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게이머들 - [2]
시스템 메시지는 저 회색 엘프가 위험한 존재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물론 쓸데없는 일이었다. 요즘 와서는 아예 일반 상식 아닌가.
혼자서 나라를 뒤엎는 초인. 자신들이 뭘 어쩔 수 없는 존재란 것쯤은 모두 알았다. 그동안 직접 겪어봐서든, 요새 뉴스를 봐서든 간에.
그러니까 조선인민군 병사들이 그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버티고 선 것은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최대한 오래들 개겨. 너무 일찍 죽은 새끼들은 게임 나가서 눈치 봐야 돼···”
그리고 반신의 권능이 퍼진다. 현대 무기를 고물로 만들어버리는 그 권능이다.
총검을 제외한 모든 무기, 문명을 상징하는 무기들이 모조리 무거운 쇳덩어리로 전락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치명적이지만, 후긴 국왕 가온은 혼자 전장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이 그레이엘프 반신은 혼자서도 능히 모든 병력을 상대할 수 있겠지만,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적들을 제거하고자 따로 병력을 데려왔다.
“말박이들 돌격해온다!”
카르세 변경 기사단.
원래 역사에서 변경백 흉턴이 적진으로 돌격할 때마다 총알받이 노릇을 해주다 궤멸했다는 이 기사단은 다른 세상의 원한을 품고 공포의 존재로 화했다.
“카르세-아린에 영광 있으라―!”
중세의 전차들이 돌격을 시작했다.
조선인민군 병사들도 이 상황을 대비하여 미리 총에 대검을 장착해두긴 했다.
물론 그렇다고 상대가 될 리 없다. 가뜩이나 잘 먹지 못해 체격도 부실한 최빈국의 병사들 아닌가.
그들 앞으로 수천 말발굽이 땅을 두드린다. 중세의 영광을 되찾은 기병들이 총 든 병사들을 짓밟는다.
학살이 시작된다.
이제는 굳이 반신까지 거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이 광경을 전지적 시점으로 판단하는 남녀가 있다.
그들이 신은 아니다. 일개 게임사 직원일 뿐이다. 그러나 이 장소에서는 가히 신과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선배? 가온 전하, 이제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겠죠?”
후임 직원의 말에 선임 직원이 대답했다.
“어. 텔레포트 하게 해드려라······”
신은 편재한다. 혼자서 여러 장소에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반신은?
비슷한 짓을 벌일 수 있다. 다른 반신은 몰라도 이 그레이엘프 반신은 그렇다.
게임사 직원의 명령으로, NPC 가온이 텔레포트했다. 또 다른 적들의 앞으로.
그리하여 전혀 다른 장소에서 행군하던 조선인민군 대대는 이 반신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가온?”
놀란 병사들이 뭔가 대응할 시간은 없다. 소드마스터의 모든 행동은 이동과 동시에 완성된다.
반신의 손에서 불꽃이 피어오른다.
화로의 성화(聖火)다. 그 신성한 불꽃은 현실의 물질이 아닌 내면의 마나를 연료 삼아 불타오른다.
그리고 반신의 마나는 거의 무한하며, 그것을 태워 얻는 결과물도 그렇다.
해일과 같은 불이 파도친다. 거대한 붉은 파도가 아직 행군을 채 멈추지 못한 대대를 휩쓴다.
*******
원래대로라면 목격자 한 명 남기지 않은 그 학살을 본부에 전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게임이고, 로그아웃한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자신들이 당한 일을 고해 바쳤다.
“게임사 종간나 새끼들. 아주 막 나가기로 작정했구만······”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광역 마법 패턴. 유저들이 전의를 상실할까 봐 그동안은 감추다가 게임이 종말에 이른 지금 비로소 봉인을 푼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여러 중대며 대대가 NPC 가온의 방문을 받은바, 조선인민군 사단 규모 병력이 불과 반나절 만에 사라졌다고 했다. 죽은 병력이야 24시간 뒤에 부활하겠지만 어쨌건 공세는 돈좌되고 말았다고.
‘원래 가온은 이따위로 적극적인 NPC가 아니었는데. 현실의 나처럼······’
더없는 불합리함을 느끼며 가온은 저 너머 하늘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화재가 한 지역을 휩쓸 때면 으레 그렇듯, 하늘마저 익어 버렸다. 그 현상을 멀리서도 관측할 수 있었는데, 얼핏 보면 노을처럼 보였다. 보고 있자면 우수에 젖게 되는 노을. 화로의 불꽃을 연상시키는······.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조선인민군 장교가 다가오더니, 아연한 얼굴로 말했다.
“가온, 마침내 나타났다는데 말이요. 어디 있는지 자세히 안내받을 필요도 없겠습니다그려······. ”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이쪽 가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화염을 파도치게 하는 반신은 저 불탄 하늘 근처에 있을 것이다.
