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장, 가온 - [2]
「대화라 하심은?」
“이 해골에 영혼이 깃든 건 분명한데 의사소통이 안 되더군. 같은 리치라면 정신적인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아서. 아, 이런 잡일을 부탁드리는 건 죄송스럽게 생각하오. 하지만 다른 리치에게 부탁하기엔 대마법사의 생존소식을 함부로 퍼뜨릴 수도 없으니······.”
이 리치 서기장은 대마법사의 근황을 잘 알고 있던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를 리치로 만든 것도, 그 해골에 불어넣을 원혼들을 가공해준 것도 이 카샤드였으므로.
「아, 괜찮아요. 괜찮아. 이 늙은이가 전하께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일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가온은 조용히, 카샤드가 해골에 손을 뻗어 거기 덕지덕지 달라붙은 원혼들을 떼어내는 작업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자신의 정신을 갉아먹던 원혼들이 모두 사라지자 비로소 대마법사는 누군가와 대화할 여력이 돌아왔다.
그 정신파는 리치답지 않게도 미약했다. 너무나 미약하여,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내면의 목소리. 가온은 그것이 대마법사의 목소리임을 알아들었다.
‘당신은······’
“가온. 후긴 엘 왕국의 적법한 왕위계승자 가온.”
‘당신을······ 압니다.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당신은 물론 저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려고 오셨겠지요.’
“아니. 기회를 주러 왔다.”
‘제게, 기회라 하셨습니까?’
“그래. 이대로 계속 살아있을지, 죽을지 고를 기회.”
이 언데드 해골 상태를 ‘살아있다’고 표현한 것이 맘에 드는지 카샤드가 정신적으로 웃었다.
대마법사가 물었다.
‘너무나 과분한 선택의 권리로군요. 대체 왜?’
“나는 네가 이미 그럭저럭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아니오, 저는 아직······’
“용서가 될 만큼 충분히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잘 지내는 내 다른 원수들에 비하면 이미 넘치게도 벌 받은 셈이지. 그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니 골라라. 이대로 계속 살아서 고통을 더 받겠나,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죽겠나?”
‘저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역시나 전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요즘에는 자비롭다 못해 호구라는 평을 듣는 편이지. 아예 마족에 붙어먹었단 말도 심심찮게 듣고. 왜, 이번에도 잘나신 가온 경께서 지나친 자비를 보인 것 같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것 같기도 하군요」
“뭐, 그럴지도 모르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가온은 해골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통일 테니.”
대마법사로서는 삶과 죽음 모두가 고통스러운 선택일 터였다. 살아서는 고문을 계속 받는 신세요, 죽어서도 지옥에 갈지언정 안식을 취하지는 못할 테니. 그만큼 이 마법사가 받은 원한은 지독한 것이었다.
카샤드도 이내 그 생각에 긍정을 표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확실히, 누군가에겐 생과 사가 동시에 괴로운 것일 수 있지요」
그리 말하면서 카샤드는 문 앞에 하인처럼 서 있는 노인을 보고 비웃었다. 경멸과 혐오의 정신파가 살짝 퍼져나갔다.
그 노인을 가온은 알아보았다.
‘조지 워커.’
리치가 되기 위해 서기장의 명에 따라 교황을 암살한 저 영국인 마법사는, 아직도 인간의 육신이었다.
보아하니 그렇게까지 해서 삶을 연명할 의욕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살하지도 않은 것을 보면 죽음 또한 두려운 것이리라.
그렇듯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고통일 수 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저런 사람들에게는······.
잠시 후, 대마법사는 선택을 마쳤다.
‘가온 전하. 인자하신 제안에 답변을 드립니다.’
“말해라.”
‘살려주십시오. 살려서······’
“살려서?”
‘저 역시 그 어둠 속에 넣어주십시오. 당신께서 오랜 시간을 보내셨던 그 땅에.’
“그 다른 세계에 처넣어달라고?”
