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드마스터 가온 - [4]
잠시 침묵이 흐른 끝에, 한 기자가 물었다.
“그러니까, 참마황이 일으키려던 전쟁을 기어이 다시 일으키실 작정이란 말씀입니까?”
가온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기자는 연이어 물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화로의 대전사께서는 복수고 뭐고 포기한 것 아니었습니까?”
날 선 질문. 소드마스터요 신의 대전사를 상대로는 지나치게 무례하다. 일찍이 참마황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던 모양이다.
옆에 선 기자들이 기겁한 가운데 가온이 대답했다.
“아니. 복수는 여전히 내 권리다. 그리고 권리와 의무 모두 내 것이다.”
“그래서 카르세 대통령 선거에라도 나오실 겁니까? 그리고 최고통수권자로서 카르세 군대를······”
“아니. 아린 벌판을 돌려받는 데 군대씩이나 필요하지는 않다.”
그리 말하더니 가온은 사라졌다. 텔레포트.
당황하던 기자들의 카메라는 아린 벌판을 향했다. 그 역사적인 제국의 변경으로.
아린 벌판의 중심에는 양 세계를 잇는 거대한 문, 대차원문이 일렁이고 있다.
그 주변으로는 지금 거대한 미 군사기지가 자리 잡았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을 위시한 지구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아 방위하는 영역이다.
당연히도 아스인들은 이 시설을 혐오했다. 미 주둔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 정부가 주장하기로는 아린 벌판은 카르세 민주주의 혁명 당시 정식으로 양도받은 영토이므로 그곳의 군사 주둔은 합법적이라는 것이었는데,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지구 서방세계의 입장에, 대차원문과 그 주변 영역을 확보하는 것은 안보상의 문제였다.
이 거대한 문을 잃는 순간 지구인들은 아스인들의 일방적인 공격에 노출되는 것이다. 과도할 만치 예산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에는 아직 차원문 기술이 없다.
미국에서는 주둔군을 철수할 테니 차원문 기술을 양도하라 요구했지만 이번에는 카르세 연방에서 거부했다.
카르세인들의 입장에 카르세 민주주의 혁명이란 그저 미국의 간악한 공작이 이루어낸 결과였으므로, 지금 미군의 군사 주둔은 무단점령에 불과했다. 그리고 침략자들과 협상하는 것은 일종의 배교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양쪽 군대가 불편한 대치를 이루는 가운데, 종교적 신념에 가득 찬 아스인이 자살폭탄 테러나 마법 테러를 벌여 순교하는 경우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도 아린 벌판 내 미 군사기지의 경계는 지극히 삼엄했으며, 심지어 기지 내부에는 그 비싼 텔레포트 방지 유물까지 여럿 깔려있었다.
그래서 가온도 그 군사기지에 직접 텔레포트하여 나타날 수는 없었다.
가온은 아린 벌판의 적당한 위치에 나타나서는, 벌판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 순찰대는 저 멀리서 단 한 명을 마주쳤음에도 긴장해야 했다.
그들은 바로 기관총을 쏴 갈기고픈 욕망을 느끼며 외쳤다.
“멈춰! 멈추지 않으면 쏜······”
그러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 병사가 바로 쏘지 않은 것은 저 멀리서 휘날리는 회색 머리칼을 알아본 까닭이었다.
아스는 물론 지구에도 유명한 저 엘프.
“가온 경? 여긴 왜······”
기겁한 미군 병사가 외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온이 걸었다. 저기 보이는 군사기지와 대차원문을 향해서.
기어이, 가온은 모든 경고와 방해를 무시하고 기지 내에 들어섰다. 그러면서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시여.”
여신님의 권능이 기지에 넘치도록 퍼져나갔다.
기지 내 거의 모든 군사 장비가 무력화되는 가운데, 발전기조차 작동을 멈추고 고요해졌다. 밤중이었으므로 조명등마저 꺼지고 말았다.
만약 사단 하나라도 끌고 왔다면 이 무력화된 기지를 점령하기 어렵지 않았으리란 생각에 모두가 공포를 느끼고 침묵했다.
한편 이 엘프를 상대로 유효한 장비는 많지 않았다. 신의 지팡이를 제외하고도 이 엘프를 상대할 만한 병기들, 예를 들어 수 킬로미터 바깥에서 수십 미터 범위에 화력을 퍼붓는 전투기 등이 개발되기는 했지만, 그런 무기들이 저 엘프를 향해 사용되는 순간 전쟁이었다.