“이로써 위치 특정이 됐으니, 칼잽이 동지가 나서주셔야······”
조선인민군 장교의 부탁에 가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가서 싸우라고? 원래는 모든 방향에서 전 병력이 한꺼번에 대차원문으로 돌입한 뒤에야 내가 싸우기로 한 것 아니었나? 그게 원래 계획이었잖아.”
“아, 맞소.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순간에야 비로소 여기 있는 칼잽이께서 그 재 귀쟁이를 상대해야 했지.”
“그래, 내가 NPC 가온을 짧은 시간이나마 붙잡아주는 동안 모든 병력이 한 장소로 들이닥치면 그놈의 벌판을 점령할 수 있을 거 아냐? 설령 내가 NPC 가온을 못 이겨도 말이야. 그런데 벌써 맞붙으라니? 더 나은 계획이 생겼나?”
“그건 아니고. 물론 원래 계획이 이상적이었겠지만, 지금은 여유 부릴 수 없겠습니다. 원래 없었던 시간제한이 지금 생겼소.”
“시간제한? 아, 나도 이벤트 알림 봤지. 언데드 군단이 온댔나?”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저 멀리서 걸어오긴 하는데, 그래봤자 여기 도착하는 데 아주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그리고 뼈다귀들이 본격적으로 전장에 나타나면 다 끝장이지요. 그땐 아린 벌판이 문제가 아니라 그 반송장 놈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가를 걱정해야 할 테니······.”
가온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벤트랍시고 한국인 유저들에게만 불이익을 주지 않기로 약속해놓고서 태연히 약속을 깨버린 것이다. 혹시 한국인이 아니라 북조선인들 괴롭히는 거라 괜찮다고 할 작정일까?
어느 이유에서건 지금 이것은 아타락시아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약속을 깨는 것은 드래곤의 신용에 크나큰 상처를 입히는 행위니.
심지어 장교가 말해주기로, 이 게임 속에서 아타락시아가 나타나 사단 하나를 기습했다고도 했다.
이 역시 아타락시아로서는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 분명한지라, 가온은 짜증과 동정이 반쯤 섞인 심정으로 혀를 찼다.
‘참마황이 늙어죽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배신자인 걸 들키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거지? 그러니 참마황을 위하는 척하려고 드래곤답지 않은 짓을······’
뭐, 그러면서도 아타락시아로서는 나름의 자비를 베푼 모양이었다.
장교가 설명하길, 또다시 갑작스럽게 출현한 언데드 군단은 제법 먼 지역에서 생성되어 이 전선에 도달하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거대한 레드드래곤은 산맥을 지킨 채 그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다고도.
물론 그것만으로도 한반도인들의 입장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저 둘의 출현만으로도 이쪽 승산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사실, 가온은 그 사실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불합리한 전쟁의 결과 누가 이기건, 가온이 보기에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빨리 끝나는 것만이 중요해. 이 짓거리가······’
그 속내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럼, 뭐. 슬슬 움직이지.”
중얼거리듯 말하며 가온은 걸음을 옮겼다. 보는 사람들마저 맥 빠질 만치 힘없이.
“부탁하는 입장에 뭐라 하긴 좀 그렇지만, 좀 더 의욕을 내줄 순 없습니까? 자그마치 그 재 귀쟁이랑 붙으려는 건데······”
조선인민군 장교가 말했지만 가온은 무시했다.
정말이지 의욕을 낼 수가 없는 상황이엇다. 가온은 주변 조선인민군 병사들을 보며 그리 느꼈다.
빼빼 마른, 무기력한 병사들.
이토록 생기 없는 사람들은 후긴에서나 보았다.
이 가상세계에서의 군 생활이 다들 고생스럽다 못해 진작 탈진해버린 듯하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자기네 흡혈귀 지도자를 위해 다들 몇 달 내내 행군하고 전쟁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고생스러웠을 텐데, 엘프 몸뚱이가 탐나는 김일성은 지금 군 장성들을 있는 대로 압박하고 있을 것이다. 그 아래 병사들은 또 얼마나 괴롭힘 받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여간 참 덕 없는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기어이 그 지도자가 엘프가 되는 데 성공하여 진정한 불로불사를 손에 넣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여간 이곳에서의 모든 일이 맘에 들지 않는다.
계속해서 우울하게 걷자니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는 누군가와 무전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가온은 그게 이미리의 목소리임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검을 쓸 줄 아니 NPC 가온이며 그 기사단과 싸울 때 도움 되리라 주장하길래, 가온이 투명화 주문을 걸어 여기에 데려와 준 바였다.
