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122화 (122/135)

LV.? 게이머들 - [5]

장비가 부실한 보병들끼리 전차를 막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드워프 전차는 약 백 대가 투입되었는데, 도저히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 전차들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짓밟으며 전진했다. 그러면서 종심돌파며 전과확대를 참 쉽게도 해냈다.

“참마황 폐하 만세―!”

전차들이 만들어낸 돌파구로 카르세 게이머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달렸다. 저들을 이대로 통과시키면 방어선은 차례차례 무너질 것이다.

잔뜩 기세가 오른 적들에 맞서, 한국인 게이머들은 분투했다.

“막아! 막아!”

한 한국인 게이머가 폭약을 짊어진 채 전차 아래로 슬라이딩했다. 그리고 폭발.

드워프 전차 한 대가 멈췄지만 그 뒤로 수 대의 드워프 전차가 지나갔다.

그것들을 막기 위해 게이머들은 말 그대로 몸을 던졌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었다면 가히 전설로 표현될 만한 분전이었다. 물론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라, 이 분투를 인터넷에 찍어 올리면 아마 비웃는 댓글이 적잖게 달릴 것이었다.

이복동은 생각했다.

‘어차피 목숨을 내버려도 될 게임에서의 일인데, 뭐 당연히 다들 열심히 싸우지 않겠냐고. 겜창들이 과몰입한다고 하겠지.’

그러나 당사자인 이복동은 그들의 노력을 그리 폄하할 수 없다.

절망적인 와중에 힘을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현실이건 가상현실이건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얼마 전 ‘우리 가온’이 ‘저쪽 가온’에게 패했음이 전해진 마당 아닌가. 이 와중에도 게이머들은 그저 악에 받쳐 적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물론 악에 받쳤다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나절 가까이 잠도 자지 않고 로그아웃도 하지 않고 싸우는 마당이다. 부족한 전력 차를 채우기 위한 노력이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보람이 없다.

계속해서 한국인 게이머들은 밀리고 밀렸다.

이기리란 희망 따윈 없었다. 패배를 전제로,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해 모두 발버둥 쳤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저격수 이복동은 지금 달렸다.

본진과 멀리 떨어져서는 죽을 힘을 다해 계속 달렸다.

숨이 차도록 달렸다. 아주 빨리, 저 멀리까지.

레벨을 올려 지구력이 향상되었겠다, 무엇보다 숨이 차도 정신력으로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몇 달간의 훈련으로 말미암아, 게임 능력치뿐만 아니라 본인의 인내심이 향상된 결과다.

덕분에 이제 이복동은 아주 빠르고 오래 뛸 수 있었다. 같은 능력치의 캐릭터라도 이복동 만한 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이토록 발전한 보람이 이제 곧 사라지겠지만. 현실에서 마라톤으로 돈 벌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이복동은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그리 얼마나 달렸을까. 그 누구도 보이지 않을 만치 멀리 달려온 이복동은 적당한 수풀에 엎드렸다.

저 앞에 펼쳐진 늪지대를 보았다.

소규모 부대가 은밀하게 이동할 만한 경로였다.

이복동은 여기 매복한 채, 최대한 그들의 이동을 저지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밤샌 데다 한껏 달려서 지친 가운데, 이복동은 엎드린 채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다시금 날이 저물고, 여기 다가올 미지의 적을 기다리던 와중이었다.

저 하늘에서 달빛이 번뜩였다. 그 차가운 빛이 한 인영을 비추었다.

저 멀리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적인가?

이복동은 스코프를 통해 그 신원을 파악했다.

저 멀리에 나타난 누군가는 머리칼이 길었다. 여자 캐릭터. 그리고 이 게임에 여자 캐릭터는 거의 없다. 덕분에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소드마스터······’

이 경로로 지나가려는 모양이다. 그리고는 대차원문 근처로 침투하려 할 것이다. ‘이쪽 가온’을 처치하여 이쪽의 우승을 저지하기 위해서.

그러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급히 본부에 그 사실을 보고했더니, 본부에서는 폭격기라도 보내겠노라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왔다.

「어떻게든 붙잡아두기 바람」

뭔 수로?

