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118화 (118/135)

LV.? 게이머들 - [1]

한국인 원정대는 사실상 패잔병들의 모임이나 다름없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했건만 얻은 것 하나 없이 잃기만 해온 마당이다. 고작 행군하는 동안 상실한 장비며 병력이 얼마인가.

그러니까 이 꼴사나운 무리에 활기가 감도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알다시피 카르세 놈들이랑 비교해서 우리가 꿇릴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훨씬 잘 싸워요! 그저 우린 저쪽을 끝장낼 수단이 없는데 소모만 강요당하니까 맥을 못 췄던 거죠. 그런데 이번에 이 망겜을 끝내줄 분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누구?”

““가온!””

연설을 맡은 길드장은 웃는 얼굴로 새로 합류한 귀빈을 소개했다.

“자, 다들 가온 경께 박수!”

우레와 같은 손뼉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단순한 과장이 아니었다.

여기 모인 만 명이 넘는 게이머들 모두가 손뼉을 치고 있었다. 이곳의 중심에 앉은 남자, 어느새 한국인 게이머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유저가 되어버린 저 가온을 향해서.

한국인 게이머들이 온갖 고생을 해가며 겨우 도달한 이 아린 벌판의 중심에 가온은 그저 혼자 걸어서 찾아왔다. 그것만 해도 다른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위업이요, 이 아스인이 가히 특수부대원의 능력을 아득히 초월하는 초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만 명의 손뼉이 계속 울렸다.

정말이지 다들 열띤 찬사를 보내는 마당이었다.

““가온, 가온, 가온!””

그러나 정작 가온 본인은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표정하게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평소라면 기분이 좋은 것을 숨기기 위한 무표정이었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도저히 칭찬 따위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 자식······.’

가온은 저 한국인들을 보며, 저들과 같은 땅에 살았던 자신의 친구를 떠올렸다.

자신과 이백 년이나 함께했던 친구.

그 친구가 저 한반도인들에게 저지른 일, 그리고 앞으로 저지를 일에 가온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윽고 죄책감은 부채감으로 화했다. 자신이 저들에게 잘못을 저질렀으니 뭐라도 해주어야겠다는 감정 말이다.

그놈의 부채감을 고작 게임에서 해결하려 하다니 우스운 일이지만······.

생각을 정리하며 가온은 속으로 한탄했다.

그놈의 친구만 아니었다면 이따위 일엔 결코 개입하지 않았으리라고.

‘하여간 이 모든 마음고생이 다 그놈 탓이야.’

다른 세계에서 반지성에게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이후로 인터넷에서 한국인들과 얽힐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저들과 얽히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정말 이제 끝입니다! 해리포터가 부활했으니 이제야말로 이 망겜을 끝낼 겁니다. 흉턴 그 볼드모트는 늙어 죽을 것이고······”

길드장의 연설이 끝난 뒤에도 가온은 여기 모인 수만 명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예전이라면 저들의 관심이 달콤했겠으나 지금은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가온이 멍하니 앉아있자니, 이복동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결국 왔네? 형. 도와도 소용없을 거라더니······.”

가온은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그런데 혹시 지존무쌍이 연락 안 하든?”

“응? 응. 돈 빌려줄 수 없느냐 전화하길래 생각해보겠다고 대답······”

“절대 빌려주지 마.”

“왜?”

“친한 사람에게 빌린 것이니 안 갚아도 된다 생각할 양반이야. 친한 사람한테 빌렸으니 반드시 갚아야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한편 한국인 원정대 수뇌부는 이 놀라운 소식을 조선인민군에 전했다.

이 게임의 최종보스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전부터 말했던 그 아스인이 합류했노라고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조선인민군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정말 그 칼잽이 데려왔어? 용하네! 아주 용해!」

괜한 호들갑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아무튼 소드마스터와 대결할 수 있다는 인물이다. 그런 인재를 대체 어디서 구할 것인가? 북한과 남한이 아니라 미국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아린 벌판 점령은 언제······”

「최대한 빠를수록 좋지. 그런데 그러려면 그 칼잽이가 우리한테 합류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얼마나 걸릴지?」

조선인민군 장교의 물음에 가온이 끼어들었다.

“금방 간다고 전해.”

