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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4판타지-129화 (129/135)

소드마스터 가온 - [6]

하고가 피 흐르는 입을 우물거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했으므로 가온은 기다렸다.

하고는 피 기침을 하고, 숨을 돌려서 여력을 챙기더니, 애써 더듬거리지 않고서 이렇게 말했다.

“그저 죽인다고, 만족할 수 있겠나.”

예상 밖의 말이었다. 달의 여신에게 기도나 올릴 줄 알았는데.

“글쎄.”

“모르겠으면, 살리는 게 어떻소.”

“무슨?”

가온이 노려보는 가운데, 하고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역겨운 목숨이 연장되게 하시오. 이 지상에서 고통을 더 받게 해.”

비굴한 소리. 그러나 조롱할 맘은 들지 않았다.

가온은 저것이 목숨 구걸이 아님을 안다. 이 하이엘프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을 테니까.

대전사에 소드마스터씩이나 되는 엘프라니? 죽어서 달 여신의 최측근 자리가 예정된 작자 아닌가. 이 하이엘프에게 죽음이란 휴식 혹은 승천의식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자길 살려두란 것은 정말로 그쪽이 더욱 고통스러우리란 조언이리라.

마침 살려둔 채 고통을 받게 할 방법을 몇 가지 알고 있다. 이 하이엘프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미군에 포로로 넘겨버린다든가 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온은 칼을 들어 올렸다.

칼끝을 하고의 목에 겨누며 말했다.

“그것도 괜찮겠지만, 역시 이게 더 깔끔할 것 같군.”

“깔끔한 게 중요한가? 얼마나 더 고통받는가보다 더?”

“그래.”

“어째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너무 오래 갇혀있었다. 문밖으로 걸어 나갈 수 없었다.

그날의 패배와 굴욕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어서, 한 젊은이의 인생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젊은이의 인생은 막 시작하려던 찰나에 미완으로 남아버렸다.

어두운 요새에 갇힌 가온은 언제나 그 사실을 실감해왔다. 계속 갇혀있을 수는 없었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려면 암울했던 과거와 작별해야 했다.

작별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가장 확실하게 일을 끝낼 방법.

“재 속에서 불사조가 날아오르기 위해서······.”

“그래.”

가볍게 내뻗은 칼이 그 목을 찔렀다.

그르륵,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는 깔끔하게도 울렸다.

하고는, 지상에 남아있던 원수는 그렇게 죽었다.

시체 위로 마지막 달빛이 깔리도록 내버려 둔 채 가온은 뒤돌아섰다.

시체의 수습은 미국이 알아서 할 것이다. 시체를 연구자료로 가져가든,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고자 하이엘프들에게 온전히 반환하든, 이제는 가온이 알 바가 아니었다.

‘가온, 괜찮으냐?’

여신께서 말씀하시자 가온이 대답했다.

“예.”

‘속이 어떠하냐?’

“별거 없군요. 막 기쁘거나 하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허무함이 느껴진다든가 뭐 그런 것도 아니고······”

‘아니고?’

“일찍이 해야 했던 일을 늦게나마 끝냈다는 느낌이군요. 너무 늦었지만, 끝내긴 했습니다.”

동이 트고 있었다. 달이 희미해진 자리에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의 여신께서 어루만지신 듯, 가온의 잿빛 머리에 희미한 붉은 빛이 감돌았다.

‘장하다, 가온.’

가온은 비로소 하나의 일을 끝냈음을, 이제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았다.

다른 일······.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

4판타지 온라인의 서비스가 종료된 지금, 레드 드래곤 아타락시아의 회사는 한산했다.

가온은 인간의 모습으로 회사 건물에 들어섰다.

아타락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왔소?”

“예, 뭐. 애는 잘 크고 있습니까?”

“덕분에. 계속 그 애 곁에 남아있을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군.”

“그걸 목적으로 그런 건 아닌데.”

“아오. 그래도 고맙고, 약속은 지켜야겠지.”

일찍이 아타락시아는 자기 요청에 따라 참마황을 막아줄 경우, 대마법사의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니까 옛 원수의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그래서 대마법사 그놈······ 어디 숨어있습니까?”

“여기에.”

아타락시아는 검지로 바닥을 가리켰는데, 그 의미를 깨달은 가온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대마법사가 이 건물에 있습니까?”

“왜, 그런 거물이 머물기엔 너무 누추한 곳인가?”

가온은 그동안 그놈을 숨겨준 것이냐 따지려다 말았다.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신들도 대마법사가 은둔한 장소를 알고 있노라 했으니.

