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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불꽃6
*
발코니에 선 제드는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저 멀리 서쪽의 평야까지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주군, 이걸로 괜찮겠소.]
“괜찮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었을 때와 비교하면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주군이 하는 일에는 참견할 생각 같은 건 없지만, 이번 일은 너무 과하지 않았나 싶소.]
제드가 옅게 웃었다.
“그래, 이걸로 왕국 전역에 공분을 사겠지. 그러면 귀족들은 뭉치게 될 테고, 여왕에게 반기를 들 거다.”
[그걸 일부러 노렸다는 것이오?]
“썩은 부위를 도려내야만 쇄신이고 개혁이라고 할 수 있는 거다. 이건 흘려야만 하는 피야.”
비록, 이번 일로 제드의 이름이 피로 점철된다고 해도 그건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제드는 기꺼이 피를 뒤집어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갈 때다.’
이튿날, 아직 해가 떠오르지도 않은 새벽에 밖으로 나왔다. 유난히 안개가 짙은 날이었다.
빌과 소수의 경비대 병사만이 그를 배웅하였다.
“돌아오는 데 오래 걸리십니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몇 가지 상황만 정리하면 되는 문제니까.”
제드가 손을 뻗자, 안개 저편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팔뚝에 가볍게 안착했다. 푸른빛의 신비로운 분위기의 새였다. 블라르다.
‘이 새, 저들과 같구나.’
빌은 바로 눈치챘다. 골렘들과 같은 녹색의 안광.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새가 제 눈이 되어 이곳의 상황을 살필 겁니다. 그리고 아이언 골렘 태반도 남아 있을 테고요. 별일 없을 테지만,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대처는 충분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이곳을 빈틈없이 지키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 위에 올랐다. 그를 뒤따르는 이는 자크 한 명뿐이었다. 새벽의 안개는 해가 떠오르면서 서서히 걷혔다.
그리고 해가 뜨기 시작하여 하늘 한가운데를 지나서 서서히 떨어질 즈음, 제드는 그레즈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수도 그레즈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토바스 사태 이후 겁에 질린 피난민들과 패주한 용병들이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난 며칠 사이에 토바스에서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떠들어댔으니, 지금 수도의 주점과 거리 어디에서든 제드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철혈의 백작.
제드는 벌써 그런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일은 충격적이었다. 한 지역의 기득권 세력인 토호 귀족을 이런 식으로 무참하게 숙청하는 경우는 아주 먼 옛 시대 이후로 없던 일이었다.
거기다가 그 일을 결행한 이의 신분도 그랬다.
제드 크레인.
그는 본디 귀족도 아니었다. 레지앙이라는 시골의 평민이 갑자기 여왕의 총애를 받게 되어 백작위를 받고 총독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두 그에게 별로 주목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적당한 인물을 앞세워 칼과 방패로 삼으려고 하는 줄 알았다.
그런 상황 속에 토바스 사태가 터졌다.
“······무시무시한 일을 벌이셨군요.”
“필요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밤이 늦은 그레즈 외곽의 한 주점.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의 마법사는 난색을 보였다. 지금 이 수도를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 눈앞에 있었던 까닭이다.
하아. 마법사 베스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어째서 절 보자고 하셨습니까. 그레즈까지 오셨으면 그냥 라르곤 마탑으로 가시면 되었을 텐데.”
“그렇게 되면 쓸데없이 시끄러워질 뿐이겠죠. 그렇잖아도 세상이 나에게 관심이 많은데, 그건 마탑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음······.”
제드의 말대로였다. 최상급 마석 때문에 제드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길 원했던 마탑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토바스 전투의 내용을 들은 라르곤 마탑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구시대 병기 화포. 그 화포로 마법의 불꽃을 발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였으니, 그것이 널리 보급된다면 앞으로 전쟁의 판도를 크게 뒤바꿀 터였다. 앞으로 마법사의 가치는 더욱 상승할 테니, 마탑에서는 어떻게든 제드의 협조를 원할 것이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나는 마탑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그걸 알려줄 용의가 있습니다. 이건 새로운 거래에 대한 제안입니다.”
“그렇다면 마탑에 요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왕정에 협력하세요. 각지의 귀족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겠죠. 앞으로의 전쟁에 마탑의 마법사들을 동원해야겠습니다. 미리 말하는데, 나는 조건 중 어느 것도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일방적이군요.”
“실제로 우리의 거래 내용이 그렇지 않습니까.”
“······.”
베스퍼는 할 말이 없었다.
제드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거래의 주도권은 제드에게 있었다. 처음부터 말이다.
*
늦은 밤까지 왕궁의 집무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
그곳엔 이제 여왕이 된 라니아가 가득 쌓인 양피지를 하나씩 훑어보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이후로 항상 그녀는 매일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고 서류를 살피곤 했다.
“하아.”
한참 서류를 살피던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케미트로스 공작을 필두로 했던 온갖 부정축재를 비롯하여 그와 연결되어 있던 귀족, 상인연합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이 산재해있었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썩어 있구나, 이 나라는. 당장 수도인 그레즈만 이 정도라니.’
그게 라니아가 잠들 수 없는 이유였다.
처음엔 죽을 뻔했던 그날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제드가 시켰던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이 나라의 국왕으로서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할 일은 많고 손은 부족했으며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정말로 해나갈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인데, 토바스의 사태가 터졌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 근래에 없던 숙청의 피바람에 귀족들의 탄원이 연일 올라오고 있었다.
