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장, 가온 - [完]
“화로 대전사의 귀환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가온은 놀란 가운데, 어느새 그 내면에 다시 자리 잡으신 여신께서 말씀하시었다.
‘네 여신 또한, 대전사의 귀환에 진심 어린 즐거움을 느끼노라.’
‘그래서 이 사람들은 대체?’
‘언제쯤 나올 수 있으리라고 미리 말하지 않았더냐? 미리 사람들을 대기시켜 두었노라.’
덧붙이시길, 천상의 체면이 있어 정확한 과거사는 공개하지 않았으나, 화로의 대전사가 어떤 일을 하러 칠 년이나 자리를 비웠는지는 알렸다고 하시었다.
여신께서 소위 대전사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힘쓰셨으리란 것을 가온은 짐작했다.
‘제가 나온 시간과 말씀드린 시간은 꽤 오차가 있었는데요. 그걸 고려하면 여기 이 사람들은 꽤 전부터 대기하고 있었을 텐데······’
‘그 정도는 마땅히 해야지. 내 대전사는 칠십 년의 세월을 고생하며 보냈거늘, 그 정도도 못 해준단 말이냐?’
‘정말 칠십 년이나 거기서 보낸 건 아닌데 말입니다. 잠은 바깥에서 잤으니까요.’
‘그래도 신들의 기준에도 긴 시간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 아니냐?’
가온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환호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온 경! 가온 경!”
세상의 절반은 화로의 대전사를 원수로 여기지만, 나머지 절반은 영웅으로 여겼다.
후자의 사람들이 여기 모여있었다.
자기네 대전사를 맞이하러 온 화로의 신도들, 그들은 교단이 염원하던 바를 이루어낸 자기네 대전사에게 찬사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지구인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들도 이 화로 대전사의 덕을 보았다.
그리고 지구인들 사이에 끼어있는 한국인들······.
그들의 대표로 이미리가 말했다.
“정말이지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모두를 대표해,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능숙한 카르세어(語), 지난 몇 년간 습득했으리란 것을 알 만했다.
‘옛날에는 가난한 아스인이니 뭐니 비하 발언을 잔뜩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말까지 익혔단 말이지.’
가온은 예의 바르게도 허리를 숙인 이미리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누구도 저 모습에서 모범적인 공무원 이외의 인상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정말이지 놀라운 변화였다.
이미리가 다시 허리를 세웠고, 가온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햇다.
일곱 살 더 먹었으니 이제 서른인가? 아니면 서른을 넘었나? 어느 쪽이건 그 얼굴을 보니 비로소 칠 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체감되었다.
그리고 가온에게 그 칠 년은 수십 년이었으므로, 그동안 별로 좋아한 적이 없던 이 여자마저 반가울 지경이었다. 그 주변을 지나가며 슬쩍 말을 건넸다.
“전보다 너무도 성숙해졌군, 이미리 양? 정말이지 몰라보겠어.”
“예, 그렇죠? 덕분에······”
이미리는 말을 흐리며 살짝 웃었는데, ‘그 덕분’이란 것은 정말이지 사실이었다.
누군가의 작은 친절은 누군가의 삶을 변하게 할 수 있다.
일찍이 이미리는 젊은 인생에 너무 빨리 연속적인 실패를 겪었다. 사 년을 퍼부은 공무원 시험은 시간 낭비로 끝났고, 국가 프로젝트에서는 누구보다 노력했음에도 뒤처졌다.
이 모든 것이 또다시 거창한 시간 낭비로 끝날 것이란 예감이 든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체념한 그 시점에 우연히도 만난 소드마스터가 칭찬 한마디를 건넸다.
칭찬한 인물이 너무나도 거물이었으므로 귀담아들을 만했던 칭찬, 인정에 목말랐던 젊은이의 갈증을 해소해준 그 칭찬······.
겨우 칭찬 한마디였지만, 실패로 얼룩진 그녀의 인생에 그것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미 한 번 변했던 성격이 또다시 변할 만한 전환점, 그리하여 지금은 원래의 성격이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듯 자신에게 베푼 친절에, 더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베푼 친절에 진심 어린 감사를 보내며, 이미리가 편지 한 다발을 내밀었다.
