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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연합1
레지앙.
화전민 출신의 아주 작은 산골 마을.
라이곤 왕국의 사람들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이 산맥에 숨은 작은 마을은 근래 아주 극심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고작 수백 명에 불과했던 이 마을의 인구는 개혁 이후 이제 수천 명을 헤아릴 지경이 되었다. 레지앙이 기회의 땅이라고 알려지면서 온갖 사람들이 모인 까닭이다. 마을은 인구를 다 감당할 수 없어서 포화 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그 덕분에 마리아는 그야말로 자는 시간도 줄여가면서 일을 하는 중이었다. 전에는 그래도 조금씩 틈이 날 때마다 제드가 알려준 마법이론도 공부할 수 있었지만, 이젠 도저히 그럴 틈이 없었다.
“이런 식으론 안 돼.”
마리아는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퀭한 눈 푸석푸석한 얼굴.
그녀는 딱 봐도 피로에 찌든 사람이었다.
일의 능률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일을 꼼꼼히 살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공부도 아예 못한지 벌써 한 달은 족히 된 것 같았다.
다행히도 아직은 일에 차질이 생기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나날이 일거리가 늘어난다면 언젠가는 결국 문제가 발생할 터였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고심하였다. 효율적이고 실리적인 측면에서 지금의 문제에 관한 해결 방안이 필요했다.
‘나 혼자서 할 수 없다면 일을 나눠야 해. 행정을 분야별로 나누고 그 각 분야에 관리자를 두는 거야. 그리고 그 관리자가 일을 정리하고 나면 내가 확인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마리아가 해야 할 일은 점차 줄어들 것이고, 도시에서 가장 우선 해야 할 일의 경중을 확인하기 편할 터였다.
‘문제는 그 관리자를 어떻게 정하느냐가 관건이야.’
마리아는 체계를 정리한 이후에도 그 부분을 깊이 고민하였다. 제드는 레지앙의 원주민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자신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고 레지앙의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하면 일이 제대로 처리가 안 될 거야.’
마리아의 고민이 깊어지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녀 역시 원주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원주민 중에서는 글을 읽고 쓰는 사람조차도 매우 적었고, 그중 태반은 다 아이들이었다.
‘총독 각하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다.’
마리아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마리아, 나는 그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제드가 했던 말.
마리아에겐 그게 가장 중요했다. 제드는 그녀를 변할 수 있게 해준 장본인이었다.
인정받고 싶다.
마리아는 자신의 안에서 그런 마음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제드가 세상에 이름을 떨치면 떨칠수록, 그런 그녀의 마음은 더욱 커졌다.
“디아고 할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마리아는 디아고에게 진지하게 자신의 지금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러자 디아고는 껄껄 웃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게야? 그거라면 걱정할 것 없다. 마을 사람들 누구도 네 결정에 섭섭해하거나 그러지 않을 거야. 할 수 없는 일을 시킨다면 오히려 더 곤란해할 거다. 무엇보다도 마리아, 넌 총독 각하께서 믿고 일을 맡긴 사람이 아니냐. 다른 것보다도 총독 각하께서 하신 말씀을 먼저 따라야지.”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마리아는 그제야 한시름 놓은 얼굴로 일을 진행하였다. 행정업무에 대한 경험이 있거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 최우선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관리였다. 보통 그런 일은 아무나 맡을 수가 없었다. 큰 마을이나 도시로 가면 귀족이 도맡았으며, 작은 마을에서도 오랜 시간 마을에서 살아온 사람이 맡는 게 관례였으니까.
그러나 레지앙은 불과 얼마 전까지 공통 재산으로 돌아가는 작은 마을이었으므로 그런 관례라고 할 게 없었고, 귀족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현재 레지앙의 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얼마 전까지 평범한 마을 소녀 중 하나였던 마리아였으니 말이다.
“놀랍군.”
토바스에서의 일을 끝마치고 레지앙에 돌아온 그는 지난 시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슥 훑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감탄하였다.
‘레지앙이 엉망진창이 되었을 줄 알았는데. 기우였어.’
마리아는 놀랍게도 제드의 예상했던 그 이상을 보여준 것이다. 특히 행정 개혁의 방향성이 그랬다.
‘이건 내가 구상하던 행정방침과 거의 비슷하다. 미흡한 부분들이 많지만, 핵심적인 인사 분야의 임명. 그리고 관리 평가에 이르기까지.’