그리고 초인 독재자가 물러나 겨우 전쟁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며 지구인 거의 모두가 기뻐하던 지금, 그들은 직접 전쟁을 이끌어낼 마음이 없었다.
지구와 아스의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여기 집중된 가운데, 긴장 상태가 이어졌다.
여전히 전쟁을 바라던 아스인들은 저 멀리서 포성이 울려 퍼지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지구인들이 다시 생필품 사재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시점에, 가온이 입을 열었다.
“대화를 하지.”
자세한 협상 조건이 곧 상부에 전달되었다.
가온은 화로 대전사의 자격으로 회담을 요구했다. 그 회담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이 기지와 관련된 다른 국가의 대표자들까지 나오도록 초청되었다.
심지어 한국마저도. 아린 벌판에 군을 주둔한 적이 없으며 관련된 적도 없는 그들마저 회담에 나오도록 초청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이 엘프가 뭘 제안하려는지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지구의 초강대국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이윽고 대차원문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번듯한 양복을 입은 미국인.
저번에 말레키스 공화국에서 본 얼굴이었다. 미국을 대표해서 나온 그는 정중히 허리 숙이며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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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차원문이 닫힌 뒤, 아스의 소드마스터며 드래곤들이 일방적으로 지구를 습격해오리란 것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적의에 가득 찬 그들이 당장 공격해오지 않는 것은 반격을 걱정해서이지 싸움을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므로.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아스의 신들과 연결되는 통로가 남아있기를 원했다.
그런 이유에서 대다수의 지구인들은 어떻게든 양 세계가 계속 이어져 있기를 원했다.
그리고 군대를 투입할 수 있을 만치 거대한 차원문은 본디 단 하나뿐이었지만, 얼마 전 하나가 더 생겨난 바였다. 모두는 그 점에 주목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 새로이 생겨난 거대 차원문만을 유지하자는 것이지요? 아린 벌판의 병력은 물리는 대신, 그곳 차원문에서 방위를 하고······”
그로써 카르세 연방은 옛 영토를 돌려받을 것이다. 아스와 지구는 여전히 이어져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예전에도 해본 논의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중단되었던 논의였다.
한반도에 생겨난 대차원문은 이미 카르세 연방이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에 미국이 군사력을 직접적으로 투사하기는 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대차원문을 믿고 아린 벌판에서 병력을 철수했다가는 오히려 불리한 입장에서 공격받으리란 우려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논의를 다시 할 수 있는 것은 적의에 가득 찼던 초인이 물러난 지금뿐이었다. 겨우 전쟁 가능성이 줄어든, 적어도 당분간은 평화 분위기가 이어질 듯한 지금뿐.
논의가 이어진 끝에, 돌아온 대답은 승낙이었다.
이제 미군은 아린 벌판에서 철수할 것이다. 그 대신, 한반도에 생겨난 대차원문 근처로 주한미군이 늘어날 것이다. 주변국의 눈치를 봐야하므로 충분히 늘리지는 못할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양보를 한 셈이다.
“평화를 향해, 축배를!”
그리 협상이 체결된 이후로도 그들은 논의가 계속되는 척 시간을 끌었다. 가온은 다시 아린 벌판에서 무력시위를 벌였고, 그에 맞서 미군은 팽팽한 대치를 하는 척했다.
화로의 대전사가 마족들과 협상을 한 것이 아니라 양보 혹은 굴복을 받아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그 체면을 높여줌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높여주기 위함이다. 전쟁을 피하려는 미국으로서는 좋든 싫든 이 주화파의 지도자쯤으로 부상 된 이 엘프를 밀어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알 만한 사람들은 당연히도 이게 일종의 쇼라는 것을 알 것이다. 많은 이들은 이 사실을 알고 냉소를 보낼 것이다. 절반가량의 사람이 찬양하는 가운데, 약 아스의 절반 가까운 인원이 비웃을 것이다.
물론 지구인으로서는 이 결정을 반겨야 했다.
결국 며칠이 지나, 쇼였던 대치마저 끝난 뒤, 일종의 축하연을 겸하는 회담이 다시금 열렸다.
그 파티에 참석한 한국의 국회의원 엄근오는 이제 아주 익숙해져버린 이 엘프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경! 정말로······”
그리고 가온이 대답했다.
“됐네. 알잖나?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지. 사실 귀국과 내가 아무 관련이 없었던 일도 아니고.”
“예, 뭐. 친우 분께서 이리 깊이 관련되었을 줄은······ 지금까지 제가 친우 분과의 우정을 들어 뭔가 부탁할 때마다 많이 황당하셨겠군요?”