“이건 경과 잠시나마 함께 했던 그 사람들이 드리는 편지입니다. ‘그 가온’이 아니시라면 그냥 버리셔도 되는데······”
“음.”
가온은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이미리가 놀랄 만큼 빠르게 편지들을 품에 넣었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만세 합창이 계속되고 있었다.
자신의 귀환에 기뻐하는 저들. 예전부터 가온은 자기 팬클럽의 존재를 좋아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원래 팬클럽 앞에서는 어찌 굴었던가? 예전에는 그들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 척 고고히 있었던 것 같다.
가온은 이번에도 체통을 유지하기 위해 무시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가온은 나이를 더 먹었고, 더 나은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온은 작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로 대전사의 이 놀라운 이 반응에 몇몇은 놀라 눈을 크게 떴고, 몇몇은 황급히 카메라를 찾아 헤맸으며, 마지막에는 더 큰 환호가 뒤따랐다.
“가온! 가온!”
*******
칠 년의 세월은 단순히 한 젊은이를 성숙하게 할 뿐만이 아니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풍경을 변하게 하기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네 업적을 보라, 가온. 그로써 그 맘을 평온히 하라······’
여신께서 속삭이시는 가운데, 가온은 행진하듯 거리를 걸었다.
아스의 중심, 카르세 연방의 변경도시를.
아린 벌판의 외곽을 걸었다.
이 도시의 저편에는 원래 대차원문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 주변에 주둔 중이어야 할 미군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약속이 지켜진 모양이다.
계속해서 걸었더니, 도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 이 변경도시는 미군과 대치하는 카르세 군에 물자를 조달하며 연명해 왔다.
꽤 쏠쏠한 돈벌이일 것 같지만, 도시는 결코 번성하지 못했다. 카르세는 가난했고, 그 군대는 더욱 가난했으며 거기 조달할 물자도 변변찮았기 때문에. 이 도시 사람들에게 떨어질 그 부스러기는 더욱 변변찮았기 때문에.
지금은 아니었다.
가온은 아경이 빛나는 변경도시를 보며 놀랐다.
‘생각보다 많이 발전했군요.’
‘투자를 받았지. 지구에서.’
‘투자야 늘 받는 게 아닌지······ 그래도 썩 나아진 게 없다고 들었는데요.’
‘요새는 좀 더 적극적인 투자를 하노라. 예전의 몇 배는 될 돈들이 아스로 넘어오고 있어.’
‘아, 화해 차원에서 돈을 막 쓰는 겁니까? 지구 놈들도 드디어 반성을 좀 하는 모양입니다그려······’
가온의 말에 여신께서 허, 하고 웃으시었다.
‘설마, 그럴 리가? 일본인들은 아직도 한국인들을 식민지 노예들이었다며 조롱하노라.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보고 비누가 걸어 다닌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대영박물관엔 여전히 식민제국 시절의 전리품이 쌓여있다.’
‘뭐, 변한 게 없군요.’
‘그리고 또한, 사죄를 표시하기 위한 선물은 언제나 최소한으로 마련하기 마련이라. 그러니까 지금 이 성대한 투자는 미안한 감정의 발로 따위가 아니라, 지구인 그들의 필요를 위함이니.’
‘필요를 위해서라면 어떤?’
뒤따른 여신님의 말씀은 가온이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카르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라.’
가온으로서는 그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이어진 여신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화로의 대전사가 신들의 과업을 위해 아스를 떠난 시기, 아스의 여러 교단은 화로의 교단이 가져간 신앙을 되찾기 위해 열띤 포교에 나섰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신자들을 거느리는 것이 그들의 숙원을 위한 길이었으므로.
종교적 경쟁을 거듭하던 천상의 신들은 결국엔 예히나탈에도 손을 내밀었으니, 이미 법적으로는 허가가 되었으나 공식적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던 언데드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천국 입성을 신들의 입으로 인정해버린 것이었다.
‘그건 암묵적으로 금지된 일 아니었습니까? 천상은 늘 언데드와 빨갱이들이 확 늘어날까 봐 걱정했을 텐데요.’
‘그 암묵적인 금지를 깰 핑계가 있었노라. 그것이 바로 내 대전사의 행적이었고.’
‘제 행적 말입니까?’