마리아가 이 레지앙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일까. 그녀의 생각에는 틀이 없었다. 실리에 따라 필요한 방침을 정했고, 그것을 결과로 끌어냈다. 모두 그녀 자신만의 생각으로 말이다.
똑똑.
머잖아 노크와 함께 마리아가 들어왔다. 그녀는 몹시 긴장한 모습이었다. 제드와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녀가 그간 해왔던 일에 대한 평가를 받는 시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리아.”
“넷!”
그녀가 긴장한 듯하자, 제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에 섰다. 지금 제드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녀는 이제 막 날갯짓을 하기 시작한 어린 새 같았다.
“훌륭해.”
제드가 마리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리아가 움찔하며 제드를 똑바로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는 정말 전혀 다른 사람이구나.’
마리아는 새삼 그걸 느꼈다. 어린 시절 그녀와 함께했던 그 작고 유약했던 남자아이는 눈앞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주 잘했어. 더할 나위 없는 결론이야. 지금처럼 사람이 계속 모인다면 금방 1만 명도 넘게 되겠지. 그런 상황에서 혼자서 행정을 다 담당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어. 반드시 행정의 정비가 필요했는데, 그걸 네가 혼자 해낸 거야.”
“······아, 아니에요. 저는 그냥 실망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을 뿐인 걸요.”
“실망이라니. 나는 감탄했다. 마리아, 너는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을 보여줬어. 지금 나에게······ 아니, 이 레지앙에 누구보다도 필요한 인재야.”
“과, 과찬이세요.”
마리아는 그 말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앞으로 이 레지앙은 네게 완전히 맡겨야겠어.”
“네? 하, 하지만 어떻게 저 같은 게······.”
“마리아, 다시는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지 마라. 그건 널 높이 평가하는 나조차도 무시하는 일이야.”
“그,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저는 단지······.”
마리아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어쩔 줄 모르는 모습. 그러자 제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알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신분의 한계 따위는 잊어버려라. 나는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아. 내가 그런 것처럼 너도 더 많은 일을 할 사람이다.”
“······.”
마리아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제드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옅은 미소를 그렸다.
“마리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 너무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고 싶군.”
“저, 저는······.”
마리아가 벌게진 얼굴로 머뭇거렸다. 그녀는 재물에 탐욕이 없었다. 권력이나 그런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딱 하나, 제드가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제드에게 꽉 한 번 안겨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 꿈에서 그 광경을 본 이후로 줄곧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걸 말할 순 없어.’
마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드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왔다.
“포상은 필요한 법이지. 그 어떤 대의를 위해 일하는 자들에게도 말이야.”
“······.”
마리아는 숨을 헉 들이켰다. 제드가 그녀를 별안간 꽉 안아주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힌 마리아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댔다.
“마리아, 네겐 더 기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나?”
“네······ 네. 기대에 부응할게요. 저 할 수 있어요.”
마리아가 꿈을 꾸는 듯 몽롱하게 대답했고, 제드는 웃으며 마리아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기특하군. 아주 기특해.”
*
‘레지앙은 앞으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어.’
레지앙의 행정 정비는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리아가 그가 해야 할 일을 알아서 다 끝마쳤다. 그 방향성까지 제드가 바라던 것과 같았으니, 굳이 지침을 지시할 필요도 없었다. 마리아는 알아서 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한 번씩 우드 골렘을 이용하여 토지 공사를 도울 뿐, 그 외에 일은 간섭하지 않았다.
레지앙 사람들은 제드가 돌아왔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할 정도였고, 제드는 주로 마력의 샘에서 마나를 써클로 치환하는 작업을 천천히 해나갔다.
‘이제 5써클이 목전이다.’
마법사들이 들었더라면 기겁할 소리였다.
세상에서 말하는 대마법사의 기준은 6써클이었다.
평균적으로 마탑에서도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는 한 명씩밖에 없었다. 그러니 5써클 마법사면 큰 마탑에서는 원로급이었고, 작은 마탑에서는 마탑주에 해당했다. 근데 지금 제드는 불과 스물 남짓에 그 경지에 다다랐다고 말한 셈이다.
‘모든 게 아주 순조롭다.’
제드는 마나를 갈무리했다. 레지앙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쿠웅. 쿵.
