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124화 (124/135)

소드마스터 가온 - [1]

결국 김일성이 우승 보상을 받은바,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엘프가 탄생했다.

김일성이 하이엘프가 되는 과정에서 원래 얼굴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아마 김일성은 모습이 지나치게 바뀔 경우 이전과 동일인물인지 의심받음으로써 권력에 지장이 올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을 것이다.

그렇듯 얻을 수 있었던 아름다운 외모까지 포기했으니, 이것은 김일성이 앞으로도 영원히 북한을 지배하리란 의지를 강력히 보여주는 셈이었다.

한반도의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통탄할 만한 일이었지만, 당장은 애써 그 사실을 즐거워하기로 했다.

다른 세계의 초인 독재자가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북쪽 독재자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

기어이 4판타지 온라인의 서비스가 종료되었지만 게이머들은 다시 만났다. 승리를 축하하는 뒤풀이 파티였다.

서로 안면이 있었던 게이머들이 만나서는 간소하게 술잔치를 벌였다. 4판타지 온라인의 주요 인사들이 죄다 모여있었다.

“좌우합작이 성과를 이루었다!”

마주 앉은 류시범과 강주석을 보며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이복동도 이 자리에 껴서는 조용히 술을 홀짝였다. 그 역시 이 자리에 당당히 낄 만한 공적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최고 공로자는 여기 보이지 않았다.

“우리 가온은? 헹가래 백 번 해줘도 모자란데 여기 안 왔어요?”

이미리의 물음에 이복동이 대답했다.

“할 일이 있다네요.”

“뭐, 하기야 엄청 바쁘긴 하겠네. 소드마스터씩이나 됐으니. 게임 친구들이나 보러 나오란 것도 좀 그렇다.”

그리고 강주석이 끼어들었다.

“그게 아니라, 딱히 축하할 일이 아니라 생각해서 안 나오는 걸지도······.”

“예?”

“그 양반, 이거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주장해왔잖아요. 그래서 안 도와주겠다고 뻐기다가 겨우 도와준 거고.”

류시범이 울적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쓸데없는 짓이라······”

뭐, 다들 참마황이 이번에 게이머들이 벌인 일로 말미암아 당장에 화병에 걸려 쓰러지거나 내일 바로 노환으로 죽어버리는 극적인 전개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모두 헛고생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은 역시 우울해지는 일이었으므로, 이후로는 모두 그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떠들고, 서로를 칭찬하다가 작별했다.

이복동도 기분 좋게 취해서는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나흘 뒤 오후였다. 이복동은 집안에서 생각했다.

‘조금 덥네······’

아직 여름이었다. 걱정했던 폭서는 지나갔지만 아직은 습기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에어컨을 켤 엄두는 나지 않았다. 4판타지 온라인은 서비스를 종료했고, 이제 이복동은 정말 실업해버린 것이다.

앞으로는 다시 쪼들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와중에 사치를 부리기는 껄끄럽다.

아니, 이런 우울한 생각을 그만두자.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TV를 틀었다. 오후 뉴스가 방송 중이었는데, 이복동은 채널을 돌리지 않았다. 뉴스에서 자신들의 활약을 모두에게 알려주기를 내심 기대했다.

고작 게임에서 벌어진 일을 무슨 역사적 위업인 양 방송하긴 좀 그렇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때였다. 긴급속보 안내가 나오더니, 웬 이국적인 여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치가 떨리는 남조선 마족들에게 고한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이복동은 경악했다. 카르세 연방 중앙방송의 아나운서였다!

저 여자가 TV에 나올 때마다 안 좋은 소식이 전해지곤 했는데, 이번에도?

과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카르세 대통령의 뜻을 충실히 대변하는 그 방송인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마치 오크처럼 포효했다.

「너희 마족들은 참마황 폐하의 질문을 기억할 것이다!

곧 있을 성전에 동참할 것인가, 아닌가?