“그보다는 답답했지. 속이 쓰리기도 했고. 그러니 굳이 감사할 건 없네. 어차피 이번에 한국에서도 양보한 셈 아닌가? 아린 벌판의 대차원문이 사라지고 한반도의 차원문만 남을 경우, 아스인들이 공격해올 통로는······”
“뭐,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요. 덕분에 수출을 쉽게 할 수 있게 되어 경제적 이득도 볼 테고······”
아마 한국 정부로서는 이 엘프에게 크게 빚을 진 마당에 차마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개인과의 빚이라 할지라도 무시했다간 큰일 난다는 교훈을 얻은 마당 아닌가.
“그리 생각해준다면야 고마운 일이고, 아무튼 그렇다면······ 이로써 빚은 없는 걸로 하지.”
“정말이지 고마운 말씀입니다! 정말이지 관대한······”
“괜한 칭송은 됐다고 하지 않았나?”
가온의 말에 엄근오가 말했다.
“그렇다면 칭송이 아니라 축하를 드리고 싶습니다.”
“축하를?”
“예, 진실로 축하드릴 일입니다! 단순히 전쟁을 피해간 한국인이나 화로의 교도로서가 아니라, 저 개인으로서도 축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전보다 지금이 훨씬 맘이 편해보이시거든요.”
“그런가?”
“예, 정말입니다. 그동안은 무표정하신 와중에도 불편해보이셨는데, 지금은 약간의 웃음기마저······”
그리고 다음 순간, 엄근오는 놀랐다. 가온이 웃었다. 엘프답게도 경쾌하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카메라에 찍히지 않도록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엄근오는 이 엘프가 웃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다.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 그러니까 이 엘프가 게임에서 대단히 웃긴 양반이었으며 대외적으로 엄격하고 근엄하게 구는 것은 분명 다 연기일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어볼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기껏 편해졌던 맘을 다시 불편하게 하는 자들이 보였다. 이곳을 기웃거리는 사람들.
“영국과 프랑스 대사들이군. 그래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겠다, 이젠 어쩔 거냐고 묻고 싶은 모양인데······ 말 붙여보게 도와달라고 하면 거절하게.”
“예, 그러지요.”
그 대화를 끝으로 가온은 저기 서 있던 미국인 대사를 손짓하여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내게 협조하겠단 제안은 변함이 없나?”
미국인 대사는 반색하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하고와 관련된 일입니까?”
“그래.”
“물론, 미국은 그 테러리스트의 퇴치를 어떤 식으로든 도울 것입니다.”
“다른 도움은 필요 없고, 그놈 있으리라 추정되는 위치나 말하게.”
가온은 그 대화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엄근오도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는 놀라서 물었다.
“벌써 복수에 나서실 생각입니까?”
그리고 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시일 내에 과거와 관련된 모든 일을 정리하기로 여신께 맹세했거든. 구체적으로는 한 달 내로 말일세.”
“그래도 한 달은 너무 짧지 않습니까?”
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멈춰서 있던 기간이 너무 길었네. 더는 그럴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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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한 여자의 무덤을 본다. 살려달라 애원해도 기어이 베어 죽인 여자 의사의 무덤이다. 아스의 풍습이 아닌 지구의 풍습대로 시체를 매장했다.
그 무덤을 볼 때마다 하고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마다 자신이 한 일, 그리고 그 전에 한 일을 생각했다.
물론 하고가 그따위로 감성적으로 구는 것을 IS 대원들은 반기지 않았다. 미국 여자 하나 가지고 저러다니?
IS 대원들은 이 무덤을 기지에서 치우고 싶어했지만 하고가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그것이 일종의 불만을 표하는 것임을 알 만했다. 그날 이후, 하고와 IS 대원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래도 아직 아군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그들이 하고를 위해 무언가 경고해주기는 했다.
“가온이 여기 접근한다고?”
IS 대원은 그렇다고, 어서 싸울 준비를 하라고 경고했다. 마치 이쪽이 패배할 것이라 생각하는 양 불안한 얼굴로. 하기야 얼마 전 그 회색 엘프가 미 서방세계를 기어이 밀어낸 것처럼 보인 마당 아닌가. 이 하이엘프가 세 번이나 이긴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 강대함을 확인한 마당에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고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하고는 그저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군.”
하고가 초승달 검을 들었다.
경고를 마친 IS 대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생각했다. 얼른 다른 대원들과 함께 이 기지에서 피난해야겠다고. 초인들의 대결에서 벗어나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그때, 대원의 바로 눈앞에서 달빛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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