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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연합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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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트로스 공작령은 라이곤 왕국의 심장부인 수도 그레즈와 불과 수십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남부에서부터 2만 명의 대군이 올라온다는 소식은 금세 수도와 북부 각지로 뻗어 나갔다.
주로 그 소식을 전하는 이들은 상인이었는데, 그들이 전하는 소식에 금세 수도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부류와 숨죽이던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떠들었다.
여왕이 역린을 건드렸노라고 말이다.
정말로 나라가 뒤집힐 거라는 얘기가 슬금슬금 나왔다.
이런 상황이었음에도 왕실에선 아무 대응이 없었다. 유예의 시간은 다 지나갔고, 남부에서 군대가 움직인다는 소식은 계속 들려왔다.
“여왕님의 군대는 없는 건가?”
“왕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사람을 모이기만 하면 앞으로 그레즈가 어떻게 될지, 그리고 왕가의 운명에 관해서 논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레즈의 라르곤 마탑도 마찬가지였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공간.
원형의 탁자에는 마법사들 여럿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여러 말 할 게 있겠습니까? 승산이 없는 싸움이지요.”
“2만 명이라는 군대가 모이는 건 그냥 쉽게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수십 년에 걸쳐 왕실이 몰락하는 동안 남부의 스키터니안이 크게 득세한 듯하군요.”
“마탑은 역시 중립을 지켜야겠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라르곤 마탑의 정통성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다소 의아하긴 하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지금까지 왕실에서 지원 요청이 없습니다.”
그러자 좌중이 웅성거렸다.
“그럴 리가.”
“상황이 이런데,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아니, 그래도 뭔가를 해보려면 어느 정도든 최소한의 병력이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아무 병력이 없는데 어떻게 적과 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
타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바로 직후에 그들 중 누군가가 한 사람의 이름을 불쑥 말했다.
“제드 크레인.”
그 이름에 원로 마법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꽤 지난 일이었지만,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다. 마탑에 단신으로 찾아와서 거래를 제안하던 그 젊은 마법사. 그는 이제 이 나라의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레지앙에 마법사가 모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요. 최근 마법사들이 다 그곳에 모인다고 합니다.”
“작금의 이 나라 마법사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국가 마법사라는 우습지도 않은 이름을 붙인 집단을 만든 모양이더군요.”
그 말에 모두가 비웃었다.
지금껏 역사 속에 그렇게 반짝 이름을 드러냈던 마법사 집단이 어디 한두 개란 말인가. 공통된 특징으로 그런 집단은 금세 사라졌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세월 속에 쌓인 비전의 마법과 내로라할 마법사의 부재.
어째서 마법사가 마탑으로 모이겠는가?
길고 긴 세월 속에서 쌓인 마법과 지식. 마법사가 추구해야 할 진리에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이곳, 마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그렇게 심각하게 여길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렇게 무시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그 집단의 배후에 그 제드 크레인이라는 아이가 있음은 명확하니까요.”
“확실히 마석도 그렇고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지기엔 썩 아까운 것이지요.”
“근데 대체 어떻게 그가 정제법을 알고 있는 것일까요?”
“억양과 말투를 들어보면 명확하지 않습니까. 그는 원래 토르가 왕국 출신의 마법사일 겁니다. 마탑에서 몰래 비전을 빼돌린 것이겠지요.”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군요.”
“마법사로서 역량도 대단하고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쉬이 건들 상대는 아닙니다. 화포라는 구시대 병기를 이용한 것 보십시오. 크흠. 예사 인물이 아님은 명확하지요.”
최근 라르곤 마탑에서 가장 심도 있게 연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마석 정제법과 마법포였다.
제드가 이미 그것을 손쉽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마탑의 원로들도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신들도 할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게 오판이었음을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정제법은 마석 자체를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고, 알려진 마법술식이 있었음에도 성공확률이 매우 떨어질뿐더러 결과물이 매번 달랐다.
마법포 역시 난항을 겪는 건 마찬가지. 화포의 강도를 어떻게 끌어올려야 하는지부터 시작하는 중이었기에 시행착오만 계속 겪는 중이었다.
