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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마법사의 회귀-124화 (완결) (3) (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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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1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산은 어두워졌다.

격렬했던 싸움이 이제야 겨우 끝났다.

“퉷. 빌어먹을 것들.”

빌이 입에 스며든 피를 내뱉으며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닦는다. 누구의 피인지도 모를 것이 가득했다.

“누가 당했냐.”

“샘이 죽었어. 헥스랑 마쉬도.”

“제기랄······.”

나자빠진 오크의 수는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오크는 번식력이 좋았고 태어나고 성인이 되기까지 불과 몇 개월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은 모두 빼어난 전사들이었다.

“시신 잘 수습해.”

빌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저편에 멍하니 앉아있는 한 소년을 발견했다.

으드득.

“제드, 이 애송이 새끼!”

천둥 같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간 빌이 제드의 멱살을 잡았다. 근육질의 거구인 빌의 우악스러운 힘 앞에 작은 체구의 제드가 딸려오면서 발이 지상에서 떨어졌다.

“머저리 자식 같으니. 가만히 서서 버티는 것도 못해! 대가리가 찢어져도 버텼어야지. 네놈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면 그 자리는 누가 메우느냔 말이다!”

레지앙은 험한 산악의 마을. 이곳은 예로부터 끊임없이 몬스터들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자아이는 걷고 뛰어다닐 때부터 사냥을 배웠고 칼과 창을 쓰는 법을 익혔다. 제드는 올해 17살. 이미 전사로서의 자기 몫은 해야 할 나이였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고, 적들의 공세가 무시무시했다고 해도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적은 이 마을에선 모두가 제 몫을 해야만 했다. 제드가 대열에서 나가떨어진 순간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은 다른 사람이 충당해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하다고!”

빌은 더 화가 난 듯 그대로 제드를 내던졌다.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았다. 당장 저 나약한 겁쟁이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저 눈빛.’

바닥에 내던진 녀석이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더니 똑바로 서서 빌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 눈빛이 뭔가 이상했다.

평소에는 빌의 눈을 쳐다보는 것조차도 무서워하여 벌벌 떨던 녀석이 지금은 아주 담담했던 까닭이다.

‘뭘 잘했다고, 버러지 같은 게······.’

빌이 입가를 비죽거리며 주먹을 말아쥘 때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이 와서 그를 말렸다.

“빌, 그만두자고. 그런다고 바뀌는 거 없잖아.”

“······너 이 애송이 새끼. 앞으로 내 눈에 안 띄는 게 좋을 거야. 알겠어? 뭐라도 되는 것처럼 까불면 내가 너 죽여버린다고!”

이를 갈며 돌아가는 빌.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제드는 속으로 실소했다.

‘예나 지금이나 꼭 성난 멧돼지 같군. 지금은 전혀 무섭지 않다는 게 다르긴 하지만 말이야.’

빌의 저 얼굴을 보고 있으니, 확실히 실감이 났다.

이 생생한 고통은 거짓이 아니다.

숨이 막히는 느낌. 엉덩방아를 찧을 때의 통증.

피비린내. 풀냄새.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으로 말이다.

수십 년도 더 된 일이었지만,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대열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다가 오크가 휘두른 도끼에 빗맞았는데, 기절하고 말았다.

그 뒤에 빌에게 죽도록 깨졌다.

그러나 그건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것보다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게 훨씬 더 무서웠다.

그래서 제드는 도망쳤다. 마을을 뒤로하고 떠났다.

어차피 이곳엔 그를 얽매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서 다시 이 레지앙을 찾아왔을 때, 이곳은 전란의 불길에 휩싸여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 자체는 큰 감상은 없었다. 고향이라고 해도 큰 애착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가족이 있던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이곳에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땅의 가치 때문이었다.

‘다시 시작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겠지.’

대국의 사이에 낀 작은 나라.

머잖아 전란의 씨앗을 품고 있는 척박한 땅.

제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젊다 못해 어린 몸에는 활기가 넘쳤다. 망가져서 항상 절던 왼쪽 발도 멀쩡했다. 그는 두 다리로 굳건히 서 있었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드,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마······.”

고개를 천천히 내리자, 그곳에 주근깨 소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잘 아는 소녀였다. 이름이······.

“마리아.”

“응, 괜찮은 거야? 상처 좀 봐. 많이 아팠지.”

“이제 모든 게 괜찮을 거야.”

“응?”

마리아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드는 그녀의 곁을 지나쳤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건 분명히 앞으로도 알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게 기회라는 것이다.

운명을 붙잡을 기회.

‘내 손으로 모든 걸 바꾸겠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들 것이다.’

제드의 눈동자에 빛이 드리웠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

밤이 드리운 시각이었다.

모닥불 앞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전날의 전투로 희생된 이들 때문에 분위기는 몹시 무거웠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만 한창 이어질 때였다.

“빌, 이제 어쩔 셈인가.”

“······뭘 그런 뻔한 걸 묻습니까. 싸워야지.”

“하지만 오늘도 셋이나 죽지 않았나.”

“그럼 뭐 어쩌자는 겁니까.”