“어떻게요? 거기까지 가는 길엔 적이 쫙 깔렸는데······”

“투명화 주문이랑 텔레포트 주문 쓸 줄 알면 못 갈 곳이 없어.”

가온의 담담한 대답에 또다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과연 재의 왕자!”

“가서 북괴 새끼들한테 최고급 축지법이 뭔지 보여줘요!”

지친 와중에도 반짝이는 눈빛들. 가온은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자기넬 구원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왕을 쓰러뜨리는 용사 노릇을 해주러 왔다고.’

가온은 그들의 기대가 거북했다.

‘실은 그렇지 않은데. 기어이 마왕 토벌에 성공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테고······’

나름대로 도우러 오기는 했다. 그러나 저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도우려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가온이 여기 왜 왔는지 저들이 알게 된다면, 저들이 보기에는 그저 이 간악한 엘프가 돕는 척하러 왔다며 분개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돕는 척하는 것은 음습한 방해보다도 큰 기만이 되는 법이다. 지금 가온은 자신이 하는 일이 그런 부류의 일이라고 느꼈다.

가온은 도망치듯 원정대를 떠났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조선인민군의 본대에 도달했으며, 이 이방인이 과연 소드마스터와 맞붙을 수 있는 실력자인지 증명해주길 원하는 조선인민군 장교들 앞에서 발사된 총탄 몇 알을 베어냈다.

그러고 나서는 검기씩이나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이마저도 지구에서는 한번 보기 끔찍하게 어려운 기예라, 이것만으로도 모두가 자신을 소드마스터 비슷한 무언가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정말 구세주가 왔군!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이 고생을 그리 하진 않았을 건데······.”

조선인민군 장교는 감탄하다 못해 이 엘프 검사를 칭송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본 다른 간부들은 굳이 말리지 않고 오히려 거들었다.

하기야 조선인민군도 이 성과없는 오랜 투쟁에 질린 마당이었다. 누구의 도움을 받든, 어떤 방식으로든 빨리 끝낼 수만 있다면 환영할 것이었다.

이내 그들은 순식간에 회의를 마치더니, 불과 며칠 지나 바로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나섰다.

대규모 행군이 시작되었다.

아린 벌판의 최중심부를 향한, 이번에야말로 그 땅을 점령하기 위한 진군이었다.

*******

“최후의 십자군들! 마지막까지 힘냅시다!”

조선인민군의 전진에 발맞추어 이미 너덜너덜한 한국인 원정대도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그들은 현실로 따지면 이미 전멸이나 다름없는 피해를 입은 마당이지만, 그리 너덜너덜한 상태로나마 싸울 예정이었다.

그리하여 약 20만 명과 2만 명이 합쳐진 연합군이 총공격에 나섰다. 현실보다 인원이 한참 부족한 게임 속에서는 가히 막을 방법이 없는 대군이다.

“저 카르세 종간나들 싹 다 죽여!”

카르세인들은 이 갑작스러운 총공세에 급히 방어에 나서야 했다.

그들은 실컷 해오던 게릴라마저 포기하고는 황급히 모여 이들의 진군을 막으려 했지만, 당연히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량의 차이가 이 정도라면 거창한 전략 전술은 무의미하다. 돌격과 돌격.

현실에서는 감수할 수 없는 병력의 손실도 게임에서는 용납되었다. 적이 요지를 점령하고 있다 싶으면, 이 대군은 그냥 한바탕 포를 쏴주고는 뚫릴 때까지 무작정 돌격하면 되었다.

그 결과, 카르세 게이머들은 전멸 혹은 후퇴를 반복하며 밀리고 밀렸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면 이때 발생한 사망자만으로도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해졌을 것이다.

계속해서 돌격하는 조선인민군의 기세는 가히 파죽지세였다.

원래는 패잔병 집단과 구분할 필요가 없을 만큼 비참했던 조선인민군이지만, 지금만큼은 사기가 높기 그지없었다. 뭔지 몰라도 드디어 대차원문을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상황 아닌가.

“씹,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짓 그만둘 수 있겠네!”

정말이지 다들 얼른 이 게임에서 뛰쳐나가고들 싶어 했다. 고작 오락이나 하는데 잘 챙겨 먹을 필요가 무엇 있느냐며 배식도 전보다 초라하게 받는 형편이다.

