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123화 (123/135)

LV.? 게이머들 - [6]

가온은 늙지 않는 엘프지만 인간에게 일 년이 얼마나 길고도 소중한 시간인지 안다. 인간 친구들과 함께한 세월이 있기 때문이다.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하던 그들의 얼굴에는 주름이 너무 빠르게 늘었더랬다.

가온은 그들이 고작 일 년 만에 얼마나 늙어버리는지, 그 사실에 얼마나 절망하는지 싫어도 지켜보아야 했다.

검술 교관이 지적한 어깨의 긴장은 그 시절에 생겨났을 것이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르게 타개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가온을 움직였던 시절이다. 주변을 둘러싼 어둠은 물론 시간까지 적이었던 시절.

적이 이겼다.

그리 초조하게 움직여댄 보람도 없이, 인간 소년들은 결국에는 늙거나 지쳐 죽어갔다. 그때마다 가온은 소년들이 괴물에게 당해 죽었을 때보다도 강렬한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그것이 왜 그리 속 쓰렸던가?

무리의 리더로서 그들을 결국 구원해주지 못해서였나? 단순히 그런 이유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 그래. 같이 늙어줄 수가 없어서였다.

구원해주지는 못할망정 함께 피해자가 되어줄 수도 없어서. 그들의 고생과 노화를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완전한 방관자가 되어버린 죄책감을 느꼈다.

그 죄책감은 아직도 내면에 남아 끈적거리고 있다. 정신에 남은 트라우마.

지금 이 게임의 한국인들을 돕는 것은 그 트라우마의 발로일 것이다. 이 강점 이입도, 죄책감도 다 거기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러니까 이 역시 결국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에 불과한 셈이라고, 그 오크에게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

화로의 여신께서는 곧 불의 여신이시다.

불의 양면성이 곧 그분의 신성이다. 그분께서는 어머니 여신이신 동시에 파괴의 여신이시며, 모성의 신이신 동시에 분노의 여신이시다.

온화하시며 인자하신 그분께서는 보통 전자의 이미지를 선호하시지만, 여기 강림한 그분께서는 후자인 듯하다.

불타는 대지. 녹아내린 강철. 여기저기 널브러진, 탄소 덩어리처럼 화해버린 시체들. 자욱한 연기를 쉴새 없이 빨아들이고 있는 푸른 대차원문.

이 모든 광경을 홀로 이루어낸 불꽃 여신의 대전사.

가온은 다시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다만티움 갑옷을 입은 그 당당한 모습은 제 모습인데도 경탄스러울 지경이다.

며칠 내내 싸웠겠지만 지친 기색은 없었다.

하기야 반신 가온은 지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가온은 잘 알고 있었다. 며칠을 밤새워 게임을 하고도 눈가만 거뭇해졌을 뿐 멀쩡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 NPC 가온은 이쪽 가온의 등장을 바로 알아보았다.

이번에도 그 도전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저 올 테면 오라는 듯, 또다시 그 자리에 멀거니 섰다.

사형대로 다가가듯 천천히, 가온이 다가갔다.

그 전진을 좌중의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학살당하다가 겨우 목숨만을 건진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애타게 소리쳤다.

“이번에야말로 이기라우!”

“이쪽 가온 이겨라! 이쪽 가온······”

자신을 응원하는 애타는 목소리들. 가온은 그들의 응원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 와중에 웬 앳된 목소리가 엘프의 뾰족한 귀를 간지럽혔다.

“이쪽 가온! 이쪽 가온! 힘······”

이미리마저 자신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온은 우울한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 웃다가 문득 물었다.

“나 이번에도 빠르게 죽으면 어떻게 되나?”

가온의 물음에 이미리는 무전으로 대답했다.

「뭐, 이번에야말로 끝장이겠죠? 이미 너무 많이 죽었잖아요. 피해를 복구할 수가 없어요. 여기서 더 시간이 흘렀다간 그땐 정말 기회가 사라져버릴 것······」

“그래? 그렇다면 나 죽은 다음 실컷 내 탓 하렴.”

