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흉턴 - [2]
반지성은 수십 년 전 카르세 제국을 기억했다. 그 땅에서 노예로 지낸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 카르세는 환상적인 곳이었다. 상상 속 존재들이 살아 숨 쉬는 판타지 세계. 맨드레이크 캐는 고블린 한 마리만 봐도 그 얼마나 경탄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때 본 풍경들은 고난 속에서도 달콤하게 곱씹을 수 있었다. 약 이백 년 동안 반지성은 어둠에 잠긴 채 한반도와 카르세의 환상적인 풍경들을 꿈꿨더랬다.
그러나 다시 보게 된 카르세 연방은 아름답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았다.
“여기가 정말 카르세가 맞습니까?”
반지성의 물음에 흉턴이 대답했다.
“맞다.”
“여기가, 정말? 지구의 어느 나라가 아니란 말씀입니까?”
반지성은 카르세 연방의 도시를 보았다.
제국의 변경도시. 이 도시에 마법사의 탑이나 페가수스 사육장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런 판타지적인 요소는 싹 다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것들 대신 아스팔트 위로 콘크리트 건물이 솟아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솟아오르는 검은 매연······, 푸르러야 할 하늘을 탁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소위 ‘문명적인’ 것들. 지구에서 지겹게 본 그것들이 이 판타지 세계마저 점령해 버린 것이다.
반지성은 이 마족적인 풍경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그리웠던 그 풍경을 다시 보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대체 이게 무슨?
크나큰 실망감을 느끼며 문득 생각했다.
이 감정을 얼마 전에 느껴본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금세 알 수 있었다. 수십 년 전 다른 세계에서 돌아와 한반도에 새로이 생겨난 대한민국을 보았을 때. 그때 느낀 이질감을 지금 다시 느끼고 있었다.
기어이 마족들은 고향뿐만 아니라 이 판타지 세계마저 오염시켜버린 것이다.
한 명의 마족으로서, 반지성은 죄책감을 느꼈다.
“자, 따라와라. 얼굴 가리고.”
반지성은 어디선가 구해온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채 흉턴을 따라 걸었다.
흉턴의 거처는 언덕 위에 있었다.
“여기서 지내십니까?”
“그래.”
반지성은 다시 한번 경악했는데, 흉턴의 집이 너무나도 볼품없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구식 저택, 번화가에서 외따로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사람들과 교류하기는커녕 수원지에서 물을 얻기도 힘들어 보였다.
참으로 초라하고도 살기 불편한 집이었다.
“전 변경백이시잖습니까? 위대한 마스터이시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찌 이런 곳에서 노비 하나 없이?”
그 질문에 흉턴은 대답하지 않은 채 먼지 쌓인 집에 들어섰다.
그러자마자 투구를 벗었다. 그다음에는 갑옷을 벗기 시작했는데, 그 동작 하나하나가 심히 힘겨워 보였다.
앞서 결투까지 벌인 까닭일까? 건틀렛을 팔에서 떼어내려 애쓰는 흉턴의 깡마른 팔은 연신 후들거렸다.
반지성은 지금이야말로 기습할 기회라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그저 기겁하여 말했다.
“이제 제가 경의 제자 아닙니까? 제자에게 시중을 요구하시지요······”
반지성은 허겁지겁 갑옷 탈착을 도왔고, 흉턴은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반지성의 카르세 생활이 시작되었다. 위대한 옛 영웅의 제자로서 지내는 생활이.
*******
나중에 알게 되었기로, 흉턴은 일종의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여기서 혼자 살았다.
원래라면 카르세의 모든 높으신 분들이 기겁하여 뜯어말려야 하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르세 연방의 대통령은 그 외로운 결정을 은근히 부추겼다.
현 대통령은 카르세가 제국이던 시절의 선제후였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만큼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정통성 덕이었다. 카르세인들은 소위 ‘민주적인’ 인사보다는 익숙한 지도자를 더욱 반겼던 것이다.
그렇기에 현 대통령은 자신보다 훨씬 정통성이 드높으며 유명하기로도 비교할 수 없는 흉턴을 경계했다. 흉턴의 입에서 정치 비슷한 것이라도 흘러나오는 순간 카르세 연방의 대통령은 바뀌고 말 테니까.
