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장, 가온 - [5]
약 팔십 년 전은 드래곤들마저 전쟁고아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시대였다. 국가보다 오래된 드래곤들마저 죽어 나가던 시대.
자연스레 부모를 잃은 새끼 드래곤이 생겨났다.
개인주의적인 드래곤들에게 친척이란 개념은 희박했으므로, 고아가 된 새끼 드래곤의 양육은 전사한 드래곤 부모의 전우였던 카르세인이 맡게 되었다.
그 카르세인은 새끼 드래곤을 나름 잘 보살폈지만, 드래곤에게 적절한 교육을 베풀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집단주의적이며 애국적인 가르침을 어린이를 위한 교육이랍시고 베풀었다는 소리다.
교육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던 것 같다. 결국에는 국가주의적 가치관이 아홉 살 새끼 드래곤의 머리에 자리 잡았다. 새끼 드래곤은 자신이 아스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카르세 전쟁고아들에게 혹시 가온 경과 같은 영웅이 되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을 때, 죽을 가능성이 크다는 양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스가론드는 아스를 위해서라는 말에 바로 자원했을 정도였다.
차원문이 그 작은 몸을 삼킨 뒤, 현실 시간으로는 약 60년, 아스가론드 개인에게는 약 600년이 흘렀다.
살아남은 다른 친구들은? 없다고 했다. 아스가론드 홀로 살아남은 것은 생존 수완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아서였다고.
“여기 사는 드래곤들······ 말이랑 마법은 못 하는데, 옛날엔 나 돌봐주고 그랬어.”
반지성은 슬며시 검을 감췄다. 아스가론드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야 했다.
“그래도 너라도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네. 그래서 아스가론드, 당장 뭔가 필요한 거 있니?”
가온의 물음에 아스가론드가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불 없애줘, 눈 아파.”
“빛에 미리 익숙해져야 해. 바깥은 훨씬 더 밝으니까. 이제 곧 나가야 하는데······”
“나가야 해?”
아스가론드의 물음에 가온은 충격을 받았다. 나가야 하냐니, 그럼 나가지 않을 생각도 있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영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이 드래곤은 여기서 육백 년을 보냈고, 그것은 정신이 매몰되어버리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하루하루 언제 나갈 수 있을지 갈망했겠지만, 나중에는 그 갈망마저 매몰되어버렸을 것이다.
“나가야지, 그럼.”
“드디어 바깥에 전쟁이 일어났어? 그래서 날 데리러 온 거야?”
아스가론드의 물음에 반지성이 대답했다.
“아니, 아니오. 전쟁은 아직이야. 그저 너무 늦어져서 지금이라도 돌아오게 하려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에 아스가론드가 보인 반응은 복잡했다. 그 얼굴에 실망과 안도가 동시에 드러나는 게 아닌가.
“아, 그래.”
실망한 것은 자기가 활약할 무대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탓이요, 안도한 것은 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기가 아직 썩 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탓이리라.
확실히, 이 세계에 들여보낸 신들의 의도와 달리 이 드래곤은 썩 강해지지 못했다.
신들이 새끼 드래곤을 이 세계에 들여보낸 것은 아마 더 빠르게 성장하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 새끼 드래곤이 신성한 괴물들을 잡아먹고 성장해서는 나중엔 고대 신들의 고기마저 취하여, 그 거대한 몸이 신성으로 가득 찬 아스의 결전 병기쯤으로 자라나길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림도 없는 바람이었다.
물론 이 드래곤은 수백 년씩이나 신성한 괴물들을 잡아먹음으로써 준신이라 불러 마땅한 신성을 획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준신은, 어디까지나 반신만도 못한 존재였고, 실제로 준신 우드엘프들은 고작 총격전을 벌이다가 여럿 죽어나갔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에인션트 드래곤들의 강대함조차 손색이 있는 마당에, 이 새끼 드래곤은 세월만큼 성장하지도 못했다.
결국 이 드래곤이 정신마저 망가져 가며 보낸 아득한 세월은, 별 쓸모가 없었다.