「아, 부담 지운 것처럼 들렸으면 미안해요. 그러니 그냥 맘 편히 잘 싸워줘요」

이미리의 말에 가온은 생각했다.

‘맘이 편할 수가 있나.’

애초에 가온은 패배할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 참전한 것 아닌가.

그러니까 이 자리가 부담스럽거든 그냥 재빨리 져버리면 되는데.

그냥 단칼에 죽어버릴까?

고민하던 차에 NPC 가온의 손에서 재가 휘날렸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순간의 번뜩임. 그 어느 사형집행인의 처형 도끼보다 뛰어난 그 일격에, 가온은 순순히 목을 내주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뒤로 뛰며 거리를 벌렸다.

자기가 그러고서 가온은 놀랐는데, 왜 굳이 생명을 연장했나 생각해보았다.

‘하기야······ 아무리 지는 게 목적이어도 그렇지, 너무 허망하면 좀 그렇지.’

그리 속으로 읊조리며 가온은 조금만 더 버텨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그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시금 처형 도끼가 휘둘러진다.

정확하게 목을 노리고 뻗어오는 재. 끔찍하게 빠르고, 끔찍하게 강렬한 힘이 거기 담겨있다. 도저히 제대로 맞설 수가 없어서, 저번에 그랬듯 가온은 죽을 힘을 다해 피했다.

그리고 검에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서기장 폐하의 드높은 뜻을 받들어, 전군 돌격!」

죽은 자들의 군세가 기어이 조선인민군의 방어선을 덮쳤다.

달그락거리는 스켈레톤들은 대검 한 자루씩을 들고 참호에 뛰어들었다.

그 참호 안에 생각보다 많은 병력이 지키고 있지는 않았다.

조선인민군은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을 여기 남겼다. 나머지 병력은 언제든 대차원문을 점령할 수 있도록 저 멀리에 배치되어 있다.

실제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닌, 단기적 목적 하나만을 신경 쓴 극단적인 배치다. 그러니까 단기적 목적, 아린 벌판의 점령이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끝장이다. 조선인민군은 전쟁에서 질 것이고, 결국 아린 벌판의 주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칼잡이 둘의 결투에 그 도박의 결과가 드러날 것이다.

“공습! 서쪽에 레드드래곤······”

비명 지르는 조선인민군을 위협하는 척 하늘을 맴돌며, 아타락시아는 최대한 피해가 적도록 불을 뿜으려 애썼다. 이게 대체 무슨 시간낭비인가 자조하면서, 그녀가 아는 그 가온의 승리를 간절히 소망했다.

*******

팔 분이 지났다. 한 군대에 주어진 시간으로는 너무나도 짧다. 군장 하나 다 싸고서 집합하기도 모자란 시간 아닌가. 그러나 그 8분이 강대한 반신 앞에서 칼잡이 하나가 버틴 시간이라 생각하면 가히 송곳 한 자루 들고 미친 코끼리 앞에서 견딘 것보다도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니 이 정도로 시간을 벌어주었으면 적어도 욕먹을 일은 없다. 슬슬 죽어줘도 된다.

그리 생각하는 차에 목젖을 노리고 날아든 찌르기를, 가온은 땅을 구르면서 피했다.

게임 속이지만 얼굴에 자갈이 긁히면서 불쾌한 감촉이 들었다.

가온은 입속에 들어온 모래를 뱉으면서, 자기가 지금 왜 이리 열심히 싸우는지 의문을 품었다. 설령 점령에 성공하더라도 다 쓸모없는 일인 걸 알면서 왜?

이놈의 오락에 시간과 노력을 바친 사람들. 전 재산에 영혼까지 포기한 사람들이 뇌리를 스친다. 가온은 그들에게 공명한다.

이백 년 묵은 엘프는 힘겨운 와중에도 추억에 잠긴다.

자신의 옛날을 떠올린다.