잠시 후 가온이 아타락시아를 따라간 곳은 회사 건물의 최심부였다.

봉인된 공간. 보안장치가 겹겹이 설치된, 벌레 한 마리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들어둔 시설.

남에게 함부로 보일 수 없는 무언가를 숨겨두고 있었다.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타락시아가 물었다.

“게임은 꽤 즐겼소?”

“예, 재밌었지요. 진짜 가상현실이라니 놀랍기도 했고. 그런 걸 아스에서 만들 수 있을 줄 몰랐는데요. 순수 과학기술로 만든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마법으로 되는 것도 아닌데······”

“마법으로 만든 것이긴 하오.”

“어, 정말 마법입니까? 제가 나름 마법에 조예가 있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군요.”

“모를 만도 하오. 웬만하면 접할 일 없는 리치들의 사악한 마법이니까. 원혼을 쓰는······.”

원혼?

그게 뭔지 물어보려던 차,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특수한 보안 절차를 또 거쳐서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잠시 후에야 둘은 건물의 최하층에 발을 디뎠다.

정체 모를 컴퓨터가 잔뜩 있는 시설이었다. 여기까지는 별로 특이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저 컴퓨터들 사이에 있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무언가······.

“자, 보시오. 저게 바로 가상현실 시스템의 중추요.”

아타락시아가 가리킨 것을 본 가온은 눈을 크게 떴다.

빛나는 해골.

웬 해골이 컴퓨터들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해골은 온갖 컴퓨터들과 전극으로 연결된 채, 영적인 푸른 안광을 뿜고 있었다.

저렇듯 안광을 뿜는 해골을 가온은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언데드 리치?”

“멋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두개골만 남겨둔.”

가온은 조금 기억을 더듬고는 저 해골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저번에 대마법사가 리치가 되어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했던가요? 그럼 저게······”

“그래, 저 해골이 대마법사가 맞소.”

“그래서 대마법사가 여기 왜?”

“생체컴퓨터? 아니, 언데드는 생체가 아니니까 그런 표현은 틀렸군. 아무튼 저 해골은 일종의 메인컴퓨터 역할을 하고 있소. 수많은 원혼들과 그들의 기억을 받아들여서, 현실과도 같은 환상을 구현하는······.”

가온이 흘긋 보니 웬 통에 희뿌연 연기들이 가득 떠다니고 있었다.

저것들이 그 원혼일 것이다. 대전쟁 때, 가온이 후긴에 귀환하여 학살을 벌였을 때, 기타 여러 이유로 죽은 자들의 영혼.

그 원혼들의 강렬한 기억을 저 해골에 주입하여, 가장 생생한 환상을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 가상현실의 원리라고 아타락시아는 설명했다.

“잘은 몰라도 원혼들의 가장 강렬한 기억을 계속해서 주입받는 것이라면······ 해골 입장엔 아주 고통스럽겠군요?”

“물론.”

“일부러 벌주려고 이러는 겁니까?”

“그런 목적도 있고, 실용적인 이유도 있지. 환상마법은 꽤 고등한 마법이잖소? 그 마법을 강제로 계속 쓰게 해야 하는데······ 수준이 높으면서도 극악한 죄인처럼 마구 고통을 줘도 무방할 마법사가 필요했소.”

그리고 확실히, 대마법사는 두 조건에 완벽히 들어맞는 존재였다.

약 백 년 전, 대마법사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양쪽으로 통하는 문을.

우주적 신비인지 저쪽 세계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이쪽 세계 사람들이 저쪽 세계에 주목했듯, 저쪽 세계 사람들도 이쪽 세계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아스는 전례 없는 침공을 겪었고, 대전쟁이 일어났으며 많은 이들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뀌거나 무너져 내렸다.

이 끔찍한 재앙을 일으킨 대마법사는 책임을 통감했다. 어떻게든 자기가 일으킨 이 사태를 해결해보겠다고 이런저런 일을 하고 다녔는데, 다른 세계에 일단의 소년 무리를 들여보내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여기와는 시간 흐름이 다른 세상이 있다. 여기보다 시간 흐름이 수십 배 빠른 세계가. 여기서 일 년이 그 세계에선 수십 년······ 그러니까 그 세계에서 일 년쯤 훈련해도 우리 세계에선 며칠 지난 셈이지.’

잔뜩 굽은 등, 움츠러든 어깨,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우울해 보이던 그 얼굴을 가온은 기억했다.