그 사실을 여기 있는 두 남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같은 처지에서 느끼는 끔찍하게 강렬한 이입감, 드래곤 장본인보다도 그 사실을 우울하게 느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스가론드는 계속해서 칭얼거렸다.
“그럼 나갈 필요 없겠네.”
“나가야 한대도.”
“나가면 뭐가 좋은데?”
가온은 바깥엔 신나는 게임들이 있다고 말하려다 집어치웠다.
반지성도 잠자코 입 다물었는데, 그 입에서 지금이라도 나가야 아스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느니 어쩌느니 애국적 발언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고작’ 이백 년을 보내고 나온 뒤로도 끔찍한 상실감에 시달린 바 있는 이 둘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아스가론드가 문득 물어왔다.
“나가서, 두 명 다 영웅이 됐어?”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가온부터 먼저 입을 닫았다. 반지성, 자칭 참마황도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 귀환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먼저 입을 열어 고백한 것은 가온이었다.
“아니.”
이번에 아스가론드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순수한 실망이었다. 우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역시 더 있어야겠네.”
“더?”
“몸 더 커지게. 쓸모 있어지게.”
가온은 애써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나가야 해.”
“왜, 너희도 영웅 못 됐다면서? 그럼 나는······”
‘영웅’이란 단어 하나가 두 명의 심장을 얼음송곳처럼 찔렀다. 한때 이 어둠 속에서, 여기 두 명도 그 단어를 희망찬 무언가로 여기곤 했다.
아스가론드가 계속 칭얼거렸다.
“더 약해. 쓸모없어······ 아직 어른도 못 됐어.”
자기 몸뚱이를 보고 그리 말하는 듯했다. 하기야 저 크기, 약 백 살 정도의 드래곤은 아성체로 분류되기 마련이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무언가.
그래서 가온은 아이를 달래듯 위로하지도, 육백 살 어른을 대하듯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비슷한 일을 겪었던 선배로서, 그저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월은 성장을 담보하지 못하지. 시간이 지난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냐. ”
“그럼?”
“계속해서 무언가를 해야지. 어둠 속에 혼자 주저앉아 있는 게 아니라.”
대마법사가 차원문을 열고 있었다. 거의 다 열리기 직전이었다. 가온은 그쪽에 흘긋 시선을 보내고는 말을 끝맺었다.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이나마 해내야지. 그래야 어른이 되고 영웅이 되겠지.”
“그럼 너는? 아직 영웅 못 됐다며?”
“그러니까 지금부터 새로 시작해야지. 너도 같이.”
“같이······”
“뭘 하고 싶지, 아스가론드?”
그 질문에 아스가론드는 싸우러 나가고 싶다느니, 아스를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느니 대답하지 않았다. 수백 년 세월이 지나서도 그 작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예의 애국적인 교육이 이 순간에는 발휘되지 못했다.
고민 끝에 아스가론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내면에서부터 흘러나온 간절한 욕구였다.
“자고 싶어.”
이 세계에서 드래곤의 삶은 힘겨운 것이었고, 위험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안심하고 오래 잘 기회는 없었다.
오랜 수면기를 거쳐 탈피를 거듭하는 드래곤의 생장특성을 고려할 때, 그 성장이 이상할 만치 더뎠던 이유는 알 만했다. 더 커지고 싶거든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얼마나?”
“오래. 아주 오래······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지, 물론.”
가온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아스가론드? 내 손을 잡아.”
머뭇거리더니 이내, 작은 손이 커다란 손 위에 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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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차원문을 통해 세 명은 아스로 빠져 나왔다. 눈부신 햇살에 아스가론드가 눈을 찡그리고 있는 가운데, 반지성이 손바닥으로 그 눈가를 가려주었다.
가온은 슬며시 아스가론드의 손을 반지성의 손에 옮겨주며 말했다.
“지성이? 여기까지 함께 해줘서 고마웠네. 아주 큰 도움이 됐어.”
반지성은 아스가론드의 손을 잡으며 떨떠름하게 물어왔다.
