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게이머들 - [3]
“전쟁 신을 배교한다면? 지옥 가겠지 뭐.”
지옥. 그 끔찍한 단어를 나루는 너무나도 평범한 말인 양 입에 담았다.
류시범은 가슴에 아주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감각을 느끼며 계속 물었다.
“다른 종교로 갈아타면요?”
“너 원래 화로 교도였다가 갈아탄 거잖아. 그럼 다시 갈아탈 곳도 없는데 다른 어떤 신이 받아주겠어?”
“기독교?”
“기독교를 안 믿으니 아스 신들을 믿었던 것 아니니?”
“뭐 그렇죠······”
류시범이 말을 흐리는 가운데, 나루는 그 속내를 짐작한 듯 물었다.
“왜, 새삼 후회돼?”
당연히 후회된다. 대체 무슨 얼어죽을 나라에 대한 복수를 꾀했는지 지금 와서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엘프가 목숨을 건져줬을 때, 그것만으로도 행운인 줄 알고 얌전히 지내기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그놈의 전쟁 신은 왜 갑자기 이쪽을 선택해가지고······.’
그 속내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신성모독이 걱정되는 탓이다.
다행히 나루는 이쪽을 배려해주는지 더 묻지는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위로하듯 주름진 손을 잡아주었다.
혼자 사는 노인으로서는 오래 느껴보지 못한 따스한 온기······.
류시범은 애써 그 손을 치워내며 물었다.
“절 경멸하진 않습니까?”
“내가? 왜?”
“전 조국의 배신자 아닙니까.”
“글쎄? 나야 뭐 국가 개념이 희박해서.”
“이 나이 먹고 젊은 애들 속여먹겠답시고 꾀병이나 부리고 있고요.”
“그래, 그건 좀 꼴사납긴 한데, 뭐 어쩔 수 없지. 인생이 얼마나 긴데······ 언제나 멋있게 굴 수 있나?”
“나루님도 이 정도로 추하게 구신 적이 있습니까?”
“많이. 아주 많이. 참 후회할 짓 많이 했지. 그런 주제에 훈수를 두긴 뭐하네.”
그 대답에 류시범은 내심 실망했다. 저 엘프가 검기를 피워올리며 자기네 연금 수호에 헌신하라고, 혹시 배신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윽박질렀다면 차라리 선택하기 편했을 텐데. 오천 년을 살아온 엘프는 그러지 않고 이 어린 종족을 존중하고 있었다.
류시범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그나마 덜 후회하려면 뭘 어째야 할까요?”
“그건 내가 정해줄 수 있는 게 아니지. 하지만 굳이 조언하자면······”
나루는 마지막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영혼을 지키렴.”
나루는 류시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껑충 뛰었다.
아, 정말로. 엘프는 뒷모습마저도 아름답다. 심지어 그 빈자리마저도.
류시범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로 달빛이 들어온다. 너무 오래 이불에 처박혀있던 탓인지 그마저도 눈이 부시다.
늙은 군인은 이불을 걷어차고 나왔다.
*******
갑자기 웬 언데드 군단이 나타난 마당에 멀뚱히 있을 수는 없다. 조선인민군도 한국인 게이머들도, 부랴부랴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단순히 방어에 전념해서 될 것도 아니다. 방어하는 동시에 모든 힘을 다해 공격해야 한다.
어떻게든 그놈의 해골 군단이 도달하기 전에 아린 벌판을 점령하기 위해, 다들 가진 모든 것을 전장에 쏟아부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는 물자 소모. 소모품만 마구 쓰는 것이 아니었다.
전장에 가용한 모든 전력과 장비를 끌고 나왔다. 전차건 항공전력이건 한꺼번에 모조리 내보냈다.
탄약이야 그렇다 쳐도 비싼 장비들은 잃고 나면 다시 구할 방법도 없다.
그러니 이번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정말 끝장임을 모두 알았다.
죽어도 부활하는 게임이지만 또다시 전멸하면 그것으로 끝. 게임 오버. 더 싸울 수가 없다.
그 사실을 당연히 카르세인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 또한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
그동안 한국인 원정대가 당한 것은 너무나 전통적인 전술이었다. 영토 깊숙이 들어오게 두고는 게릴라전을 펼쳐 보급을 방해하고 피해를 누적시키기.
다행스럽지는 않게도,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강주석은 저 능선 너머 카르세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척 봐도 여기 절반은 왔네.”