이복동은 그리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소드마스터로 추정되는 그 여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저 여자는 엘프였다. 들키기 싫거든 작은 소리라도 내면 안 된다. 절대.

너무 멀어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숨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이복동은 저 초인과 자신의 거리를 가늠했다.

약 2km. 저격하기엔 너무 멀다. 모름지기 저격은 최대한 가까이서 해야 성공하는 법인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방아쇠에 손을 가져갔다.

비상식의 결정체인 초인을 상대로 상식적으로 굴어선 안 된다.

자신이 알고 지내는, 그 이계인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저격수 혼자서 초인 소드마스터를 쏴 죽이는 게 가능한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잘난 엘프가 뭐라 대답했던가?

‘물론 저격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 음속보다 빠른 총알이 안 통할 리가 있나?’

‘안 통하잖아요?’

‘전투감각 때문에 그래. 보통 사람도 수상한 곳을 보면 직감적으로 스산한 기분을 느끼지? 소드마스터는 그 감각이 너무 탁월해서 누군가가 저격해올 만한 장소만 봐도 경계심이 곤두서고 바로 대응하니까 쏴 맞히기 어려운 거지. 그러니까 그 공격을 성공시키려면, 아예 예상이 안 되는 공격을 해야 하는데······’

그리고 이복동이 생각하기에, 그 ‘예상이 안 되는 공격’이란 다음과 같다.

거의 저격이 불가능한 거리에서 쏘는 것이다.

2km에서······.

사실 기네스에 기록된 최대 저격 기록은 그보다 훨씬 더 길지만, 그것은 괜히 기네스에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

보통의 저격은 1km 이내에서 이루어진다. 그보다 먼 위치에 있는 표적을 맞힌 것은 본래 실력을 넘어선 우연으로 간주 된다.

그리고 우연한 일을 예상하기는 힘든 법. 이 거리에서의 사격은 예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 믿고, 이복동은 풍향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며 숨을 참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내 소드마스터가 걷기 시작했다.

주변에 위험이 없는 것으로 여긴 모양이다. 그렇다면 좋다······.

소드마스터가 한 발짝 내디뎠을 때, 방아쇠를 당겼다.

소리를 남기고 간 총알.

‘아.’

팔에 맞았다!

피를 흘리며, 소드마스터는 이 상황에 완벽한 대응을 해보였다. 바로 몸을 굴러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겼다. 바위가 그녀의 조그만 몸을 숨겼다.

‘몸통에 맞혔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이복동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맞힌 것 자체가 기적임을 알았다. 그야말로, 놀라운 행운과 지금까지 해온 훈련이 이루어낸 기적이었다.

다시 이런 기적이 반복되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복동은 숨죽인 가운데, 소드마스터를 숨긴 바위를 스코프 너머로 바라보았다.

저 엄폐물에서 쉽게 벗어나기는 힘들 터였다. 그랬다간 저격에 계속 노출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돌아가라. 돌아가. 내가 쓴맛을 보여줬잖아······’

이복동은 그리 빌었지만,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드마스터는 바위 뒤에서 바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저 뒤로 후퇴하지도 않았다.

이쪽의 긴장이 풀어진 틈에, 불시에 뛰쳐나오려는 모양이다.

바위에서 나온 그 순간 바로 쏴야 한다.

이복동은 집중하여 계속 바위를 노려 보았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다. 이복동도 졸음과 긴장에 지쳐 눈을 조금 오래 깜박였을 때, 불현듯 소드마스터가 바위에서 몸을 꺼냈다.

이복동이 한 박자 늦게 쏜 총알은 역시나 빗나가고 말았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소드마스터의 머리칼을 스쳤을 뿐이다.

‘아······.’

아까 쏴 맞힌 팔에는 천이 묶여있었다. 지금까지 숨어있던 것은 그저 뛰쳐나올 타이밍을 재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지혈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던 것 같았다.

마침내 이쪽으로, 소드마스터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영광이네. 소드마스터가 고작 총잡이 한 명 죽이러 몸소 오다니.’

