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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마법사의 회귀-124화 (완결) (17) (1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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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1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흐린 날이었다.

쭉 뻗은 구릉지로 마차 한 대가 바쁘게 나아가고 있었다.

검은색의 마차는 썩 호화롭지는 않았으나, 앞뒤로 마차를 지키는 이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칼을 차고 말에 오른 이들만 일곱. 그들의 행색과 절제된 모습을 미루어볼 때 마차에 탄 이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음을 짐작게 했다.

마차는 라이곤 왕국의 수도인 그레즈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앞으로 하루 정도면 도착하리라.

“흑.”

마차의 안에서 나지막이 울음이 새어나왔다.

“왕녀 전하······.”

“흑흑. 대체 어째서 찰스 경이 그렇게 간 거지?”

라니아 왕녀는 지금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녀린 몸이 파르르 떨렸다.

믿을 수가 없다.

무덤의 묘비를 보고 왔건만, 아직도 그렇다.

버밀리온 백작.

라니아 왕녀의 약혼자이자, 장차 여왕의 남편으로서 이 나라의 국정을 도모해야 할 인물. 젊고 총명했으며 상냥했던 그 남자를, 라니아는 연모했다.

그들의 첫 만남은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하지만 라니아는 개의치 않았다. 왕족으로 태어난 이는 마땅히 그 신분의 무게를 감내해야만 했다. 더욱이 유일한 적통으로서 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그녀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난 백작은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난국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던 버밀리온 백작이 갑자기 죽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어떻게 버밀리온 백작령까지 향하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중년의 시녀는 안타까운 마음에 속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그간 옆에서 라니아가 얼마나 백작에게 마음을 쏟았는지는 누구보다도 그녀가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큰일이야. 왕녀 전하께서 크게 위험해지셨다.

버밀리온 백작의 급사.

그 일로 이제 라니아 왕녀는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노련한 정치 공작으로 케미트로스 공작은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고 있었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바로 왕위다.

‘이제 누가 왕녀 전하의 힘이 되어줄까······.’

시녀는 착잡한 얼굴로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그들의 앞날을 말하는 것처럼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피넬리, 이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야. 그렇지?”

“······왕녀 전하.”

“나도 바보는 아니야. 찰스 경······ 버밀리온 백작이 죽으면 지금 가장 득을 보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야. 바로 케미트로스 공작이지.”

시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빠드득.

물기 어린 왕녀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그녀는 착하고 여렸으나, 바보는 아니었다.

“내가 뭘 할 수가 있을까? 찰스 경을 위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왕녀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웬 놈이냐!”

“왕녀 전하를 지켜라!”

별안간 마차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채채챙!

칼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무슨 일이냐!”

라니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소리쳤을 때였다. 돌연 마차가 심하게 덜컹댔다.

히이이잉!

말이 흥분한 듯 심하게 울었고, 마차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요동쳤다.

“꺄아악!”

“와, 왕녀 전하!”

시녀가 다급히 몸을 날려 라니아를 보호했다.

곧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과 함께 마차가 쓰러져 땅을 휩쓸었다.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아으으······ 피, 피넬리······.”

라니아가 신음을 흘리며 시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바로 지척에 쓰러져있었다.

“피넬리!”

머리에서 피를 흘리곤 있었지만, 숨은 붙어 있다. 의식을 잃은 것뿐이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

“거, 거기 아무도 없느냐! 나, 나를 도와다오!”

라니아는 거듭 소리쳤지만, 밖에선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따름이다.

‘나, 나를······ 습격했구나. 공작이 나까지 죽이려고 해!’

라니아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뭉개진 마차의 문을 끙끙 밀어댔다. 손톱이 깨지고 핏물이 흘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쏴아아아.

머잖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빗물이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이렇게 죽을 수 없어. 이렇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어!’

유리에 손가락이 베여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통증이 심해질수록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샘솟았다.

바로 그때였다.

콰직.