게다가 거듭된 패전으로 책임을 추궁당한 장교들은 병사들을 곱게 다뤄주지 않았다. 게임에 들어온 병사들 모두가 막 입대했던 시절의 고생을 처음부터 다시 하고들 있었다.

어떻게든 이 고생을 끝낼 수만 있다면······.

*******

카르세인들을 제외한 모든 군소세력이 아린 벌판에서 도망치듯 물러난 가운데, 한반도인들은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그 누구도 이 수십만 대군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 어떤 명장인들 확고한 전력 차를 감당할 방법은 없다. 상대가 병력의 수는 물론 장비의 질마저 월등하다면 더욱 그렇다.

가로막는 모든 카르세인들을 짓밟으며 나아가는 인민군을 보며, 가온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실제 전쟁이 벌어져도 이 꼴이 날 것 같은데. 아스와 지구 어느 쪽이 월등한지는 명백하니까······’

아타락시아와 같은 주화파들의 주된 생각이었다. 지구는 인구수와 군사력, 경제력 모든 면에서 아스를 능가하므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 그러니까 전쟁 따윈 결코 벌여선 안 된다는 것.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존재했다. 주전파들은 아스의 초인들, 예를 들어 소드마스터와 같은 비대칭 전력이 그 암울한 전력 차를 메워주리라 주장했다.

그리고 그 비대칭 전력 중에서도 독보적인 초인, 화로의 대전사가 가세한다면 오히려 아스의 전력이 지구를 능가하리라는 것 또한 인기 있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가온 본인이 과연 그놈의 필승카드가 되고 싶으냐 하면, 역시 알 수 없었다. 아스인들의 위협에 맞서려는 지구인들과 함께인 지금은 더욱.

“힘들진 않소?”

인민군 장교의 물음에 가온은 심드렁히 대답했다.

“딱히. 그래서 언제 대차원문까지 닿을 것 같습니까? 빨리 결전 치르고 쉬고 싶은데.”

“이대로면 얼마 안 걸릴 거요. 가로막는 적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수만 명의 적과 맞서는 상황에 내뱉기엔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그러나 헛된 자신감이 결코 아니었다.

인민군은 계속 진군했고, 가온은 한반도인들의 군대가 거의 행군하는 속도로 아린 벌판을 점령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최종보스를 물리치는 것이 어려울 뿐, 아린 벌판에서 카르세인들을 몰아내는 것 자체는 대단히 쉬운 일인 듯했다.

그리고 사실, 그마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거듭된 승리. 희망찬 행군 중에 한 조선인민군 사단은 카르세 무리와 마주쳤다. 그들은 자동화기도 변변치 않았지만 어쨌건 사단 규모는 되어보였다.

“생각보다 규모가 꽤 되는데······”

실제 전쟁이었다면 좀 더 조심성을 발휘했으련만, 빠르게 진군해야 하는 마당에 조선인민군 지휘관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으려 했다.

포격 몇 차례 이후 곧바로 돌격명령이 떨어졌다. 죽고 죽이는 치열한 접전이 시작되었고, 그 승자는 분명 조선인민군일 것으로 보였다.

전투가 계속되던 중이었다.

총탄이 나부끼는 전장의 하늘로, 와이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그 거대한 발톱은 뭔가를 꼭 쥐고 있었는데, 아마도 먹이인 것 같았다.

“어, 저거······”

격전 중에 그 날짐승 한 마리를 신경 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와이번이 쥐고 있던 무언가를 놓쳤을 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와이번이 놓친 그것은 전장의 한복판에 추락하기 시작했다.

중력에 힘입어 가속하던 그것은 이윽고 위장이 벗겨졌다.

피 묻은 가죽. 그것이 포장지처럼 벗겨지더니 내용물이 드러났다.

그것은 쇠붙이였다. 인간이 만든 무언가.

항공폭탄일까?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도 위험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우연히도 그것의 낙하를 주시하던 한 분대장이 황급히 외쳐댔다.

“엎드려!”

그러나 항공폭탄이 아니었다. 그보다 끔찍한 무언가였다.

맨 처음에는 빛이 있었다.

그것이 떨어진 자리로, 아주 거대한 섬광이 번쩍였다.

너무나도 강렬한 나머지 바라보기만 해도 눈을 멀게 만드는 섬광이다.

그리하여 무엇이 떨어졌는지 모두가 깨달은 순간에는 늦었다.

