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렘 마법사의 회귀-124화 (완결) (1) (1/124)

동대륙 전쟁7

*

동부대륙 끝자락.

부르크 연방과 토르가 왕국.

그 국경에서는 토르가의 기습 침공 이후에 소규모 국지전이 시도때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토르가 왕국은 우수한 기사단을 바탕으로 기동전술을 펼치며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부르크 연방군을 계속 압박했다. 그 덕분에 가랑비에 옷이 젖듯, 연방의 피해는 조금씩 누적되고 있었다.

“······왜 적을 잡지 못하는 거지?”

화를 억누른 여왕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물음에 장내의 지휘관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답을 몰라서 물은 질문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같은 탑승형 골렘에 출력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탑승형 골렘은 출력만큼이나 그 골렘에 탑승하는 탑승자의 실력이 중요했다.

토르가 왕국은 이 동대륙에서도 전통의 군사강국이었고, 수년 전 하이렐 회전의 패배 이후로 지금은 이빨이 뽑혔다고 해도 여전히 기사단의 실력은 만만히 볼 게 아니었던 것이다.

답답한 현실 앞에서 록산느가 그저 입술만 질근질근 깨물었다. 앞으로 오멜 공국의 지원까지 약속된 마당에 지금 연방이 자체적으로 최소한의 결과도 내지 못한다면 이 전쟁이 끝난 후 외교적 입지는 그리 크지 않으리라.

“우리가 그들의 공격에 대응하는 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쪽에서 먼저 치고 들어갈 수밖에. 적들이 유격전을 벌인다면 우리는 그 전술의 약점을 이용하는 겁니다.”

록산느가 내놓은 결단에 지휘부들도 수긍하고 나섰다.

본래 북부의 해방전선 출신인 연방군은 전면에서의 교전이 아니라 유격전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런 유격전의 약점이 무엇인지도 잘 알았다.

“적들의 주요 요충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입니다. 먼저 이 지점부터······.”

새로운 전략으로 다시금 작전을 구상해나가는 부르크 연방의 지휘부였다.

바로 그때였다. 지휘부 막사로 전령이 다급히 들어왔다. 활발히 진행되던 회의는 잠깐 멈추었다.

전령의 복장과 옷깃의 색깔이 그가 어디에서 온 전령인가를 대신 말하고 있었다.

“라이곤 방면의 전황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옛, 폐하. 그것이······.”

곧 전령이 보고사항을 전달했다.

그러자 여왕은 물론이고, 지휘부 전원이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대승이라니.”

그랬다.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바로 라이곤 왕국과 렌시아 공화국의 국경 부근의 숲의 협곡 입구에서 일어난 교전에 관한 보고였다.

약 사흘 전, 라이곤 왕국의 육군부대는 남하를 개시, 곧바로 적의 주둔지를 급습하였고 이후에 협곡까지 밀고 들어갔다고 그랬다.

그 후, 그곳에서 일어난 일련의 전투양상은 그 자리 모두의 할 말을 잃게 하였다.

라이곤 왕국에게 그 장소는 최악의 전장이었다.

전투 초기에 벌어진 전투의 흐름 역시 그랬다.

그런데 그게 도중에 뒤집혔다. 경과를 듣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흐름으로 말이다.

‘제드 크레인. 그에겐 상식이 통하지 않아. 공간을 뚫고 튀어나오는 골렘. 도대체 그런 골렘을 몇 기나 부릴 수 있는 것인지, 또 그런 골렘을 얼마나 더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어. 그 자신을 제외하고선 말이야.’

아군일 때에는 그보다 더 든든한 존재는 없다.

그러나 적으로 만난다면 이보다 더 최악의 적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렌시아 공화국의 군대는 패주하였고, 라이곤 왕국의 군대는 현재 전열을 다듬는 중이라고 한다.

‘······남하하겠지. 렌시아 공화국은 최정예를 잃었어. 다수의 골렘이 남아있다고 해도 전력이 온전한 라이곤 왕국의 군대를 감당할 힘은 더는 남아있지 않다. 이 전쟁은, 이미 끝난 거야.’

록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렌시아 공화국이 무너진다면 토르가 왕국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곧 평화협정을 제안하리라.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평화협정을 맺을 것인가. 그게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싸워서 외교적 우위를 가져갈 것인가.’

고민은 짧았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록산느의 눈동자에 전의가 일렁였다.