‘앞서 내 대전사는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며 우회적으로나마 발언하지 않았더냐? 이미 누가 그랬다면 더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논리였지.’
그리하여 이제 지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사후의 삶에서마저 안락이 보장된 예히나탈은, 본디 신들이 걱정했던 그대로 급격한 확장을 시작했다. 동맹국을 늘리고, 혁명의 전파를 시작했다.
가난과 독재에 시달리는 아스 중소국가들의 혁명을 지원하고, 혁명이 성공한 그들의 땅에 언데드 리치들이 주축이 되는 공산당을 설립하는 것이다. 죽은 뒤에도 로동하는 프롤레타리아들과 그로 인한 강력한 군사력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그 결과 아스는 일사천리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지구에서 한 번 크게 망한 바 있으니 여기서도 실패하리라는 전망은 불가능했다. 지구와는 다른 판타지 세계 아니던가. 지구에서 성공한 사상들이 여기서는 처참히 실패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다.
심지어 붉게 물들어버린 아스의 중소국가들은 다른 평범한 국가들보다 조금이나마 더 잘 살았고, 그로 인해 놀라운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 사실로 볼 때 지구에서 겪은 바 있는 공산 국가들의 실패는 당장에는 그저 반면교사에 불과해 보였다.
이제 그들 가정의 집에는 레닌과 마르크스, 카샤드 서기장과 화로 대전사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아니, 제 초상화가 왜 빨갱이들 집에 걸려있답니까?’
‘말하였듯 내 대전사가 가장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민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라. 그리고 또한 내 대전사의 존재로 말미암아 숱한 식민지 국가들이 그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노라는 역사적 해석도 있었다. 혁명의 화신이란 것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온이 경기하는 가운데 여신께서 한탄하시었다.
‘덕분에 네 여신 또한 붉은 여신으로 통하는 중이라. 중도좌파를 자처한 끝에 기어이 본색을 드러냈다느니, 그동안 네 여신이 전쟁을 반대한 것은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과 세계의 구분 없이 서로 연대해야 할 프롤레타리아들끼리 서로 다투려는 게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라느니······.
실로 어이가 없는 주장이노라. 애초에 언데드들의 천국 입성을 허가하자고 처음 제안한 것은 전쟁 신이거늘!’
‘고정하시지요. 그래서, 그게 지구 투자가 대폭 늘어난 것과 뭔 상관이랍니까?’
‘이 상황이 지구의 저들로서는 썩 공포스러웠던 모양이지. 이대로 카르세마저 붉게 물들었다가는 아스의 대부분이 붉어지는 셈 아니냐? 그랬다간 정말로 세계 규모의 냉전을 치러야 할지 모른다고 걱정한 모양이다.’
그리고 붉은 사상에 심취하지 않으려면 배가 불러야 할 일이니, 이번에야말로 카르세 연방의 경제성장을 지원코자 진정으로 투자를 대폭 늘렸다는 말씀이었다. 이 도시는 그 혜택을 본 것이었다.
가온은 아연한 가운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곱씹었다.
칠 년이나 지나면 세상도 조금은 변하리라 기대하기는 했다. 이런 식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쨌건.
여전히 떨떠름함을 숨기지 못한 채 가온이 물었다.
‘그래서, 좋은 일입니까?’
‘물론 중도좌파인 네 여신이 보기에 극단적인 좌익 사상의 대두는 흡족한 것이 아니나······’
‘정치적인 얘기는 빼고요.’
‘뭐, 그거야······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느냐? 계속해서 가난에 절망하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
가온으로서는 정말 제 여신께서 중도인가 의심하면서도, 가타부타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건 그가 판단할 일은 아니었다.
가온은 그저 새로운 건물과 시설들이 여럿 생겨난 카르세의 변경도시를 보았다.
사실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고 표현하기는 어림도 없었다. 본디 빈민굴에 가까웠던 이 도시는 지금도 썩 부유한 도시는 못 되었다.
여전히 길가의 콘크리트는 거미줄처럼 금이 갔고, 공장에서는 변변한 정화시설도 없이 오수들을 배출했으며, 그 주변에서 드워프들은 할 일이 없는 나머지 대마나 피워대고 있었다.