다른 세계에서의 자신. 젊었던 그때 자신은 힘겨웠으나 견딜 수 있었다. 시련 끝에 보상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바라던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제 저들이 같은 일을 겪으리란 사실을 가온은 안다. 아예 남 일처럼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온은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사실, 가온은 저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게 만들 방법 하나를 알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마다하던 일이다. 웬만해선 하고 싶지 않았던 일. 하지만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던, 선택의 갈림길 저 너머에 있는 그런 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어어······”

NPC 가온 또한 이쪽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훨씬 날카로워진 공격들.

사냥감이 피하려는 곳마다 재가 도사린다. 가공할 힘이, 속도가 가온을 압박했다.

가온은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충분히 오래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바랄 수 없었다.

겨우 오 분이 더 흐르자마자 가온은 포기해야 했다.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더 못 버틸 거 같은데.”

가온의 말에 무전기에서 이미리가 물어왔다.

「정말 더 못 버텨요?」

“응. 한계야.”

「제발 더······」

“미안해. 정말.”

가온은 잠자코, 무전기에서 쏟아질 욕설을 기다렸다. 약속한 이십 분도 못 버티다니 말이 되냐고. 너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망치게 생겼다고 욕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 후, 이미리의 반응은 가온의 예상을 벗어났다.

무전기 너머 이미리는 힘없는, 그러나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할 거 없어요」

“그럼······”

「그냥 고맙지. 보수도 안 받고 일해주는 건데······ 충분히 힘써준 거 알아요」

상식적인 말이지만 가온은 당황했다.

“왜 이러냐. 너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욕해도 되니 어서 욕하지?”

「아뇨, 어찌 그래요······ 결과야 어떻건 맘 편히 가져도 돼요. 최선을 다했잖아요」

이 순간 가온은 그저 아연하다.

잔뜩 욕을 처먹고 속이 시원해지길 바랐는데. 저 미친년이 대체 왜 저러나?

가온은 그 이유를 헤아리지는 못한다. 그저 각오하던 욕이 돌아오지 않자 더욱 미안해졌을 뿐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가온은 한탄하는 동시에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어보고자 애썼다.

무슨 대단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닌, 그저 덜 미안해지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저 가공할 적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가온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NPC 가온은 자비 없이 추격해왔다.

가공할 힘으로 거기 밟힌 시체를 짓뭉개며, 손에 담긴 불길로 세상을 불태우면서 다가왔다.

가온은 이번에는 또 어찌 살아남아야 하나 고민하며, 왼손에 쥔 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또 다른 자신의 공격에 맞섰다.

재가 덮쳐온다. 재로 형상화된 죽음이다.

그리고 가온은 저 죽음에 맞설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오가 필요하다. 선택을 정할 각오가······.

“이미리?”

「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너 왜 갑자기 잔 다르크가 된 거냐? 뭐 이리 성격이 변했어?”

「예? 나 원래 성격 좋아요」

“지랄 말고. 궁금해서 못 싸우겠으니까 빨리 대답해, 응? 빨리, 빨리······”

이미리는 당황하면서도 뭐라 대답해야 할지 생각했다. 성격이 변했다는 말을 요새 가족에게서도 듣긴 했는데······.

남에게 들려주기엔 너무 긴 이유였으므로, 이미리는 짧게 설명했다.

「그야 이번 일 성공시키려고 노력하는 거죠 뭐. 이번 일 성공 시켜야 공무원 노릇 계속할 수 있고······」

“그게 다야?”

「왜요, 그럼 안 되나?」

“아냐. 장하네. 아주 훌륭해.”

「장하긴 개뿔······ 그런데 왜 물어봤어요? 진짜 궁금해 못 싸우겠어서?」

“아니, 뭔가 좀 근사한 대답을 기대했지. 애국자로서 조국의 위기에 성질부릴 수는 없었다, 뭐 그런.”

「아, 그럼 실망했겠네. 미안해요. 사실 다 투철한 애국심 때문······」

“아니, 장하다니까. 충격을 받아서 폐인이 됐든, 그냥 나태해서든. 자길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넘치는 세상이야. 어느 엘프 같은······ 그런데 자길 위해 노력하는 걸 왜 폄하하겠나?”