*

동대륙 전쟁.

통합력 1649년에 본격적으로 개시된 전쟁을 사가들은 그렇게 기록하였다.

부르크 연방의 수도인 에이부르크를 향한 토르가 왕국의 기습침공으로 시작된 이 싸움은 렌시아와 라이곤의 국경 부근의 나우르 협곡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사실상 그 판세가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렌시아 공화국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검은 척탄병 흑사자 부대의 전멸. 그와 함께 최신형 골렘 4기도 모두 파괴되었다.

물론, 그즈음에도 공화국의 전력은 많이 남아 있었다. 주력급 탑승형 골렘과 거기에 타는 척탄병들. 그리고 조종형 골렘과 골렘 마법사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이미 양국의 전력차이는 확연했다. 이후 교전은 국지전 양상을 보였고, 공화국의 남은 전력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빠르게 소모되어 더는 교전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협곡의 회전에서 모든 게 갈려버린 것이었다.

탁.

어두운 밀실.

원목의 탁자에 독한 술이 든 술잔을 놓은 노의원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난 며칠간 그는 10년은 더 늙은 모습이었다.

번뇌로 가득 찬 얼굴의 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듯.

“자유와 혁명의 시대여. 이 늙은이를 저버리는가.”

그는 그렇게 피를 토하듯 중얼거리곤 날카롭게 벼려진 단단검을 눈에 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이내 그는 단숨에 자신의 복부를 쑤셨다.

“끄으으으!”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바닥에 쿵 쓰러진 그는 몸을 바르르 떨며 통증에 몸부림치다가 파란만장했던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크리스티앙 발뭉. 렌시아 공화국을 전쟁으로 이끌었던 장본인이었던 의원은 끝까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공화국 군벌의 정점에 있었던 크리스티앙 발뭉이 자살하면서 평화협정의 준비는 급물살을 탔다.

그렇게 동대륙 전쟁의 남부전선 상황이 큰 회전과 여러 번에 걸친 소규모 국지전으로 끝이 난 것에 반해서 동부전선의 양상은 매우 치열하였다.

라이곤과 렌시아 양국의 동맹국으로서 전쟁에 참전한 오멜, 부르크, 그리고 토르가는 이후에 개시될 평화교섭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마지막 순간까지도 치열하게 싸웠다.

골렘 병력의 숫자는 부르크 연방과 오멜 공국이 더 많았지만, 토르가 왕국은 잘 싸웠으므로 싸움의 양상은 백중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 균형도 이내 깨졌다.

린베르크.

그곳에서 삼국의 군대가 마침내 충돌한 것이었다.

*

굉음이 진동하고 지축이 뒤흔들렸다.

골렘의 전열이 부딪쳤고, 진형의 좌우 측면에서는 기병대가 거침없이 파고들어 적진으로 들이닥쳤다. 물고 물리는 식의 싸움 속에서 마법사들은 마법을 쏟아냈다.

그것은 이미 지독한 소모전이었다.

“격퇴한다. 그대로 밀어내란 말이다!”

“버텨라! 곧 아군이 온다!”

“크아아악!”

“죽어어어어!”

고함과 비명이 뒤섞이는 전장엔 한 발의 양보도 없었다.

이 죽고 죽이는 전장 속에는 사일러스와 하인리도 있었다.

“흐하하핫. 그래, 그래야지. 이래야 하인리 엘스우드지!”

사일러스가 광기를 터뜨렸다.

피범벅이 된 모습. 그도 그럴 것이 흉부 장갑이 다 깨져서 너덜너덜해진 상태다.

물론, 그와 대적하는 사일러스의 상황도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칼과 칼로 대적하는 싸움에서 사일러스는 단 한 번도 사일러스에게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전장에서 대적한 사일러스는 뭔가가 달랐다.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넘으며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온 사일러스는 강했다. 하인리도 여러 번 죽음을 느꼈을 정도였다.

‘저 짐승은 진작 죽였어야 했다!’

길들일 수 있노라는 착각. 그 오만이 상황을 이 지경까지 오게 한 것이었다.

“사일러스 이번에는 네놈을 반드시 죽여주마.”

“흐흐흐. 좋다. 어디 누가 먼저 죽는지 볼까!”

그 대화를 끝으로 하인리와 사일러스의 골렘이 얽히고설켰다. 이 전장의 양상처럼 말이다.