‘예, 어둠과 시간만이 가득한 그곳에······.’
대마법사는 지금 가온과 그 소년들이 받은 고통을 자신 역시 겪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이 해골에 정신이 묶인 채,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 어둠 속에 갇혀있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굳이 잔인하게 굴고자 온 것은 아닌데. 더 큰 고통을 받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더 큰 고통이야말로 곧 절 위한 것일 것입니다, 전하.’
이해하지 못할 심리는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괴롭혀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심리, 죄책감에 익숙한 가온은 그것을 잘 알았다.
가온은 조금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전하.’
그것으로 대마법사와의 대화는 끝났다. 가온이 해골을 주워든 가운데,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카샤드가 정신적으로 비웃었다.
「이 못된 것이 분수도 모르고 귀찮은 부탁을 하는군요. 자신을 채찍질하여 속죄하는 수행자 행세라도 하려나 본데, 그런 식으로 자기만족을 할 것이면서 쓸데없이 고급스러운 채찍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제 주제를 안다면 똥구덩이에나 버려달라고 해야 마땅한데요」
“아니. 괜찮소. 서기장. 별로 귀찮을 것도 없어.”
「이럴 수가, 이 어찌나 인자하신 분이신지······」
“정말 귀찮을 것 없다니까.”
「그래도 그렇지 다른 세계에 넣어달라니, 너무나 번거로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 세계의 좌표를 구하랴, 차원문을 열랴······」
“물론 그건 전부 귀찮은 일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괜찮소······ 마침 그곳에 갈 일이 있었으니.”
그 말에 카샤드는 놀란 눈치였다.
「그곳에 다시 가시다니요, 어째서?」
“그게 말이오······”
조금 시간이 지나, 가온은 서기장과 헤어져 예히나탈의 거리를 걸었다.
그것은 언제나 우울한 일이었다. 망국의 주민으로서 행복한 나라를 걷는 것은.
예히나탈은 이번 사건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나라 중 하나였다. 참마황이 일으키려던 복수의 전쟁이 일어나든 말든, 예히나탈의 스켈레톤과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예히나탈에도 곧 일어날 대전쟁에 참전하려는 주민들의 의용병이 결성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저 장렬하게 전사하여 천국에 쉽게 가고 싶었을 뿐이지 별 대단한 신념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결국 전쟁이 무산되자 그들은 아쉬워하고 말 뿐이었다.
오히려 예히나탈로서는 전쟁이 무산된바, 예산을 아끼고 지구에 계속 언데드들이 양산해낸 공산품을 수출할 수 있어 좋을 것이었다······.
계속 걸으니 웬 건물의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광고가 걸려있었다. 여아용 장난감 광고였는데, 웬 소녀를 아역 모델로 쓰고 있었다.
그 아역 모델의 얼굴을 알아보고 가온은 놀랐다.
바로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으?”
「예, 가온 경?」
“봐라니가 길거리 광고에 보이는데 뭐냐?”
「아, 그거요으? 저번에 데뷔했어요으」
“데뷔? 배우로?”
「예, 춤추고 노래하는······ 사실 둘 다 아직 잘 못하는데 벌써 광고부터 받았네요으」
그러고 보니 그 애는 뱀파이어가 되면 TV에도 나올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가?
아마 그 바람을 알고 공산당에서 밀어줬으리라 추측했다. 재의 왕자와 관계가 있는 소녀를 지원하는 것은 이득이리라 생각했을 테니.
이후로도 요으는 한참이나 그 일을 곧 자기 성공인 양 자랑했다. 아역 모델이 워낙 좋아서인지 일본에도 새로운 수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느니, 어째서인지 일본의 여자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 남자들도 이 장난감을 불티나게 구입하고 있다느니.
“그래, 대단하네.”
