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장, 가온 - [4]
차원문을 통과한 두 눈에 담긴 것은 어둠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키는 어둠.
그리고 이곳에서 이백 년 넘게 머물렀던, 그곳을 나온 이후로도 어두운 집에서만 지냈던 이 엘프에게는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어둠이기도 했다.
반지성은 적응에 좀 더 시간이 걸렸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마법적 불꽃을 만들어내어 조명 삼은 뒤, 세 명은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세계에 들어온 첫날부터 위기상황을 마주했다.
“뭐가 오는데.”
어둠 너머에서 들려오는 진동, 거대한 소리. 그것의 정체를 둘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약 일 분 후, 어둠 속에서 거대한 윤곽을 드러낸 것은 삼십 미터는 족히 넘을 법한 거인이었다.
온몸에 구름을 두른 고대 신.
‘옛날에도 두 번인가 본 적이 있었지. 여신께서 말씀해주시길, 옛 천공의 신이라 했던가.’
숨죽인 채 지나 보내려 했다.
“저놈, 예전에는 그저 배경에 불과했는데. 이젠 아니게 됐군.”
“그래, 참으로 흉악해졌어.”
왜 저리 변했는지는 알 만했다.
2차, 3차, 4차로 이 세계에 보내진 소년들의 수는 다 합쳐 만 명에 가까웠다고 했다. 넘쳐나는 전쟁고아들을 참 넉넉히도 들여보낸 것이다.
이 어둠 속에서 소년들은 단순히 검술과 사격을 연습하면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앞선 선배들의 성취를 재현할 수 있도록, 그들은 적극적으로 괴물들과 싸워가며 초인으로 거듭나기를 요구받았다.
그리고 온갖 고대의 괴물들이 즐비한 이 세계에서, 놈들과 적극적으로 싸우려 드는 것보다 빠른 자살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이 세계에 사는 것들에게 인간의 고기도 제법 별미라는 것을 알려줬겠지. 사냥할 가치가 있을 만한 존재라는 걸······.’
그것은 단순히 이번 임무가 초인 소드마스터들에게조차 위험해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소드마스터들에게도 위험한 곳이라면,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하루도 채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다.
그것은 역시 소년들은 전부 죽었으리란 암울한 전망을 의미했다.
반지성은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보다 지랄맞게 된 이곳에서, 몇 년쯤 있다 나갈 생각인가?”
“한 십 년쯤?”
“그렇게 오래?”
“여기서 십 년쯤 있어봤자 바깥에선 일 년 정도 흐를 뿐 아닌가. 내가 늙어 죽지도 않는 엘프고 하니, 신들께선 내가 아예 수십 년 정도 여기서 썩다 오길 바랄걸.”
“방금 우리 고기 맛 보고 싶어 안달 난 고대 신을 봤잖나.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뭐, 자네가 모시는 신께선 기뻐하지 않으시겠나?”
가온의 자조적인 말에 반지성은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자네 신께선 지금쯤 날 천하의 배신자라 생각하지 않으시겠나?”
“그리 여기시기는 하지. 그래도······ 자네는 여전히 아스의 자존심이야.”
반지성의 말에 가온은 쓰게 웃었다.
“내가?”
“그래. 날 추종하던, 소위 ‘전쟁광’들에게도 그렇네.”
“그 친구들은 지금 날 죽이고 싶어 안달 났을 텐데.”
“하지만 정말 죽는다면 당황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절망할걸.”
“왜?”
“자네는 하나의 상징이니까.”
“상징?”
“아스에도 지구를 능가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상징. 설령 또다시 대전쟁이 일어난다 한들 지구에 무력하게만 당하지 않으리란 기대를 심어준······ 지구가 아스를 무작정 깔볼 수 없게 만들어준······ 그리하여 아스인들의 패배의식을 조금이나마 달래준 존재가 바로 자네야.”
“내가 그 정도로 인기 있을 줄은 몰랐군. 아직도 내가 그쪽에도 승리의 마스코트쯤 된단 말이지.”
“그렇기 때문에 전쟁 신께선 지금 자네를 두들겨 패고 싶어 하실지언정, 어딘가에서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으실걸세. 그러니까 내가 자네와 함께하도록 허가하신 거고.”
반지성이 덧붙이길, 이 위험한 세계에 가온이 홀로 들어갈 것 같으니 전쟁 신께서 은근슬쩍 가온의 소식을 흘려 자신이 같이 가도록 유도하신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인간들뿐만 아니라 천상의 신까지도 그 존재를 중히 여기고 있다고도.
“아스의 모두가 자네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 알았나?”
“조금은.”
“자네가 포기한 게 바로 그걸세.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그만큼 자네의 역할은 중요했고, 지금도 중요하네. 자네는 단순히 대전사 노릇만 충실해서 될 게 아니었어.”
반지성의 말에 가온이 생각했다.
‘그거 하나만 하기도 벅차던데.’