그 많은 투자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밑 빠진 독의 구멍을 조금 메운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란 사실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가온은 계속해서 도시를 걸었다.
그 와중에 웬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이쪽을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가온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알아볼 사람은 없어야 했다. 그렇다면 누가?
가온이 고개를 올려 위쪽을 바라보니, 웬 기사가 보였다.
언덕 위 작은 집 앞에 한 기사가 우뚝 서 있었다.
투구와 전신갑옷을 입은, 시대착오적인 기사였다. 그렇듯 온몸과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온은 그 기사를 알아보았다.
저 기사를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이 세상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
‘데스나이트, 그······’
그 정체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 땅의 옛 영주가 저기 있었다. 전쟁 신은 그저 전력이 필요하여 가증스러운 언데드들에게 천국의 문을 허가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가온은 잠시 어떻게 인사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미안합니다.”
가온은 그 기사를 향해, 진심 어린 미안함을 담아 허리를 숙였다.
아린 벌판을 되찾았을지언정 저 남자가 바라는 형태는 아니었으리란 걸 알았다. 저 남자가 저 꼴이 되어서까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했을 복수를 누가 망쳤는지도 알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어보니 죽음의 기사는 사라져 있었다.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했다.
가온은 기사가 들어갔으리라 짐작되는 언덕 위의 집에 들어섰다.
“계십······”
기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탁자 위에 놓여있는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검게 물든 갑옷 한 벌······.
정말이지 익숙한 물건이었다. 가온은 그 앞에서 잠시 몸이 굳었다.
‘신들의 과업을 처리해준 것에 대한 대가? 아니면 맘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라도, 제 영지를 되찾아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 그도 아니면······’
어느 쪽이건 당장 입어볼 맘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떳떳하지 못했다.
이 갑옷은 친족의 복수자가 입어 마땅한 갑옷이었다. 그러나 가온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고 버려둘 수도 없는지라, 가온은 아다만티움 갑옷이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도록 외투로 감싼 채 텔레포트했다.
그동안 다른 세계에서 일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머물던, 호텔 방에 들어왔다. 갑옷을 잘 숨겨놓은 뒤, 마음의 안정을 위해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마침 그러기 적합할 무언가가 있었다.
가온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오늘 이미리에게서 받은 편지들을 꺼내 읽어나갔다.
자신이 저지른 배반의 대가를 감해주는 대가로 장성 시절 군 인맥들에게 종교를 전파하는 임무를 떠맡게 된 류시범의 소식을 보았을 때는 그저 웃었고, 큰돈을 잃은 이후로 비트코인인지 뭔지에 남은 돈을 다 퍼부었다는 강주석의 소식을 봤을 때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기어이 사기를 쳐서 돈을 빌렸다가 갚아줄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꾸고 다닌다는 지존무쌍의 소식을 봤을 때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지만, 정직원이 되어 어깨가 넓어진 이복동의 사진을 본 순간에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나름대로 평온한 시간을 보내던 와중이었다.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량하기까지 한 그녀의 목소리.
“안녕, 가온.”
닫아둔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우드엘프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온은 놀라지 않은 채 웃으며 화답했다.
“나루 양? 오랜만입······”
그러나 나루는 웃지 않았다.
“오랜만이지. 듣자 하니 고작 칠 년이 아니라 칠십 년을 보냈다던데. 그 세월 동안 칼 쓰는 법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 물론······”
“잘됐네. 그럼 칼 뽑아.”
“예?”
“내가 달 여신님의 새로운 대전사다. 여신의 뜻을 받들어 전임자의 복수를 하러 왔다.”
창밖에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온은 그 달빛에서 분노한 여신의 시선을 느꼈다.
초인의 심장마저 서늘하게 식히는 저 원한······,
하기야 가온은 지상뿐만 아니라 천상에도 원한을 샀다. 그 죄를 이제야 사면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오만이었던 모양이다.
가온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너무 놀라지 않으려 애썼다. 어쨌건 각오한 일 아닌가. 아스의 절반의 분노를 산 마당이다. 그 업보는 어떤 식으로든 돌아오기 마련임을 진작 알고 있었다.
슬며시, 쓰게 웃으며 가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요.”
가온은 칼 두 자루를 뽑았다. 그 두 자루 칼에서 빛나는 재와 불이 호텔 난로의 불빛을 머금고 빛났다.