자애로운 참마황 폐하께서는 이 거룩한 질문에 대답할 기한을 한 달이나 주시었다. 한 달이나!

그것은 깊이 숙고하여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자비였으나, 너희는 그 감격하여 울면서 소중하게 써야 했을 그 기한을 하찮은 수작질로 낭비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참마황 폐하께서는 너희 마족들의 어리석음에 깊이 통탄하시었으니, 결국에는 너희에게는 그저 과분했던 자비를 거두시기로 하셨다.

그러니 이제 너희에게 주어진 기한은 한 달이 아니다.

단 이틀, 이틀이다!

내일 정오까지, 앞서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너희는 확실하게 내놓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중립은 용납할 수 없다. 방관도 용납할 수 없다. 아군이거나 적이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

너희의 결정이 현명하지 못하거나 대답을 내놓지 못할 경우, 참마황 폐하께서는 즉시 너희에 대한 징벌에 나서실 것이다! 자비는 이미 충분히 베푸셨으니, 더는 없을 것이다!」

저 방송은 지금 카르세 연방의 군사행동을 암시하고 있었다. 다가올 대전쟁에 자기편이 되지 않겠다면 바로 쳐들어오겠다는, 외교라 불러주기도 껄끄러운 협박.

‘미친······’

방송이 종료된 뒤, 이복동은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때문인가?’

엘프가 되지 못하게 방해한 것이 저 초인 독재자를 지나치게 자극한 것일까?

그러니까 그들이 벌인 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리란 그 엘프의 말이 옳았나?

불안으로 가슴이 쿵쾅거리는 가운데, 방음이 좋지 않은 다세대 주택답게 옆집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씨바아알!”

이번 방송이 어지간히도 충격을 준 모양이다.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람들은 바로 건물에서 뛰쳐 나와 가게며 편의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상점들의 주요 생필품들은 죄 바닥난 지 오래지만, 새삼 사재기할 필요성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이복동도 그들의 행동에 동참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럴 의욕마저 없었다.

우울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축 늘어져서는 베개에 얼굴을 박으려던 와중이었다.

“방가방가.”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

이복동은 기겁하면서도 누가 침입했는지 알아챘다.

“가온 형?”

텔레포트를 마친 가온은 어색하게 웃었다.

“문 열어달라 요청도 안 하고 멋대로 들어왔지만 괜찮지?”

이복동은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예? 뭐······ 그래서 여긴 왜요? 바쁘다면서. 파티에도 안 끼더니······”

“그냥 우리 복동이 보고 싶어서 왔지. 그런데 왜 갑자기 존대하냐?”

“아니, 그게······”

지금까지도 소드마스터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웠건만, 이제는 정말 소드마스터가 되어버린 엘프 아닌가. 완전한 초인임이 드러난 저 남자를 상대로 편히 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가온은 이복동에게 친한 형으로 생각하라느니, 말 놓으라느니 하는 말들을 다시 해야 했다.

그러고서 물어보았다.

“아무튼 복동이, 엄청 우울해 보이네. 그간 멋있게 활약 했더만 왜 축 늘어져 있어. 번아웃? 뭐 그런 거냐? 아니면······ 뉴스 때문이야?”

“예, 뭐.”

“하기야 심란하겠네.”

“심란할 것까지는 없고······”

이복동은 엄청나게 심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전쟁 나는 것도 차라리 괜찮지 싶을 정도네요. 어차피 난 이대로 내리막길 인생인 거, 다 같이 좆되는 것도······”

가온은 그게 무슨 심보냐며 핀잔하려다 그만두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기보다는 너무 우울하여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지금 절망하다 못해 염세적이 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모든 노력이 헛짓이었음이 드러나면 저렇게 되는 법이다. 일찍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가온은 새삼 동병상련을 느끼며, 일부러 기운찬 목소리로 떠들었다.