적들은 과할 정도로 여기 몰려와 있었다. 아무래도 실제 군대인 조선인민군보다는 게이머들의 연합이 훨씬 약할 것이므로, 이 취약한 방어선을 집중하여 뚫어버리려는 모양이었다.
날이 저물기 무섭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양쪽에서 요란하게 포성이 울리는 가운데, 총알이 어둠 속에 수많은 빛을 수놓았다.
“죽여! 전부 죽여!”
예전과 달리 이제는 카르세인들이 수적 우세였다. 이쪽 병력이 죄다 행군 중에 낙오하거나 지쳐 나가떨어진 탓이다.
또한 예전이라면 강력한 항공지원으로 시작부터 적들의 기를 죽였을 텐데. 이제는 이쪽도 저들만큼 가난해졌다. 거의 모든 장비를 상실한 지금은 한국인들도 검소하게 몸과 총만으로 맞붙어야 했다.
그나마 마지막 남은 돈으로 총과 탄약은 나름 괜찮게 챙겨오기는 했다. 덕분에 병기의 질은 아직 이쪽이 우세라는 점에 위안을 가지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마저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금세 드러나고 말았다.
카르세인들은 이번 최후결전에 최종병기를 동원했다. 지구인들은 감히 쓸 수 없는 비대칭 전력을.
무전을 들은 한국인 지휘부는 신음했다.
「소드마스터!」
어두운 전장에 달빛이 번뜩인다.
달빛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두세 명의 목이 날아간다.
한국인들이 예전에 목격했던 그 소드마스터였다. 아마도 나루이리라 짐작되는 우드엘프 소드마스터.
이제는 그 존재를 숨기지도 않는 모양이다.
나루는 전보다 빠르게. 더 치명적으로 전장에 파고들었다.
곳곳에서 소드마스터의 등장과 그로 인한 분대 단위 전멸을 알리는 무전이 비명처럼 들려왔다.
지휘부는 이 상황을 최대한 침착하게 판단해보고자 애썼다.
“이참에 이 방어선을 뚫고, 소드마스터를 저 너머로 보내려나 보지······.”
“대차원문에?”
“그래. 그리고 소드마스터가 거기 도달하는 순간 다 끝장이야. 소드마스터끼리 맞짱뜨는 동안 나머지 병력이 그 근처를 점령하면 우승이니까······ 게다가 저 소마가 우리 가온이랑 만나면······”
그 가온이 진짜 그 가온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어느 쪽이건 소드마스터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순 없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최대한 여기 묶어둬야 돼. 전멸하든 한이 있더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백두 길드장 강주석은 고급 총기를 들었다.
현금 수십만 원짜리 비싼 아이템이다. 이미 원정대를 위해 수십억을 쓴 마당에 돈을 추가로 들여 장비했다.
덕분에 이제는 정말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빈털터리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면, 간단하다. 게임과 인터넷에서 칭송을 받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무언가 근사한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오직 그것을 위해 강주석은 전 재산을 날렸다.
보통 사람들은 이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게임 속에서라도 존경받기 위해 대출받아가며 게임에 돈을 퍼붓는 만년 아르바이트생쯤 되어야 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으레 그렇듯, 강주석은 자신에게 자신이 없다.
자신이 참으로 형편없는 놈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원래는 하루 14시간씩 특정 콘솔 게임 사이트에 상주하던 중졸 백수 아니었던가. 그 사이트의 정치 관련 게시글이 금지된 게시판에다 편향적인 정치 관련 게시글을 올려대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강주석의 일과였다.
그러다 사이트 회원들을 모아 게임 길드를 만들었더니 우연히도 성장을 거듭했는데, 그 길드장으로서 큰돈을 벌었지만 고아요 친구 하나 없는 강주석은 모은 돈을 자랑할 상대가 없었다. 게다가 사행성으로 악명 높은 게임에서 떼돈을 벌었단 것은 썩 자랑거리가 못되었다.
그래서 여전히 자존심은 채워지지 않았고, 여전히 강주석은 자신을 인생의 낙오자로 여겼다.
그리하여 강주석의 내면에는 예로부터 있었으나 충족되지 못했던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졌으니, 그것은 바로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해내고 싶다는 욕구였다.
