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 마법사의 회귀-124화 (완결) (20) (20/124)

#   19 - 3747013

#

레지앙1

산골의 작은 마을이었던 레지앙은 변화하고 있었다.

마법사와 상인, 인부들이 한 곳에 모이니 돈이 돌기 시작했다. 돈을 따라 매일 새로운 사람이 마을에 찾아들었으니, 당연하게도 전에는 없었던 문제점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농경지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일단은 마을의 재산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만, 불만스러운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식량을 분배해야 하는지, 저마다 이야기가 다르고 요구도 다른지라······.”

디아고는 그 이야기만 나오면 한숨을 푹 내쉬며 골치아프다는 표정을 했다. 제드도 그걸 이해했다.

‘이 레지앙이라는 마을은 공통 재산, 식량 분배, 역할에 따른 분업. 그 공동체 의식으로 돌아가던 곳이다. 그건 모두의 공통된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어. 하지만 지금처럼 매일 새로운 사람이 유입되고 정착하는 이들이 늘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변화는 불가피했다.

그리고 제드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겁니다. 레지앙은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질 겁니다. 변화를 거부할 게 아니라면, 레지앙의 사람들도 변해야 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주십시오, 마법사님.”

“마을의 공통재산 방식부터 바꿔야겠습니다.”

“예? 그러면 어,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되긴요. 레지앙도 세상 밖의 방식을 따르면 되는 겁니다. 재화의 가치에 따른 시장의 형성과 구축.”

“아이고. 마법사님,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마을 사람들 태반은 힘없고 늙고 약한 사람들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디아고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제드가 한 말이 가혹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고이게 되고, 고인 것은 썩는다.

“변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건 없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도태될 것입니다.”

“하지만······ 마, 마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글조차도 읽을 수 있는 이가 극히 소수인데, 저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과 어찌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저도 대등하게 싸우라는 말은 하지 않았죠. 저는 이 마을 출신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줄 생각입니다.”

“대우라면 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예를 들자면 그동안의 마을에 해온 공로에 따라서 농경지를 나눠주는 게 그 일환이겠군요.”

디아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드가 만든 농경지를 지금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땅이 개인 소유가 된다는 말에 디아고는 눈만 끔뻑댈 따름이었다. 확실히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이 배를 곯을 일은 없을 터였다.

왜냐하면, 제드가 만든 농경지는 몹시 비옥하여 감자를 심고 두 달이 지나기만 하면 주먹보다 더 큰 알감자 뿌리가 주렁주렁 매달릴 지경이었다.

“상인들이 터를 잡을 테고, 시장이 만들어질 겁니다. 농경지엔 뭘 심어도 많이 잘 자랄 겁니다. 사람이 늘어나면 토지공사를 통해 농경지를 더 확보하면 될 일이고요.”

디아고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의 변화를 다 이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겁니다. 디아고는 이 마을에서 거의 유일하게 글과 산수를 아는 분이시죠?”

“저도 대단히 내세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읽고 쓰는 정도만 조금 할 줄 압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부터 세금의 계산까지. 레지앙의 새로운 규칙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촌장’이라는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을 겁니다.”

“그, 그런 큰일은 이 늙은이가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부디 마법사님께서 이 일을 맡아주십시오. 마법사님께서 말씀하신다면 마을 사람들도 모두 받아들일 겁니다.”

디아고는 간절히 부탁했지만 제드는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어요. 힘들다면 도움이 될 만한 이를 찾고 키우세요.”

끄응. 디아고가 사색이 된 얼굴로 앓는 소리를 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직감한 까닭이다.

레지앙의 원주민들은 당혹스러워했다.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운 변화였기 때문이다.

불만과 우려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걸 제드에게 말하진 못했다.

몬스터의 침공부터 농경지, 그리고 지금 마을의 발전과 변화가 모두 제드의 덕분임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지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혹하게 하였다.

아무리 순박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욕망이 없는 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억눌려 있는 것뿐.

제드는 그런 인간 본연의 욕망을 너무 잘 알았다. 제국 대신이란 인간의 욕망에 정점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소요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바로 변화의 시작이지.’

제드는 생각을 정리하며 마나를 개방했다.

모두 저마다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제드도 일을 할 때였다.

파지직!

번갯불이 튀었다.

지금부터는 마석을 정제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그게 곧 자신의 힘이 되어줄 것이기에.

*

사람이 모이는 곳엔 늘 소란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의 레지앙이 그랬다.

돈이 돌고 사람이 들어오니까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그 때문에 빌과 마을의 치안을 책임지던 사냥꾼들은 아주 바빴다.

그나마도 처음에는 자질구레한 일이 태반이었는데, 지금은 마을에 들어온 용병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레즈에서 레지앙까지 물자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그들은 임무가 너무 손쉬웠던 까닭인지 조금씩 말썽을 일으켰다.

용병들의 생태를 익히 아는 빌도 처음에는 웬만하면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넘어갔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마을의 처녀를 술에 취한 용병 하나가 성추행한 것이다. 엉덩이를 좀 만졌을 뿐이라며, 낄낄대는 모습에 빌의 화는 폭발해버렸고 용병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문제는 일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 용병단의 단장이 그 소식을 듣고 나타나서는 오히려 빌을 두들겨 패버렸다. 단장쯤 되니 실력으로 빌이 어찌할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제드가 도착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빌은 그 일을 겪은 뒤로는 잠을 자는 시간도 줄여가면서 자신을 단련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고 했다.