1억 8천도의 화구가 떠올랐다. 그 인공태양은 전장에 끔찍한 열선을 흩뿌린 뒤, 너무나도 거대한 버섯구름으로 화했다. 자연계에 유례가 없는, 3km짜리 버섯이다.

그 거대한 버섯은 순식간에 서로 싸우던 수만 명의 목숨을 삼켰다.

이윽고 재가 떨어진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

보고를 받은 인민군 장성은 난색을 표했다.

“카르세 놈들이 핵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고?”

“예, 총 열두 발이 거의 한꺼번에······”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핵이 투하된 자리마다 수천수만 명이 사망하여 모든 장비를 잃었다. 그와 함께 생성된 방사능 지대는 군을 통과시키기 어렵게 만들었다.

핵폭탄 투하 보고는 연이어서 들어왔다. 카르세인들은 밀리는 전장마다 핵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 게임에 핵은 이미 존재했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게임 속에서도 핵은 핵이라, 핵탄두 한 발의 가격은 대규모 길드나 겨우 한 발 가질 수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넓은 폭발반경 탓에 아군도 휘말리는 데다 장비도 못쓰게 되어 승자조차 아무것도 건질 수 없게 된다. 목숨의 가치가 한없이 가까운 이 게임에서조차 웬만해선 쓰지 못하는 무기다.

그러나 저 카르세인들은 참 쉽게도 써대고들 있었다. 어떻게?

카르세인들도 가난하기로는 북한보다 겨우 나은 수준인데, 그 비싼 핵탄두가 어디서 났을까? 게임사에서 카르세 유저들의 로그인 보너스로 핵탄두 한 개씩 챙겨주기라도 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어쨌건 갑작스럽게 공세가 막혀버린 조선인민군으로서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뭐 어차피 시간벌이야.”

이 어이없는 상황에도 지휘관은 차분하려 애썼다.

“핵이 있다고 재래식 군대를 몽땅 전멸시킬 수 있는 건 아니지. 애초에 저 새끼들이 미국도 아닌데 핵이 수백 발 있을 리도 없고. 게다가 한꺼번에 수만 명 죽어봤자 어차피 다음 날이면 부활하는데 뭐······. 장비 손실이 뼈아프지만 상관없지. 당장 다시 보급할 만큼은 더 있으니. 재정비해서 다시 보내면 돼.”

지휘관은 말한 대로 실행에 옮겼다. 죽었다가 부활한 병사들에게 다시 보급을 해주고, 새로운 진로를 설정한 다음 진군시켰다. 핵이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끝까지 막을 수는 없으리라 믿으며.

그러나 카르세인들은 핵폭탄만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동맹이 있었다.

이 세계의 창조주.

그러니까 게임사 말이다.

이 망겜의 게이머들이라면 모두 알다시피, 이 게임사는 아스인을 편애했다.

그것은 최후의 결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

조선인민군의 한 사단은 험준한 산맥 사이를 지나가려 했다.

당연히도 매복이 있을 법한 지형이었다. 미리 정찰을 충실히 하여, 당장 근처에 매복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고서야 병력이 협곡 사이로 진입했는데, 앞서 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사실 매복이 있었다.

발견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그만 날짐승으로 변해있다가 갑자기 본모습을 드러내는 드래곤의 존재란 정찰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법이다.

빠르게 협곡을 잠식하는 거대한 그림자.

산맥 위에서, 이곳 협곡을 향해 거대한 목을 들이민 저 붉은 드래곤을 모두 알았다.

“아타락시아다!”

여기 모인 병사들은 저 거대한 레드드래곤의 존재감에 압도된다. 이게 그저 게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분노한 레드드래곤을 본다. 저 드래곤의 뾰족한 동공에서, 그 크게 벌린 주둥이에 모이는 열기에서 분노를 본다.

이내 불길로 형상화된 드래곤의 분노가 덮친다.

거기 휩쓸린 이들은 결코 무사할 수 없다.

가장 악명 높은 어미 드래곤과 조우한 조선인민군 사단은 거의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퇴각해야 했다.

“아니, 북한놈들 전원 하이엘프 종족인데 왜 공격하는 거야? 설마 게임상 종족보다 현실 종족을 우선해서 공격하는 거야?”