「그렇죠으, 엄청 대단하죠으?」
“잘 됐고. 앞으로도 잘 됐으면 좋겠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말, 가온 경한테 직접 듣고 싶어할 거 같네요으! 예전부터 그 잘생긴 오빠 언제 오냐고 묻는데, 한번 만나러 와주시면······」
그 말에 가온의 표정이 굳었다.
“그 애한테는 미안한 일이겠지만, 굳이 만나고 싶지는 않아.”
「예? 아, 하기야 자주 만나면 정말 특별한 관계가 있는 줄로 사람들이 착각하겠지요으」
“그래. 내게 원한 있는 누군가에게 노려질 수도 있고 하니,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두는 게 좋아.”
사실 만나기 싫은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가온은 봐라니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봐라니에 대해 생각할수록 맘이 불편해졌는데, 그 소녀는 끝내 가온의 복수가 흐지부지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예전부터 가온은 집단과 그 구성원은 구분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구성원이 자기 집단에 계속 소속돼있기로 선택했다면, 그것은 곧 집단이 짊어진 원한 또한 계속 감당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논리에 따르면 프랑스가 자신에게 죄를 지었다면 프랑스의 구성원들을 벌하는 것은 정당한 일었다.
여전히 이론적으로는 그것이 옳다고 가온은 생각했다. 민주주의 아닌가. 자기네가 선출한 정부이므로, 정부가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구성원들이 짊어져야 마땅한 체재.
그러나 막상 실행에 옮길 때는 그 이론이 썩 도움 되지 않았다. 죄책감을 줄여주지 않았다.
가온은 자신의 원수로 존재하는 국가 셋,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후긴 중에 후긴을 가장 혐오했다. 다른 두 나라가 부추겼건 지원을 했건, 직접 그레이엘프들을 학살하고 능멸한 것은 후긴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죄로 고통스러워하는 후긴의 소녀를 본 그때, 가온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소녀의 경우엔 어떨 것인가?
그때라고 해서 즐거워할 수는 없으리란 걸 직감했으므로, 복수의 욕망은 그대로 남은 채 복수의 실행만이 흐지부지 보류되고 말았다.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예, 그럼 어쩔 수······」
“뭐 봐라니는 잘 지낸다 치고. 너도 잘 지내지?”
「당연하죠으. 가온 경은요?」
“나야 뭐······ 그럭저럭.”
목소리에 힘이 없는 걸 느낀 걸까? 요으는 난데없이 응원을 해왔다.
「힘내세요으. 경께서 뭘 하시든 존경해요으. 경 덕에 저랑 그 애는 행복해졌으니, 경께서도 행복해지시길 바래요으」
가온은 그제야 살짝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요으. 이 착한 녀석.”
그리고 가온은 텔레포트했다.
*******
별로 힘겹지 않은, 그저 머리만 조금 지쳤을 뿐인 업무가 끝난 뒤, 이복동은 회사 건물을 나섰다.
출근한 뒤에도 할 것이 많았다. 경비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으려면 육체적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한두 시간 정도 운동해야 할 것이다. 보너스까지 타려면 공부도 마저 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꽤나 즐겁게 느껴지는 일들이었다.
물론, 오늘은 그 일들을 조금 늦게 해야 했다. 앞서 한 약속이 있었으니까.
잠시 후, 이복동은 다른 두 명과 함께 술집에 앉았다. 조금이나마 웃고 있는 가온, 그리고 어색하게 안주만 끼적이는 지존무쌍이 보였다.
맨 먼저 입을 연 것은 가온이었다.
“그날로부터 한 반 년 지났나?”
“예, 아마. ”
“육 개월 만에 거리가 엄청 변했네.”
그 말대로 못 보던 것들이 잔뜩 보였다.
우선 검도 도장이 아닌, 검술 학원이 잔뜩 보였다. 이번 역사적 사건에 소드마스터들이 주목받았기에 새삼 아스적 초인이 되는 것이 매력적으로 여겨진 모양이다. 덕분에 맨드레이크도 불티나게 팔린다던가?
그리고 또한, 교회가 여럿 새로 생겨났다.