이복동은 뒤돌아서서 달렸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닌,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실제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어쨌건 최선을 다해 뛰었다. 현실에서 어떨지 몰라도 여기서 둘은 같은 게임 캐릭터였다. 신체 능력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덕분에 추격전을 제법 오래 지속할 수 있었다.

뛰고, 또 뛰었다. 잔뜩 지친 와중의 마라톤.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나 승리하기는 무리였다.

기어이 이복동은 따라잡혔다.

“안녕?”

등 뒤에서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 놀라울 만치 청량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이복동은 공포를 느끼며 급히 뒤돌아서 총을 쏘았다. 탕! 비싼 돈을 들여 장비한 돌격소총이 불을 뿜었다.

“저리 가!”

그리고 당연히도 막혔다. 소드마스터는 양손에 각각 든 칼로 놀라울 정도로 쉽게 총알을 쳐내며,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연발로 놓고 마구 쏘아도 소용이 없었다. 소드마스터는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천천히, 달빛을 발하며 다가올 뿐이었다.

끝내 소드마스터가 이복동의 바로 앞에 섰다.

끝을 직감한 이복동은 눈 감으며 생각했다.

하기야 초인을 홀로 사살한다니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다. 결국 의미 없는 발악이었나?

그리 자조하던 가운데, 또다시 소드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오······”

그것은 감탄사처럼 들렸다. 어째서?

눈 감은 이복동의 어깨를 나루가 툭툭 건드렸다.

놀라서 눈을 뜬 이복동에게, 나루는 저 멀리 지평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기야? 고생했어. 이젠 내가 도망쳐야겠네?”

소드마스터 나루가 가리킨 그곳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현대의 기병들. 전차들이 이쪽으로 질주해오는 것이었다.

전차를 위시한 장갑차량들의 윤곽이 빠르게 커졌다······.

조선인민군에서 보낸 것일까?

아니, 아니었다. 장갑차량들이 더 가까이 다가왔고, 이복동은 그것들의 차체에 그려진 해골 마크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접근을 보고받았는지 무전기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백골부대다! 그 새끼들, 드디어 왔다!」

나루가 씩 웃더니 엄지를 세워 보였다. 이복동은 어안이 벙벙한 채 생각했다.

칭찬하는 걸까?

정말 그런 의도였던 모양이다.

나루는 이복동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왔던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전진을 포기한 후퇴,

하기야 아무리 소드마스터라 한들, 저 병력을 무시하고 지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곧이어 백골부대의 장갑차량들이 이 부근을 통과했다.

결국 전장에 합류해서는, 드워프 전차들과 맞붙기 시작했다.

뒤이어 한국인 게이머들, 원정 도중 죽어서 이탈했다가 백골부대에 합류한 한국인 게이머들이 이 지점을 통과했다. 그들은 막 본진에서 왔기에 보급도 무장도 충실했다. 대전차무기를 비롯한 여러 무기를 아끼지 않고 가져온 바였다.

그 모든 광경을 이복동은 스코프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무전으로 전장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밀리고 밀리던 전장은 비로소 치열한 접전을 이루었다. 단번에 적들을 밀어내지는 못하지만, 모두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았다. 이 가상세계의 전장에서 그들의 역할은 처음부터 보조였으므로, 이 정도 소소한 역할에도 그들은 만족할 수 있었다.

이복동도 마찬가지였다.

“수고했어! 이젠 목적은 이뤘으니까 다들 쉬고. 특히 이복동 씨,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

마침내 로그아웃한 이복동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며칠 밤샌 와중에도 아드레날린이 그 졸음을 밀어냈다.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씨발, 와우!”

지금 이복동은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누구한테 자랑하나? 자신이 알고 지내는 사람이 거의 없단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자조했다.

‘그래도 엘프 하나는 알고 지내지.’

평소라면 그 잘난 엘프에게 먼저 친한 척하지 않았으련만, 너무나도 들뜬 지금은 예외였다.

그리하여 이복동은 가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복동이 물었다.

“형 몇 시간 뒤에 부활해요?”

전화기 너머 가온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십오 시간 뒤에. 왜?」

“그럼 말 섞을 여유 있네!”