“아니, 자식이! 젊은 놈이 말이야. 벌써 인생 망한 것처럼 굴어도 안 돼, 안 돼? 야 인마, 옆에서 보기엔 엄청 한심한 거 알지?”

“알지······.”

“내가 뭔가 설교를 하고 싶은데, 내가 나은 점이 딱히 없어서 그럴 수는 없네? 미치겠다.”

“나보다 나은 게 없다니, 그건 또 뭔······”

“그걸 왜 물어봐? 왜, 진짜 너보다 한심하면 난 아직 사람 새끼구나 하고 위안 삼게? 인마,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놈을 보고 발전할 생각을 해야지. 지보다 못한 놈을 보고 멸시를 하려 들면······”

“설교할 수가 없다더니 잘만 하시네. 그리고 저보다 못하다니 지금 반어법으로 기만하려는 거예요?”

이복동이 불만스럽게 따지자 가온이 설명했다.

“기만이긴? 실제로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굴었는데. 지존무쌍이 말 안 했나? 나 지난 수십 년간 방에 처박혀서 게임만 하고 있었어. 그런 주제에 주변 사람들 엄청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고.”

“뭐 나랑 비슷하네. 나도 울 가족들한테 그러다 쫓겨났는데. 그런데 형은 수십 년쯤 낭비해도 괜찮지 않나? 엘프의 수십 년은 인간의 수 년······”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신체 차이 크게 나는 것도 아닌데 체감시간이 왜 달라? 인간한테나 엘프한테나 긴 시간은 길어. 그러니까 난 엘프 기준에도 긴 시간을 낭비한 게 맞고.”

가뜩이나 우울했던 이복동은 그저 짜증이 났다. 갑자기 쳐들어온 이 엘프가 왜 이리 주절주절 떠드는 것인가.

“그래서?”

그리고 가온은 어색하게 웃더니, 말했다.

“우리 둘 다 더 나아져야지. 우선 나부터.”

엘프에 소드마스터씩이나 되어 뭘 더 나아지겠다는 것인지, 이복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기만당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더 나빠질 뿐이었다.

“뭐 어떻게 나아지시려고?”

여전히 이복동의 목소리는 심드렁했지만, 가온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첫걸음이 반이랬나? 그래서 오늘, 큰맘 먹고 한 발짝 내디뎌보려고 해. 그러니까······ 오늘 뉴스 지켜봐라.”

“뉴스요?”

“9시 뉴스. 꼭 봐. 거기 형 나올 거다.”

“응?”

“맘 약해지기 전에 이만.”

그리 말하더니 가온은 텔레포트하여 사라졌다.

남겨진 이복동으로서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뉴스에 나오겠다고?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소드마스터가 됐다더니 군부에 역할이라도 생겼나? 뭔가 정치적 발언이라도 할 생각인가?

저녁이 되었고, 이 시간대에도 뉴스가 나왔다.

뉴스에 나오는 새로운 소식을 보고 이복동은 눈을 크게 떴다.

*******

카르세 대통령 궁에 참마황은 외로이 앉아있었다. 가온은 머쓱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반갑네, 친구.”

참마황은 울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역시 반갑노라 답하고 싶지만 그러기 힘들군. 난 솔직히 당분간은 자넬 만나고 싶진 않았는데.”

“왜, 맘대로 하라 했지만 정말 맘대로 해서 기분이 상했나?”

“뭐, 그렇지.”

역시나 게임에서의 그 일이 이 남자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가온은 쓰게 웃으며 물었다.

“갑자기 한국에 준 기한을 줄여버린 것도 그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러지 말게.”

가온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참마황만큼이나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들을 내버려 둬. 자네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

“아니, 있네.”

“없네. 절대 없지. 만약 정말 자네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었다면 그건 이미 자네가 한 짓으로 끝이야. 자넨 이미 그들을 충분히 괴롭게 했잖나.”

“그것 말고도 그들은 약조한 바가 있다. 응하지 않았으니 응징할 권리가 있고!”

