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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마법사5
이 일대의 공기가 급속도로 얼어붙는 듯했다.
영혼은 얼어붙은 동토의 시간에 머무는 존재.
방대하게 밀집한 마나와 그런 존재가 접촉하면서 공명하니 그 기운이 증폭되면서 냉기가 사방에 내려앉은 것이다.
사아아아아아.
영혼의 존재감이 더욱 선명해지며 이명이 커졌다.
“돌아가라. 너 따위를 쓸 생각은 없으니.”
죽은 인간의 영혼은 정령과 비교하면 격이 너무 낮았다.
제드가 막 마력의 돌풍으로 다가온 영혼을 날려버리려던 때였다.
[이 몸이 정령보다 못할 게 무엇이오?]
별안간 이명이 사라지고 들려온 뚜렷한 목소리.
제드의 눈에 이채가 드리웠다.
대개 이승을 떠도는 영혼은 무너져 오염된 상태였으므로 목소리는 저주를 쏟아내는 창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념은 너무 맑았다.
‘그러고 보니 이 느낌, 좀 기이하군. 음산하긴 하지만 그것뿐이야. 주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반쯤 정령화했다는 건가? 드물게 영혼 중에 속박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긴 들었는데, 그래서 부름에 응했나.’
곧 마법진 안쪽에서 흐릿한 모습의 사내가 나타났다.
영혼은 날카로우면서도 시원시원한 인상의 미남자였다.
[쫓을 땐 쫓더라도 대화나 나누는 게 어떻소.]
“너는 누구지?”
[소개가 늦었소. 자크 안투르프요. 내가 죽었을 땐 그래도 꽤 유명했는데, 젊은 공자가 날 알까 모르겠소.]
남자의 말에 제드가 미간을 모았다.
“안투르프? 설마, 마르테르의 그 안투르프인가?”
[그걸 어찌 알고 있소? 맞소. 마르테르의 안투르프. 이거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 아니지, 죽고 오래되고 볼 일이로군!]
긍정.
제드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눈앞의 자크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안투르프라는 그 성씨는 모를 수가 없었다.
공화국의 푸른 늑대.
파스칼 안투르프.
전생에 토르가 제국을 수도 없이 패배로 밀어 넣었던 강습대 전술의 선구자가 바로 그였다. 일당백의 마스터이자, 공화국의 정예를 직접 이끌었던 안투르프 장군.
‘근데 안투르프 가문의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마르테르는 렌시아 공화국에서도 남부의 바닷가와 인접한 도시. 반면 이곳은 수백 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중앙내륙인 라이곤 왕국의 수도였다.
“안투르프 가문의 사람이 왜 여길 떠돌지?”
[이야기하자면 좀 긴데······ 뭐, 대충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셈이오. 꽤 오래전이긴 한데, 이 저택에서 죽었소. 그래서 여길 떠도는 것이고. 뭐, 지나간 일이니 그런 건 신경 쓸 것 없소. 근데 나에 관해서 아는 거 아니었소? 왜 내 이야기를 나한테 묻는 거요?]
“······.”
황당한 유령이었다. 자기 죽음을 이렇게 대충 넘기다니. 하기야 원한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이토록 사념이 맑은 것일 테지만 말이다.
“······좋다, 나도 관심없는 네 옛 사연은 궁금하지 않다. 그럼 다른 걸 묻지. 내 부름에 응한 이유는 무엇이냐? 나는 인간의 영혼 따위는 부른 적이 없는데.”
[성미가 급하군. 나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이고, 말이 통하니 말을 걸었을 뿐이오.]
“그게 전부라는 건가?”
[처음에는 그랬소. 근데 조금 전에 알게 됐지. 공자가 마법을 통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육체의 그릇을 만들었다는 걸 말이오.]
“그래서.”
[내게 이 깡통의 몸을 빌려주는 건 어떻소?]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렇지 않소. 복수는 할 사람도 없고. 예전에 다 끝났소. 그런 너절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확인해보고 싶소. 죽은 내가 깨닫게 된 것들을 말이오.]