그리고 이복동은 자기 위업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소드마스터의 발목을 붙잡았다느니 어쩌느니. 너무나도 즐거운 목소리로 그 사실을 전했다.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와, 나루 양을? 그 아가씨 미치게 센데. 잘했네 정말······」

전화기 너머 가온은 그리 칭찬하면서 진심으로 놀랐다.

그러나 그 놀라운 사실이 가온에게 순수한 기쁨만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그런 위업을 이루어낸 보람이 없으리란 사실에 가온은 새삼 슬픔을 느낀다.

「그러니까 이제 소드마스터 하나가 바로 거기 합류하진 못할 거 같아. 그러니까 이제 형이 더 오래 붙잡아주기만 하면 승산이 생기는 건데······」

수화기 너머 이복동의 말에 가온은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소심한 친구가 이토록 열띤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은 처음 알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그에 제대로 호응해 줄 수 없었다.

다행히 잠시 후, 이복동은 찐따가 신이 나서 너무 말이 많았다며 자책하더니 통화를 종료했다.

이후로 시간이 또 흘러, 가온은 다시금 게임에 접속했다.

이번 접속은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아마도 마지막 접속이 될 것이었으니.

*******

가온의 부활 장소는 한국인들이 사는 도시였다. 이제는 검술을 가르쳐주던 교관도 없는 그곳. 게임은 서비스 종료 직전이요, 남은 유저들은 전부 전선에 가 있느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느새 정들어버린 도시를 벗어나 백골부대의 영역에 도착했다. 거기 발 디디면서 내심 걱정했는데, 길드장의 배신이 지금쯤 탄로 났을지 모르는 것이었다.

류시범이 어떤 방식으로 배신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쯤 다들 실망하거나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 추측했지만, 아니었다.

“가온 경 오셨다!”

가온을 본 백골부대 길드원들은 들뜬 목소리로 환호했다. 뭔가 당했다기에는 너무나 즐거운 목소리들.

가온은 어안이 벙벙하여 물었다.

“왜 다들 기분이 좋아 보여. 전황 좋아?”

그리고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예! 백중지셉니다!”

“아니, 어떻게? 저쪽은 전차까지 동원했는데······”

“우리 전차는 놀고 있습니까? 지금 길드장님이 전차 다 끌고 가서 죄다 부숴버리고 있습니다!”

“시범이가?”

“예! 드워프 전차들이 종심돌파 하려는 거 길드장님이 역으로 감싸서······”

뭔 소리를 하는지는 잘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류시범은 지금 자기 길드원들을 지휘하여 잘 싸우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밀리고 있던 아군을 구했다는 것.

가온은 혼란 속에서 생각했다. 그것도 배신을 위한 속임수일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리 없었다. 적들이 다 이기는 상황에 훼방을 놓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대체 왜?’

*******

류시범은 치열한 전투 중에 걸려온 무전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은인이요 거물의 연락이었던 것이다.

「너 참마황과 전쟁 신을 위해 임무 수행 중 아니었나?」

가온의 물음에 류시범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이젠 아닙니다.”

「미쳤니?」

“아뇨, 전 그냥······”

「너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게 얼마나 이로운 일인지 모르나? 천국행이 확정인데 그걸 버려!」

“그거야 알죠. 하지만 천국 의외로 별로라던데요? 거기 가면 행복만 느끼게 세뇌를 당한다느니, 모든 증오가 거세되어 종일 실실 웃게 된다느니······”

「천국 안 좋긴 개뿔이, 척 보니까 천국 못 가니까 질투하는 후긴에서 한 말이구만! 그거 다 개소리고, 천국 정말 살기 좋아! 요샌 천국엔 자기네끼리 쓰는 인터넷도 깔려있다? 지금이라도 맘 고쳐먹고······」

“지금 와서 그러긴 늦었지 않습니까? 이미 저질렀는데요. 돌이키기엔 늦었어요.”

체념과 후회가 뒤섞인 말, 무전기 너머 가온은 벌컥 성냈다.

「그놈의 게임! 엿 같은 게임! 거기서 아무리 애써봤자 현실엔 별 영향 없다고 내 몇 번이나 말했는데, 대체 왜!」

류시범은 주눅 들면서도 대답했다.