“약조라······ 반지성을 물리쳐주면 요구 하나를 들어주겠다던 그걸 말하는 건가?”

“그래!”

“그거야말로 자네 권리가 아니었지. 한국 정부가 약속한 그것은 흉턴 경의 권리였어.”

참마황은 입술을 깨물더니, 무언가 변명하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렇잖은가?”

참마황은 침묵했다. 조금 뜸 들인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대체 그놈의 조선 놈들을 왜 그리 신경 쓰는지 모르겠군.”

“같이 어울렸거든. 글쎄, 그 친구들 웃기더라. 게임에서 그들이 자네 죽이려고 왜 그리 용을 썼는지 알아?”

“현실에서 죽이지 못하니 오락에서라도 죽여보고 싶은 것 아닌가.”

“아냐. 진짜 죽이려고 그런 거야. 글쎄 자네를 늙어 죽게 만들려고 그랬대. 한낱 인간으로 남으면 백 년도 더 못 살 거라 이거지.”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다. 반신은 늙어 죽지 않으므로.

가온은 방금 자기 말이 웃기지 않았느냐는 듯 슬쩍 웃었지만, 여전히 참마황은 웃지 않았다.

하기야 웃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 정말 웃긴 이야기였어도 참마황은 웃지 않았을 것이다.

수백 년 묵은 조선인의 유머 감각은 현대인의 그것과 다른 법이니.

*******

흉턴 경이 죽은 지 시간이 꽤 흘렀고, 그가 마지막에 일으킨 사건은 벌써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워지려 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겪은 고통도, 카르세인들이 느낀 희열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 사실이 반지성은 못내 맘에 들지 않았다.

미국도, 카르세도 그 사건을 묻으려 했다. 그 사건을 애써 들춰내는 것은 양 세계의 우호를 다지는 데 하등 쓸모없는 일이란 것이다.

결국 흉턴의 마지막 불꽃은 어느새 언급하기 껄끄러운 테러 사건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였다.

반지성은 그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반지성에게 그로부터 시간이 경과한 것은 슬픔이 가셔 맘이 편해지는 과정이 아닌, 쓰라린 통탄이 더욱 커지는 과정에 불과했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좋은 일이 하나 생기기는 했다.

수십 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 드디어 연락이 된 것이다.

그와 만나기 위해 반지성은 친구의 고향에 발을 디뎠다. 원래 왕국이었지만 공화국이 되어버린, 그로부터 시간이 더 흐른 지금은 뱀파이어들의 왕국이 되어버린 후긴 공화국에.

후긴의 몰락은 선명했다.

어두운 하늘, 침침한 거리. 이 땅의 사람들은 죄인이었고, 벌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희망 따윈 없었다.

자신의 친구가 만들어낸 이 풍경을 보며, 반지성이 느끼는 감정은 저열한 동질감이었다.

그 고귀한 친구 또한 자기 고국에 복수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다. 덕분에 더욱 반가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친구를 만났을 때, 반지성은 친구와 자신이 같아졌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없었다.

이미 고국에 대한 복수를 마친 그 친구는 조금도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조금도.

약속장소에 나온 가온은 어조 변화 없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자네, 오랜만이군.”

충혈된 눈, 음침한 눈가. 끔찍하게 힘없어 보이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반지성은 충격을 받았다.

반지성이 기억하는 가온은 언제나 힘찬 몸짓을 하는 엘프였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던 그 눈에는 언제나 힘이 넘쳤다.

이 폐인과 달리······.

“그래, 정말 오랜만일세. 어찌나 만나고 싶었는지······ 아, 자네 얘기는 들었네. 정말로 유감······”

당황한 반지성이 횡설수설하는 가운데, 가온이 말했다.

“나도, 자네에 대한 얘기는 들었네. 사실 좋게 평가하긴 뭐하더군······.”

“그래서 비난할 텐가?”

“글쎄, 그거야 자네 설명에 따라 다르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줄 수 있겠나?”