대통령 노릇을 최대한 오래 하고 싶었던 그는 흉턴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감히 신의 대전사요 소드마스터인 흉턴을 제거하려 할 용기는 없었기에, 그저 흉턴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려 애썼다.
그리고 흉턴은, 대통령이 바라는 대로 행동해주었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흉턴이 가끔 시내에 나갈 때마다 전신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써 모습을 숨기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갑옷과 투구는 이제 반지성의 몫이 되었다.
늙은 흉턴은 갑옷을 입고 외출하길 힘들어했다. 그러니 기력이 넘치다 못해 반신의 육체를 지닌 반지성이 지금까지 흉턴이 하던 일을 대신 해주어야 했다.
시내에서 생필품을 산다든가, 거지와 노숙자들에게 동냥을 베푼다든가 하는 일들을.
흉턴과는 다른 이유에서 반지성 또한 정체를 숨겨야 했으므로, 이제 반지성이 흉턴의 갑옷을 입고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흉턴과 반지성이 동일인물인 줄 안 것일까?
길가를 활보하는 반지성을 향해, 사람들은 미친 늙은이라며 비웃곤 했다.
“노인네, 그 고철덩이 대체 언제 벗소?”
“벗기도 힘들어 보이는구만 화장실 가고 싶어지면 어쩐대. 그냥 싸나?”
“사실 이미 안에다 지린 거 아녀?”
시내를 걸을 때마다 들려오는 조롱들. 그 천박한 말들이 귀에 파고들 때마다 반지성은 얼굴을 붉혔다.
자기가 모욕당해서가 아니었다. 반지성은 울컥하여 탄식했다.
‘원래는 흉턴 경이 저런 모욕을 듣고 다녔으리란 말이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다. 옛 영웅, 위대한 전쟁 신의 대전사가 정신 나간 노인네쯤으로 대우받다니?
“기관총 앞으로 기마돌격 할 분일세. 아직도 중세인 줄 아나?”
오늘도 흉턴을 대신하여 조롱받은 뒤, 반지성은 식료를 사 들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흉턴을 위해 청소와 빨래를 해주고 식사를 챙겨 주었으며, 그 봉사의 대가로 검술을 배웠다.
겉으로 보기엔 몰락해버린 노인의 검술. 그러나 그 기술만으로 반신마저 제압해버린 달인의 검술을 말이다.
“카르세 롱소드 검술이다. 희귀한 검술은 아니지만, 그래서 좋은 검술이지.”
흉턴은 반지성이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를 원했다. 기초가 없다 못해 아예 없느니만 못한 수준이라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지성은 겸허히 그 바람을 받아들였다.
“경께 배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
스승에게 극진한 예를 표하며, 반지성은 흉턴에게 배우고 배웠다.
우선 예의 롱소드 검술을 전수 받았으며, 대인 검술과 자신이 익힌 전투법의 차이를 배웠다. 실제 사람과 하는 대련의 중요성이며 올바른 수련방법 따위도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사실 그 모든 것을 흉턴이 썩 열심히 가르치지는 않았다. 하루에 오 분 정도 시범을 보여주거나 검술 교습서를 던져주고는 알아서 익히라고 내버려 뒀을 뿐이다.
그리 대충 가르친다는 사실에 반지성이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반지성의 기량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반지성은 수백 년간 괴물이며 고대 신과 싸워온 전사였으므로.
반지성에게 부족한 것은 그저 기술뿐이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씩이나 되어 이미 정립된 기술을 이해하고 빨아들이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흉턴이 짧게 가르치든 대충 가르치든, 반지성은 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덕분에 반지성의 검술 실력은 날마다 눈에 띄게 늘었다. 이대로만 계속 연습한다면 언젠가 다른 마스터들의 실력에 도달할 것이었다.
결국 억지로 잡혀 온 것치고 썩 나쁜 나날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이곳 카르세에서 맘이 더 편할 지경이었다. 하기야 크게 사고를 친 고향을 벗어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 없는 다른 세상에서 한적하게 지내는 상황 아닌가. 어쩌면 이대로 쭉 카르세에서 사는 편이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반지성의 머릿속에서 고향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언젠가는 스승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슬슬 혼자 훈련해도 되겠군. 내가 시범을 보일 것도 없이.”
흉턴의 말에 반지성은 겸손히 고개를 숙였다.
“다 위대한 스승 덕분이지요.”