이 어이없는 상황에 한국인 모두가 아연한 가운데, 공지사항 하나가 떠올랐다.

이벤트를 알리는 공지였다.

본디 이벤트란 즐거운 것이지만,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카르세인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

「[이벤트 알림] : 불사왕 카샤드가 다시금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

십만 스켈레톤 돌격대와 좀비 포병대로 이루어진 군세를 막아보세요!」

아린 벌판에 모여든 지구인들을 막기 위해, 불사왕이 나섰다.

십만이 넘는 언데드 군세를 거느린 이 불사왕은 현실상의 불사왕 카샤드였다.

참마황을 돕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 NPC로서 게임에 접속했다.

사실 썩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숙원이 달성된 지금, 카샤드는 참마황의 전쟁에 대단한 열의가 없다. 그 와중에 서기장씩이나 되어 한낱 오락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한다니?

‘차라리 상위 뱀파이어를 시켜 김일성에게 조선인민군을 전부 물리라 명하는 것이 더 확실한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이것은 천상의 이름으로 보상을 줘야 하는 신성한 경기이니, 아예 선수를 위압하여 물러나게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반칙이라며 화로의 여신께서 항의하셨다고. 이미 우승자를 정해둔 것이나 다름없는 신들조차 그 항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뭐, 그건 그것대로 잘된 일이다. 카샤드가 일국의 독재자를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대놓고 그러는 것은 껄끄러웠다. 이후 다른 독재자들을 포섭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카샤드가 생각에 잠겨있던 중이었다.

근처에 있던 언데드 리치가 정신파를 터뜨렸다.

「서기장 폐하? 요새 말씀이 없으셨는데 오늘 경우 말씀다운 말씀들을 하시는군요」

이 리치는 게임 속 존재였다. 그러니까, NPC였다. 하잘것없는 존재. 그러나 카샤드는 이 리치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말씀이 없다니? 아, 요새 내가 접속을 안 했으니 어쩔 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진 모르겠지만 무시당하는 것 같아 서운했습니다」

불평하는 이 게임 속 리치를 카샤드는 알고 있었다. NPC가 되기 전에는 자신의 수하였던 것이다.

생전에 신들을 능멸하다 죽은 나머지 그 영혼이 지옥에 떨어진 언데드 리치. 카샤드는 이 가엾은 측근의 구원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둘은 여기서 만났다.

「서운하긴. 내가 자네 감형시켜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결과 나나 자네나 이 놀음에 끼게 된 것 아닌가. 감사하지 못할망정 어딜 감히」

이 NPC 리치는 자신의 지고한 군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기야 2차 대전 당시 죽은 이 리치가 전자오락이며 가상현실 게임의 존재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리치는 자기 주군의 정신파에서 크나큰 호의를 느낀다. 그리고 이유 모를 반가움도.

「자, 그럼. 얼른 병력을 움직이지. 놀음에 불과하지만, 이왕 불사왕의 이름을 걸고 끼었다면 승리를 쟁취해야 옳겠고」

고대 리치의 손짓 하에, 십만 언데드 군대가 일제히 행군한다.

수송차량 한 대 없는 그들의 전진은 조금도 느리지 않다.

이미 죽은 그들은 쉬지 않는다. 절대.

*******

“이게 뭐야, 씨발! 이딴 짓거리 더는 안 할 거라며!”

노골적인 게임사의 편애. 때아닌 강적들의 출현에 한반도 게이머들은 모두 분개하면서도 새삼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미 숱하게 겪어본 일인 것이다.

어쨌건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최종보스였다.

아린 벌판의 대차원문.

이 게임의 결승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조선인민군 사단은 기어이 최종보스와 맞닥뜨렸다.

모두 저 회색 엘프를 멀리서도 알아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온······”

뾰족한 귀 너머로 흩날리는 회색 머리칼. 그 모습이 눈에 담긴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도움말 :

후긴 엘 왕국의 적법한 통치자이시며, 화로의 대전사이시며, 일곱 마스터 중 하나이신 가온 폐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후긴 엘 왕국은 카르세 제국의 오랜 동맹이었습니다. 동맹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폐하께서는 현재 자리를 비운 제국 변경백을 대신해 아린 벌판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네 간악한 지구인들이 아린 벌판을 탐내려거든, 이 마지막 그레이엘프를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주,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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