그 욕구는 이후 강주석이 벌인 온갖 기괴한 행동의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기괴한 행동 끝에 길드장 자리에서 쫓겨난 뒤에도, 그 강렬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은 거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기야 인생의 낙오자가 거창한 판타지 망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듯, 거창한 목표에 매달리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리고 그놈의 위대한 일을 해내기 위해 이미 돈을 쓰고 난 지금은, 새삼 빈 통장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제발 헛돈을 쓴 게 아니기를. 무언가 해낼 수 있기를.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감이 생길 만한 일을 해낼 수 있기를······.
그리하여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강주석은 간절히 바랐다.
적들이 다가왔다.
강주석은 비싼 총을 높이 들며, 머릿속에 가득한 울적함을 떨쳐내기 위해 최대한 소리 높여 외쳤다.
“죽자! 이참에 뒈지고 이 망겜 접어버리자!”
수십억을 쓴 보람이 있는지 호응이 제법 뒤따랐다.
“가자―!”
강주석을 위시한 결사대가 돌진했다. 가장 비싼 자동소총 한 자루씩을 들고, 소드마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때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한 명 한 명의 조준 사격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랬다간 피하거나 칼로 쳐낼 테니까. 그러지 못하게 최대한 밀집해서 화망을 형성해야 한다.
이런 전장에서 그따위로 뭉쳐 있었다간 수류탄 하나에 떼죽음을 당하겠지만, 이번만큼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만하다.
초인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든······.
천운인지 실력인지. 놀랍게도 결사대는 소드마스터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쏴! 있는 대로 쏴!”
결사대는 우르르 몰려서, 저 소드마스터의 가녀린 몸을 향해 다 함께 총을 쏘았다.
피할 곳은 없었다. 설령 한두 발 쳐내더라도 다른 총알들이 그 몸에 박힐 것······.
“저게······.”
초승달이 번쩍였다. 나루의 오른손 검에서만 빛나던 달빛이 이제는 왼손에서도 빛나기 시작했다.
양손 검기. 즉 두 배의 검기다. 보통의 소드마스터는 한두 발의 총알쯤 쉽게 베어낸다. 그렇다면 이 소드마스터의 경우는? 검기가 두 배이므로 쳐내는 총알의 수도 두 배다.
“씨발.”
기껏 밀집해서 쏜 총알들을 양손으로 쳐내며 나루는 달렸다.
총알의 소나기를 정면으로 뚫는 초인의 존재란 과연 불합리의 결정체에 가까운 것이었다.
비명 지르며 결사대가 총을 연사하는 가운데, 문득 나루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류탄을 맨발로 주워서는 휙 하고 던졌다.
발로 한 일임에도 평범한 사람들이 손으로 한 일보다 훨씬 나았다. 수류탄은 결사대의 정확히 중심에 떨어졌다.
결사대가 전멸하기는 순식간이었다.
그 광경을 이복동은 은신처에 숨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야간스코프가 달린 저격총 두 자루를 갖고서.
이복동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저격수들이 저 초인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 여기 매복했다.
혹시 저 뾰족한 귀에 들릴세라, 숨을 잔뜩 죽인 채 이복동은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죽일 수 있을까?
저번에는 아슬아슬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야말로 죽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망할 게임이라면 추억이라도 남기를. 이 분투가 인생에 추억이 되기를 이복동은 간절히 바랐다.
정말이지 자랑스러운 추억이 될 것이다. 확신한다. 워낙 보잘것없는 인생이었으니까, 고작 게임에서의 활약도 지금까지 살아오며 벌인 그 어떤 일보다 가치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
‘억.’
이복동은 갑작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배에 울려 퍼진 진동 탓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지축을 울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리고 진동과 함께 소리, 거대한 소리가 모두를 괴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접근을 알 수 있었다. 모두 한 방향에 고개를 돌리고는 충격을 받았다.
어두운 와중에도 지평선에 휘날리는 저 거대한 흙먼지 폭풍이라니? 그리고 그 폭풍을 일으키는 것들은······.
소스라친 누군가가 무전으로 소리쳤다.
「전차! 전차들이다! 한두 대가 아니야!」
그동안 약탈하며 모아둔 자원들을 어디다 썼나 했더니만, 모조리 저 전쟁 기계들을 생산하는 데 쏟아부은 모양이다.
전차들, 그것도 중전차들이 달려온다. 그 수가 자그마치 쉰 대가 넘는다.
많다. 너무 많다.
카르세인들의 환호가 울려 퍼진다. 그와 함께 이복동은 절망했다.