“단순 전자오락이라기엔 중요한 게임 아니겠습니까······ 그놈의 게임 때문에 한국 국가요원까지 절 죽이려고 하신 거 봤지 않습니까?”

「그건 그 병신들이 뭘 잘못 알고 있어서 그런 거고! 애초에 너 죽이려고 한 그곳에 왜 가? 그 꼴 당하고도 애국심이 돌아오디?」

“애국심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럼 왜―」

류시범은 대답하려다 말았다. 무전이 다른 길드원들에게 들릴까 봐 걱정되었던 탓이다.

“죄송합니다. 지금 한창 전투 중이라 바쁘네요. 무례를 무릅쓰고 끊겠습니다.”

무전기를 바닥에 집어던진 뒤, 류시범은 전투에 집중했다.

적들에 맞서 지휘봉을 휘두르고 휘둘렀다.

고명한 엘프가 조언해주었듯, 자기 영혼을 위해서.

자길 믿는 젊은 병사들을 저버렸다가는 분명히 내면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질 터였던, 늙은 군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

무전을 마친 가온은 울화통이 터지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정말이지 답답하고도 정신 나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임 속에서 활약하여 조국을 구하겠답시고 전 재산을 날린 놈이 나오더니, 이제는 사후세계까지 포기한 놈이 나온 것이다.

‘미친······’

전원을 끄고 강제로 나오게 할까?

그러나 류시범이 말했듯, 이미 배신을 저지른 마당에 돌이키기는 늦었을지 모른다. 차라리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나을지도······.

가온은 멍한 정신으로 백골부대의 주둔지를 둘러보았다.

백골부대를 포함한 한국인 게이머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다들 참 열심히도 일하고 있었다. 트럭에 탄약이며 연료 따위를 싣는 등 다들 전투 준비에 한창이었다.

가온은 그들을 보며 다시금 인상을 구겼다. 비싼 계정비를 내고서 중노동하는 정신 나간 상황 아닌가.

‘아무런 보람도 없이······.’

심지어 그 일꾼들은 한국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아스인들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카르세어를 들어보니 확실했다.

그 아스인들 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오크 하나.

가온은 그를 알아보고는 말을 걸었다.

“너 요으냐?”

가온의 물음에 탄약상자를 나르다 말고 웬 남자가 기겁했다.

“어, 가온 씨? 반갑······ 저 인간으로 캐릭터 재생성했는데 어떻게 알았어요으?”

“숨소리로. 그래서 요새 잘 지내냐?”

“덕분에요으. 가온 경에겐 정말 몇 번이고 감사를 드려도으······”

“그래서 예히나탈 좋디? 인민의 낙원이니 뭐니 하던데.”

가온의 물음에 요으는 예히나탈 공산당 선전부에 취직한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칭송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당에서 준 집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느니, 예히나탈에서 내준 새 일자리가 얼마나 맘에 드는지 모르겠다느니. 그게 다 여기 있는 엘프 덕분이라느니.

가온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치곤 월급은 부족한 모양인데? 게임에서 부수입 챙기려는 거 보니.”

“부수입이요으?”

“지금 돈 받고 알바하는 거 아냐?”

“아니에요으. 봉사하는 거예요으.”

요으의 말에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 다른 아스인들도?”

“아마, 예으.”

참마황에 맞서는 한국인들을 돕는 아스인들, 뭐하는 치들인지는 뻔했다.

“아스의 주화파들인가보지. 참마황이 엘프의 몸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려는.”

그리고 여신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리고 네 여신의 신도들이기도 하노라. 나의 대전사.’

화로의 신도들.

각자의 가정이 있는 사람들.

사후가 보장된 아스인들은 그 어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란 편견과 달리, 저들은 책임질 가족들을 내버려 둔 채 전장에 뛰쳐나가길 원하지 않는다.

저들은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하여 천국에 오르기보다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국에 오르길 원한다. 그리고 만약 대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들의 죽음은 제 의지를 벗어나 앞당겨질 것이므로, 전쟁을 막고자 지구인들을 도우러 여기 온 모양이었다.

