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장, 가온 - [1]
미군이 아린 벌판에서 단계적 철수를 진행하기로 결정된 뒤, 실제로 삼 할의 병력이 지구로 돌아온 그 날, 뉴욕의 시민들은 철벅거리며 하수도를 기어 나오는 고블린들을 보았다.
그 조그만 종족은 쥐를 잡아먹으며 하수도와 지하철도에 숨어 살아오고 있었다. 대검과 권총으로 무장한 채, 적국의 도시에 은밀하게 잠복해 있었다. 다가올 전쟁의 그 날을 기다리며.
어느 산림관리인은 울창한 국립공원에서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우드엘프들을 보았다.
온몸을 녹색으로 위장한 채 컴파운드 보우 한 자루씩을 들고 있는 아름다운 엘프들. 저들이 여기 숨어있던 이유는 명백했다. 저들 또한 그 날을 대비하고 있었으리라.
그 혹은 그녀들이 유격전을 시작했다면 화살에 맨 먼저 꽂히는 것은 자신의 머리였으리라 생각하여, 절로 소름이 끼친 산림관리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런던의 시민들도 자신들의 도시에 있던 아스의 존재를 보았다.
그 노신사는 공원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신문을 읽다가, 예의 소식이 실린 기사를 읽었다. 그는 신문을 가지런히 접고는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드래곤의 거대한 육신을 드러냈다.
그 거대한 날짐승이 시계탑을 맴도는 동안 회색 건물들을 검게 물들이는 검은 그림자. 아무리 전투기와 방공체계들이 발달하여 드래곤의 처치가 것이 어렵지 않게 된 시대라 한들 그 갑작스러운 출현은 모두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어느 거대한 레드드래곤과 그녀의 공습을 기억하는 런던의 나이든 시민들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대체 왜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는지 의문을 품었다.
실제로도 경보를 울리고는 전투기들을 출동시키려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윗선에서 내려온 구체적인 지시는 그저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다. 그 드래곤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덧붙이며.
계속해서, 복수자들은 조용히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무표정한 복수자들. 그들은 자신들이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원문을 향했다.
그들이 이번 소식에 만족함으로써 투쟁을 그만두고자 귀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복수의 날을 기다리러 귀환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건 그들이 행진하는 동안, 지구의 뭇 국가들은 겸손해졌다. 각국은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군과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을 내렸고, 복수자들은 그 사이로 행진했다.
그리고 푸르게 일렁이는 차원문이 그들을 삼켰다. 스산한 기분으로 복수자들의 등을 쳐다보는 지구인들을 내버려 둔 채.
이날의 사건을 두고서 누군가는 정신승리에 불과하다고 조롱할 것이다. 기껏해야 테러나 벌이고 죽었을 판타지 세계의 얼간이들이 주제도 모르고서 잘난 척 군다고. 한 초인이 일방적으로 얻어낸 양보를 자기네 승리로 여긴다고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이날의 사건을 두고서 이번에야말로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여전히 그 판타지 세계의 주민들이 옛날을 잊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고, 그들이 언제든 자신들의 오만에 응징을 내릴 준비가 되어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설교할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의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후로도 양 세계 사람들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힘겹고 고달픈 그들의 일상은······.
*******
무더운 여름과 턱없이 짧은 가을마저 지나, 시린 겨울이 끝났다.
다시 봄이다.
이복동은 정장을 걸친 뒤, 넥타이까지 가다듬고는, 집을 나섰다. 흩날리는 벚꽃 사이로, 자신의 일터를 향해서.
수개월 전, 4판타지 온라인은 서비스를 종료했고 이복동은 백수가 되었다. 모아둔 돈이 수천만 원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복동은 절망했더랬다. 대학 졸업증은커녕 자격증 하나 없는 처지에 앞으로 일을 구할 일이 막막했던 것이다.
그때 걸려온 전화가 있었으니, 게임 속에서 자신을 고용했던 스폰서의 전화였다.
그녀는 앞으로도 자신을 고용하겠다고 말했다. 이복동으로서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리하여 이복동이 새로 출근하게 된 직장은 아스에 있었다. 카르세 연방의 도심, 그곳에 우뚝 선 마천루가 이복동의 새로운 일터였다.
그곳에서 이복동은 한 정체 모를 지하시설의 경비 임무를 맡았는데,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다보니 널널하다 못해 한가하기 짝이 없는 임무였다.
그 남는 시간에 스폰서는 이복동에게 웬 책과 노트북을 주면서, 공부할 것을 지시했다. 시험을 치르고 성과를 보인다면 보너스를 줄 거라고도 말했다.
대체 회사의 이득과 경비원의 공부가 무슨 상관인 걸까? 알 수 없었다. 당장에는 그저 월급을 받으면서 미래를 챙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저 스폰서와의 통화가 기억났다. 그녀는 어쩌면 오지랖이 넘치다 못해 인생의 낙오자를 보면 내버려 두지 못하는 괴벽이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에인션트 이복동을 만들고 싶은 것일지도······.
머릿속으로 온갖 망상을 하던 그때였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목소리에 이복동은 걷다 말고 자리에 멈춰섰다.
“잘 지내냐?”
이복동은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엘프가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지금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확실했다.
“가온······ 형?”
“그래, 복동이.”
“여긴 왜? 나 따라오고 있었어요?”
“응.”
“왜요?”