제드가 그런 빌을 발견하고서 디아고에게 묻지 않았으면 그냥 모르고 지나갔으리라.

“많이 분했던 모양이군.”

[분한 정도가 아닌 듯했소. 그는 마을을 지키는 걸 거의 자기 사명처럼 아는 것 같았으니, 아마도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오.]

머릿속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 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은색 갑주의 자크가 대답했다.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발전할 여지는 충분하겠군.”

[발전할 여지라. 그건 또 다른 얘기이오, 주군.]

“왜. 경이 보기에 재능이 없던가?”

[재능이라기보다는 방향성에 문제가 있소. 이미 그 빌이라는 자는 육체적인 단련만으로는 실력을 끌어올리기 힘든 수준에 다다랐소. 육체의 한계는 저마다 다르오만, 어쨌든 내가 보기엔 그랬소. 그 이상은 오직 자신이라는 그릇에 세계를 담기 시작해야만 열리는 법이오.]

“즉, 마나를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군.”

[그렇소. 문제는 마나를 깨닫는 것은 순전히 재능과 감각의 영역이오. 단순히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소.]

“어떨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어두운 밤이었다.

부웅. 부웅.

반복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마을의 목책 너머.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가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그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웃통을 드러낸 채로 구슬땀을 흘리는 사내였다. 근육질의 몸에 사나운 인상. 빌이다.

빌의 눈동자가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 이 정도론 부족해.’

다시금 칼을 휘두르려고 할 때였다.

오싹.

별안간 등줄기를 스치는 스산한 감각에 빌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저편의 어둠에 꽂혔다.

“웬 놈이냐.”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을 때였다.

절그럭.

갑옷의 이음새가 얽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2미터에 육박하는 거구의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꿀꺽.

빌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 존재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뿜는 전의에 온몸이 오싹할 정도였다.

‘강하다.’

상대가 누구인지,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빌은 압도됐다.

바로 그 순간, 상대는 단숨에 거리를 좁히더니 그 큰 대검으로 공간을 베어왔다.

꽝!

“으그극!”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서 막아낸 빌이었지만, 손아귀와 팔이 떨어지는 듯했다. 뒤로 붕 떠올랐다가 착지한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무, 무슨 공격이······.’

단 일격을 받아냈을 뿐인데, 전의가 꺾인다. 이토록 빠르고 무거운 검격이라니.

빌이 어둠의 너머에서 번득이는 녹색의 안광을 목도했을 때, 허공을 가르는 공격이 다시금 날아들었다. 지독하게 빠른 속도에 거리감이 무용지물이다.

꽝!

“크으윽!”

이번 공격에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헉헉. 빌은 초췌한 기색으로 칼을 꽉 쥐었다. 손아귀에 감각이 없었다. 필시 손바닥이 엉망진창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곳은 내가 지켜야할 곳이다.”

으드득. 이를 짓깨물며 그 말을 내뱉은 순간, 꺼질 듯이 연약해졌던 전의의 불씨가 다시 화르륵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번엔 빌이 달려나갔다.

“차아아아앗!”

쉬아악.

기합과 함께 상대의 빈틈투성이인 몸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그리고 그 공격은 성공적으로 먹힌 듯 보였다. 적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쩡!

칼끝에서 느껴지는 반발력에 떠밀리듯 튕겨 나간 빌이 칼을 땅에 박고서 자세를 다잡았다.

그러나 빌의 눈동자엔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대검을 휘감은 푸르스름한 기운을 말이다. 그것은 마나다. 정확히는 마나를 엮어서 덧씌운 오러다. 저것에 튕겨 나온 것이다.

그러나 어둠 속의 적은 더는 공격해오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

“많이 분한 모양이죠.”

별안간 들린 목소리에 벼락같이 고개를 돌린 빌.

나무의 뒤에서 익숙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드다.

“······.”

빌은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제드와 함께 온 거구의 인물.

그가 바로 지금 저 눈앞의 존재라는 걸 알았다.

‘나를 시험했구나.’

화가 치밀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의 대결은 너무나도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들었습니다. 최근에 용병들 때문에 호된 꼴을 당했다죠.”

“······제 무능함을 비난하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하십시오.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는 자기 몫을 다 하지 않는 이들을 혐오합니다. 지금의 저처럼 말입니다.”

그 말은 언젠가 빌이 제드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제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답군.

“좋습니다. 빌에게 제 몫이라는 건 이 레지앙을 지키는 거겠죠. 모든 위협과 치안의 상황까지 포함해서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하나 물어봅시다. 빌은 어째서 레지앙에 집착합니까? 빌이라면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해나갈 수 있을 텐데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상황에서 말이죠.”

제드는 불현듯 그게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러자 빌이 투박한 태도로 대답했다.

“레지앙의 사람들이 나를 믿고 받아주었으니, 그 믿음에 답하는 것뿐입니다. 그게 집착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제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훌륭한 신념이군.]

잠자코 있던 자크가 한 마디 덧붙였다.

‘신념인가.’

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길이 있다. 빌에겐 이 레지앙을 지키는 것이 곧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란 얘기였다.

“그렇다면 강해져야겠군요. 레지앙과 당신 자신을 위해서.”

제드가 그를 지나쳐 숲을 향해 걸어갔다.

“따라오세요, 빌. 그 신념에 이르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테니까.”

“······.”

어둠 속으로 제드가 모습을 감추었다. 절그럭대는 소리 역시 멀어져갔다. 빌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이내 그 뒤를 따랐다.

길이 있다면 나아갈 따름이다.

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