“그러긴 힘들고, 그냥······ 이해해줄 순 없겠나?”

“뭐, 그리 말해서야 이해 못 하지.”

가온은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굳이 따지고 들 생각은 없는 눈치였다. 아니면 그럴 기력조차 없거나.

가온은 잠자코 친구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반지성의 손을 붙잡고 텔레포트했다.

그리하여 친구의 집에 들어온 반지성은 바로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두운 요새, 이 회색 엘프의 요새는 지하 아주 깊숙이 있었다. 그 안에는 당연히도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서 반지성이 물었다.

“화로라도 불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조명은 없네. 따로 설치하지 않았어.”

“왜?”

“이렇게 어둡게 해둬야 맘이 안정되더군. 왜, 우리한텐 이 정도 밝기가 적당하잖나?”

빛 하나 없던 시절, 다른 세계에서의 시절을 반지성도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끔찍하고 고생스러웠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반지성의 친구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금이 그 시절보다 끔찍하단 말이지.’

그렇다면 위로해야 하나?

아니, 말만 할 게 아니라 복수에 함께해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고를······”

이번에야말로 그 원수를 죽이자. 내가 돕겠다.

반지성이 제안하려는 가운데, 전쟁 신이 경고했다.

‘닥쳐라.’

달과 순결의 여신은 자기 대전사를 총애했다. 그와 적대하는 순간 우드엘프 소드마스터들과의 동맹이 깨질 것을 전쟁 신은 우려했다.

‘물론 그들은 강력한 전력이겠지만, 제 친구는 더 강력한 전력일 겁니다. 마족들을 상대하려거든······’

반지성이 항변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의가 있을 때 말이지. 지금은 전의가 없어 보이고.’

결국 반지성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게 된 가운데, 반지성은 죄책감을 느꼈다. 결국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부탁이나 해야하다니?

한편 가온이 물었다.

“하고가, 뭐?”

“아니, 아닐세. 아무튼 내가 여기 온 목적을 말하자면······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부탁?”

“자네 폴리모프, 다른 사람에게도 걸어줄 수 있었지?”

다른 세계에서의 시절, 생존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써야 했던 시절이었다.

다른 괴물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다른 괴물로 변하는 식으로 폴리모프 주문 또한 여러 번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갈고 닦아 너무나도 완벽해진 주문이었다.

“그렇지.”

“쉽게 풀리지도 않고. 마나뿐만 아니라 신성까지 사용되니까 반영구적인······”

“그래.”

“마지막으로, 특정한 인물의 형태로 바꿔줄 수도 있나?”

“물론 가능하네.”

그것은 다른 잘나신 마법사들도 못 하는 일이라는 것을 반지성은 알고 있었다.

역시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이 대단한 친구다. 그 대단한 친구가 이 요새에 갇혀있어야 하는 상황에 반지성은 크나큰 유감을 느꼈다.

언젠가는 반드시······.

반지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사진 속에 있는 것은 한 광전사의 모습이었다. 손질하지 못해 덥수룩한 턱수염과 지저분한 머리, 그 충혈된 눈에 분노만이 가득 담긴 기사의 사진.

그 손에 들린 참마검.

사람들이 기억하는 흉턴의 모습이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취해야 할 모습.

“이 모습대로, 바꿔줄 수 있겠나?”

“이 모습은 왜?”

“내 얼굴로 사회적 활동을 할 수는 없잖나.”

“아, 새 신분이 필요하다 이거지. 그런데 흉턴을 흉내 내는 건 힘든 데다 언젠가 탄로 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차라리 새로운 얼굴을 창조하여 취하지 그러나? 내 그리 만들어줄 수 있는데.”

“그건······ 괜찮네. 그냥 흉턴 경의 얼굴을 쓰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물론 가온은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이 친구가 한국인들을 얼마나 죽였건, 그게 얼마나 사악한 일이었건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만큼 중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그래.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이루어내길 바라네. 나 대신 말이야.”