핏물이 튀고, 강철의 파편이 흩날린다. 대지가 꺼지고 흙먼지가 가루가 되어 튀었다.

몹시 길고도 치열한 전투였다. 밤이 다 되어서 그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끝났을 즈음, 린베르크의 너른 평야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무수한 시체가 즐비하였고, 땅은 다 헤집어지고 까졌다. 수십 기의 골렘이 부서져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골렘 중에는 그 어떤 골렘들의 접전보다도 치열하였던 하인리와 사일러스, 두 사람의 골렘도 팔다리가 날아간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 린베르크 회전은 공식적으로 북부연합의 승리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부르크 연방군도 오멜 공국군도 그 피해는 실로 막대하였다.

이후, 토르가 왕국에서 대대적으로 평화협정을 사절을 보내왔으니, 사실상의 항복선언이었다.

약 반년 동안 크고 작은 몇 번의 교전을 치르며 이어졌던 동대륙 전쟁이 마침내 끝을 고한 순간이었다.

종전협정은 라이곤 왕국의 수도에서 이루어졌다.

라이곤, 렌시아, 토르가, 부르크, 오멜.

총 5개국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평화조약을 맺고 구체적인 전쟁배당금을 협의하고 조정을 하는 것이다.

이 조약은 이후, 그레즈 조약이라고 불렸다.

동대륙 전쟁은 그렇게 끝을 맞이하였다.

*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오후였다.

살랑거리는 커튼의 사이로 꽃잎이 흩날렸다.

봄.

완연한 봄이 또 찾아왔다.

하얀 침대 위에서 사내는 천천히 일어났다. 날카로운 인상을 한 그 인물은 삼십 대의 인물로 크레인 대공이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가 들어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차를 준비했다.

아침의 이 고요한 평화를 즐기는 방의 주인에게 지금 이 순간, 언어는 그저 소음이다.

제드는 향을 음미하며 창밖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듬성듬성 보이는 구름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다. 그 아래로는 여느 때와 같은 도시의 정경.

매일 제드는 이 광경을 눈에 담고 생각한다.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경험해보지 못한 평화의 시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하였고, 삶의 모습도 서서히 변해갔다.

그 완만한 시간 속에서 제드는 무엇인가 중요한 게 빠져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전쟁이다.

삶과 죽음. 평화와 전쟁.

그 둘은 놀랍도록 긴밀히 맞물려 있는 것이다.

제드는 전쟁으로 살아왔고 자신을 증명해왔기에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공허감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맞이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전쟁이라는 굴레. 제드는 그 안의 일부였다.

돌이켜보면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제드 크레인이라는 존재였다. 평화를 추구해왔음에도 전쟁과 죽음을 수단으로 삼았으니, 그것이 그를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평화의 시대.”

제드는 높은 탑 위에 홀로 섰다.

그는 곧잘 이곳에 서곤 했다.

그리고 도시를, 들판을, 산을, 강을 눈에 담았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지금 이 순간, 이 나라가, 이 세상이 그의 아래에 있다.

평화와 전쟁.

그것은 손바닥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어도 이상하지 않다.

제드의 눈동자가 섬뜩한 푸른빛으로 빛났다.

그러나 이내 그 눈빛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제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해야만 한다. 그 역시 싸움이다. 고요하고도 격렬한 그 자신만의 전쟁 말이다.

-fin-

에필로그

때는 바야흐로 마도공학의 중흥기였다.

동대륙을 평정한 라이곤 왕국이 주도하는 평화의 시기.

남부 동맹의 항복선언 이후에 북부 동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제질서가 확립됐다.

라이곤 왕국은 전쟁방지를 위한 각종 조약서를 들이밀었고, 그것은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는 증거와도 같았다.

그러나 제드는 알았다.

인류 역사에 영원한 것은 없음을.

이 평화가 항구적인 것이 아님을 알았다.

마도공학의 기술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두드러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와. 움직인다!”

아직 어린아이가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 환호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카로스.

먼 훗날, 라이곤의 후계자가 될 왕자였다.

크고 넓은 극단에서 여러 인형이 바쁘게 움직여 다녔고, 카로스는 몹시 흥분하여 환호하고 소리치고 이내 훌쩍거렸다. 카로스는 몹시도 감정이 풍부한 아이였다.

인형극의 내용은 한 영웅에 관한 이야기였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넘어서 마침내는 왕국을 구하고 전쟁의 위기에 놓인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이야기.