“날 정 스승이라 생각한다면 가르침을 하나 내려도 되겠나?”
“무엇이든요. 기꺼이 받아들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슬슬, 그 검술 같지도 않은 검술은 버려라.”
흉턴의 말에 반지성의 몸이 굳었다.
반지성은 한참이나 입을 우물거리더니,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완곡하지만 단호한 거절.
스승의 조언을 무시했다고 흉턴이 뭐라 꾸짖지는 않았다. 흉턴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건성인 스승이었다.
이번에도 흉턴은 그저 무표정하게 반지성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방을 나섰을 뿐이다.
그리고 반지성은 그것을 일종의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계속해서 반지성은 검술 같지도 않은 검술이라 판명된 천둔검법에 집착했다. 매일 수련을 마치고 나면 기존에 익힌 천둔검법을 어떻게든 쓸 수 있도록 손보느라 시간을 쓸 정도였다.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그러고 나면 해가 저물었다. 그때마다 지평선에서는 붉은 태양과 푸른 에너지가 겹쳐져 보랏빛 광채를 흩뿌리곤 했다.
아, 저 푸른 에너지. 황홀한 저 빛.
반지성은 지평선의 대차원문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 다른 세상······.
고향과 거기서 벌어진 일을 생각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대충 화장하고 그 시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는데, 한국인들이 뒤처리를 잘해줬을까?
아닐 것 같았다. 학살자의 아비란 이유로 그 유골을 변기에 쏟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남을 작자들 아니던가, 조선인들이란.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갈라 죽여야 할 것들.’
망상과 실제 벌어진 일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소용돌이쳤다. 마음속 소용돌이는 현실의 신체에도 폭풍을 일으켜, 반지성의 눈을 충혈 시키고 온몸의 핏줄을 꿈틀거리게 했다.
반지성은 여전히 그들을 증오한다는 것을, 만 명 넘게 죽인 뒤에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자신에게 새삼 놀라지는 않았다. 이 모든 감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
이후로도 수련의 나날이었다. 평화로운 몇 년이 빠르게 흘러갔다.
반지성은 이제 조선땅보다 익숙해진 카르세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와중에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기사님?”
방금 불린 ‘기사님’이 자신임을 눈치챈 반지성은 퍼뜩 놀랐다. 반지성은 평소 사람들과 싸우기 싫어 누가 조롱한들 무시하고 다닌 터였다. 그러길 몇 년이 지나자 슬슬 사람들도 자신을 조롱하길 그만두고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더랬다.
이번은 아주 오랜만에 대화상대로 취급된 셈이었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린 반지성은 다시금 놀랐다. 자신에게 말을 건 남자의 머리가 자기 허리를 겨우 넘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키가 작은 수염쟁이. 왜소증도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기사님······ 도움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이 조그만 남자가 무슨 족속인지 반지성은 알고 있었다.
‘드워프?’
투구에 가려진 반지성의 얼굴이 미소를 머금었다.
반지성은 지난 몇 년간 거리에서 수많은 조롱을 들어놓고서도 아스인들에게 조건 없는 호의를 품고 있었는데, 특히 판타지적인 종족을 유독 좋아했다. 엘프나 드워프 같은 종족들 말이다.
반지성은 그들이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귀 뾰족하고 아름다운 친구들의 존재가 이 편견을 만들어낸 바였다.
반지성은 늙은 기사다운 목소리를 꾸며내어, 최대한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보게.”
그리고 드워프가 말했다.
“저 건물 보이시지요? 저 역겨운 공장 말입니다.”
드워프가 가리킨 방향을 본 반지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저 공장, 연기를 뿜고 있군.”
“참으로 더러운 매연. 더러운 시설입니다. 마족의 물건이나 만들어내는 추악한 곳이지요. 저 마족 건물이 이 땅에 있다는 게 수치스럽지 않으십니까?”
반지성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다 그만두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스인의 공장일 테지. 아스인을 위해 물건을 만드는.”
반지성이 애써 옹호해보았더니 바로 반박이 돌아왔다.
“공장주가 아스 놈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자식, 지구 놈이라 해도 믿을 쓰레기예요. 게다가 저 공장, 마족 놈들이 지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마족 놈들이 기술 전수하고 공장설립 비용도 대부분 냈거든요.”
보통 사람이라면 그것을 ‘지구 선진국에서 투자를 해주었다’고 표현하겠지만 여기 있는 두 명은 그렇지 않았다.
