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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마법사의 회귀-124화 (완결) (18) (18/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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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2

*

꽈르릉.

천둥과 벼락이 쳤고, 창문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흔들렸다.

“하늘마저 우리를 축복하는 듯하군.”

상석에 앉은 중년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이름은 바미르 테이반 케미트로스.

현재 라이곤 왕국 수도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왕이 병환으로 쓰러지고, 그는 차근차근 자신의 입지를 넓혀왔고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지금쯤이면 유일한 적통인 왕녀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을 테니, 이제 남은 것은 그 소식이 수도에 들려오는 것만 기다리면 됐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 나라의 왕이 된다.’

왕관을 쓰고 왕좌에 오른 순간을 상상하는 공작의 입가엔 탐욕 어린 미소가 드리웠다.

“곧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겠지요.”

“이제 곧 공작 전하의 세상입니다.”

공작의 입가에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곧 우리가 기다리는 소식이 올 걸세. 그때는 각자가 제 할 일을 해야 할 걸세. 모두 잘 알고 있겠지?”

“예, 그리하겠습니다.”

긴 시간 준비한 까닭에 구태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평생을 기다렸건만, 고작 이 하루를 기다리기가 이토록 힘들 줄이야.’

케미트로스 공작이 요동치는 가슴을 억누를 때였다.

회의실 외곽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기사가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남쪽에서 소식이 당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래, 드디어······.”

공작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패 확률은 지극히 낮다.

왜냐하면, 그 계획에 동원된 이들은 공작이 고르고 고른 정예였기 때문이다. 배신의 가능성도 없었다. 그럴 수 없도록 목줄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왕실 근위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완벽하게 알고서 짠 계획이었으니, 공작이 기다리는 건 그저 일을 끝마쳤는가뿐이었다.

······분명히 그랬을 터인데.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실패라니.”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지금 이 상황에 나올 실패에 관한 소식은 단 하나뿐이다.

라니아 왕녀를 죽이는 것에 실패했다는 얘기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묻지 않느냐!”

케미트로스 공작이 쩌렁쩌렁 고함을 터뜨렸다.

기사가 쩔쩔맸고, 곧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사납게 내리는 비에 젖은 모습. 그는 현장의 습격조 인원 중 하나였다.

“그대가 말해보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머잖아서 엄청난 실력의 기사와 마법사가 나타났습니다······.”

기사는 악몽과 같았던 전날의 그 순간을 말했다.

공작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실패라고.’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 실패했다.

‘왕녀가 살아 있어서는······ 왕위에 오르는 건 불가능하다.’

실권을 잡았다고 해도 정통성은 라니아에게 있다.

즉, 다시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아무리 순진한 왕녀라고 해도 이런 사건을 겪고 나면 독기가 오를 테니까.

빠드득.

“대체 웬 놈이······.”

케미트로스 공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고르고 고른 정예였다. 근위대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이 실패하다니!

‘잠깐 마법사? 마법사라고······.’

바로 그 순간, 공작이 미간을 모았다.

불과 한 달 안팎 사이에 수도에서 일어난 일들이 떠올랐다.

마탑을 중심으로 무슨 전쟁이라도 준비하듯 온 도시가 난리였다. 그 물건들의 목적지는 레지앙. 산골 마을로 간다고 그랬다.

‘그놈이야! 그 마법사가 이 일에 개입한 거다!’

부릅 뜬 공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안일했다! 이제 고지가 코앞이라는 생각에 넘겨선 안 될 일을 그냥 넘겨버린 것이다.

근 한 달 사이, 도시에서 돌아가는 상황이 수상쩍어 사람까지 골라서 뒤를 캐고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그것도 실패했다. 보냈던 이들은 모두 죽었고, 마법사의 행방도 묘연해졌다고 그랬다.

그래서 관심을 껐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렇게 여기고 말았던 것이다.

“고, 공작 전하.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이 일은 역풍이 될 것입니다!”

장내의 귀족들이 안절부절못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

조금 전까지 희희낙락했던 것들이 이제 우는 소리를 내고 있는 꼴을 보자니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케미트로스 공작은 인내했다. 그들을 품지 않으면 왕위는 얻을 수 없다.

“조용히.”

나지막한 말에 좌중이 입을 다물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고, 공작은 언제 당황했었느냐는 듯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왕실의 안녕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음이 말이다. 정체불명의 마법사와 기사. 그들과 마탑이 연계하여 불온한 일을 꾸몄으니, 필시 왕녀 전하를 습격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고 저지른 것일 터.”

귀족들이 눈치를 보다가 이내 영악하게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이번 일을 제3자에게 덮어씌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모두 알아듣겠나? 지금 왕국은 전에 없던 위협을 맞이한 것일세. 왕실의 존엄과 안녕을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계엄을 선포하고 이 일과 연관된 모든 자를 잡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야.”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그저 공작 전하를 따를 것입니다.”

“이 나라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십시오!”

언제나 길은 있는 법이었다.

공작은 겨우 한숨 돌렸다는 듯 안도하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외부가 소란스러웠다. 이건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밖이 왜 이렇게 소란스럽더냐.”

“살펴보겠습니다.”

기사가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꽈르릉.

창밖이 번쩍거리고 굉음이 터졌다.

‘일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인가? 이상하게도 불길하구나.’

사람의 직감은 때때로 아주 정확할 때가 있다.

닥쳐올 불행을 미리 느끼는 것이다.

지금의 공작이 그랬다.

꽝!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인형 하나가 회의실 바닥을 나뒹굴었다.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조금 전 기사의 몸이 두 동강이 난 채였다.