가온은 한동안 그들을 멀거니 지켜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작업 끝에 휴식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지구인들이 각자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하는 가운데, 아스인들 또한 따로 모여 휴식을 취했다. 종교적인 그들다운 방식으로.

아스인들은 경건히 모여, 기도를 시작했다. 그들의 한 가운데에 불타오르는 화톳불을 향해 무릎 꿇고서.

화로의 여신께 평화를 기도할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재의 왕자시여.”

저들은 그분의 대전사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보다 직접적으로 지상에 힘과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는 반신에게.

“화로의 대전사시여, 불꽃이 총구에서가 아닌, 우리 가정의 화로에서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소서······”

가온은 청력이 뛰어난 엘프답게, 그들의 기도를 멀리서도 들을 수 있었다.

계속 울려 퍼지는 기도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자신과 저들의 관계에 대해서.

아스의 절반은 가온이 복수자이기를 바란다.

나머지 절반은 가온이 화로의 수호자이기를 바란다.

양측은 서로를 상극이라 생각하겠지만, 가온이 보기에 둘은 똑같은 족속이었다. 가온에게 무언가의 의무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그 의무를 따르지 않으면 비난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점에서 양측은 같았다.

그렇듯 두 족속이 똑같이 지겨웠으므로, 무얼 고른들 맘이 편하지 못할 것이므로 가온은 둘 중 어느 쪽도 고를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

“그런데 저 인간들은 전쟁 발발하면 징집될 카르세인들이라 그렇다 치고, 요으 넌 예히나탈인이면서 왜 전쟁 막겠답시고 봉사하고 있냐?”

가온의 물음에 요으가 대답했다.

“예히나탈도 전쟁 분위기에서 비껴 나가진 못해요으. 아직도 천국 갈 수 있을까 불안한 사람들이 많아서 의용병도 결성되는 중이고······”

“뭐 하기야, 아스 전체의 전쟁이 될 테니까······ 그래서 넌 여전히 오크답게 전쟁 나가서 천국행 티켓 확보할 생각 없고?”

“절대. 봐라니 돌봐야죠으. 제가 천국 가면 걔 혼자 남겨지는데, 그럴 수가 있나요으?”

“그래, 훌륭하다. 이 자식.”

가온은 웃었고, 요으는 고개를 저었다.

“훌륭하긴요으. 다 저 좋으려고 그러는 건데.”

“너 좋으려고 그런다니?”

“저 같은 오크 새끼가 언제 또 봐라니처럼 귀여운 아일 키워보겠어요으? 결혼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제 인생에 제일 즐거운 순간이에요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러니 제가 그 앨 돌보는 건 헌신도 뭣도 아니에요으. 다 절 위해서지.”

그 고백에는 못생긴 데다 왜소하기까지 한 오크다운 열등감이 흘러 넘쳤다. 그 고백이 진심이든 아니든 가온은 위로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니, 그래도 훌륭해. 네가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잘 아는데 왜 자길 비하하니? 그러지 마라, 자식아.”

가온의 말에 요으는 쓰게 웃었다.

“훌륭한 걸로 치면 여기 가온 경과 비교할 수 있겠나요으?”

“내가 뭐가 훌륭해?”

“지금도 한국인들 도와주시려고······ 아니면 화로의 신도들을 위해서······ 전쟁 막으려고 대전사로서 활동 중이신 거 아닌가요으?”

“딱히 그러려는 건 아닌데.”

“그럼?”

가온은 뭐라 대답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한편 요으는 이 위대하신 재의 왕자에게 감히 대답을 독촉할 깜냥이 못 되었으므로,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고요를 깬 것은 저 너머에서 온 무전이었다.

「가온 씨? NPC 가온 위치 파악됐소! 어서 오시오. 자, 빨리······」

가온이 복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조선인민군이 급히 연락해왔다.

이제야말로 마지막 싸움을 할 때였다.

가온을 위한 군용차량과 운전병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온을 태운 차량은 검은 매연을 뿜으며, 아린 벌판을 달렸다.

또 다른 자신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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