‘마족들······ 아스를 자기네 색채로 물들이려 하는군. 자기네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어. 아스의 고귀한 것, 검과 마법을 버리게 하고는 자기네 추잡한 문물을 선택하게 만들어서······’
반지성이 분개한 가운데 드워프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저 공장, 같이 때려 부숩시다. 단련하신 힘과 기술을 보여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동네 하찮은 놈들이 어르신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지요.”
함께 공장을 부수자고?
썩 놀라운 제안은 아니었다. 드워프들이 공장을 혐오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 아닌가. 그 어떤 숙련된 드워프 대장장이도 마족들의 공장 앞에서는 한낱 수공업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기관총 앞에서 기사들이 한낱 깡패로 전락한 것처럼.
그리고 한 명의 기사로서 반지성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 퇴물끼리 힘을 합치잔 셈인데······’
사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무조건 제안을 승낙하고 싶었다.
가능하면 판타지 종족의 부탁은 뭐든 들어주고 싶거니와, 저 마족적인 공장은 보기만 해도 역겨운 것이다.
그래서 반지성은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아니. 그럴 수 없네.”
어쩔 수 없었다. 폭력행위로 경찰이나 기자라도 왔다가는 스승의 은거 생활이 망가질 것 아닌가.
그리고 드워프는 반지성을 노려보더니, 이 자리를 떠나가며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뭐라 말하는지 듣지 못했겠지만 여기 있는 반신은 들을 수 있었다.
“쓸모없는 노인네가 겁만 많아 가지고.”
충격을 받은 반지성은 잠시 멀거니 서 있었다.
죄책감마저 품은 채 반지성은 저택에 돌아왔다.
이후로 시간이 흘러, 반지성은 공장 공격 계획이 어찌 진행되는지 따로 알아보았다.
썩 멋지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럭저럭 든든한 전력이 될 줄 알았던 기사가 가세하지 않은 탓일까? 무력이 부족했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드워프들의 공격은 치졸하게 이루어졌다. 도끼와 망치를 통한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그들이 평소 비열하다고 욕하던 마족의 방식으로.
드워프들은 공장이 법을 어겼다며 국가기관에 신고했다.
그 사악한 공장이 노동법을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다고.
결국 공장에 감사가 결정되었는데, 드워프들에게는 애석하게도 신고를 받은 시청에서 공장에 사전 통보를 해주었다. 소위 ‘지역 발전에 기여하는 사업가들을 배려하기 위한’ 관행이었다.
공장주는 감사가 오기 전, 법에 어긋나는 요소들을 미리 싹 다 제거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불법적으로 고용한 노동자들을 몽땅 해고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졸지에 실직자들이 양산되었다. 해고된 실직자들은 큼지막한 눈으로 울먹거렸다.
“사장님, 이렇게 갑자기 해고하시면 우린 어떻게······”
그들의 울음기 가득한 표정이 썩 불쌍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원체 주름이 많았던 녹색 피부가 더욱 주름지게 되어 징그러울 뿐이었는데, 원래 고블린들의 표정이란 그런 법이었다.
그래서 공장주도 내일부터 공장에 나오지 못하게 된 고블린들에게 별 양심의 가책 없이 쏘아붙일 수 있었다.
“아, 감사 나온다는데 어쩌라고?”
“그럼 언제 다시 고용해주실 수······”
“몰라. 신고 들어와서 조치하는 건데, 누가 신고했는지 몰라도 다음에 또 신고할지 내가 어찌 아나?”
공장주의 말에 고블린들은 더욱 크게 울더니, 서럽게 끅끅거리면서 공장을 떠났다.
공장주는 고블린들을 노려보다가 한숨 쉬었다.
이번 해고는 공장주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졸지에 값싼 일꾼들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그동안 이 고블린들은 거의 공짜에 가까운 임금으로 공장에서 일해왔다.
당연히도 불법이었으며 사실 고용 자체가 불법이었다.
애초에 고블린들을 합법적으로 부려먹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균수명이 열여섯 살에 불과한 고블린들은 모두 법적 미성년자요, 대부분은 인간 기준으로 아동의 나이인 것이다. 그리고 카르세 연방이 지구에서 투자를 더 받아내기 위해 준수하기로 약속한 노동법에 따르면, 15세 미만 미성년자를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 단명하는 종족에게 관련 노동법규를 적용해야 하느냐는 한때 카르세 연방을 뜨겁게 달군 화제였다.