그 순간, 나루의 동공이 커졌다.
“다행히 좋은 승부가 되긴 하겠군요. 대전사끼리 천상의 신들께서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결투를 벌입시다. 그 결과 누가 죽든 신들께서 돌봐주시기를 빌어주고······”
가온이 읊조리는 가운데, 나루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왜?
가온은 긴장한 와중에도 의아함을 느꼈다. 이 재와 불의 검기를 보고 놀란 건가? 설마 나루 저 여자는 결투 상대가 자신과 같은 성취를 이뤄냈음을 듣지 못했나? 결투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 알지 못한 건가?
하기야 우드엘프들은 TV를 보지 않는다. 7년이나 지났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계단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로 몸이 무거운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리 큰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급히 뛰어오는 것 같았다.
“결투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가온이 중얼거렸고 나루가 더듬거렸다.
“그게······”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호텔 방에 울렸다. 호텔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와 동시였다.
“장로님, 미쳤어요!”
또다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우드엘프 오림이었다. 세간에는 그림자 엘프들의 리더로 유명한 친구. 그림자 엘프다운 청력으로 이 방에서의 대화를 저 멀리서도 들은 것 같았다.
“말리려고? 그러지 말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가온의 말에 오림이 제지에 나섰다.
“아니, 가온······”
“지난 수십 년 동안 어둠 속에서 지냈지. 자네들도 알겠지만, 사색할 시간만은 넘쳐나는 곳이라네.”
“자네······”
“내가 한 일들을 곱씹을 시간이 많았어. 아스의 절반에게는 구원이었겠지만, 나머지 절반에게는 한 초인이 제멋대로 자기네 운명을 정해버린 오만이었겠지.
어쩔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었다, 이런 자기합리화도 여러 번 했지만 결국에는 모두의 앞에서 당당할 수야 없다는 것을 깨달았네. 그 결과를 기꺼이 감내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죽어줄 수도 없지요.”
정말이지 소름 끼치게 차가운 달빛이었다. 화로의 불꽃도 그 차가움을 온전히 식혀주지는 못했다.
“전 준비가 되었습니다. 슬슬 칼을 뽑으십시오, 달의 대전사.”
가온은 그리 선언하면서, 혹시 자신이 이기더라도 가능한 죽이지 않게 노력해보겠노라 친구들을 안심시키려다 집어치웠다.
단순히 결투 상대에 대한 실례라는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여유 있는 척하기에는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아스 역사상 최고의 검법가가 눈앞에 있었다. 형상화된 달의 분노로서······.
그리고 잔뜩 붉어진 얼굴로, 오림이 말했다.
“오해하지 마······. 우리 장로님이 오천 살이나 먹었더니 벌써 치매가 왔나 봐. 이젠 숲에서 놀고먹는 백수면서 자기가 언제 대전사로 임명됐다고 착각하네.”
불과 재가 꺼졌다. 문득 창밖을 보니 보름달인 줄 알았던 노란 불빛은 사실 가로등 조명이었음을 뒤늦게나마 알 수 있었다.
나루는 숲에서의 위세가 약한 나이든 우드엘프답게, 이 젊은 엘프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흐렸다.
“미안해, 얘들아. 오랜만인데 맥없이 인사하긴 재미없고 하니, 장난 좀 치고 싶어서······ 이렇게 진지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어······”
“하여간 나이 먹고 왜 그래요? 그 나이면 슬슬 철이 들어야지, 응?”
“내가 나이를 먹고 싶어서 먹었니······”
“아무튼 자리 비켜줘요. 가온 얘 표정 봐, 감동적이어야 할 해후 분위기를 장로님이 다 망쳐버렸네 진짜. 친구들끼리 인사하러 온 건데 장로님이 왜 끼어들어요?”
나루는 미안해, 하고 쓸쓸하게 중얼거리더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가온이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애쓰는 가운데, 우드엘프 오림이 어색하게나마 입을 열었다.
“우리 장로님이 미안해, 정말.”
“아니, 그건 됐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먼저 입을 연 것은 오림이었다.
“수십 년 동안 또 고생했다고? 우리 후배들을 구하러.”