그 앞에 모인 소년들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불안만 심어줄 만한 얼굴. 그 표정이 앞으로의 불행을 암시한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마법사는 아스에 살아가는 모두의 증오를 한몸에 받고 있었으니까.

하기야 그 누가 이 세상 모든 비극의 원흉을 용서하겠는가?

게다가 이자는 가온과 그 친우들의 원수이기도 했다. 가온은 자신이 돌보던 인간 친구들을 기억했다. 그들의 죽음은 가온에게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복수하려거든 어찌해야 하는가?

“이 해골, 앞으로도 계속 이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실 예정입니까?”

“아마. 설령 가상현실 컴퓨터로의 용도가 다하더라도 다른 곳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험하게 쓰일 거요. 그게 이자가 신들에게서 받은 형벌이니까.”

가온은 물끄러미 해골을 바라보았다.

쉼 없이, 쉼 없이 원혼들이 그 안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들이 겪은 가장 강렬한 기억, 마지막 느낀 고통과 죽음의 순간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이 해골은 내가 맘대로 해도 되는 겁니까?”

“그렇소. 신들도 허락한 일이니, 원대로 하시길.”

그리 말하더니 아타락시아는 방을 나섰다. 숙고할 시간, 혹은 복수의 시간을 혼자서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화로의 여신께서 말씀하시었다.

‘잠시, 네 여신이 이자를 변호해도 되겠느냐?’

다름 아닌 이 대마법사를 변호하시겠다니, 여신께서?

신자로서 당황스러울 법도 하건만, 가온은 그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 말씀하십시오.”

‘그 마법사는 물론 용서받기 힘든 죄를 지었으나, 너희를 속여 그 끔찍한 세계에 가둔 것은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노라.’

가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신께서 계속 말씀하시었다.

‘너희가 간 세상을 기억하느냐?’

‘예. 신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고대의 존재들이 유폐된······’

‘오래된 신들만이 아는 감옥세계였지. 그리고 신들은 그곳이 병사들을 빠르게 키워내는 연무장으로 쓸 만할지도 모르리라 여겼노라.’

‘괴물과 고대 신들이 우글거린단 걸 이미 알았으면서도 말입니까?’

‘물론 네 여신을 포함해, 그곳이 지나치게 위험한 곳이라며 지적하는 신들도 있었다. 아이들이 순조로이 크기는커녕 모두 죽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을 신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천상의 신탁을 통해서가 아닌, 저 마법사에게 명령하여 그 세계로 통하는 차원문을 열게 하였나니. 그리하면 만약 실패하더라도 이미 컸던 저 마법사의 악명만 더욱 더하고 말 테니까 말이다. 아예 들어간 소년들의 영혼조차 건지지 못하게 될 줄은 신들도 예상하지 못하였지만······.’

그것은 고백이었다. 가장 오래된 불행 중 하나가 당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고백. 여신께서 설령 그 일을 반대하였다 한들, 천상의 대신격으로서 천상이 벌인 일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분의 고백을 들은 가온은 새삼 놀라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온을 보고 여신께서 당혹하시었다.

‘놀라지 않는구나, 어째서?’

“뭐, 짐작은 했지요.”

‘이미 짐작했었다고?’

“제가 그동안 괜히 땡강 부렸겠습니까?”

가온은 허, 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리 모성 넘치는 신이시더라도 한낱 어린애들을 챙기러 직접 오시는 건 과했으니까요. 그 정도로 책임감을 느끼셨다면 아마 아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짐작이 이제 확신이 되었으리라. 그래서 이제, 네 여신을······’

“괜찮습니다.”

‘더 일찍 말했어야 했노라. 누굴 원망해야 하는지 알려줬어야 했어.’

“그럼 땡강이나 더 부렸겠지요.”

‘네 여신이 만약 그 일로 후긴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괜찮아요.”

후긴의 인간 놈들은 원래 우리 왕가를 싫어했으므로 결국에는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느니, 어쩌느니 말하면서 가온은 어색하게나마 살짝 웃었다. 신앙하는 여신을 위해서가 아닌, 그 자신과 어머니를 위해서.

천상에서의 흐느낌이 내면에서 울리는 가운데, 가온은 다시금 대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 해골 주변에서 원혼들이 떠돌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원혼. 그 대부분은 대전쟁으로 말미암아 생긴 전사자들의 것이었고, 해골은 그 원혼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나, 아타락시아가 들어와 물었다.

“어찌할지 정하셨소?”

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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