“애초에 패배의식을 가진 채로 고요하게 지내는 건 평화가 아냐. 굴종이지. 아스인들은 한 번쯤 이길 필요가 있었네. 옛 원한을 갚고서, 대등해질 필요가 있었어. 평화와 자비는 그다음에 노래하면 됐어······”
반지성은 계속해서 혼자 중얼거렸고, 가온은 가타부타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전쟁을 일으켰다면 패배할 가능성이 컸으리란 주장도 반지성의 마음을 꺾지는 못할 터였다. 패배할 가능성을 감수하는 것 또한 전쟁의 본질 아닌가. 그리고 가온의 친구는 전쟁의 대전사였다.
가온은 그저 조용히, 계속해서 친구의 말을 들었다.
이어지는 하소연과 설교.
역시나, 염원하던 사업이 무너졌음에 반지성은 크게 낙심한 눈치였다. 그런 결정을 내린 친구를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친구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 완전히 늦지는 않았네. 당장에야 자네가 직접 평화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어냈으니 제 손으로 망가뜨릴 순 없겠지. 하지만 마족들이 얼마나 간악한지는 자네도 잘 알잖나?
놈들은 이제 용서받은 줄 알 거야. 용서받았으니 다시 패악을 부려도 된다 생각하겠지. 요새야 겸손해진 영국과 프랑스도 제 버릇을 남 주진 못할걸. 언젠가는 제 본색을 드러낼 테고, 그때는 절대 내 말을 잊지 말게······ 그러면 전쟁 신께서도 자네에게 기쁜 마음으로 갑옷을 돌려주실 것······”
그리고 여전히, 그 염원을 포기한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맘을 돌이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반지성은 계속해서 전쟁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가온은 씁쓸하게 속으로 생각했다.
‘이 친구가 조센징을 젠부 코로스, 이런 헛소리만 작작했으면 정말로 그 말에 따랐을지 모르지. 에펠탑을 무너뜨리고, 런던탑에 여왕을 넣어 불태우고······’
그랬다 한들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가온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고, 그럴 능력이 있었다. 세상의 반은 한탄했겠지만, 나머지 반은 진정한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를 거세게 튕기는 피막, 거대한 날짐승. 그 접근을 알아챈 반지성은 감회에 젖은 듯 중얼거렸다.
“아, 저 용들······.”
원시 드래곤이었다. 지능이 없는 드래곤들, 그들은 다른 신성한 괴물들에 비하면 훨씬 강력한 고물이었지만 초인 소드마스터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거대한 드래곤이 아가리를 벌린 가운데, 두 명은 대전사가 되기 전의 옛날로 돌아왔다.
이 익숙한 상황에 그리움을 느낀 나머지 둘은 마음의 평안마저 되찾고 말았다. 느긋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악룡참수였나? 저 도마뱀들 베던 기술 이름 말일세.”
“그래, 보여줄까?”
가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반지성이 씩 웃었다.
어둠 속에 백색이 번뜩였고, 드래곤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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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차원문을 열어줄 대마법사가 있었으므로 굳이 수면까지 이 세계에서 취할 필요는 없었다. 둘은 잘 때만 아스에 돌아간 다음,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는 다시 이 세계에 들어와 수색에 나섰다.
이틀째, 이제는 아예 그리운 얼굴이 되어버린 신성한 괴물들과 맞닥뜨렸다.
혹시 놈들의 뱃속에 소년들의 영혼이 갇혀 있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마주치는 족족 모조리 썰어보았지만, 영혼 따윈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육백 년이 지나서도 뱃속에 영혼이 남아있을 수 있다면 모든 인간의 뱃속은 울부짖는 소와 돼지의 영혼으로 가득 찬 용광로쯤 되었으리라.
사흘째, 괴물들과도 마주치지 못했다. 심지어 드래곤이나 고대 신과도. 그저 어둠과 고요뿐이었다. 나흘째와 닷새째에도 마찬가지.
드넓은 어둠 속에서 둘은 계속 나아갔고, 지나치게 고요한 날 아니면 고대 신에게 쫓겨 달아나야 하는 급박한 날만이 이어졌다.
일주일째, 가온은 자신이 여기서 십 년 넘게 보내겠노라고 호언했던 것이 참으로 멍청한 짓이었다고 느꼈다. 시간 낭비하는 것에야 도가 튼 마당이었지만 정말로 아무런 소득이 없는 일에 시간을 쏟아붓는 것은 도저히 할 만한 일이 못 되었다.
그리고 열흘째 되는 날, 그제야 둘은 겨우 찾으려던 것 하나를 발견해내는 데 성공했다. 반지성은 눈을 크게 뜨더니 외쳤다.
“영혼일세. 인간의 영혼!”
죽은 지 오래된 소년의 영혼. 영능력이 뛰어난 사제요 반신만이 그 미약한 흔적을 알아볼 수 있었다.
차원문을 연 뒤, 가온은 간소하게 장례식을 치렀다.