지금의 라르곤 마탑이 애매한 처지에 있다는 건 좌중의 원로 마법사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한 사람이 헛기침하며 그 침묵을 깼다.
“흠흠. 이미 지나간 일이야 어쩔 수 없고······. 이대로 왕실에 힘을 보태는 것도 곤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카드란 마탑을 통해 이야기를 잘 조율해서 제드 크레인. 그를 사면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
“그거 괜찮군요. 그를 라르곤 마탑에서 받아들이자는 얘기지요?”
“바로 그겁니다.”
“찬성합니다. 그러면 마탑의 권위도 세울 수 있을 것이고, 겸사겸사 인재도 마탑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겠어요.”
“저도 찬성입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싸움은 이미 결과가 뻔했기에 나름대로 제드에게 빚을 지게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들은 짐작도 못 했다.
사태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
근위대장 로톤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레즈의 도심지 남부의 언덕 지대에 세워진 막사의 수와 그곳에 있는 병력의 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
로톤은 수도를 지키는 수비병의 태반을 끌고 왔다. 그 수가 600명 남짓. 현재 그레즈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이었다.
반면 지금 막사에 세워진 병력은 불과 200명 남짓.
즉, 병력을 다 합쳐도 1,000명조차 되지 않는단 얘기다.
바로 그때, 저편에서 흑마가 달려왔다.
그 말 위에는 제드가 있었다.
“로톤 경,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백작님.”
겨우 꺼낸 로톤의 목소리는 쥐어짜는 듯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도 제드는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말에서 내렸다.
“병사를 데려왔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런 한가한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이 병력으로는 승산이 전혀 없습니다. 적의 규모는 지금 이곳에 모인 병사 수에 10배가 넘는단 말입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틀 전에 폐하께 보낸 서신에도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로톤이 다그치듯 물었다. 이제 남은 유예는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적은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으니, 당장 내일이라도 그레즈로 진격해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왕실의 운명을 쥐고 있는 눈앞의 총독에겐 어떤 대책도, 긴장감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건 지금도 같습니다. 폐하께서는 아무것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로톤 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저 병력으로 충분하단 말씀이십니까?”
“예,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대체 어떤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인지, 폐하께서는 아셔야 하는 일이 아닌지요.”
그 말에 제드가 물끄러미 로톤을 바라보았다.
“토바스에서 일이 벌어질 때, 로톤 경은 무얼 하셨습니까?”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 로톤을 향해 제드는 말했다.
“준비는 끝났다.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정중하고 점잖은 어투.
그러나 그 속에 깃든 말에는 서슬 시퍼런 단호함이 있었다.
로톤은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평생 살아온 세월의 반도 되지 않는 이 젊은이가 내뿜는 기백이 어떻게 이렇게 매서운 것일까.
“이왕 온 김에 지켜보시죠. 이 전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처음과 끝을 보는 사람이 아군 쪽에도 있어서 나쁠 건 없겠죠. 아, 그리고 폐하께도 사람을 보낼 참이었는데, 수고를 덜었군요.”
“폐하께 중요한 전갈이라도 보낼 생각이셨습니까?”
“예, 신하로서 폐하께 개전 소식은 전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개, 개전이요? 하지만 아직 며칠이 남지 않았습니까.”
“굳이 그 시기를 채워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드가 도리어 그렇게 묻자, 로톤은 할 말이 궁해졌다.
“오늘 밤, 전쟁을 시작할 겁니다.”
*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케미트로스 공작령에는 엄청난 수의 군대가 주둔하였다.
대도심지 케미트론의 북부의 대평야. 지금 이곳엔 수천 개도 넘는 막사가 드리워 있었다.
수레를 끌고 온 상인들은 술과 음식을 팔았고, 창녀들은 몸을 팔았다. 막사 이곳저곳에서는 달 뜬 신음과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병사들의 얼굴 어디에도 불안감이나 근심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레즈에서 용병을 끌어모은다거나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적의 병력이 1,000명 남짓에 불과하다고 했으니, 공적을 세워 포상을 받는 것도 썩 여의치 않을 지경이었다.