땅이 진동했다.
우드 골렘 두 기가 커다란 나무를 뿌리째로 뽑아서 다른 곳으로 옮겨 심는 중이었다.
레지앙에서는 특이하게도 나무를 베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나무를 그대로 다른 곳으로 옮겨 심었다.
그도 그럴 게 나무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군.”
“아니, 골렘이라면 조종하는 마법사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아무도 없지.”
“그게 의문이야. 기존에 알려졌던 골렘과는 확실히 다르단 말이지.”
움직이는 골렘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레지앙에 유입된 떠돌이 마법사들이었다. 용병단의 마법사부터 무명의 떠돌이 마법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널리 알려진 골렘이라는 존재를 직접 보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이렇게 두 눈으로 보고나니 확신이 서는군.”
“무슨 확신?”
“얼마 전에 콜렉 남작령에서의 그 소문 못 들었나? 거인끼리 전투를 벌였다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가 있긴 했지.”
“그거 헛소문 아니었나?”
“헛소문은 무슨. 지금 저 존재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나? 세상이 바뀐 거야. 저 골렘이 전쟁에 나타난다고 생각을 해보란 말이야.”
그 말에 마법사들이 말을 잇지 못했다. 만약 그런다면 앞으로 전투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는다면 렌토의 총독 각하는 그 골렘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를 곁에서 부리고 있는 거야.”
“거기까지 알아채다니 대단하군.”
별안간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마법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웬 젊은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귀하는 누구인데, 함부로 이야기를 엿듣지?”
“나는 지금 그대들이 얘기한 그분을 따르는 마법사 중 하나다.”
“뭐? 그럼 정말로······.”
마법사들의 시선이 아까 이야기를 주도하던 인물에게 꽂혔다. 정작 당사자인 가스톤은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크흠. 그, 그거 봐. 내가 말한 대로지. 보아하니 마탑의 마법사는 아닌 듯한데······. 어디 출신이지? 마탑인가?”
“출신은 없다. 우리는 국가 마법사다.”
“국가 마법사? 그런 집단은 처음 듣는 말인데.”
“자네는 들어봤나?”
“아니, 나도 처음 듣는군.”
“처음 듣는 게 당연해. 국가 마법사는 총독 각하께서 만든 개념이니까. 그분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마법사를 모으고 계신다.”
청년의 말에 마법사들은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국가 마법사라니. 말만 그럴듯하지, 그냥 마법사를 영구적으로 싸게 고용하려는 수작질처럼 여겨졌던 까닭이다.
“거창한 발언이군. 그래서 마법사들에게 그게 어떤 의미가 있지? 그 국가 마법사라는 이름이 말이야.”
“능력의 고하에 맞는 직위와 대우. 부와 명예. 마법사라는 존재의 위상 자체도 크게 달라질 거야. 그대들에게도 그 기회를 주지. 그분께서는 지금의 능력이 아니라,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하니까.”
“훗. 그럼 그렇지. 열거한 그것만으로는 능력 있는 마법사들이 총독 각하께 얽매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군.”
“그대들이 떠돌이 개처럼 살아가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이 기회는 다른 이들에게 돌아갈 거야.”
청년 마법사가 그렇게 말하며 지나쳐가자, 마법사들은 분개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곧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쿠웅. 쿵.
우드 골렘 하나가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팔을 바닥에 밀었다. 청년은 익숙한 듯, 그 손 위에 올라섰고 우드 골렘은 마법사와 함께 쿵쿵대며 저편으로 걸어갔다.
“고, 골렘을 조종하는 마법사!”
지켜보던 마법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금 전 그들이 마다한 그 기회가 어떤 것인지 뒤늦게 알아챈 까닭이다.
“자, 잠깐! 아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갔다.
쿠웅.
우드 골렘이 멈추었고, 청년 마법사는 고개를 돌렸다.
“별안간 생각이 바뀐 모양이지.”
“그, 그 기회가 아직 유효하다면······ 아니, 제발 기회를 주십시오. 라이곤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저, 저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청년 마법사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마법사들을 눈에 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좋다, 받아주겠다. 하지만 똑똑히 기억해두도록. 기회라는 게 언제나 지금처럼 두 번씩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옛!”
그들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했으리라.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마법사가 바로 제드 크레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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