만약 노동법을 예외 없이 적용할 경우, 고블린들은 평생 고작 일 년 정도 노동할 수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런 식으로 생계를 꾸릴 수는 없다.
그러니 고블린들에게만은 예외를 두어야겠지만, 카르세 국회는 그래 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표를 줄 카르세인들이 극구 반대했기 때문이다.
만약 고블린들이 노동 시장에 뛰어든다면? 성장 속도와 번식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이 조그만 종족은 결국 인간들의 몫이어야 할 모든 일자리를 차지하고 말 것이다! 그리 생각한 카르세인들은 고블린들의 노동을 억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고블린은 관련 노동법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지지 못하니 말도 안 되는 박봉을 받으며 연명할 수밖에.
그리고 지금은 그 박봉마저 끊기게 된 것이다.
‘젠장.’
반지성은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는 고블린들을 바라보았다. 반지성이 보기에는 고블린도 존중받아 마땅한 판타지 종족이었다.
흉턴에게 돌아와서는 오늘 본 장면을 울적한 목소리로 전했다.
“결국 아스의 존재들은 서로서로 상처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놈의 공장 탓에요.”
반쯤 혼잣말이었다. 흉턴은 평소 감정표현이 적었고, 과묵하다 못해 잡담하는 일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한 귀로 듣고 흘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웬일로 흉턴은 감상을 토했다.
“확실히. 애석한 일이군.”
“그렇지요? 고블린들도 분명히 아스의 일원일 텐데요.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네 말이 맞다. 그들은 일원으로 여겨질 자격이 있지.”
“예, 몬스터가 아니라!”
반지성이야 아스 종족에 대한 호감과 동정으로 그리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흉턴은 고블린에 대한 호의나 동정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듯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아스가 대전쟁에서 버틴 게 드래곤과 소드마스터 덕이라 칭송하지. 그러나 그 못지 않은, 언데드와 고블린들의 공로는 잘 언급하지 않는다.”
“고블린들도 대전쟁에 참전했습니까?”
“아주 많이. 다른 종족들과 힘을 합쳐 마족과 싸울 경우 아스의 지성체로 인정받으리란 기대로 참전했지.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목숨을 불태워가며 싸웠고.”
“그래서 약속받은 것을······”
“받긴 받았지만 제대로 받지는 못했다. 몬스터란 이유로 학살당하지만 않게 되었을 뿐, 내 듣기로 고블린들은 투표권도 받지 못했다더군. 미성년자인지 뭔지 하는 이유로.”
그리 핍박받는 이유는 알 만했다. 고블린들에게 투표권이 생겼다간 순식간에 인간보다 수가 많아져서는 나라를 좌지우지하리란 ‘고블린 국가 잠식론’ 탓이리라.
실제로는 워낙에 삶이 힘든 나머지 고블린들의 출산율은 갈수록 줄어들 뿐이었지만, 그 사실이 카르세 국회에 반영되는 일은 없었다. 어쨌건 당장 카르세의 다수 종족은 인간이니까.
설명을 듣고 난 반지성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남 일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감정이입이 되고 있었다.
반지성은 너무나 분노에 찬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입에서 초저주파가 흘러나오도록 중얼거렸다.
“그놈의 잘난 지구식 민주주의를 본뜬 결과로군요. 옳든 그르든 다수의 결정을 무작정 따르는······ 카르세를 정통한 황제 폐하께서 다스리고 계셨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요.”
“모르지. 제국인들은 원래부터 고블린들을 몬스터라며 싫어했으니까, 사실 달라질 게 없었을지도.”
흉턴이 그리 말했지만 반지성은 새삼 마족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그놈의 민주주의. 그놈의 지구식 정치. 그것들을 받아들인 결과를 보라.
서로 헐뜯고 싸우는 아스의 지성종족들을 보라.
지금 아스인들은 식량이 부족하면 숲을 차지하여 농지를 부족하게 한 엘프들을 탓한다. 화학비료를 비싸게 팔아치우는 마족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반지성은 다시금 이 세계가 마족들에게 오염되었다고 느꼈다. 마족들의 사악한 문물을 받아들이자 카르세인들의 정신마저 썩어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끔찍하게 역겨워진 조선처럼.