“이것들 설마, 뒤늦게 항복이라도 하는 거 아니겠지?”
“항복을 안 하면? 제깟 놈들이 뭘 할 수가 있겠어.”
“흐흐. 그야 그렇지. 크으! 술맛 좋고. 근데 말이야. 나는 여왕 폐하께서 끝까지 저항해주셨으면 좋겠단 말이지. 저항하는 계집이 원래 더 재밌는 법이거든. 안 그래?”
“크하핫. 그게 맞지!”
병사들은 천박한 말조차 서슴없이 내뱉으며 낄낄댔다.
지금 이곳에 있는 병사 중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다. 스키터니안 후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걸 말이다.
왕이 바뀌면 폐위된 왕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리고 여왕은 머잖아 폐위될 게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여왕을 좀 희롱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
“이봐, 거기! 멈춰봐. 네가 오늘 내 여왕이 되어야겠다.”
옆에 있던 병사가 엉덩이를 반쯤 드러내놓고 씰룩거리며 지나가는 창녀를 끌어당겨 꼭 안았다. 벌써 욕정이 동하였는지, 벌게진 눈이었다.
이제 홀로 남은 병사는 흐흐 웃으며 남은 술을 입에 전부 다 털어 넣었다. 오늘따라 술이 물처럼 들어갔다.
“좋다, 좋아.”
빈 술통에 반쯤 몸을 기댄 병사는 별이 수 놓인 하늘을 눈에 담았다. 좋은 밤이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도 술 때문에 오르는 열기에 딱 기분 좋게 느껴졌다.
펑.
“으응? 뭐야, 축포라도 터뜨리나?”
“흐하하. 불꽃놀이까지 한단 말이야? 이건 뭐, 축제가 따로 없군. 정말 우리가 전쟁터로 가는 건 맞아?”
“흐하하. 전쟁은 무슨 전쟁! 싸우지도 않을 텐데.”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웃는 병사들.
조금 전 아주 멀리서 들려온 폭발음을, 그들은 불꽃놀이 정도로 여겼다.
“으응? 저게 뭐야······.”
술에 취해 꾸벅꾸벅 졸던 병사 하나가 몸을 바르르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별이 수 놓인 하늘의 저편에서 붉게 빛나는 구체가 보였다. 처음에는 술에 취해 달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붉은 구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은 열 개가 넘었고, 점점 더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어······.”
병사는 취기가 달아나는 걸 느꼈다. 다급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가려고 하였지만, 그의 몸은 그걸 따라주지 않았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쾅!
날아든 화염은 대지를 불태웠다.
굉음이 터지고 이글거리는 화염 속에서 발버둥치다가 널브러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수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비명과 고함이 뒤얽혔다.
불지옥.
조금 전까지 축제와도 같았던 주둔지는 단 한 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그 지옥과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구릉지. 제드는 그곳에 있었다.
어둠이 내릴 즈음에 행군을 시작하여 이 언덕에 자리에 잡기까지 적들은 제드의 동향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적이 먼저 선제공격을 감행하리라고 여기지 못했던 것도 있었고, 병력의 수가 너무 적어서 이동속도가 빨랐던 것도 있었다.
서늘한 새벽공기를 휘감는 불꽃의 열기를 느끼면서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방열.”
곧 구릉 언덕 아래로 붉은 화염이 채 가시지 않은 화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15개가 넘는 화포. 각 화포에는 네 명의 병사와 한 명의 마법사들이 붙어 있었다.
제드의 시선은 저 멀리 일렁이는 불꽃에 꽂혀 있었으니, 그의 눈빛이 싯푸르게 빛났다. 창공을 날고 있는 블라르를 통해 적진의 상황은 일목요연하게 제드에게 보이고 있었다.
화염은 정확히 적의 주둔지에 떨어져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좌표점 고정. 각 포 오차율 이내에 자율적으로 포격하라.”
제드는 명령을 내리고 뒷짐을 졌다.
저 멀리 어둠이 내려앉은 대지의 끝자락에서 불꽃에 잠긴 대지가 보였다. 오늘 밤, 저 불꽃 속에 무수히 많은 목숨이 덧없이 스러져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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