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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바야흐로 제국은 승리했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마도공학을 토대로.
연합국은 그 앞에 추풍낙엽처럼 무너졌으니. 이제 제국의 앞날은 반석처럼 단단할 터였다.
궁전 깊숙한 연회장.
“모두 훌륭했소.”
상석의 젊은 황제가 말문을 텄다. 그는 와인잔에 포도주를 채우고 가볍게 흔들며 향을 음미했다.
“제국은 승리했소. 연합국의 간계는 우리의 기강 앞에 완전히 무너졌고, 우리는 천년제국을 코앞에 두고 있소.”
좌중은 경건한 자세로 황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잠깐의 뜸을 들인 황제는 이내 포도주를 입가에 머금더니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건 끝이 아니오. 제국은 이제 발돋움하였소. 짐은 이 땅을 수중에 넣고 나아가 서대륙의 항로를 따라서 저 너머의 땅까지 제국의 발아래에 둘 것이오.”
“오오.”
“온 제국이 폐하의 뜻을 반길 것입니다.”
“저희 역시 폐하의 용단을 끝까지 지지할 것입니다!”
좌중은 기다렸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뜻은 아니었다.
좌중의 한 사람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황제는 그걸 그냥 흘려넘기지 않았다.
“제드 경, 표정이 좋지 않소. 어떻게 된 일이오. 짐은 아직 경의 대답을 듣지 못한 듯한데.”
“······폐하, 아뢰기 송구하나 어찌 전쟁을 계속 이어나가려고 하십니까? 이제야 겨우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대신들의 눈빛이 무거워졌고, 몇몇 이들은 노골적인 분노를 드러냈다. 하지만 젊은 황제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들은 것처럼 담담했다.
“그 말인즉, 경은 반대한다는 말이로군.”
“이제 전쟁은 멈추셔야 합니다. 제국은 이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위협은 없습니다. 누가 감히 제국을 향해 칼을 들이밀 수가 있겠습니까?”
“싸울 필요가 없다······.”
황제는 그 말을 곱씹는 듯했다.
“예, 폐하. 이제 안으로 나라를 돌보고 국민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야 할 때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국민이 그걸 원한다면 말이오. 하지만 경은 모르고 있소. 전쟁은 짐의 뜻이 아니오. 이 시대가, 국민이 피를 요구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소?”
황제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제국엔 힘이 있소. 승리할수록 제국민은 부유해지고 더 많은 시장이 열릴 것이오. 노예와 부. 물자와 식량. 그 모든 것들을 짐의 것이 아니오. 이 제국의 것이지.”
“폐하.”
“끝까지 들으시오. 제국은 유례없이 강력한 군사력과 단결된 정신으로 무장했소. 짐은 전쟁에 미치지 않았단 말이오. 그저 이 시대가 짐과 제국을 그곳으로 이끌고 있어. 그리고 그게 틀리지 않았음은 명확하오. 하늘마저 감탄하여 그대와 같은 인재를 이 제국에 안겨주지 않았소?”
제드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젊은 황제의 기백에 영혼이 송두리째 휩쓸리는 기분이었다.
어떤 말로도 황제의 의지를 바꾸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황제는 애초에 나와의 약속은 지킬 생각이 없었구나.’
노쇠하였던 전대의 황제는 말했다.
전쟁의 너머. 그곳에 평화가 있노라고.
평화를 위해서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해달라고. 그것이 멸망해버린 그의 고국의 넋을 달래는 일이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 말을 믿었다. 자신이 얻게 된 모든 것은 이 가혹한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제국에,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쳤다.
연이어 개량을 거듭한 최강의 전열 골렘이 전선에 투입됐고, 제국의 전술교리의 토대가 바로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수십 년 사이에 제국은 압도적인 군사 강국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어찌 표정이 어둡소? 혹 짐이 그대를 배반했다고 여기는 것이오? 천만에. 짐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소. 이 너머에는 분명히 평화가 있어. 제국이 주도하는 평화와 질서가 말이오.”
“폐하······.”
제드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아, 그래, 그러고 보니 경에게 이 전쟁이 마지막이라고, 분명히 그랬었지.”
그랬다.
젊은 황제는 제드에게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 역시 거짓말이 아니오. 경의 전쟁은 끝났소.”
그 말 속에 칼이 있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커윽!”
왈칵 피를 토한 제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몸을 비죽 관통한 칼끝을 보았다.
젊은 황제의 얼굴엔 일말의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제국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 이 순간은 이미 계획되어있었던 것이다.
선혈이 옷을 적시고 바닥에 쏟아진 와인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불에 지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추위가 찾아들었다.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다니. 제국의 공신이자 위대한 마법사인 제드 크레인 마르뉴 백작이 암살을 당했소. 경들 보았소? 여전히 제국의 안위가 위협을 받고 있소. 싸움은 끝난 게 아니오. 이제 시작일 뿐!”
“옛, 폐하.”
시야가 멀어지는 가운데, 황제의 목소리만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하는 건 썩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앞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더욱 크고 무서운 전쟁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허망했다.
항상 후회 없는 선택을 해왔다고 여겼는데, 죽음의 순간에 다다르고 보니 모든 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든, 무엇이든······ 그걸 진정으로 바랐더라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 손으로 이루었어야 했다. 그럴 기회는 충분히 몇 번이고 있었어.’
그러나 후회한들 바뀌는 건 없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눈앞의 시야가 이내 어두워졌고 감각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 오로지 어둠 속으로 침전하는 시간이 도래했다.
죽음이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요했다.
안식이라는 표현은 제법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어둠 깊숙한 곳으로 떨어져 내리던 의식이 별안간 부유했다. 빠르게 더 빠르게.
심연을 순식간에 벗어났고.
빛이 눈앞에 펼쳐졌다.
“제드, 제드 크레인!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얼른 서서 전열로 기어들어오지 못해!”
윙윙 머리가 울렸다.
쩌렁쩌렁 고함에 두통과 현기증에 시야가 명멸했다.
“으······.”
낮게 흘러나오는 신음으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후우······.
들이마시고, 내뱉는 호흡이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반갑다.
‘나는, 나는······ 죽지 않았나?’
서서히 눈앞의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제드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매만졌다.
몸을 관통했던 자상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주변의 광경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궁전이 아니다.
저택도 아니었다.
서늘한 녹색이 가득하다. 나무가 빼곡한 풍경이다.
‘이것은 꿈인가?’
레지앙.
제드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자, 전란의 불꽃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어버린 장소. 이곳은 틀림없이 그곳이었다.
바로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중얼거리던 제드가 자신의 얼굴과 몸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왼발이 멀쩡했다. 수십 년 전, 망치에 깨져서 더는 뛸 수 없게 되었을 그의 왼쪽 발이 말이다.
“제드 크레인!”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는 과거로 돌아왔다.
제2의 인생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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