“그 게임 회사 찾아가서, 차기작은 꼭 여자 주인공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강력히 탄원하려는 거지. 나중에도 계속 거시기 달고 다닐 수는 없잖아?”
“예? 여자 주인공을 왜······”
“왜긴 왜냐? 거시기를 좋아하지 않는 정상적인 성 취향의 남자라면 모름지기 여자가 되길 소망해야 돼. 내가 게이도 아니고, 그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대체 왜 달고 다녀야겠어?”
이복동은 그 앞서나간 사상에 당황해야 할지, 아니면 저 유명한 엘프가 그따위 요청을 하러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기겁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쨌건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면 절대 믿지 않을 것이었다.
그 누가 눈앞의 헛소리꾼이 두 세계에 그림자를 드리운 거물이라 여기겠는가? 자신의 나라의 경우, 아예 이 엘프의 선택에 운명이 결정되었다······.
이복동은 황당함을 애써 참아내고서 말했다.
“죄송한데 차기작 계획은 없다고 아는데요. 애초에 가상현실 게임 서비스는 이후로 하지 않을 계획이라 들었고······”
“그건 알지. 농담이었어, 인마.”
“그럼?”
“너 보러 왔지 물론.”
*******
가온과 함께 걸으며, 이복동은 다시 한번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이 유명한 엘프와 알고 지낸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칫하다간 좋지 않은 꼴을 볼 수 있단 사실에 불안을 느껴야 할 것인가?
정말이지 이 엘프는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아스의 많은 이들이 이 엘프를 원망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암살 시도가 없었던 것은 반신 소드마스터를 암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지 그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뭐, 이 꼴을 보면 그 누구도 재의 왕자라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
인간의 모습으로 말 같잖은 소리를 마구 지껄이며, 한국의 대로변을 걷는 가온을 보고서 이복동은 그리 생각했다.
계속 걸으면서 물었다.
“저 보러 오실 시간이 있었어요? 바쁘실 텐데······”
“요새 바쁘긴 하지. 이런저런 일로.”
그 ‘이런저런 일’이란 이복동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양 세계와 거기 얽힌 온갖 커다란 일들이란 것을 이복동은 알았다. 그렇듯 눈앞의 엘프는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존재였다.
형처럼 반말해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으면서 다시 존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럼 왜?”
“앞으론 더 바빠질 것 같아서. 그나마 여유가 있을 때 만나려는 거지.”
“그거 영광이네요······ 그런데 저 지금 출근해야 하는데, 어떡하죠? 누가 만나러 왔는지 밝히고 휴가 낼 수도 없고······”
“그럴 건 없고, 저녁에 보자. 우리 게임할 때처럼. 지존무쌍 아재도 불러서.”
지존무쌍이 언급되자 이복동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아재랑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안 했어요? 엄청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도 그 양반 생각만 하면 울화통이 터지긴 하지. 나이 처먹고 할 짓이냐, 그게.”
“그런데도요?”
“그래도 계속 속에 담아두는 것보단 어떤 식으로든 끝을 내는 게 좋아. 그냥 죽여버리든, 아니면 싫어도 용서를 하든. 나 자신을 위해서······”
죽인다는 말이 나오자 이복동은 순간 새하얗게 질렸다가, 그래도 정말 죽이지는 않으리라 믿기로 했다.
“예, 그럼. 오늘 술 마시러 나오라고 부를게요.”
“그래. 그럼 일 열심히 해······”
그 대화를 끝으로 둘은 차원문을 통과했다.
한국에 생겨난 거대한 차원문. 누군가는 안보상의 중대한 위협이라 여기고 분노의 눈길을 보내며, 또 다른 누군가는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시장을 가깝게 하였다며 극찬하는 다른 세계의 통로였다.
둘 중 어느 평가가 옳건, 이 차원문의 존재가 한국인들의 삶 또한 크게 바꿔놓으리란 것은 분명했다.
둘은 그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갈라져서 자기 목적지를 향했다.
이복동은 카르세 연방에 있는 자기 직장을 향해서. 가온은 리치와 프롤레타리아들의 낙원, 예히나탈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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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이 다시 왔건만 국가차원의 거창한 환대는 없었다. 가온이 정체를 숨기고 왔거니와, 이 나라는 지금 그럴 만한 정치적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카샤드 서기장은 대뜸 사과부터 꺼냈다.
「귀하신 분, 왕림해 주셔서 이 천한 것은 정말로 영광인 줄로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독대만을 해야 하다니 모쪼록 용서해주십시오」
이 서기장으로서는 이 엘프를 너무 대놓고 반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신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고, 대부분의 신들이 이 엘프와 그 교단을 미워하는 지금은 싫어도 거리를 둬야 했다.
가온도 그 사실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오. 어차피 어려운 부탁을 드리러 온 처지에 이래라저래라 따질 수도 없고.”
「어려운 부탁이라니요?」
“이 해골, 알아보시겠소?”
가온이 한 두개골을 내려놓았다. 거기서 뿜어지는 안광, 그 영혼의 형태만 보고서도 카샤드 서기장은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대마법사로군요」
“그래, 이제 내 소유가 됐소.”
「예? 아, 이자에게 피해를 입은 당사자로서 권리를 행사하셨군요. 정말이지 잘된 일입니다그려. 참으로 기쁘고도 복된······」
“그래서 부탁 말인데.”
「예, 말씀하시지요······」
카샤드가 경청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가운데, 가온은 조금 주저하고는 말했다.
“이 해골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