“그랬지. 두 명 구해낸 것 말고 별 소득은 없었네만.”
“그게 어딘가? 정말이지 자네다운 일이었어. 친구 사이에 칭송하긴 거북한 일이지만 기꺼이 찬사를 보내겠네. 그런데, 모두의 앞에서 당당할 수 없다고? 남들의 시선일랑 신경 쓰지 말게. 그들은 자네만큼 아스를 위해 무언가 한 적이 없는······”
“방금 그 말 듣고 위로하려는 거지? 그 헤프닝은 제발 없었던 일로 해주면······”
“아, 그래야지. 미안하네······”
“나야말로······”
또다시 정적, 가온은 자칭 달의 대전사와의 결투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참 후에야 오림이 다시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 하려던 일은 마무리가 됐나?”
‘하려던 일’이 뭘 묻는 것인지는 쉬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복수, 의무, 뭐 그런 것들. 지금까지 가온을 옭아매던 것들.
“대강은.”
“그럼······ 그때 우리가 했던 제안 기억나나?”
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부터라도 함께하지 않겠느냐 했던가? 당시엔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중으로 결정을 미루겠다고 대답했지 아마. 이제라도 그 대답을 들려줄 수 있겠나?”
예전에 들었을 때도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는데, 지금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당시 우드엘프 친구들의 활동은 가온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가온도 한 번이나마 참여해보고는 꽤 큰 보람을 느꼈더랬다.
이후로도 더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온과 그 친구들 모두에게 이로운 일일 터였다. 아스 절반의 원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의 왕자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거물인 것이다. 그가 함께하는 단체의 활동을 막기는 어렵다······.
그래도 되는지는 따로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좋지 않겠느냐?’
여신께서 미리 허가하시었고, 가온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이 허락해준다면, 기꺼이······”
“좋아, 정말 잘 생각했네!”
오림이 기뻐했고 가온도 웃었다. 오직 친구들 앞에서만 가능한, 꾸밈 없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여신께 아까부터 계셨느냐, 그럼 달의 대전사가 공석임을 진작 알려줘도 되지 않았느냐 따지려다 그만두었다. 기억에서 최대한 빠르게 지우려면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게 좋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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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은 TV에서 친구의 귀환을 본다.
저 친구를 직접 맞이하러 나가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소파 옆에서 아스가론드가 자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서너 살 정도 커진 엘프의 모습, 아이 같았던 정신도 이제는 꽤 성숙해졌지만 아직은 충분하지 못했다.
수백 년 만의 귀환자는 아직 이 세상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다.
아스가론드는 이 조그만 엘프의 모습일 때 자동차를 무서워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려오는 그것이 거대하고 정체 모를 괴물쯤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스가론드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는데, 주변에 차가 쌩쌩 달리는 상황이 마치 광분한 괴물들 사이에 놓인 것으로 느껴지는 탓이라고 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자동차를 직접 타는 것도 무서워했다. 그 역시 다른 차들 사이에서 달려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던가?
저 드래곤의 눈에 자동차들이 왜소하게 보이려면, 시간이 더 흘러야 할 것이다. 더욱 제대로 자라나, 몸집이 더욱 커져 자동차 따위는 작게 보일 미래에야 비로소······.
그 탓에 오늘 친구의 귀환을 맞이하러 이동하지도 못했다. 자신이 그 잘난 친구도 아니고, 텔레포트하여 갈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몸이 무거운 드래곤에게 장거리비행을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막상 직접 현장에 갔다면 즐겁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확률도 컸다.
반지성이 세간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간 쓸데없이 많은 인터뷰 요청을 받았을 테니까. 거기 모인 기자들은 이런 질문들을 던져올 것이다.
당신이 반신 반지성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인가?
정말로 흉턴이라면 예전에 쓰러뜨린 반지성의 피를 취해 신성을 얻은 것인가?
기자란 언제나 무례한 족속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만도 하다. 결투 중에 손목이 잘렸다가 빠르게 재생되는 장면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끈 탓이다.
새 신분을 만들어야 하리라.
무슨 모습을 새로 쓸지는 이미 정했다.
TV에서 다음 뉴스를 내보냈다.