외부에서 힘껏 당기는 힘에 문이 벌컥 열렸다.

라니아가 기겁하는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근위대 기사대장인 로톤이었다.

“왕녀 전하, 상황이 급합니다.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하, 하지만······.”

라니아는 아직 마차 안에 쓰러져 있는 피넬리를 보았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기사가 소리치자, 라니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쏟아지는 빗물 너머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중과부적.

마차를 지키는 근위대 기사는 일곱 명뿐인데, 적은 이십 명이 넘었다. 외관은 도적 떼와 같은데, 날랜 움직임과 일사불란한 파상공격은 그들이 절대로 도적 따위가 아님을 증명했다.

쉬악!

캉!

부지불식간에 날아든 칼을 튕겨내는 근위대 기사.

“이놈들! 감히!”

로톤이 노성을 터뜨리며 날아든 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라니아는 곧 알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렇구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이 모든 게 전부 다 계획된 일이었어.’

라니아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실소했다. 버밀리온 백작의 죽음조차도 그녀를 꾀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꽉 쥔 손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무력감에 온몸이 사무쳤다.

그러나 이내 라니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기사들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말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온몸이 벌벌 떨려왔지만, 마지막까지 의연하도록 할 것이다. 그게 최소한 그녀가 자신을 위해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컥!”

“크악!”

별안간 비명이 적진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왔다.

제3자.

조금 전 누군가가 빗줄기를 뚫고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그 사람은 은색의 갑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채로 거대한 대검을 너무나도 손쉽게 휘두르며 적을 베어 넘겼다.

써걱!

순식간에 핏물이 땅을 적셨다.

상황이 급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가 여섯을 넘겼다.

정체모를 3자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챈 습격대 대장이 다급히 소리쳤다.

“빌어먹을! 왕녀부터 죽여! 왕녀부터 죽이란 말이다!”

*

습격대의 공세는 매서웠다.

왕녀를 지키는 근위대 기사 일곱 중 셋이 죽은 상황. 이제 나머지 넷은 이제 왕녀를 중심으로 모여 방어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재미있군.

이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제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저 근위대 기사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색 갑주의 기사······ 아이언 골렘 자크를 지원군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선 곤란하지.’

“자크 경, 시간을 끌어라. 쓸데없이 힘을 쓸 것 없다.”

[알겠소.]

조금 전까지 무시무시한 기세로 적들을 베어 넘기던 자크의 움직임이 다소 둔해졌다. 꼭 지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마차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싸움은 한창 더 격렬해졌다.

카앙! 채챙!

빗물 사이에서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칼.

불똥이 튀고 핏물이 비산했다.

습격자가 두 명 쓰러질 때마다 근위대 기사도 한 명씩 쓰러졌다. 근위대 기사의 실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으나, 습격자들의 실력 역시 만만찮았다.

“빌어먹을. 저런 놈이 있다는 얘긴 듣지 못했는데······.”

자크의 존재감에 조바심을 느낀 습격대 대장이었다.

이제 남은 근위대는 셋. 그중 둘은 이제 상처가 꽤 컸다.

그러나 문제는 왕녀의 바로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중년의 기사 로톤이었다. 왕국 근위대의 대장인 그는 마스터에 다다랐다고 칭송받는 실력자였다.

“어차피 어느 한 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일이다.”

으드득. 습격대 대장은 이를 갈며 칼을 꽉 쥐었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물의 기세가 더 강해졌다.

치열하게 이어지던 싸움도 서서히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근위대 기사가 쓰러졌고 습격자도 쓰러졌다.

시체가 쌓이고 핏물이 바닥을 적시는 가운데, 제드는 이제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자크 경, 이제 정리해도 좋다.”

제드의 명령이 떨어지자, 자크의 움직임이 변했다.

조금 전까지 자크를 밀어붙이던 적 셋의 공격을 피하더니 불쑥 한 명의 팔을 베어내고 그대로 파고들어 다른 한 명의 목을,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다리를 날려버렸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연속 베기.