“고집을 꺾고 도움을 청해야 할 때가 됐다는 말일세.”

“제기랄! 도움이라고 그랬습니까?”

빌이 사납게 대꾸했다.

“토바스의 그 빌어먹을 지주 놈들한테 도움을 받으면 그다음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개자식들이 이 마을의 사람들을 전부 노예처럼 부려 먹으려고 할 겁니다. 그렇잖아도 레쟈스 나무의 값을 어떻게 하면 더 후려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그놈들이란 말입니다.”

“······.”

노인이 입을 다물자, 씩씩대던 빌도 진정하였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날이 선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리더는 그래선 안 됐다.

“후우. 오늘 일은 제가 너무 안이했습니다. 오크가 나타났다는 건 이 근방 어딘가에 터를 두었다는 거겠죠. 날이 밝으면 샅샅이 돌면서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파악해서 그곳을 기습해야겠습니다.”

노인과 아낙들은 불안한 표정을 했다.

공격에 나섰다가 더 많은 이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혈기왕성한 빌의 의견을 대놓고 거스르는 건 빌과 같은 또래의 삼십 대 혈기왕성한 전사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마무리되려는 듯했다.

한 소년이 나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무 무모합니다.”

좌중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그 순간, 모닥불 너머로 불빛이 일렁이는 빌의 얼굴이 악귀의 그것처럼 일그러졌다.

“너 이 애송이 새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빌이 무섭게 다가갔다.

“이보게, 빌······.”

노인들이 말리려고 하였으나, 빌에겐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저 무능력한 애송이가 지금 이 회의에서 자기 목소리를 냈다는 게 참을 수가 없었다.

“너, 내 눈에 띄면 죽는다고 그랬지.”

“적의 규모도 제대로 모르면서 기습을 한다는 건 이 마을 사람들 전부를 다 죽이겠다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

빌은 제드가 말대꾸를 할 줄 몰랐기에 당황했고, 좌중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미친놈이······.”

“갑자기 왜 저래?”

“제드, 이 멍청한 새끼야!”

빌의 성격은 불같다. 한번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 자기에게 대드는 이는 흠씬 패서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교육하는 게 바로 그의 방식이었다.

다른 청년이 빌이 터지기 전에 급히 나섰다.

“빌, 저 애송이 녀석이 머리를 다친 것 같으니까 한 번만 봐주자고. 아직 뭣 모르는 꼬맹이야.”

“봐줘? 뭘. 저 애송이 새끼가 지금 멋대로 떠드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해? 일어나. 오늘 뼈 한두 개는 부러질 줄 알아라.”

빌은 잘 걸렸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제드는 도무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그냥 담담하게 일어나 옆으로 걸어나왔다.

“원시적인 방법은 때때로 좋은 해결책이 되지요. 가장 빠르기도 하고요.”

“뭐야?”

“강한 자의 말을 듣는다. 내가 당신을 꺾으면 날 존중해요. 나는 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당신을 꺾으면 자연스럽게 증명되는 것이겠지요.”

“하! 너 진짜 실성했구나. 지금 날 꺾는다고 한 거냐?”

“겁이 나면 지금이라도 그만둬도 좋습니다.”

“······좋아, 너 같은 새끼는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빌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달려들었다. 덩치도 그렇고 힘도 그렇고 저 비리비리한 제드는 아무리 봐도 빌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지금 제드는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꺼윽!”

달려들던 빌이 별안간 고개를 숙이더니 무릎을 꿇었다. 모두가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였다. 제드가 손을 뻗었고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빛무리가 얽혔다.

“마, 마법!”

노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을 때였다.

쐐액.

공간을 가르며 뻗어 나간 구체가 아래로 푹 꺼졌다가 거침없이 치솟아 빌의 턱을 올려쳤다.

뻐억.

빌의 몸이 튕기듯이 뒤로 고꾸라졌다.

“끄으으으.”

신음을 내뱉으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는 모습.

‘허. 맷집이 더럽게도 좋구나. 아무리 마나가 부족해서 위력이 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이 정도면 거의 오크랑 맞먹겠어.’

제드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원래 이 무렵의 제드는 마법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의 제드는 달랐다.

그는 수십 년 이후에 등장하게 될 동부의 최대패권국가인 토르가 제국의 마도공학을 총괄하는 대신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적인 존재였다. 몸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그가 가진 지식은 그대로였다.

지잉.

마탄(魔彈)이 손가락 끝에서 또다시 나타났다.

“으으······. 뭐, 뭘 한 거야. 이 새끼······.”

빌이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듯 고개를 홰홰 젓고 있을 때였다. 쐐액. 어둠을 가르고 쏟아진 빛의 구체가 빌의 복부를 향해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커억!”

쿵. 차가운 바닥에 널브러진 빌은 눈을 까뒤집은 채로 기절했다. 제드는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얼마 안 되는 마나를 쥐어짜려니 가벼운 현기증이 난 까닭이었다.

‘후. 마나를 다시 쌓는 것도 일이겠군.’

예전의 경지까지 오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물론, 그때만큼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길을 전부 알고 가는 것과 모르는 채로 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

좌중이 술렁이는 가운데,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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