아스 사제들의 장례는 산 자들이 아닌 죽은 자들을 위해 치러지는 법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신이시여, 재에 묻힌 불씨를 거두소서.”
가온의 인도에 따라, 영혼이 움직였다. 차원문을 빠져나가, 미지의 중력에 이끌려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이제 그 영혼은 아스로 돌아갔을 것이다. 자신을 이곳에 보낸 천상의 신들과 마주해, 그들의 멋쩍은 웃음 속에서 천국으로 승천할 것이다.
“이제 겨우 하나 건졌군. 주변에 다른 영혼은 없나? 죽을 땐 여럿이 같이 죽었을 텐데.”
반지성의 말에 가온이 고개를 저었다.
“없네. 역시 죽은 지 너무 오래라, 죄다 산산이 흩어졌나 봐.”
이로써 수색이 완전히 무익한 일은 아니란 사실이 증명되었지만, 막막한 일임은 변하지 않았다.
이 속도로 영혼 하나씩을 찾는다면 정말로 십 년은 족히 걸릴 터였다. 그리고 찾는 물건의 수는 정해져 있는 상황에 모조리 찾아야 한다면 그 수가 줄어들수록 찾는 시간은 훨씬 더 오래 걸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기어이 모든 영혼을 거두려거든 십 년보다 몇 배는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었다. 수십 년, 엘프와 반신에게도 지나치게 긴 시간이다.
희망을 갖고서 계속 찾아내자고 말하기도, 포기하자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에 둘은 말없이 계속 걸었다.
어둠 속을 나아가던 와중이었다. 또다시 파공음이 들렸고, 그것은 원시 드래곤의 출현을 의미했다.
반지성이 칼을 움켜쥔 그때, 과연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한 마리 드래곤이었다.
새하얀 검광이 그 목을 빠르게 베어버렸다. 숨 쉴 수 없게 되자 날갯짓도 더 할 수 없게 되었다······.
쿵, 하고 떨어진 드래곤은 목과 주둥이에서 피를 흘리며 꿈틀거렸다. 그 파충류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비난하는 듯한 그 눈,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낀 가온은 친구를 탓하듯 중얼거렸다.
“단번에 숨통을 끊어 놓지 왜 잔인하게 그랬나.”
반지성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그리고 목에서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널브러진 드래곤이 말했다.
「날 왜······」
그 순간 가온과 반지성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가온은 황급히 다친 드래곤에게 다가가 치유의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한편 반지성은 가져온 실종자들의 명단을 보았다. 그 명단에서 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혹시 이름이?”
드래곤이 대답했다.
「아스, 가론드. 아스가론드······」
천상의 과수원에 첫 감이 열린 이래, 드래곤들의 이름은 다섯 어절이었다. 그리고 아스가론드, 이 다섯 어절은 명단에 실려있었다.
“아스가론드, 1957년에 들어온······”
지금은 그로부터 육십 년은 넘었다. 그 세월에 곱하기 십을 해본 반지성은 기겁했다.
“육백 살이 넘었단 말인가?”
“아마도······.”
반지성은 충격을 받아 아스가론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답게 크기는 대단히 컸지만, 육백 년 된 드래곤다운 크기는 결코 아니었다.
바깥세상의 수백 년 묵은 드래곤들은 현실감이 없는 크기를 자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드래곤은? 딱 백 살이라 하면 믿을 만한 현실적인 크기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몸뚱이······.
나이만큼 성장하지 못한 것은 몸뿐만이 아니란 것도 곧 알게 되었다.
치료가 끝났고, 아스가론드는 대화할 기력을 되찾았다. 아직 통증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끙끙거리면서도 물어왔다.
「날 알아?」
“이제는.”
가온의 대답에 아스가론드의 파충류 눈이 빛났다.
「나도 널, 알아. 가온」
“날? 어떻게?”
「내 모범이잖아? 나보다 먼저 이 세상에 들어온······」
아스가론드는 반갑다는 듯 말하더니, 그 몸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비늘이 사라진 자리에 매끄러운 피부가 자라났다······.
폴리모프 주문. 이내 아스라론드는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자라난, 조그만 엘프의 모습이 되었다.
가온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소년? 소녀?
알 수 없었다. 어린 엘프의 성별은 쉬이 구분되지 않거니와, 그 폴리모프는 실로 불안정하여 배꼽이나 생식기 따위 세밀한 부분은 구현되지 않았다. 하기야 산 사람을 본 지 오래되었고, 이 드래곤의 기억은 실로 불안정할 터였다.
그리고 이 마법을 보고서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더.
‘드래곤들이 사용하는 폴리모프는 사용자의 정신연령을 반영하기 마련이지. 육백 살에 걸맞지 않은 어린애의 모습은 그 정신이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는 증거······.’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지난 육백 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묻혀 홀로 지내는 것은 정신이 성숙해지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혹은 드래곤의 굳건한 정신마저 유아기로 퇴행하기 충분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이 어둠 속에서 지내본 당사자로서, 둘은 그 사실을 다른 누구보다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