카로스는 끝까지 푹 빠진 모습이었다.

쓰러진 인형을 다시 살리겠다며 정령까지 다루는 모습까지 보였지만, 제드는 카로스를 조용히 만류했다.

그렇게 인형극이 모두 끝난 뒤에 극의 배후에서 라데르가 나타났다. 그는 최근 라이곤 왕국을 비롯한 이 동대륙에서 가장 유형한 인형사였다.

“멋진 공연이었습니다.”

“허허. 별말씀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각하, 왕자님께서는 정령술에 탁월한 조예가 있으신 듯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드문 재능을 타고났지요.”

“으음.”

제드가 이미 알고 있는 듯하자, 라데르는 굳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도중에 극에 쓰러진 인형을 일으켜 세우던 그 특별한 힘에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 어린데도 이 정도로 정령친화력이 높다면 나중에는 어느 정도의 역량을 보일지 모르겠구나. 왕자의 능력은 그야말로 타고났어. 요정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왕가의 안녕을 생각해보자면 이 일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라이곤 왕가에 흔들림이 없어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것이고, 그것이 곧 동대륙 정세에 두루 영향을 미칠 테니까.

“그건 그렇고 라데르, 그동안 세상 이곳저곳을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부족한 제 능력을 원하는 곳이 꽤 있더군요. 덕분에 세상을 볼 수 있었지요.”

“그 세상은 어땠습니까.”

“글쎄요. 잘 설명하기는 어렵군요. 워낙 다양한 곳을 보았고, 경험하였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모두 각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제드는 이렇다 할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그 말을 곱씹어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평화. 평화라······.

“그 평화가 얼마나 더 길게 이어질 것 같습니까?”

“글쎄요. 저 같은 사람이 감히 짐작할 일은 아니나, 각하와 왕가가 굳건하다면 이 평화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이어지지 않을지요.”

라데르가 조심스럽게 말하며 제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을 묻는 저의를 헤아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가 제드의 속내를 알 리가 없었다.

아마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평화라는 것은 차곡차곡 쌓아올려서 만든 공든 탑과 같다. 그 기반을 이루는 주춧돌이 빠지거나 흔들린다면 곧 탑은 전체가 무너진다. 그리고 이 탑의 중추는 제드이고, 이 왕가이며 라이곤 왕국, 그 자체라고 해도 좋다.

“쌓아올리기까지는 그처럼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도 허물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란 말인가.”

라데르와 헤어진 직후에 제드는 어둠에 잠긴 왕궁의 정원에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발트 테바인의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평화란 신기루와 같은 것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제드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이 평화의 시대를 위해 살아왔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에 단 한 가지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뿐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이 평화에 다다르고 난 이후에도 꺼지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남아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무엇인가.

제드는 전쟁이 끝나면 자신의 내부에서 타오르던 이 불꽃도 꺼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이제 제드는 알고 있다. 아마 이 불꽃은 사라지지 않는 불씨처럼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제드 크레인이라는 인간의 족적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언젠가 이 탑을 부수리라.’

제드는 그걸 알 수 있었다.

이 평화의 시대에는 제드가 자신을 증명할 장소는 없었다. 그는 이제 쌓아올린 탑의 중추로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는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드에게 이곳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없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았다.

“어디에 있나 싶었더니.”

곧 제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편한 복장의 여인이 있다. 이제 제법 농익은 여인의 태가 물씬 풍기는 그녀는 바로 라니아였다. 최근에 그녀는 강철 여왕이라고 불린다.

“카로스가 많이 좋아했어요. 나중에 자기도 그런 영웅이 되고 싶다는군요. 그 이야기의 영웅이 당신이라는 걸 알고서 그런 말을 한 걸까요?”

라니아가 키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제드와 라니아의 대화는 주로 이런 식이었다.

라니아가 재잘재잘 떠들면 제드가 대답하거나 반응을 보였다. 그건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창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던 라니아가 제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거 알아요? 저 조금 불안해요. 요즘 당신은 금방 사라져버릴 것 같거든요. 이상하죠. 당장 전쟁이 터지고 싸울 때에도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는데······. 너무 평화로워서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된 거겠죠?”

라니아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제드의 얼굴을 보곤 굳은 표정을 했다.

“제드.”

“폐하, 저는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을 모릅니다.”

“그런 건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는 거예요.”