그리고 반지성이 보기에 이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법은 간단하다.
마족들이 쳐들어오기 이전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니까, 대차원문이 열리기 이전으로 회귀하면 된다.
마족들이 강점한 아린 벌판을 되찾아 대차원문을 없앰으로써, 마족들의 접근을 차단해버리면 된다.
반지성이 생각하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은 자신의 잘난 친구 아니면 흉턴뿐이었다.
반(反)마족의 상징. 종족을 넘어 영웅 대접받는 이 소드마스터야말로 아스의 분노를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위대한 영웅이라면 능히 아스인들을 이끌고 저 아린 벌판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왜 이딴 데서 처박혀 지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반지성은 스승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설득해보았다. 제발 세상 밖에 모습을 드러내시라고.
“필요하다면 그놈의 선거에라도 나가십시오. 예? 모두가 경을 지도자로 추대할 겁니다! 경께선 그들을 올바로 이끌기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흉턴은 그저 담담히, 거절의 뜻을 밝혔다.
“안 돼.”
“그러기 저어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여기서 몇 년이고 그저 멀거니 계시는 이유가······”
따지고 묻던 반지성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겁에 질렸다. 설마 저 분노의 영웅이 이제 와서 평화를 바라는 것인가? 그래서 싸우기 싫은 것일까? 그것은 참 말도 안 되는······.
반지성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아니. 내가 여기 가만히 있는 것은, 나서기 싫어서가 아니다.”
“그럼······”
“그럴 기력이 사라진 탓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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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턴이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널 후계자로 삼은 것은 단순히 제자를 원해서가 아니었다.”
“예. 마족과 싸울 소드마스터가 하나 더 있는 게 낫겠다고 하셨지요.”
“그래. 하지만 부족한 설명이었다. 난 진정한 내 대리를 원했어.”
반지성은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물었다.
“진정한 대리라 하시면?”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죽고 없을······ 이 늙은 칼잡이를 대신해 전장에서 싸워줄, 전쟁 신의 대전사. 내 의무를 대신해줄 소드마스터를 원했다. 그래서 널 데려왔고 제자로 삼았다.”
흉턴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전사의 죽음이 아닌, 침대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노인의 죽음을. 그래서 영원히 젊은 전사를 데려왔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반지성이 듣기에 썩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무가 있으시다면 직접 하시지요! 수명이 문제입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제 피를······”
“아니. 설령 수명이 연장된들 난 그 의무를 계속하기 어렵다. 몸이 아닌 정신의 문제야.”
“정신이라뇨! 누구보다 정신적으로 강인한 분이시잖습니까! 경께서는 자그마치 사십 년이나 싸우셨습니다! 평범한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엘프나 경과 같은 위대한 영웅들만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맞다. 사십 년을 분노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분노는 심력을 소모하는 감정이더군. 그리 오래 분노해놓고서 계속해서 분노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이제는······ 분노해야 할 때조차 분노하기 어렵다.”
흉턴의 고백에 반지성은 충격을 받았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흉턴은 자신의 후계자 앞에서 계속 말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분노했다. 그러나 저들이 평화라 부르는 지금은, 마지막에 불탔던 분노가 결국 꺼져버린 지금은······ 더는 분노할 수 없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다.”
“어째섭니까? 경께서 당하신 일은 잊힐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드님만 해도······”
“이제 내 아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 애를 사랑했는지 어땠는지도.”
그 말에 반지성은 충격을 받았다.
“그게 무슨?”
“하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적을 더 잘 죽일 수 있을지만 고민하며 살아온 세월이다. 추억을 되새김질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로서의 의무, 복수할 의무를 다하기 위해 싸웠다.”
영웅의 힘없는 말, 그 말에 반지성은 아연하다가 겨우 위로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경께선 이미······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 더 어려운 의무가 남았다.”
“더 어려운 의무요?”
“카르세 제국, 아린 변경백으로서의 의무.”
수십 년 전, 대차원문이 막 열렸을 때, 흉턴은 카르세의 변경백이었다. 제국의 변경 아린 벌판에서 쳐들어오는 마족들을 죽이다가, 접근해온 마족만 죽이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저 멀리 있는 마족들까지 죽이겠노라며 원정을 떠났다.