북조선 소식, 환하게 웃는 귀 뾰족한 독재자를 보며 반지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지간히도 새로운 몸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엘프가 된 주제에, 그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인간일 적 흔적이 꼴 보기 싫어진 것일까? 인간일 적에 낳은 자식들을 별별 핑계를 대서 숙청한다는 소식을 TV 뉴스에서 여러 번 보았다.
세간에는 광기로 치부되는 그 기괴한 짓거리의 이유를 반지성은 이해할 수 있었다. 옛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니까.
더러운 피를 버리고, 아스의 일원으로 거듭나고 싶었던 자신이라면 저보다 더한 짓도 저질렀을지도······.
결국에는 그러지 못하게 되었음에 반지성은 크나큰 질투를 느낀다. 질투심을 어찌 표출해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다.
‘하이엘프라면 마땅히 아스의 관습을 따라야겠지. 결투의 관습도 물론 따라야겠고. 관습의 본래 의의와 달리, 그 과정에서 크게 다치거나 죽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고.’
본디 저 독재자는 체중이 적은 뱀파이어답게 텔레포트의 명수로 유명했지만, 하이엘프의 육체를 얻은 지금은 축지법 따윈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살이 너무 뒤룩뒤룩 찐 탓이다.
그러니 찾아가 목을 베어내기도 무척 쉬울 것이다.
뒤처리를 위한 협조는 따로 구해두었다.
해골 서기장은 자기 지배에서 벗어난 데다 레닌과 마르크스의 가르침조차 따르지 않는 저 인민위원장을 숙청하기로 약조해주었다.
저 모습으로 반지성에게 폴리모프를 시켜줄 리치를 파견하고, 인민위원장이 예전과 달라졌음을 당연히 알아챌 뱀파이어 공산당 간부들의 입을 닥치게 해줄 것이다.
한편 아스의 신들께서는 아스가 지구에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길 원하신다. 반지성이 원하는 바를 허락하심과 동시에 지원하실 것이며, 저 지구 독재국가의 국가원수로서 새로이 해야 할 임무들을 내려주실 것이다.
아스의 일부 구성원은 늙어서 죽지 않는다. 세월에 휩쓸려 그 원한이 사라지지 않는다.
엘프와 드래곤들이 그렇듯, 천상의 신들도 아직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반지성 자신이 그렇듯이.
아마도 신들은 지구의 여러 국가들에 이롭지 않을 임무들을 내려주실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은밀한 복수심 또한 충족할 수 있으리라고, 반지성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지구의 여러 복잡한 관계 사이에 심겨진 일종의 도화선을 건드려, 다시금 전쟁의 불길을 꽃피울 수 있으리라고도 기대했다.
반지성이 생각건대, 그 가장 친한 친우는 그때마저 자신의 의무를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잠든 아성체 드래곤을 보며 반지성은 속으로 읊조렸다.
저 아이가 완전히 자라나, 독립할 수 있게 된다면 곧바로······.
*******
앞으로는 우드엘프 친구들과 함께하기로 약속한 마당이다. 그 전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 시간 동안 가온은 게임을 했고, 오래도록 잤으며, 온종일 인터넷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혼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가온은 텔레포트를 했다.
후긴으로. 떠나기로 결정한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왔다.
카르세 변경도시의 발전상을 보고 감명받은바, 그렇다면 후긴도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궁금해진 탓이었는데, 막상 후긴에 오고서는 바로 실망하고 말았다.
밤이었고, 여전히 후긴은 회색의 나라였다. 후긴의 매연은 하늘과 건물 모두에 더러운 얼룩을 묻혔다.
당장 눈에 보이는, 후긴의 옛 왕궁부터가 그러했다.
다른 건물들이 그렇듯 회색으로 물들어버린 저 왕궁.
저 건물은 가온이 귀환하기 전에는 왕정의 몰락을 상징하도록 일부러 방치되었으며, 가온이 귀환한 이후로는 직접 천민들의 접근을 엄금했기에 방치되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원래의 대리석 빛깔을 찾아볼 수 없는 회색이 저 왕궁의 상징이 되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가온은 절로 우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는 이곳에 신경 안 쓰기로 했는데’
실망이라 해야 할지 분노라 해야 할지 모를 감정이 가슴 속에 똬리를 틀었다.
