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드마스터 가온 - [5]
“그러면 건투를 빕니다. 이번에야말로 모쪼록······”
미군에서 위성사진을 주기적으로 제공해주겠다느니, 목표가 보일 때까지 수송기에 태워주겠다느니 제안했지만 가온은 모두 거절했다. 이 복수는 개인적인 것이어야 했다.
하고가 있으리라 추정되는 IS 기지의 위치를 대략 전해 들은 뒤, 가온은 바로 추적에 나섰다.
텔레포트하기 앞서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하고는 미군을 상대로도 수십 년째 살아남은 베테랑 아닌가. 그가 도주하고 숨기로 마음먹었다면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니었다. 하고는 도주하려 하지도, 숨으려 하지도 않았다.
피웅덩이가 여럿 생겨난 군사기지에서, 하고는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아온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나?”
가온은 그 얼굴을 바라보기 전, 주변에 널려있는 시체들을 보았다.
깔끔하게도 머리가 잘려나간 중동인들의 시체, 정확히는 몰라도 아마 IS 대원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동맹을 돕겠답시고 결투를 훼방 놓지 못하도록 결투 장소를 미리 정리해둔 것일까?
가온으로서는 새삼 긍지 높은 전사의 자세라며 감탄하지도, 멋 부리는 위선자의 행동거지라며 역겨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멀뚱히 원수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이 유니콘을 다시 만나면 어떤 감정이 들지 의문이었지. 수십 년 동안 원한이 희석되어 의외로 무덤덤할지 모른다는 추측도, 게임에서처럼 억눌렀던 분노가 다시 치솟아 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했는데······.’
둘 다 아니었다.
극적인 감정 변화는 없었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가거나 머리에 피가 몰리지도 않았다. 게임에서나마 지겹게 얼굴을 마주치며 익숙해진 덕일까?
그렇다고 무덤덤하지도 않았다.
박동하는 심장을 느껴보니, 가온은 자신이 아주 멀쩡한 상태는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경이다.
흥분과 증오, 그리고 다시 질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공포가 뒤섞여서는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이 되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런데도 그럭저럭 침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온은 놀랐다.
덕분에 옛일을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친척 여인들의 잘린 머리를 떠올렸다. 그녀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동안 생긴 트라우마가 지금도 가온에게 남아있듯, 그때 그날의 굴욕은 지금까지 가온을 지배해왔다.
해내지 못한 복수를 떠올렸다. 동족들의 원수, 반세기 넘게 칩거하게 만든 근원이 눈앞에 있음을 되새겼다.
자신은 그 순간에 갇힌 죄수였고, 눈앞에 간수가 서 있었다.
“그래, 왔다.”
“원수를 갚으러 왔겠지.”
“그래서, 겁나나?”
“아니. 올 것이 왔단 느낌이로군.”
하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칼날을 닦던 헝겊을 던져버리자 초승달 칼날이 드러났다.
어두운 밤이었다. 달빛을 반사한 칼날이 은은하게 반짝이는 가운데, 하고가 몸을 데우고자 피워놓은 모닥불이 거세게 일렁였다.
두 여신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침묵이 흘렀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가온은 고까운 듯이 입을 열었다.
“훈수는 집어치우기로 했나 보지?”
가온은 저 하이엘프를 처음 마주쳤을 때 본 그 태도를 기억했다.
그때 학살자로서 하고는 사과하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한 가지 신념을 따라온 저 오만한 하이엘프는 제 행동에 일말의 오점도 없다는 듯, 지혜로운 현자가 학생을 대하는 양 설교했더랬다.
‘유감이오. 나이를 더 먹어보면 이해했을 텐데.’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것들이 있는 법이라느니, 그것들을 지키게 해주었으니 오히려 고마운 줄 알아야한다느니 지껄였던 것 같다. 오히려 굴욕과 분노를 키웠던 짓거리.
놀랍게도 지금 그러지는 않았다.
“내게 누굴 가르칠 자격이 없단 걸 아오.”
“그때와는 말이 다르시군. 왜, 그때 그 당당함은 어디 가셨나?”
하고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면 죽은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지. 그렇듯 긍지가 사라진 삶이 연장되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나 또한 결국 남의 운명을 결정하는 압제자에 불과했을지 몰라.”
지금 와서 죄를 인정하려는 건가? 설마.
가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용서를 비는 건가? 아니면······”
“사죄하면 용서해줄 거요?”
가온은 한숨 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저놈의 원수가 대체 왜 저리 변했는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지구인이 발 디딘 이래 아스인들의 삶은 급격한 변동을 겪었고, 수천 년을 넘게 살아온 엘프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므로.
세계수를 잃은 하이엘프들은 고향을 잃었고, 이대로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다.
새로워진 삶의 방식은 이전과 달라도 너무 달랐을 것이다. 계속해서 달라졌을 것이다. 만 년 넘게 살아온 하이엘프에게도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은 풍파로 다가왔을 것이다.