‘아······’
뒤이어 더 자세한 소식이 알려졌다. 지금 여기 오고 있는 저것들은 드워프 전차들이라고 했다.
그게 뭔지 이복동도 대충 기억하고 있었다. TV에서 소개하길, 반세기 전에나 쓰였을 고물들이라던가?
그렇듯 21세기 전장에서는 구형으로 평가받는 부족한 전차들이지만 이 2차 대전 배경에서는 그렇지 않다.
당연히 그 전차들은 여기서 현역 수준이요, 애초에 이 빈약한 군대에 대전차 화기는 거의 없다. 소총병들 따위가 잡아둘 수 있는 적들이 아니다.
이복동은 저격총을 내려놓으며 한숨 쉬었다.
이대로, 뭔가 해볼 기회도 없이 짓밟힐 것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추억은커녕 차가운 겨울의 기억만이 남으리란 것도.
*******
핵탄두가 아직 남아있던 모양이다. 버섯구름 몇 개가 더 피어났고, 대차원문을 향해 나아가던 조선인민군 대대 몇몇이 증발했다.
지구인들이 죽은 그곳으로 카르세의 의용군이 진입했다.
핵이 떨어져 그 어느 병사도 발 디디지 못하게 된 땅을 가로질러, 드워프 전차들이 달렸다. 그 죽음의 땅에 도사리는 방사능도 드워프들이 손수 단 무한궤도를 막지는 못했다.
일련의 소식을 무전으로 전하는 장교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게 대체······」
그러나 가온으로서는 새삼 놀랄 것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앞서 들어본 적이 있지 않은가.
‘이 게임이 원래는 전쟁 시뮬레이션이라더니. 마지막에 와서야 전략 시험을 하나 보지. 그래서 네가 준비한 게 이거냐?’
아타락시아가 가온을 만나 알려줬더랬다. 참마황이 지구를 상대로 싸우겠다며 준비했다는 그놈의 전략.
‘핵과 초인. 핵을 쏴서 길을 뚫고, 확보한 대차원문 너머로 초인을 보내겠다는 그 전략. 우선 아스의 일부를 불태우는 것이 전제인······.’
불탄 땅, 핵과 마법의 화염에 불타버린 아린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가온은 그 잿더미 땅에서 뛰고 또 뛰었다.
그리하여 가온이 또 다른 가온에게 당도한 것은 반나절 후의 일이었다.
여기 가온은 보았다.
저기 또 다른 가온이 있었다.
NPC 가온. 대차원문을 지키는, 이 게임의 최종보스.
수 킬로미터씩 텔레포트하는 저 반신의 이동을 막기 위해, 수많은 조선인민군이 죽어라 달려들고 있었다. 텔레포트를 방해하는 유물들을 가지고 달려드는 것이다.
말 그대로 목숨을 내버리는 그 분투 덕에 저 반신의 위치가 잠시나마 고정될 수 있었다.
피가 흐르고 또 흐르고 있었다.
“이 간나 새끼이이이!”
사방에서 적들이 달려드는 와중에 NPC 가온은 포위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지 않았다. 그는 오만한 그레이엘프 왕족이었으므로, 비단이 깔려있지 않은 이곳에서는 발조차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NPC 가온은 그저 제자리에 서서 칼을 휘저었다. 크게 움직이기는 귀찮은 듯이 최소한의 동작으로, 그러나 효율적인 동선을 그리며.
그 우아한 동작의 결과는 매번 참혹했다.
휘둘러진 재가 호를 한 번 그릴 때마다, 매번 대여섯 병사들의 머리가 몸에서 사라졌다.
밀리터리 게임에 내보내기는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의 연속. 이대로 내버려 두면 NPC 가온은 금세 포위를 뚫고 이 자리를 벗어날 것이다.
그로서는 굳이 뛰어서 달아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저 걸어서 이 지겨운 장소를 떠나면 될 것이다.
그 사실을 가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잔뜩 지쳤지만 더 구경할 수는 없었다.
가온은 마지막으로 숨을 돌리며 이 주변 광경을 보았다. 불타오르는 대지. 잿빛으로 녹아버린 구름과 붉게 물든 하늘.
그리고 그 색채들에 뒤섞여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거대한 대차원문······.
‘그래, 최종보스전답기는 하네.’
가온은 칼을 뽑았다. 그리고 또 다른 자신을 보며 우울하게 웃더니,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