마족들을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골치 아픈 초인이 자리를 비운 틈에 기어이 아린 벌판을 점령했다. 그것은 모든 감정이 소모된 와중에도 이 초인이 눈을 감지 못하게 하는 동기였다.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는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자기만족을 위해 칼만 휘두르면 되니까. 무덤에 있는 그 애는 평가하지 못하니, 나 스스로 평가하고는 잘하고 있다며 위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변경백으로서의 의무는? 다하지 못했을뿐더러 나 스스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금에야말로 만회하기 위해······”
“다시 말하지만 그럴 기력이 없다. 모든 행동을 아무런 마음의 동력 없이 해내야 하는 상황이다. 제대로 싸울 기력도, 힘껏 뛸 기력도 없다. 한두 번 전투에서 칼을 휘두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전쟁 같은 대사업을 수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지금 흉턴은 자신이 무기력해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감정을 너무나도 소모한 끝에 분노마저 사그라들었다고. 그런데도 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마음의 병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옛날 방사능에 피폭되었을 때 치료하지 않아 생긴 무기력증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지금의 흉턴은 병자였다. 몸 하나 까딱하기 힘겨운.
‘그동안 날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날 하찮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놈의 기력이 없어서······’
반지성은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제가 되찾아드리길 원하는 겁니까? 당신의 영지였던 아린을······”
“그래. 늙어 죽지 않는 너라면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지도.”
“손수 되찾으셔야지요······.”
“어떻게.”
“아까 말했듯, 카르세 제국에 돌아가십시오. 카르세인들의 지도자가 되십시오. 대통령이 되기 싫으시다면 황제가 될 권리를 주장하십시오. 당신께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선제후 아니셨습니까?”
“변경백 노릇도 못 해낸 얼간이가 황제를?”
“그래도 의무를 다하시려면, 카르세인들을 전장으로 이끄셔야······”
반지성의 말에 흉턴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그것은 내 의무지 그들의 의무가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나서서 싸우길 원하거든 말리지 않겠지만, 감히 내 뜻을 강요할 염치는 없다.”
“하지만······”
“이 얘기는 됐다. 그래서, 앞으로도 마족과 싸울 용의가 있나? 그러리라고 천상에 맹세하겠다면 그 대가로 네게 전쟁 신의 대전사로서의 자격을 승계하겠다. 전쟁 신께서도 거부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마스터를 대전사로 삼기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니.”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반지성은 눈을 질끈 감더니 말했다.
“맹세하겠습니다.”
그러고서야 반지성은 처음으로 흉턴의 웃음을 보았다. 늙은 영웅의 웃음.
그러나 억지로 지은 웃음이었다. 이제 흉턴은 분노는 물론 기쁨마저 잘 느끼지 못했다.
흉턴의 분노가 사라졌음은 그가 분노에서 풀려났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흉턴은 여전히 복수자였고, 그 의무를 다해야 했다. 이때 분노가 사라졌음은 그를 자유롭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의 동력을 상실하게 만듦으로써 모든 행동을 더욱 힘겹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후로도 계속, 흉턴은 반지성을 가르치는 동시에 자기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무 기력도 없는 상황이지만 얌전히 죽을 생각은 없었다. 모름지기 전쟁 신의 대전사란 침대에 누워서 죽어선 안 된다.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고 죽어야 한다.
이제 흉턴의 내면에서 불을 피워야 할 감정의 연료는 고갈된 마당이지만, 아직 미약한 불씨만은 남았을 것이었다. 단 한 번, 마지막에 타오를 수는 있을 것이었다.
흉턴은 그 최후의 불꽃을 준비했다.
흉턴의 계획을 듣고 난 반지성은 눈을 크게 떴다.
“원자력 발전소를 공격하시겠다고요?”
“전쟁 당시에 바로 몇 킬로미터 바깥에서 핵폭탄이 떨어진 적이 있다. 아주 인상 깊었는데, 그들에게 같은 일을 돌려주고 싶군.”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끔찍했던 일이었다. 도시에 떨어진 핵탄두. 하늘에서 떨어진 재의 눈.
직접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놈의 낙진에 노출되어 시름시름 죽어가는데 치료용 신성 주문을 써줄 사제가 모자랐다. 딱히 눈에 보이는 이상이 없었던 흉턴이 자신을 위한 신성 주문을 거절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도록 독려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죽어버렸다. 전쟁의 종결을 앞당긴 요소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확실히 복수가 되겠지만, 당신께서도······”
“되었다. 나는 그리 죽을 테니, 너는 그 뒤를 준비하라. 그러기 위해서 우선······”
전쟁 신의 대전사는 칼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올렸다.