파도검이라고 불리는 안투르프 가문의 비전검술이었다.

한편, 제드 역시 오른손을 쭉 뻗었다.

이제 왕녀를 지키는 근위대 기사는 하나뿐이다. 그 하나도 상처투성이. 위기에 처한 왕녀를 구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인 것이다.

우우웅.

중지의 디바이스가 공명하는 가운데,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낸 마나의 구체가 쪼개지기 시작하더니 수십 개의 화살이 되었다.

기사급 실력자들에겐 잘 통하지 않는 공격이었지만, 적들은 이미 지쳤고 조바심이 난 상태였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으니.

“가라.”

제드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하늘에 떠올랐던 수십 발의 화살이 수십 미터의 공간을 가르며 쏟아졌다.

슈슈슈슈슉!

“헉!”

“마, 마법의 화살!”

별안간 매섭게 쏟아지는 마법의 화살에 경악한 습격자들은 다급히 칼을 휘둘러 마법을 상쇄하였다.

퍼퍼퍼펑!

“큭! 죽여야 한다. 어떻게든 왕녀를 죽여야 해!”

대장이 다급히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고지가 코앞이다. 이게 마지막 기회임을 그는 직감했다. 왕녀를 죽여야 한다!

이노오오옴. 로톤의 서릿발 같은 고함과 함께 날아드는 은색 궤적을 튕겨낸 순간, 화살이 몸에 박히며 폭발했다.

퍼엉!

왼팔이 터져나가며 핏물이 튀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죽어서라도 해야만 했다. 그렇잖으면 그의 처자식이 죽는다.

“죽어라!”

칼이 공간을 갈랐다. 그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만든 일말의 틈. 하지만 그가 목적을 끝까지 달성하는 일은 없었다.

퍽!

하얗게 질린 라니아의 목에 칼이 다다르기 직전, 날아든 섬광이 그의 머리를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

하얗게 질린 라니아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조금 전 눈앞에서 터진 핏물을 그녀가 다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처, 철수한다!”

대장의 특공이 실패한 순간, 습격자들은 이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증원군. 그것도 마법사가 개입한 마당에 더 하는 건 개죽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빗물 속에서 피 칠갑을 한 은빛 기사가 절그럭대며 다가와 마차 앞에 섰다. 마지막 순간까지 라니아를 지키던 중년의 기사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로, 로톤 경!”

“와, 왕녀 전하······.”

피를 많이 흘린 기사는 의식을 잃었다.

라니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모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곳에 제드가 서 있었다.

“무사하십니까, 왕녀 전하.”

“······.”

넋이 나간 채로 오들오들 떠는 라니아.

충격이 컸으리라.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그녀가 언제 이런 살육의 광경을 본 적이나 있을까.

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제드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 괜찮습니다. 악몽은 끝났습니다.”

“그, 그대는······ 그대는 누구지?”

“저는 제드 크레인이라고 합니다.”

“제드······ 크레인.”

이름을 곱씹던 라니아가 별안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로 그 순간, 제드는 그녀를 안 듯이 부축했다.

“왕녀 전하, 이제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 합니다. 바로 이곳에서부터 역사가 바뀔 테니까요.”

오싹.

라니아가 몸을 움츠렸다.

한순간이었지만, 제드의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무섭게 요동치는 폭풍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는 내, 내 편인가?”

“왕녀 전하께서 제 편이라면, 저 역시 왕녀 전하의 편입니다.”

“······.”

라니아가 덜덜 떨며 제드의 앞섶을 잡아당겼다. 그 애달픈 요구를 제드는 응해주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작은 새를 품었다.

“나, 나를 지켜다오······.”

“예, 기꺼이 그리하겠나이다.”

제드가 미소 지었다.

여전히 빗줄기는 거세다. 바람까지 거세지니, 한동안 이 비는 멈출 것 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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