“백골부대 아직도 협조 안 한다 이거지······ 그래서 류시범이 뭐래? 아직도 때가 아니래요?”
「류시범 그 양반, 요샌 아예 접속을 안 한답니다」
“아니, 이 중요한 순간에? 왜요?”
「아파서 앓아누웠대요. 그리고 백골부대 이인자가 말하는데, 사단장 명령 없이는 자기넨 행동 맘대로 못 한다 하고」
“참군인들 나셨네 아주!”
청력 좋은 엘프답게 가온은 그 대화 내용을 멀리서도 들을 수 있었다.
류시범이 오프라인이라고?
왜 그러는지 짐작이 가능했다. 의도적인 태업이리라. 참마황을 위한······.
비난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현명한 처신이라는 생각이 들 뿐.
“칼잽이 양반? 그만 뭉그적대고 최대한 빨리······”
장교가 독촉했다. 가온은 움직이기 싫은 것을 꾹 참고 행동에 나섰다.
우선 자신에게 투명화 주문을 걸었다. 그리하여 적은 물론 아군도 자신을 보지 못하게 된 가운데, 홀로 저벅저벅 벌판을 걸었다.
또 다른 자신을 찾아서, 저 붉은 하늘 아래로 나아갔다.
*******
류시범은 이불로 몸을 감쌌다.
전화기가 울렸지만 무시했다. 이를 악물며 속으로 되뇌었다.
‘난 아픈 거야. 아픈 거. 아프니까 전화 못 받는······’
그 핑계로 게임에도 접속하지 않았다. 덕분에 백골부대 길드는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묶였다. 사단장 노릇을 하는 길드장의 명령을 기다리기 위해서.
실제 군대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게임의 길드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백골부대 길드원들은 자기네 길드장의 지휘권을 존중한다. 길드장과 길드원들의 사이가 좋아진 요즘은 특히 더 그렇다.
그러니까, 다들 지금 불만이 쌓이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맘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 길드장이 접속하지 않더라도 기어이 움직여야겠다고 맘먹었을 때는 너무 늦었을 것이다······.
또 한 번 전화기가 울렸다.
류시범은 이번에도 무시하려다가, 문득 휴대전화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았다.
길드의 부관이 보낸 메시지였다.
얼른 게임에 접속해서 결정을 내려달라는 독촉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박대위 : 많이 편찮으십니까? 푹 쉬시고 쾌차하시길 빕니다 (11:14)
비난받아야 할 상황에 비난받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죄책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불에 틀어박혀 있던 류시범은 몸을 떨었다. 다 늙어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때 바람이 불어왔다. 창이 벌컥 열리더니 웬 여자가 들이닥쳤다.
실제 아픈 사람처럼 류시범은 소스라쳤다.
“누구······”
“누나도 몰라보니, 시범아?”
청량한 목소리, 우드엘프 나루였다. 하기야 저 엘프 말고 이런 방문을 할 사람이 달리 없다.
“여긴 뭐하러?”
류시범의 물음에 나루가 대답했다.
“너 아프다길래 상태 보러 왔지. 괜찮니?”
“아, 으, 예. 물론 괜찮습니다. 아픈 척하는 겁니다. 제 길드원들 속이려고요.”
“음, 그래? 안색만 봐선 엄청 아파 보이는데······ 안 아프다니 다행이네.”
류시범은 더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말했다.
“헛걸음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 다른 목적도 있었으니.”
“다른 목적이요? 어떤······”
나루는 살짝 웃었다.
“마지막 인사하려고. 이제 정말 다 끝이라잖아?”
“예? 예. 그렇죠.”
애써 모르는 척하지만, 현재 그놈의 게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류시범도 알고 있었다.
여기 늙은 군인과 엘프가 얽힌, 그 게임은 지금 종막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름 즐거웠어.”
“저도 그렇습니다.”
류시범은 그리 말하며 웃었는데, 진심이었다.
다 늙어서 웬 반만 년 엘프에게 구박받고 괴롭힘을 받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엘프와의 만남은 생각지도 못했던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 늙어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던 중에, 그 누가 역사책에도 나오는 엘프와 어울려 보겠는가?
류시범은 지금 이 상황이 자기 인생에 다시 없는 순간임을 새삼 자각했다.
류시범은 문득 저 엘프를 이대로 보내기 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한, 그녀에게 자기 고국의 배신자로 기억되기 싫다고도.
“저······”
류시범의 말에 나루가 뒤돌아섰다.
“응?”
“조언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느긋한 우드엘프답게 나루는 급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침대에 걸터앉아서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 누님한테 걱정을 털어놓아 보렴, 애기야.”
그러나 류시범은 웃지 못했다. 누가 들을까 봐 겁먹은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저 말입니다. 만약 배교하면 어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