자신이 사라졌다고 발전을 거듭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화가 났으련만, 변하지 않은 모습은 그 나름의 우울함을 느끼게 했다.
이후로도 멀거니 왕궁을 보던 가온은 문득 달라진 것 하나를 발견했다.
회색 갈보들이니 잿귀쟁이들이니 하는 낙서들. 혁명의 기념으로 저 왕궁 벽에 새겨졌던, 재의 왕자가 그들의 죄를 증거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천박한 낙서들이 지금은 모두 지워져 있었다.
‘나름대로 관리를 시작한 모양이지······’
그리고 달라진 것이 하나 더.
가온은 밤하늘을 보았다.
후긴의 밤하늘 중심에서 빛나는 달······.
한때는 굴욕감과 트라우마로 인해 저 달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가온은 아주 오랜만에 다시 달을 보았다.
사실 가온의 기준으로는 수십 년 전, 아스의 기준으로는 7년 전에도 후긴에서 저 달을 본 적이 있었다.
그날 본 달은 얼룩덜룩 기름에 범벅된 수면처럼 더러웠다. 마약쟁이들이나 볼 것 같은 빛깔로 채색된 채월(彩月)이었다. 오염된 대기는 밤하늘마저 더럽혔고, 구름과 섞인 매연이 기괴한 빛의 산란을 일으켰던 탓이다.
그러나 지금 후긴의 밤하늘에 뜬 저 달은 그저 푸른 달, 맑은 창월(蒼月)이다.
그것을 보니 확실히 대기는 맑아진 것 같다. 뱀파이어들이 물러난 뒤로 대기오염 물질배출에 제재가 가해진 탓일까?
그 사실에 새삼 주목하지는 않았다. 달의 대전사도 아니고, 달이 제 모습을 되찾았단 사실에 감흥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워낙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달의 모습이라, 가온은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자니 시간이 꽤나 흘렀다. 밤하늘의 어둠이 걷히고 저 너머에서 붉은빛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동이 트고 있었다. 그제야 가온은 고개를 내렸다.
다시금 후긴의 왕궁이 보였다.
‘잿더미를 요 삼아 편히 자라 우리 아기.’
어둠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왕궁에 빛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회색이었던 왕궁은 이제 백색을 띠고 은은하게 빛났다.
‘비록 집이 불탔지만, 잿더미에서 불사조가 태어난단다.’
가온은 한동안 무언가에 홀린 듯, 자신의 옛집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잿더미를 요 삼아 편히 자라 우리 아기. 자장자장······.’
한참 뒤에야 가온은 살짝 웃었다. 기뻐서도 아니고, 어이가 없어서도 아닌, 웃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웃음이었다.
웃음을 거둔 뒤 가온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
마침내 고향과의 인연이 완전히 끊겼지만, 새삼 아쉬울 일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발 디뎌야 할 곳이 있었고, 그곳에서 친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온은 그곳으로 향했다.
*** 完 ***
작가의 말
드디어 완결입니다. 지금까지 따라와주신 분들, 여러 과분한 호의를 보여주신 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외전을 바라는 분이 몇 분 계셨지만, 당장엔 외전 계획이 없습니다. 이 에필로그 자체가 일종의 외전격 성격이 있었는지라...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소설은 제가 중고등학생 때 썼던 소설의 리메이크입니다. 심지어 마지막에 등장한 아스가론드는 전역 후에 썼던 어느 소설 프롤로그의 주인공이었는데요.
그렇듯 나름대로 과거작들의 추억을 되살려 쓴 소설이지만 많은 분들께서 만족하지 못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죄송할 뿐입니다.
처음 이 스토리와 결말을 구상했을 때, 제 망상에서는 그저 멋지기만 했습니다. 눈마새 XXX의 마지막 선택이라든가, 뭐 그런 느낌이 될 줄 알았는데...
그리 되기엔 제 역량이 너무 모자랐네요. 거듭 죄송할 뿐입니다. 심지어 휴재까지 무책임할 만치 길었는데, 정말이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휴재 기간 전개를 바꾸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보았지만, 플롯을 뒤엎을 역량이 없었지요. 정말이지 모자란 글쟁이였습니다.
그럼에도 좋게 읽어주셨다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역시나 불만족스러우셨던 분들께는 진심 어린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