“왜 갑자기 작별 같은 말을 하는가?”
“작별 맞아. 자네는 이제 이 애를 돌봐줘.”
반지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양육에 적합한 인재는 아닌 거 같은데? 적절한 분들에게 맡기고 바로 합류하겠네.”
“아니, 그러지 말게. 자네가 직접 돌봐줘. 친숙한 얼굴이 하나쯤은 있어야 안심될 것 아닌가.”
오래 걸릴뿐더러 위험하다는 것이 판명된 일에 친구를 떼어놓으려는 의도란 것쯤은 쉬이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자신이 엿 먹인 친구를 위험하기 짝이 없고 쓸데없이 오래 걸리는 일에 끌어들이는 것은 상당한 부담일 것이다.
“그럼 가온 자네는, 다시 혼자 돌아가서 하던 일이나 마저 하려고?”
“그래야지.”
한 명이 살아있다면 두 명이 살아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두 명이 살아있다면 세 명이 살아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고, 그 셋을 구해내는 것은 생각보다 시간의 낭비가 아닐 것이었다.
“얼마나 살아있을지 그걸 어떻게 아나?”
“뭐, 영혼을 찾아가며 이 명단과 일이 대조해보면 될걸.”
“이 명단에 있는 걸 다 찾으려고?”
“못 그럴 것 없지.”
그리 말하는 가온에게서 반지성은 이백 년 전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생존자 집단의 리더, 유일무이한 사제. 책임감으로 넘치던 그 친구가 말했다.
“오랜만에 사제 노릇 좀 해봐야겠네.”
저 너머에서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 밝은 차원문을 향해서, 자유를 그리워하는 웬 고대 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저 거대한 몸이 이 문을 막거나 파괴하기 전에 얼른 다시 들어가야 하리라.
“아, 저놈······”
반지성이 말을 흐리는 가운데, 가온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뭐, 지루하진 않겠네······ 자네도, 내 탓에 할 일이 없어져서 적적했을 텐데 잘 됐어. 마법사? 따라와라.”
가온이 손짓했고, 대마법사는 군말 없이 뒤따랐다. 이 언데드 리치에게는 그럴 의무가 있었다.
가온 이후의 소년들마저 차원문에 들여보낸 것 역시 이 대마법사였을 것이다. 따로 설명을 따로 듣지는 않았지만, 분명했다. 이런 추잡한 일을 맡길 마법사는 달리 없었을 테니까.
애초에 자신을 이 어둠 속에 넣어달라 부탁한 것부터가 자기가 벌인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으리라 추측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새삼 비난하지는 않았다. 이미 자기 죄를 알고 있는 이 마법사에게는, 그저 자기 의무를 되새겨주기만 하면 충분했다.
해골 하나와 엘프 하나가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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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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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에게는 지나치게 긴,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게 긴 칠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루한 날도, 지나치게 험난한 날도 많았던 세월이었다.
그리고 신들이 맡긴 과업은 종료되었다.
분명히 신들마저 찬사를 아끼지 않을 업적이었지만, 정작 이 일을 완수해낸 두 명은 썩 들뜬 눈치가 아니었다.
어둠 속의 두 명은 이 일을 일종의 벌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형기를 마친 다음 느낄 만한 감정은 신남이 아니라 후련함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그 후련함마저 느끼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정말 여기 계속 있을 건가?”
가온의 물음에 대마법사가 대답했다.
「예, 모쪼록······」
아니면 지금 죽여줄 수도 있다고, 그 영혼을 인도해주겠다고 제안해보았지만 대마법사는 그마저 거절했다. 그는 계속 이 세계에 남아있기를 원했다.
하기야 세상에는 시간이 지났다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많은 법이었다. 대마법사가 벌인 일이 그런 부류의 일이었다.
이내 가온은 고개를 끄덕인 뒤, 대마법사가 열어준 차원문에 몸을 집어 넣었다.
환한 세상이 그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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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문을 통과한 가온은 주변을 보고 놀랐다.
그곳은 환영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여럿이었다.
“가온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