“히이익!”

귀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문이 열린 복도에 기사들이 널브러져 있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이게 무슨······ 무슨 일이란 말이냐?”

케미트로스 공작이 당황하여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복도의 저편에서 절그럭대는 쇳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그것은 갑주가 얽히며 내는 소음이다.

꿀꺽.

공작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을 때, 어둠 속에서 녹색의 안광이 일렁였다.

“웬······ 웬 놈이냐!”

그 물음에 대답은 없었다.

습격자는 대답 없이 땅을 박차더니 무서운 기세로 회의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꽈르르릉!

창밖이 새하얗게 물들었고, 하늘은 무너질 듯 요동쳤다.

*

“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킨 여인.

식은땀이 범벅된 채로 주변을 두리번대는 금발여인의 동공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피, 피넬리. 피넬리!”

라니아는 겁에 질려 중년의 시녀를 불렀다.

그러나 그 시녀는 이곳에 없었다.

그 대신에 이곳엔 여인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있었다. 소년의 태를 막 벗기 시작한 얼굴. 잘 먹지 못한 듯 마른 체구. 차분한 눈동자. 그 얼굴을 본 순간, 이상하게도 그녀는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제드······ 제드 크레인.”

“예, 왕녀 전하.”

“꿈이······ 꿈이 아니었구나. 그 모든 게 꿈이 아니었어.”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 빗속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기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은 현실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안전합니다.”

“아,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안전한 곳은 없다.”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십니까?”

“케, 케미트로스 공작. 그는, 그는 괴물이다.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테니······ 또 나를 죽이려고 들 거야. 어떻게 감히······ 감히 이런 짓을.”

라니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권력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순진한 어린아이여서야 그 자리를 지킬 수 없는 법이지요.”

“······그대는 내가 순진한 어린아이 같다고 책망하는구나.”

“아닌지요.”

라니아는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대로다.

“맞다. 나는, 나는 어린아이나 다름없다······. 지금껏 공작의 손에서 멋대로 놀아나고 죽을 뻔했지. 그대가 아니었다면 말이야. 제드 크레인, 말해보라. 그대는 나에게 뭘 원하지?”

“저 역시 권력을 원합니다.”

“그대도······ 그렇단 말인가.”

“저에게 대가 없는 충성과 친절을 원하셨습니까?”

“······.”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던 라니아는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대가 없는 충성과 친절. 그런 건 없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었다.

“왕위를······ 원하느냐?”

“제게 필요한 것은 왕위가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이 대륙의 균형을 잡을 강력한 국가입니다. 따라서 왕녀 전하께서 저와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신다면 저는 라이곤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뿐입니다.”

“뭐, 뭐라? 네가 감히······.”

라니아가 깜짝 놀라 그렇게 말했다가 제드의 눈동자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허풍도 기만도 뭣도 아니다. 그냥 담담히 사실을 말하는 태도였다.

제드 크레인. 이 남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다.

꿀꺽.

마른침이 저도 모르게 넘어갔다.

“만약······ 내가 그대를 필요로 한다면 어찌 되는가?”

“왕녀 전하께서 저에게 협력하신다면 저는 이 나라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한 강력한 권력은 제가 휘두르겠지만 말입니다.”

“오만하구나. 이번엔 운이 따라주어 일에 훼방을 놓았을지 몰라도, 케미트로스 공작의 힘은 막강하다. 그를 따르는 귀족이 있고 기사들이 있다. 그들의 힘이 얼마나······.”

라니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곧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은빛 갑주를 걸친 기사였다.

“다오.”

제드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은빛의 기사는 말없이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라니아가 그걸 지켜보다가 이내 사색이 됐다. 그 주머니가 피로 물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그게 무엇이냐.”

“왕녀 전하께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

“보시겠습니까?”

라니아의 동공이 떨렸다.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약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붙잡았다. 이젠 도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여다오.”

그 말과 함께 제드는 주머니를 풀었다.

“우웩!”

라니아는 곧장 토악질했다.

그 안에는 라니아가 예상했던 것처럼 사람의 머리가 있었다. 바로 케미트로스 공작의 머리가 말이다.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숨을 헐떡이는 그녀는 더 게워낼 것도 없을 때까지 전부 게워낸 후에야 제드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공작이, 그 무시무시한 공작이 죽었다. 그리고 이처럼 엄청난 일을 벌였음에도 제드는 처음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저를 오만하다고 여기십니까?”

“······.”

어떻게?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라니아는 입을 다물 뿐이었다. 그건 쓸데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 저곳에 케미트로스 공작의 머리가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불변의 결과가 이곳에 있었다.

그 순간, 라니아는 알았다.

처음부터 선택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선택은, 눈앞의 제드가 한 것이다.

“나는······ 이제 뭘 하면 되지?”

라니아의 물음에 제드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던 빗물은 이튿날 거짓말처럼 그쳤고 쨍한 햇빛이 세상을 비추었다.

그레즈는 이른 아침부터 발칵 뒤집혔다.

케미트로스 저택에서의 수십 명이 비명횡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면면이 몹시도 화려했다. 하나같이 공작의 편에서 정국을 주도하던 귀족들이었다. 사람들은 쉬쉬했으나, 이 일이 정치적 암투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바야흐로 세상이 바뀐 것이다.

죽었어야 할 이가 살고, 살았어야 할 이가 죽었다.

역사가 변했다.

그러나 이건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었다.

제드 크레인. 그레즈를 연이어 발칵 뒤집어놓은 장본인은 그 무렵, 상인들의 행렬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레지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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