그리 말하며 가온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킬킬 웃었다. 유쾌하다기보다는 정신에 문제가 있는 듯한 그 모습을 흉턴은 애써 외면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반지성은 후긴을 떠났다. 동경하던 영웅의 형상을 취한 채.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채 길을 걸으며, 친구가 앞서 했던 제안을 생각해보았다.

아예 새 모습을 취하면 어떻겠냐고 했던가?

그 역시 매력적인 제안이기는 했다.

처음 아스에 끌려가 참전한 이후, 반지성은 아스인들에게 심리적 빚이 있었다. 그 부채감은 어느새 동경으로 화했다.

이제 반지성은 아스인들을 지구인보다 우월하게 여긴다. 그리고 아스인 중에서도 가장 우월하다 여겨지는 것은 당연히도 그 친구들의 종족이다.

더러운 마족의 피를 버리고,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있다면 정말로 좋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반지성은 흉턴이 될 것이며, 그것은 단순히 영웅의 신분을 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위대한 영웅 흉턴을 절대 잊히지 않게 할 것이다. 그분이 끝내 이루지 못한 의무를 그분의 이름을 빌려 이루어줄 것이다.

그 영웅의 상징쯤 되는 참마검까지 든 마당에, 의심할 사람은 없으리라.

이제 반지성은 생각한다. 자신이 이제 뭐라 불려야 할지를. 그 호칭을 생각해내기는 어렵지 않다.

반지성은 참마검을 보며, 이 칼의 주인이 원래 무엇이 되어야 했는지 떠올린다.

‘황제.’

그리고 그의 의무도.

‘마(魔)를 베는······.’

*******

참마황은 한참 후에야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심하다 못해 비참하군. 날 죽이고 싶을 만치 싫으면 현실에서 그랬어야지. 겨우 오락에서?”

“할 수 있는 게 그뿐이었다 이거지. 불가능한 걸 알면서 동참하려니까 미치겠더라.”

“웃겨서?”

“아니. 의미 없는 짓을 하는 걸 뻔히 알면서 내버려 두려니 내가 다 비참해지더라고. 그래서 생각한 바가 있는데 말이야.”

“결심?”

“그들의 무의미했던 행동에,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네.”

참마황은 눈을 크게 떴다. 주먹을 움켜쥐더니,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떼었다.

“날 죽이겠다고?”

“아니.”

“그럼?”

“자네를 막겠네.”

가온은 칼을 뽑았다. 그리고 선언했다.

“결투다. 아스 결투의 관습은 알고 있겠지, 조선인?”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가온은 말없이, 오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배신당한 자들이 보일 법한 얼굴이 보였다. 지금 참마황은 그저 분노에 가득 찬 것 같았다.

그러나 가온에게는 그 눈동자의 흔들림이, 어깨의 미동이 보였다.

분노를 넘어선 당황. 그럴 만도 하다. 수백 년 지기 친구가 자기 소원을 방해한 걸 넘어 아예 싸우자는 것이니.

참마황은 그 당황스러움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랜 권력자 행세는 조그마했던 조선인 소년을 초인 독재자로 만든 지 오래였다.

참마황은 이를 악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받아들이지.”

“그럼 내일 이 시간에.”

“그래.”

*******

지금 TV 속 한국인 아나운서의 표정은 밝기 그지없었다.

오후 뉴스에서만 해도 핏기가 없었던 그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 가운데, 아나운서는 저녁 뉴스를 전했다.

「가온 경이 참마황에게 결투를 선언 (······) 결투를 선언한 시기로 볼 때, 이것은 분명 앞선 참마황의 협박에 대응한 것으로 보여 (······)」

내일 밤, 소드마스터 둘이 결투를 벌인다.

저번에 무산되었던 그 세기의 이벤트가 기어이 치러지는 것이다. 그 사실이 한국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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