가온은 자신이 어두운 요새에 갇혀 지내는 동안 저 하이엘프라고 해서 즐겁게 지내오지는 못했으리란 것을, 그 역시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변화를 겪었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원수의 고통은 대개 희열이었으나, 이런 경우에는 동질감이 느껴지는 법이었다. 같은 병자끼리 느끼는 특유의 이입.
그리고 가온은 칼을 뽑았다.
“아니.”
가온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하고는 계속 불쌍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고가 초승달 검을 들어 자세를 취했다. 그 흉흉한 자세에서 방금 전 병자의 태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온도 싸울 준비를 했다. 심장 속 무형의 힘을 양어깨로, 양팔로 끌어냈다.
양손에 쥔 각각의 검에 힘이 깃든다.
재가 흐른다.
불이 휘감긴다.
둘은 서로 섞여서 소용돌이 친다.
양손에 각각 쥔, 재와 불의 검기가 어둠에 섞이고 빛난다.
이 놀라운 기예를 보고서 하고는 잠시 눈을 꿈틀거렸지만, 동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만 년을 넘게 살았고, 이런 일에 일일이 놀라기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하고도 자신만의 검기를 발했다.
그 칼끝에서 시작된 은빛이 이내 초승달 검 전체를 광원으로 만든다.
이 빛과 같은, 저 밤하늘의 광원.
저기 떠 있는 은빛 구체는 아스의 달이 아니다. 저 달의 주인은 하이엘프의 여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지구의 달 아래에서 요정의 칼은 달빛을 발한다.
“좋아, 이제······”
‘지지 말라, 가온.’
각자의 여신이 속삭이는 가운데, 소드마스터 둘이 결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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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이시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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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네 대전사의 구명(救命)을 요구하려거든 미리 하라. 그 심장의 피가 내 대전사의 칼을 적신 다음에는 너무 늦을 테니」
「아니, 되었소. 화로」
「승패가 어찌 나온들 승복함인가? 이 여신은 그리 깨끗하지 아니하여, 결과가 좋지 아니하면 구차하게 애원할 셈인데」
「그러시구려. 그러거든 받아들일 테니」
「그렇다면 왜? 그대 대전사가 필승하리라 자신하는 것은 아닐 것인데」
불과 화로의 여신께서 물으시매 달과 순결의 여신이 대답했다.
「내 대전사는 오래도 싸웠지. 이제는 내 곁에서 쉴 때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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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은 이 적수를 게임에서는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렇기에 승리의 확신 없이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여럿. 이제 가온은 그때보다 나은 검사요, 신체적이고 마력적인 능력에서는 비교할 수 없이 강대한 반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가온은 이 달빛 앞에서 위축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하고는 진지한 태도로 받아들인다. 가르치거나 봐주려는 마음 따윈 없이, 그간 싸워온 모든 경험을 끌어내 칼을 맞부딪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된 그 순간에는 그마저 오만이었음을 깨닫는다.
양쪽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급소를 노려오는 불과 재 두 자루. 양손의 검기.
그 놀라운 기예는 가장 강력한 마스터로 꼽히는 그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초승달에 재가, 불이 감겨 온다.
반격을 대항한 반격에 이어지는 또 다른 반격과, 미끄러지는 동시에 세차게 공기를 갈라오는 두 자루 칼날.
부드러우면서도 강맹하다. 끔찍하게.
그 검기가 발전한 것을 넘어 처음부터 다시 벼려진 것을 알 수 있다. 약간의 위기가 곧 죽음의 갈림길이다.
저 두 자루 칼의 맹공을 초승달 한 자루로 막아내자니 한 수 한 수가 절벽 끄트머리에서 춤추는 것과 같다.
그리고 하고는 계속해서 춤을 춘다.
재와 불, 두 자루 검을 쉽게도 막아내는 초승달 한 자루.
연격(連擊)과 역습이 계속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이득을 보는 것은 하고다. 이 젊은 도전자의 놀라운 발전이 지난 만 년의 경험을 완벽히 능가하지는 못했다.
가온의 노출된 팔과 다리는 계속해서 조금씩 베여 피를 흘린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듭한다고 이길 수 없으리란 것을 하고는 안다.
가온은 반신이다. 그 신체능력은 그야말로 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초인 소드마스터에게도 위협적인 요소다.
하고는 승률을 높이기 위한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여신께 승리를 기원하며 기도를 올린다.
“여신이시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달의 여신이 당신의 대전사에게 축복을 내린다. 지금 상대하는 반신과 비교할 만한 괴력을 선사하기 위해서.
하고는 달의 대전사이며, 달에게서 야성을 이끌어내는 수화(獸化)의 권능을 받았다. 그 하반신에 털이 뒤덮이고,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부드러웠단 발은 딱딱한 발굽이 된다.
사슴의 다리가 거세게 대지를 박찬다.
하고가 거리를 벌린다. 그러나 평범한 스탭이 아니다. 단 한 번 펄쩍 뛰어서 수백 미터 뒤로 이동했다.
도망친 것이 아니다. 거대한 도약을 위한 웅크림.
가온은 그것을 알고 다가올 충격에 대비한다.
과연 하고는 즉시 공격에 나선다.