주절주절 대화하는 동안 NPC 가온은 원본을 사정없이 밀어붙이고 있었다. 가온으로서는 아직도 버티는 것이 기적일 뿐이다.

“오히려 칭찬해야겠지. 남들을 위해 일하는 게 자신을 위한 것도 되는 셈이니.”

그때 NPC 가온의 칼날이 이쪽 가온의 가슴을 스쳤다. 피가 튀었다.

다행히 제때 피한 덕에 근육은 찢기지 않았지만, 무전기가 박살 나고 말았다.

아슬아슬하게 목숨만 건진 가운데, 듣는 이 없이 가온은 홀로 중얼거렸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

가온은 기도를 올렸다. 언제나 어머니와 같았던 여신께.

‘여신이시여.’

화로의 여신께서 기도에 응해주시었다.

‘말하라. 가온.’

“지금부터 제 뜻대로 해도 되겠습니까?”

가온이 뭘 하고 싶은지 설명하기도 전, 여신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물론, 네 여신은 언제나 대전사를 지지하리.’

그제야 가온이 웃었다. 오랜만에 속 편히 웃었다.

가온은 칼을 들었다. 저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도.

둘을 굳이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가온이 한 발짝 내디뎠다. 수세에 몰리던 이의 갑작스러운 전진에는 단순한 걸음 이상의 기세가 필요했다.

온 힘을 발에 담아 나아가면서, 칼을 휘둘렀다.

그때 거센 재가 덮쳐왔다. 또 다른 자신의, 번뜩이는 횡 베기. 소드마스터의 공격답게도 소름 끼치게 빠르고 치명적인 궤적을 그렸다.

가온은 잔뜩 지친 와중에도 어쩐지 여유로워진 느낌으로, 가뿐히도 그 공격을 피해냈다.

물론 피해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반격할 수 있어야 한다. 적을 위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기가 필요하다.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소드마스터의 전유물이 필요하다. 오직 그것만이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 가온은 맥없이 패배할 작정이었기에, 남몰래 검기를 쓸 수 있도록 연막탄을 준비해달란 요청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검기를 쓰려거든 모두의 앞에서 써야 한다.

그 경우 재의 왕자씩이나 되어, 어쩌고 하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비웃음당하리란 걱정은 지금 하지 않기로 했다.

기어이 지구인들을 편들어 참마황을 방해했다는 비난을 들으리란 걱정도 지금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들은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당장에는 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오래 어두운 집에 박혀있었다. 주어진 두 가지 의무가 있었지만 둘 모두를 거부했다.

언제까지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고를 수 없었다. 둘 중 어느 쪽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물론 지금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몇 가지 계기로 둘 중 한쪽에 아주 살짝이나마 마음이 기울어진 지금, 가온은 선택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중의 선택은 더욱 힘들어질 테니.

그리 생각하자 맘이 오히려 편해지는 느낌이 든다.

긴장된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더욱 자연스러워진 그 어깨, 잔뜩 지친 와중에도 오히려 더욱 힘이 넘쳐 보인다.

그 사실을 NPC에 불과한 가온은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NPC 가온은 그저 거세게 공격해온다.

언제 봐도 완벽한 찌르기.

가온은 검기를 쓰기 위해, 평소 익숙한 오른손으로 검을 바꿔 잡고 싶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다.

가온은 당장 왼손에 든 검으로 대응에 나선다.

생각하지 않고 몸이 먼저 반응한다.

수백 수천 번을 연습으로 몸에 새겨둔 기술. 그 반격의 기술이 왼손에 든 검으로 구현된다.

가온은 천천히 스탭을 밟으며, 왼손에 든 검을 마주 찌른다.

양쪽의 검이 교차한다.

그 순간, 찰나는 잘게 쪼개진다.

자신의 칼을 찌르면서, 가온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공격을 살핀다.

가온은 그 재로 빛나는 칼을 본다.

잿빛 검기.