자크가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건 명백했다.
왜냐하면, 자크가 거짓과 기만을 늘어놓았더라면 지금 그의 영혼의 형상을 유지하는 제드에게 곧장 오염이 역류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현상이 전혀 없었다.
제드는 점차 이 눈앞의 존재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깨닫게 됐다? 그건 죽은 자에게 허락되는 게 아니야.”
[뭐, 다른 말로 표현해도 상관없소. 그걸 어떻게 표현하든 내가 살아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은 가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니까.]
“재미있는 얘기군. 자크라고 했었지. 내가 만든 그릇에 들어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서 하는 말이겠지?”
[알고 있소. 나도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니오. 소위 흑마법사라는 부류가 한 100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수없이 찾아오곤 했었지.]
“근데 용케 버텼군.”
[나는 바보가 아니오. 바로 알았소. 그자의 부름에 응해서 깨어났다가는 난 나일 수 없었을 것이오.]
자크의 말이 맞았다.
강령술로 깨어난 존재는 저주받은 존재였고, 그 영혼은 타락을 거듭하여 이내 소멸할 뿐이었으니까.
“그걸 알고 있는데도 이 그릇을 원하는 건가?”
[그야 다르지 않소. 공자는 흑마법사 같은 게 아니오. 내 말이 틀렸소?]
“그건 정확하다. 하지만 그대의 처우는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나는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일 존재가 필요한 거니까.”
[알고 있소. 그리고 육체만 제공해준다면 나는 기꺼이 공자에게 충성을 바치겠소. 기사는 주인을 모시고 충성을 바칠지언정 꼭두각시가 되어 조종당하지는 않소. 그리고 공자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충성을 바칠지언정 조종당하지는 않는다.
마음에 드는군.
제드는 결정을 내렸다.
“좋다. 그럼 나의 부름에 응하겠느냐?”
[자크 안투르프. 공자의 부름에 응하였소. 얼어붙은 시간의 저편에서 기사의 맹약을 선서할 것이오. 나의 주군이시여, 충성을 바칠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오.]
“제드 크레인, 그게 나의 이름이다.”
[제드 크레인. 이제부터 이 몸은 맹약이 파기되는 그 순간까지 주군을 따르겠소.]
자크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더니 이내 갑주 안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 순간, 대기 중의 마나가 엄청난 속도로 갑주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쓰스스스스.
골렘 마법이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육체와 그것을 움직이는 에고가 융합한다. 제드는 빛을 잃어가는 마법진의 내부를 향해 마석을 튕겼다. 날아간 마석은 이윽고 갑주의 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이 코어가 될 것이다.
엉망이 된 로비에 요동치던 마나의 흐름이 잠잠해졌고 스산하게 불던 바람은 멎었다. 제드의 중지에서 빛을 뿜던 디바이스도 이제 은은한 푸른빛만 머금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순간, 풀 플레이트 아머가 절그럭대며 천천히 움직였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움직임은 조금씩 부드러워지더니 이내 사람의 그것과 같아졌다. 투구 깊숙한 곳에서 은은한 녹색의 빛이 일렁였다.
“그래서 새로운 몸은 어때?”
[음, 나쁘지 않소. 산뜻하오, 주군.]
“재미있는 표현이군. 어쨌거나 그럼 바로 실력을 좀 볼까? 불청객이 찾아온 것 같으니 말이야.”
제드가 힐긋 고개를 돌렸다. 다수의 기척이 무너진 저택을 중심으로 포진해있었다. 사냥감을 기다리듯 이를 드러내고서 말이다.
[주군은 인기가 많은 모양이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사람들이 기꺼이 찾아오고 말이오.]
제드는 피식 웃었다.
처음 기척을 느낀 건 며칠 전부터였다. 그때만 해도 강도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제드를 지켜보던 것은 틀림없는 감시였다.