수험생들의 사랑을 받는 법과 지혜의 교회, 환자들의 기도를 받는 태양과 역병의 교회······.
기독교의 교회가 아닌, 아스의 교회들이 한국에 새로이 자리 잡았다.
대차원문이 한국에 새로 생겨난 바, 한국에 주목할 필요가 더욱 커졌기에 더 많은 아스의 교단이 진출해왔을 것이었다. 얼마 전 아스와의 전쟁이 정식으로 무산되었으므로, 한국인들은 그 이질적인 교회들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 교단 교회는 별로 안 늘어난 것 같냐?”
가온의 물음에 이복동이 대답했다.
“올해도 한국이 출산율 꼴찌니까 그렇겠죠? 아스랑 지구 다 포함해도 맨날 꼴찌잖아요. 결혼해서 애 낳고 잘 길러야 천국 간다는 교리가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죠.”
“아······ 그럼 저건 뭔데. 전쟁 신 교회 아니냐? 저건 또 왜 생겼냐?”
“아, 저거요? 저 교회는 군복무 경력 있으면 천국행에 가산점 준대서요. 나라에서도 군 가산점 없애는 마당에 딴 세계 종교는 챙겨준다며 남자들한테 인기 있네요.”
“아니, 씹······”
가온은 혀를 차면서도 이 현상을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저 이질적인 종교들을 더 많이 수용하는 것은 아마 한국의 국가정책일 것이었다. 저들의 신에게 잘 보임으로써 그들과의 마찰 가능성을 줄이려는 전략.
지구에 많은 신도들을 거느림으로써 그들과의 전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화로 교단의 경우를 볼 때, 그 전략은 아마 유효할 것이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아스의 종교들이 지구에 스며들 것이었다. 더 많은 아스의 검술과 마법이, 그 정신적인 것들이 전해져올 것이었다.
지구의 문물이 아스에 그러했듯이······.
한참이나 눈치만 살피던 지존무쌍이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안녕, 가온 씨······.”
“그래, 안녕.”
가온이 살짝 웃자 지존무쌍도 억지로나마 웃었다.
“나 여기 초대한 것도 그렇고, 이제야 용서해주는 거야?”
“아니.”
“그럼, 대체······”
“아주 용서한 건 아니고. 그냥 카톡 차단 풀어줄 정도는 돼.”
예전이었다면 노력하는 젊은이들을 기만한 이 중년 남자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개인적인 경험, 트라우마로 인한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그 화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은 것은, 그 트라우마가 조금이나마 해소된 덕분이리라.
지존무쌍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린 다시 친구인 건가?”
“글쎄, 친구라 해도 이제 현실에선 못 만날걸. 인터넷이나 게임에서도.”
“왜?”
“떠나야 하거든. 꽤 오래, 저 멀리.”
이윽고 술자리가 파했다.
가온은 자신과 인연이 있었던 이 남자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복동이? 요새 잘 지내고 있는데, 앞으로도 그러면 좋겠네. 그러면 잘 될 거야, 분명.”
이복동이 웃는 가운데, 가온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지존무쌍 아재? 빌린 돈, 안 갚아도 돼.”
그제야 지존무쌍이 반색했다.
“그거 정말 고맙······”
“용서한 거 아니야. 어차피 평생 다 갚지도 못할 것 같으니. 그냥 맘에서 지워버리고 맘이나 편해지려는 거지. 그러니까 지존무쌍?”
“응, 응!”
“반성해.”
그 말에 지존무쌍은 반성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반성하겠노라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이 진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건 가온은, 저 중년 남자가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것이었다.
어두운 요새에 갇혀있던 그 시절, 저 남자와 게임에서 어울리는 것은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그런 휴식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재기도 없었으리라.
그리하여 친구들과 헤어진 뒤, 가온은 그날 마지막으로 텔레포트했다.
고향으로.
우울한 회색빛 뱀파이어들의 왕국, 후긴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