라니아가 다급하게 말하자, 제드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소명이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저는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곳에서 계속 있을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가까스로 쌓아 올린 평화를 이 손으로 부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

라니아는 말문이 막혔다. 불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제 곁을 떠날 생각인가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볼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시대를 가늠하고자 합니다. 평화의 너머에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게 제가 폐하와 이 나라, 그리고 이 시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

결단을 내린 뒤에 제드는 언제나 그랬듯 홀연히 왕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사라지는 것은 이제 썩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 뒤로 제드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녔다.

무수한 사람을 만났고, 무수한 세상을 보았다.

온갖 오지를 넘나들며 고고학과 같은 여러 학문까지도 두루 익혔다. 그 과정의 목적은 아주 뚜렷했다.

‘안타레스의 유산.’

제드는 알고 싶었다.

먼 고대의 종족이 왜 세상에서 사라졌는지, 그리고 안타레스라고 불리던 대마법사는 어째서 이 세상에 마법과 그들의 유산을 남긴 것인지를 말이다.

마도공학의 특이점이 나날이 갱신되어 세상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으므로, 유산의 봉인은 이미 깨져 있을 터였다. 그저 아무도 찾지 않고 있을 뿐.

그 과정은 지난했고 오래 걸렸으나, 제드는 아무도 기억하는 이가 없는 고대의 유적에서 유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형태는 과거에 보았던 것과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이미 두 개의 유산에 접촉했던 제드였으므로 착각하는 일은 없었다.

제드가 문의 앞에 다다랐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문의 중심부에서부터 빛이 퍼져 나가듯이 마법진이 빛을 발하였다.

드드드드.

문이 진동하였고, 먼지가 흩날렸다.

머잖아 열리기 시작한 문.

그 너머에는 어둠만이 가득하다.

제드는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오직 제드의 발소리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곧 어둠은 사라졌고 익숙한 정경이 나타났다.

초원.

그 가운데에 하늘 높이 뻗은 세계수의 모습.

그 앞엔 벌써 세 번째 보는 금발의 소년이 서 있었다.

“그대는 정말 특별하군. 세 번이나 세계 곳곳에 숨겨놓은 유산에 접촉하다니 말이야. 인간의 짧은 수명으로는 이 지식을 탐할 수 없도록, 장치가 되어 있을 텐데.”

“격변의 시기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하하하. 재밌군. 역시 인간이란 종족은 가능성의 존재야. 예상을 항상 벗어나지.”

소년은 키득거렸다.

“자, 그래서 유산을 찾아왔다는 건 이 안에 있는 지식을 원한다는 거겠지.”

“그 전에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좋아. 마음껏 물어봐. 이제 그대는 웬만한 대답은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럴 자격이 있다. 내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말해주지.”

“드래곤들은 왜 사라졌지? 그리고 안타레스는 어째서 유산들을 남겼나.”

그 질문은 소년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다.

“그런 걸 궁금해할 줄은 몰랐는데.”

소년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간단해. 드래곤들은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불안정한 세계에 존재하는 것에 의미를 찾지 못했다. 시작도 끝도 없었기에 그들은 머잖아 세계의 체계가 되어버린 거야. 세계의 보완하는 일부가 된 거다. 그건 그 이상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야. 그리고 안타레스가 유산을 남긴 건 그가 조금 특별했기 때문이지.”

“특별했다?”

“그래, 특별했지. 안타레스는 인간과 비슷한 생각을 한 거다. 그들이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싶었던 거야.”

제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인간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완전한 존재에게는 경계가 모호하다.

특히나 절대적인 존재인 드래곤에게는 시간의 흐름도 낮과 밤도 탄생과 죽음도 모두 경계가 희미한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레스는 마지막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필멸의 시간을 살아가는 종족들에게 있어 끝을 고하는 순간임을 알았던 것이리라.

그리고 한편으로는 궁금했으리라.

그들이 남긴 것이 무엇을 어떻게 바꿔나갈지.

“그래서 궁금한 건 그것뿐이야?”

“그래. 그것뿐이다.”

“역시 너는 특이한 인간이야.”

곧 새로운 지식이 제드의 눈앞에 펼쳐졌다.

······.

시간은 유수와 같다.

제드는 그 뒤로도 세상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안타레스가 남긴 유산을 찾아다녔고, 그 뒤로 두 개의 유산에 더 접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 또 다른 유산의 앞에 섰다.

