏물이 바닥을 적시는 가운데, 제드는 고개를 돌렸다.
동녘이 푸르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제군, 케미트론으로 진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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