저게 왜 생겨났는지 이제는 안다. 그 당시 자신은 사제였다. 산 자들보다는 죽은 자들을 신경 쓰며 살았다. 장례를 치르면서 공중으로 휘날린 재들이 그 심상에 쌓인 바 검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 가온은 사제가 아니다. 그 심상에 영향을 준 것은 오로지 산 자들이다.

교차한 서로의 검이 스친다.

재의 칼에 가온의 칼이 가 닿았다.

그 순간, 불씨가 튄다. 충돌의 여파로 생긴 불씨인가?

아니, 아니다.

가온은 계속해서 불씨를 본다. 내면에서도, 현실 세계에서도 불씨가 튄다.

그리고 자신의 검에서도, 찬란한 불씨가 튄다.

거세게 튀는 불씨가 흩날리는 재에 섞인다.

재 속에서 불씨가 일렁인다.

재가 품은 불씨는 이내 불꽃이 된다. 거세게, 거세게 피어 오른다.

가온은 자기 검을 감싸는 불꽃을 본다.

이 화염검에 부딪힌 재의 칼날은 그 폭력성을 잃는다. 그 가공할 충격력이 흡수된 것이다.

덕분에 화염검은 다가오는 재의 칼을 슬며시 치우면서, 그대로 전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목적지에 닿는 데 성공했다.

뻗어간 칼날은 적의 급소에 가 닿았다.

“아······”

가온은 또 다른 자신의 이마를 관통한 화염검을 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그 검.

아무리 반신이라 해도 머리를 다치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기어이, NPC 가온이 쓰러졌다.

풀썩, 하는 소리가 들린 순간. 좌중의 모두는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이긴 거요? 정말?”

잠시 후에야 사람들이 다가왔다. 이미리도 여기 다가와서는 지금 가온이 왼손에 든 검을 눈에 담았다.

검신에 일렁이는 불꽃. 진짜 불꽃은 아니었다.

불꽃을 형상화한 무언가다.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보는 것이지만 그것이 뭔지 이미리는 알아볼 수 있다.

이미리가 꿈에도 그리던 그것이다.

“검기······”

이제 가온의 검은 주변 모든 것에 자신의 색채를 덧씌운다. 주변의 배경은 넘실대는 불꽃에 휘말려 녹아내린다. 지켜보고 있자니 그저 황홀하다.

이미리는 동경과 질투를 동시에 느끼며 물었다.

“이번에 각성한 거예요?”

가온도 지금 자신이 이루어낸 일에 놀라고 있었다.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응? 어.”

“그럼 진짜 가온은 아니었나 보네요. 사실 진짜 가온인 줄 알고 지금까지 쫄았는데······”

“아. 어쩐지 언제부터인가 얌전해졌더라니?”

가온은 이 위업이 별것 아니라는 듯 실실대기 시작했는데, 이미리가 상상하던 초인의 탄생에 걸맞은 태도는 아니었다.

자신이 저랬다면 기뻐 날뛰었을 텐데.

이미리는 순간 욱했지만, 질투를 가라앉히고는 이내 말했다.

“축하해요, 정말.”

질투가 진심이듯 그 축하 또한 진심이었다. 그 사실을 가온은 느낄수 있었고, 더욱 기분 좋게 웃었다.

한편 조선인민군은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사들 모두가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날래날래······ 날래날래!”

저기 보이는 대차원문을 향해서.

NPC 가온이 사라진 지금, 그곳을 지키는 병력은 그저 중세 군대에 불과했다. 아무리 빈약한 북한군이라 한들 그들을 짓밟기는 어렵지 않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차원문은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리하여 게임은 끝났다.

「[알림] : 우승자가 결정되었습니다!

아린 벌판은 ‘조선인민군’ 길드에 점령되었으며, 그 길드장은 우승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천상의 신들도 그들이 주최한 게임에서 탄생한 우승자를 축복할 것입니다!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승자가 정해진 지금, 서비스 종료는 확정되었다.

세계가 무너진다. 또 다른 자신의 시체도, 대차원문도, 아린 벌판과 다른 지구의 군대도 모두 암흑 속에 잠긴다.

가온은 로그아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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