‘왕정 쪽이겠지. 배후는 케미트로스 공작인가?’
불과 한 달 안팎으로 발칵 뒤집힌 수도였다.
공작이 이 도시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걸 미루어 볼 때, 제드라는 존재가 폭풍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왕녀 암살을 앞두고 장애물 요소를 정리하는 중인가.’
제드는 여유롭게 저택의 입구로 걸어갔다.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아슬아슬한 감각.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전생에서 제드는 항상 암살에 노출되어 있었다.
제드는 골렘 전술의 핵심이었고, 차세대 병기 개발의 총수였으며, 제국의 다섯 대신 중 하나였다. 제드가 죽었다는 소식은 적들의 사기진작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드는 언제나 자신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예민하게 감각을 기울여왔다. 그리고 그 강박에 가까운 습관은 이렇게 제드를 또다시 위험으로부터 구했다.
우뚝.
문을 앞에 두고 제드가 멈추었다.
그리고 비웃음을 담아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해서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그 순간이었다.
문 너머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검은 그림자.
쉬아아악!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세찬 바람이 제드를 향해 날아든 순간이었다.
콰가가각!
별안간 제드의 뒤에서 광풍이 몰아치며 날아드는 바람을 한 번에 찢어발겼다.
제드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콰르르 사선으로 절단이 나서 무너지는 저택의 입구. 그 앞에는 먼 옛 시대에나 썼을 법한 풀 플레이트 아머의 기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크 안투르프.’
제드는 인간형으로 만든 아이언 골렘에 깃든 존재의 이름을 곱씹었다. 무너진 입구의 너머에 몸이 잘려 죽은 두 구의 시체가 보였다.
일격필살.
과연, 안투르프 가문의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아니면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웃돈다고 해야 할까.
“훌륭하군.”
제드는 짧고 담백하게 평가했다.
[아직 평가는 이르오.]
그 순간, 강철의 기사는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땅을 박차고 움직였다.
*
[총 22명이었소.]
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그게 싸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라면 말이다.
지독하게도 일방적인 싸움은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이의 칼날이 부러지고 목이 허공을 날면서 끝났다.
[살려둘 필요가 없다고 해서 다 죽였소만, 이들의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내려면 살려두는 게 나았을 것이오, 주군.]
“알아낼 필요 없다. 어차피 누가 벌인 일인지는 대충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것보단 경의 실력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출중하군.”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진작 말씀드리지 않았소.]
자크가 자신감을 드러낼 만하다.
처음에는 잠깐 사용할 골렘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좋은 패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감을 듣고 싶군. 죽은 후의 얻게 되었다는 그 깨달음이 그 검에 깃들었나?”
[그건 아직 잘 모르겠소. 이 육체가 생각보다 굼뜬 것 같소.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것도 있소. 마나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아서 말이오.]
“그래, 앞으로 미세조정이 필요하겠지. 애초에 그 그릇은 수준 높은 검사의 그릇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 말이야.”
아이언 골렘 등급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크라는 유령 기사가 가진 바 능력을 다 끌어내려면 나이트 골렘의 수준까지는 봐야 할 듯싶었다.
‘나이트 골렘이라.’
전생에 제드가 만들었던 최상위 등급의 골렘.
한 기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부터가 이미 웬만한 소국의 수년 치 예산에 육박하는 결전병기.
그 정도 고출력 골렘을 소형화하는 것이다.
전생에는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골렘끼리 전열 전투를 벌일 때는 더 크고 무거우면서 빠른 골렘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제드는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하늘마저 나를 돕는가?’
시리게 빛나는 제드의 시선이 끝없이 펼쳐진 남부의 평원 저 너머에 닿았다.
앞으로 며칠 남지 않았다.
이 나라의 운명이 크게 뒤바뀔 날이 말이다.
통합력 1641년 6월 21일.
라니아 왕녀 암살사건은 이제 코앞까지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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