그러나 그 유산은 굳게 닫힌 채였다.

“다음 문은 열 수 없을 거라더니······. 그 말대로였군.”

제드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긴 시간, 거듭 유산을 찾아다녔던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궁금했던 것이다. 이 시대가 다다른 특이점과 안타레스가 안배했던 지식이 어떤 것인지 말이다.

그것은 마법사로서의 탐구욕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하여 이곳에 다다랐다.

이 유산을 여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그러나 제드는 굳이 그런 일을 벌이진 않았다.

제드는 제2의 발트 테바인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제드는 파묻힌 유적을 나와서 걷고 또 걸었다.

치이이익.

머잖아 저 멀리 초원의 평야를 내달리는 강철의 뱀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것은 열차라고 불렸다. 골렘의 노심기관을 동력으로 삼아서 정해진 길 위를 내달리는 운송 및 이동수단이다. 그동안 정말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세상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제드는 열차에 올랐다. 덜컹대며 나아가는 열차 위에서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는 사이, 옆 객실에서 우려스러운 목소리가 제드의 귓전을 때렸다.

“그거 들었나? 라트센 공업지대의 노동자 운동이 과격해지고 있다더군······. 부르크가 병력을 동원하니까 토르가에서도 병력을 동원했어. 이제 양국이 전쟁을 벌일 거란 얘기가 파다해.”

“전쟁이라니. 설마······.”

“아, 이번엔 정말이래도. 라이곤의 중재기관은 지금 파벌이 나뉘었어. 강철 여왕도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쇠하였어. 거기다가 그 대공은 한참 전부터 행방불명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 얘기야 유명하지. 허. 그나저나 다시 전쟁이라도 일어난단 말인가.”

제드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그가 안타레스의 유산을 찾아다니며 다음 시대의 가능성을 엿보는 사이, 시대는 어느덧 다음 역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던가.

곧 제드가 있는 객실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중절모의 중후한 기풍이 엿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천천히 옆자리에 앉았다. 제드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툭 던지듯 물었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각하께서 왕국을 떠난 뒤로 28년입니다.”

“과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로군.”

제드는 웃었다. 어느새 중년이 되어버린 나이였지만, 그의 눈빛과 미소는 젊었던 그 시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각하, 왕국에 돌아오셔야 합니다. 왕국엔 각하가 필요합니다. 산재한 문제들이······.”

“코라스 경, 내가 평화를 견인하는 자가 아님을 알지 않나. 그건 나의 몫이 아니야.”

“······.”

코라스. 라이곤의 정보국장의 자리에 있는 남성은 무거운 얼굴을 했다. 어쩌면 제드의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다가오는가?”

“공업지대의 소규모 분쟁입니다. 아직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닙니다. 본국이 개입한다면 금방 정리될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직은 그렇단 말이지.”

제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풍요로운 시대였다.

30여 년의 평화.

발전한 시대의 풍경.

마도공학의 다양한 결과물들.

새로운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전쟁을 알지 못했다. 이제 그런 시대가 되었다.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세상의 경계에서 때를 기다려야지.”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씀이신지요.”

코라스의 물음에 제드는 그저 희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

야생의 땅.

그곳은 그렇게 불리는 곳이었다.

우거진 숲과 습한 기후. 그리고 무수한 몬스터가 서식하는 장소. 그 너머의 땅 깊숙한 곳에는 이제는 읽을 수도 없는 글귀로 적힌 유적의 입구가 존재한다.

그곳은 안타레스의 유산이라고 불리는 유적이었고, 지금은 중년의 마법사 한 사람이 공방으로 삼고 머무는 곳이었다.

이 일대의 몬스터와 생명체들은 감히 그의 공방에 침범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이름은 제드 크레인.

긴 유랑의 끝에 라이곤 왕국을 지척에서 굽어살피는 듯한 이 땅에 들어온 그는 안타레스의 유산을 정립하고 자신의 마법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준비다.

언제고 다가올 다음 시대를 맞이할 준비 말이다.

그리고······.

드드드드.

별안간 공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드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 공방의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이다.

제드 크레인의 다음 세대.

이 시대를 살아온 자신의 분신.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린다.

어둠의 저편에서부터 평화의 끝자락을 지나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드의 눈동자가 싯푸르게 빛났다.

다시금 증명의 시간이 되었다.

시대가 제드 크레인, 최강의 골렘 마법사를 또다시 부르고 있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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