제드 크레인. 그를 그냥 두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들이 어찌 알았으랴. 라니아는 자기 힘으로 여왕에 오른 게 아니었다. 제드가 그녀를 선택한 것이었다.
‘제드 크레인, 그는 이 나라의 모든 귀족을 적으로 돌리기라도 하려는 걸까? 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귀족을 그런 식으로 무참하게 숙청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제드가 이전에 한 일을 생각해보자면 썩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모르겠구나. 그가 나에게 알려준 길은 여기까지였다. 왕위에 오르고, 제정안을 공포하는 것. 그 이후엔 뭐지? 이제 나는 뭘 해야 하는 걸까.’
라니아가 얼마나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똑똑.
“폐하, 아리에입니다.”
“들어오너라.”
시녀였다. 어린 시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여느 때처럼 예의를 갖추어 인사하였다.
“무슨 일이지? 부른 적은 없는데.”
“폐하께 전달할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내게? 무엇을.”
그러자 시녀는 조심스럽게 투박한 서신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라니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 서신을 펼친 순간,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꿀꺽.
라니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왕궁의 정원에는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밤이 깊은 시각, 이곳을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왕궁의 주인인 라니아조차도 이곳을 얼마 만에 찾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체 언제 수도에 온 걸까. 또 어떻게 이렇듯 자연스럽게 왕궁까지 들어올 수가 있었을까.
그러다 저 멀리 분수대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을 때, 머릿속 무수한 생각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 그다.
제드 크레인. 그가 달빛 아래에 서 있었다.
두근.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두려움? 그도 아니면 설렘? 알 수가 없다. 그와 관련된 것들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수수께끼였다. 달빛에 번진 하늘의 색처럼 짙은 푸른색 눈동자는 올곧게 그녀에게 드리워 있었다.
“무모하시군요. 이 깊은 새벽에 홀로 예까지 오시다니 말이지요. 이게 함정일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수도엔 언제 왔나요.”
“그저께 왔습니다.”
“그런데 절 지금에야 찾아오셨나요.”
“뜻밖이군요.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그, 그건······.”
그녀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했다. 제드로서도 그 반응은 의외였기 때문이다.
“토, 토바스의 일은 들었어요. 아주 무시무시한 일을 벌이셨더군요.”
“예, 하지만 그건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시작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제드는 자신의 계획을 짧게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이런 계획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터무니없군요. 토바스와는 달라요. 지방 귀족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면 동원 가능한 병력의 수만 1만이 넘어설 게 틀림없어요. 그런 대병력과 어떻게······.”
그녀의 말에 제드가 낮게 웃었다.
“대체 뭐가 웃기죠?”
“폐하, 이 대화는 전에 그 방에서 나눴던 대화와 비슷하지 않은지요. 그때도 폐하께서는 제 말이 터무니없다며 부정하셨습니다.”
“······.”
라니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그때도 그랬다. 수도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던 케미트로스 공작. 그 가문의 기사단은 근위대 이상으로 강했다.
그랬던 그가 하루아침에 목이 사라진 채로 죽었다. 그를 따르던 귀족들과 함께 말이다. 바로 이 남자, 제드의 손에 의해서.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쇄신이라는 불꽃 아래 타들어 가는 개혁의 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면 너무나도 많은 피가 흐르겠군요.”
“썩은 부위를 도려내지 않으면 몸 전체가 썩는 법입니다. 흘려야 하는 피를 아까워한다면 어찌 군주라 할 수 있겠습니까.”
라니아는 몸을 떨었다. 눈앞에 핏물이 낭자했던 그날이 떠오른 까닭이다.
“차라리······ 제드 경이 왕위에 오르는 게 더 맞았을 것 같네요. 그 모든 일은 저에겐 너무 벅차요.”
“글쎄요. 왕관의 무게를 가볍게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밖의 일은 제가 할 터이니, 폐하께서는 나라의 안을 살펴주십시오. 앞으로는 인재를 발굴하고 곁에 두셔야 합니다.”
그 말에 라니아가 원망스러운 듯한 표정을 했다.
“경은 너무 쉽게 말하는군요. 피의 숙청 이후로 각지의 귀족들이 분노로 들끓는 상황에서 대체 어떤 귀족이 날 위해 일하겠습니까?”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어째서 귀족이어야 합니까?”
“왜냐니 그야······.”
라니아가 말을 하다가 말고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표정을 했다. 왕의 신하라고 하면 응당 귀족인 것이 당연했다. 명문가의 귀족이 교육을 받고 왕을 보필하는 것.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런데 제드는 그 상식부터 부정하고 있었다.
“잊으셨습니까? 저는 귀족이 아닙니다. 그리고 폐하와 저는 지금 귀족과 영주라는 구시대의 기득권 세력을 이 나라에서 뽑아내는 중이십니다.”
······.
라니아는 등줄기로 소름이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평민을 중용하여 귀족을 끌어내리고 기득권을 부수는 것.
그래서야 마치.
“예, 혁명입니다. 저 남부에서 일어난 공화국의 혁명과 차이가 있다면 이 혁명은 폐하께서 주도하는 왕정의 강화로 이어지겠지요. 혁명의 군주가 되어 주십시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라니아는 제드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그의 사고에는 한계라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꼭 먼 미래의 일까지도 다 아는 것처럼 말이다.
“가장 먼저 상인 계층을 살피세요. 시대가 변했습니다.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본가 계층. 그들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그들이 폐하의 지지층이 될 것이고, 이는 왕정의 권위가 될 것입니다.”
두근두근.
라니아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렇구나.’
이 두근거림의 정체는 흥분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설렘. 제드는 그녀에게 늘 그것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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