사슴의 근육질 다리가 팽창하더니, 그 발굽이 마침 등 뒤에 있던 콘크리트 벽을 박찬다.
그 반탄력이 어마어마하다.
하고는 마치 로켓처럼 쏘아진다.
지상 위 1미터 높이에서 일직선으로, 똑바로 앞으로 발사된다.
가온이 보기에 그것은 은빛 미사일이 똑바로 날아오는 것으로 보인다.
시야가 눈부신 달빛으로 가득찬 그때, 가온은 눈을 감지 않고 눈앞에 휘둘러진 초승달 검에 자기 칼을 가져간다.
달빛과 불꽃이 마주쳐 찬란하게 폭발했다.
방어 성공. 가온이 반격으로 넘어가려던 그때, 하고의 몸은 충돌의 충격으로 잠시 공중에 붕 뜬다.
그 순간 사슴의 하반신은 놀고 있지 않다.
하고는 공중에서 다리를 쭉 뻗어 짐승과 같은 발길질을 갈긴다. 음속으로 날아온 발톱이 가온의 배를 피할 수 없는 거리에서 노려온다.
이 변칙적인 공격을 가온은 이미 예상했다. 그놈의 게임에서 지겹게도 겪어본 덕분이다.
해법은 간단하다.
“어······”
그제야 하고의 눈에 놀라움이 스친다.
공격이 허망하게 실패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먹혔다.
가온의 배를 관통한 사슴의 다리. 단순한 발길질이라기엔 너무 강력한 힘이 깃들어있었던지라 목표물을 날려버리지 않고 아예 뚫어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이것만으로도 이미 승리겠지만, 반신은 고작 배가 뚫렸다 하여 죽지 않는다. 소드마스터의 전투감각이 미처 읽어내지 못한 정보다.
과연 가온의 눈은 여전히 생기가 넘친다.
하고는 황급히 다리를 회수하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대로 가온이 쌍검을 휘두른다.
왼손에 든 불꽃검, 아직 배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사슴의 다리를 노린다. 붉은 궤적을 그리며 나아간다.
하고의 초승달 검은 그 궤적에 끼어들지 못한다. 하고의 검은 재가 흩날리는 검을 막기도 벅차다.
끝내 목표물에 닿은 불꽃검은 사슴의 허벅지를 잘라버렸다.
“억······.”
절단면에서 피는 솟구치지 않는다. 끔찍한 열기에 피는 증발하고 상처는 익어버렸다.
하고는 가까스로 비명을 참는다.
쇼크를 억누르고, 남은 다리로 펄쩍 뛰어 황급히 거리를 벌린다. 역시나 그 도약력은 탁월하다. 단번에 이십 미터 뒤로 이동했다.
하고는 잘린 다리를 얼른 치유하기 위해 달의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시여······”
한편 가온도 몸이 성치는 않다. 아직도 배에 꽂혀있던 사슴의 다리를 뽑아내자, 큼지막한 구멍에서 피와 장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는다. 온몸이 신성으로 가득 찬 반신은 자신의 재생력을 믿고 달려든다.
가온이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그 몸이 복구된다. 찢겨나간 내장이 도로 차고, 그 위에 살이 뒤덮인다.
하고의 잘린 다리도 벌써 새 살이 돋고 있지만, 여기 반신에 비하면 늦다. 너무 늦다.
하지만 마지막 저항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아직 한쪽 다리나마 남았으니.
가온이 막 그 앞에서 칼을 휘두르던 그때, 하고는 아직 남아있던 다리로 땅을 박찼다.
그 몸이 저 위로 솟구쳤다.
목표물을 놓친 가온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
또 하나의 달이 지구의 밤하늘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그 달빛이 더욱 커졌다.
가온은 양손에 쥔 칼을 들어, 추락하는 달과의 충돌에 대비했다.
*******
수십 년 만에 재개된 싸움은 오래 끌지 않았다.
하고는 땅을 구르며 입에서 피를 토했다.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가,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았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사이렌처럼 위험 신호를 울려대고 있었다.
하고는 달의 여신께 치유를 청하는 기도를 올리려다 그만두었다.
그 얼굴에 그림자가 깔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앞에 가온이 서있었다.
자신이 잠시 정신이 혼미했던 사이에 텔레포트해서 거리를 좁힌 모양이다.
하고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초승달 검을 휘두르려니, 이미 유리한 고지에 있던 가온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살짝 재의 검을 휘둘러 그 손목을 잘라냈다.
팔에서 벗어난 초승달 검이 저 멀리 날아가 땅을 뒹굴었다.
이윽고 거기 깃들어있던 달빛이 사라지자, 낡고 금 간 칼 한 자루만 바닥에 남아있었다.
하고는 다른 팔이라도 써서 저항을 시도하려다가, 그쪽 팔은 이미 잘려나간 지 오래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더는 칼을 쥘 신체가 없었다.
그제야 하고의 움직임이 멈췄다.
한편 가온의 온몸은 여러 부위가 썰리고 썰려 피투성이였지만, 지금은 이미 멀쩡했다.
덕분에 물끄러미 패배자를 내려다볼 여유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