칼과 전쟁의 신, 평생 모셔온 그 신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대전사를 선택해달라고 기도했다.
전쟁 신은 그 기도에 응했다.
반지성은 자신의 신성과 반응하는 놀라운 힘, 전쟁 신의 존재를 내면에서 느꼈다······.
“이로써 너는 전쟁의 대전사이며 그분의 칼로서······”
흉턴이 읊조리는 가운데, 전쟁 신이 이 새로운 대전사에게 건넨 첫 말은 이러했다.
내면에서 울리는 분노한 목소리.
‘네가 대신 죽었어야 하는데.’
반지성은 잠시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그분의 원망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하기야 전쟁 신으로서는 새 대전사를 얻었다 해서 좋을 리 없을 것이다.
일생이 전쟁이었던 흉턴. 이 충실한 대전사에게 전쟁 신은 승리를 내려주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전사의 힘겨운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 사실에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인가. 분노? 슬픔? 어느 쪽이건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고, 반지성은 감히 짐작했다.
“저도 그리 생각했지요. 그분께서 거부하셨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대신해······ 제가 마족을 베겠습니다.”
반지성은 그리 말하며 공손히, 아주 공손히 흉턴이 내준 참마검을 증표로 내밀었다.
그러자 전쟁 신은 더욱 분노했다.
‘그깟 참마검 한 자루 받았다고 네가 정말 내 칼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넌 흉턴을 대신할 수 없다, 마족 놈아!’
그 일갈을 반지성은 담담히 인정했다. 어떻게 마족 조센징 따위가 그러겠는가?
하찮고 더러운 마족은 위대한 흉턴을 대신할 수 없다.
만약 아스의 영웅을 대체하려면, 마땅히 아스의 피가 흐르는 존재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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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턴은 이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후계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고국에 대한 원한은 떨쳤나?”
“물론 아닙니다. 그 마족놈들은 여전히 간악합니다. 일본의 원한을 말로는 주장하면서 절대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고······”
흉턴은 제자의 대답에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러나 실랑이할 기력이 없었다. 그래서 말리지는 못하고 다만 말했다.
“시간이 해결해주길 빈다.”
그 말을 듣고 반지성은 생각했다.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아니, 아니다. 절대 아니다.
원래 반지성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던 분노는 오래 배출되지 못한 나머지 증오로 화했다. 그리고 증오란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부풀어가는 감정이다.
소모되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곪고 부패하여 곰팡이처럼 번식해버리는 감정. 그 음습한 감정이 앞으로도 더욱 커질 것임을 반지성은 알았다.
한편 죽음을 계획한 그 날이 다가왔다.
마지막 발화를 위해, 흉턴은 어떻게든 속에서 분노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 흉턴은 아들의 묘비 앞에 섰다.
마족들이 죽인 아들의 묘.
수십 년 전, 흉턴이 아린 벌판의 변경백이었을 때. 마족들은 ‘용맹한 흉턴’을 덜 용맹하게 만들고 싶어했다. 흉턴이 계속 설쳤다가는 그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 그리 겁을 주고 나면 흉턴이 얌전해지리라 기대했다.
일단의 군부대가 파견되어 흉턴의 아들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였고, 그런 부류의 일이 흔히 그렇듯 사고가 일어났으며 아들은 죽었다. 그리고 용맹한 흉턴은 미쳐 날뛰는 흉턴이 되었다. 더 많은 마족을 죽이겠답시고 지켜야 하는 영지마저 내팽개친 채 저 멀리 원정을 떠나 버리는······.
“전쟁이시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흉턴이 묘 앞에서 자신의 신께 기도 올리는 가운데, 그 자리에 후계자인 반지성도 함께였다. 그리고 오랜 세월 그에게 섬김받았던 전쟁 신 본인도.
영웅의 마지막을 지켜보고자 여기 멀거니 섰다.
“이제, 정말······”
반지성이 울먹거렸지만 흉턴 본인은 이 마지막 순간에 무감정했다. 슬픔 비슷한 걸 드러낼 마음의 연료마저 아껴야 했다. 마지막 불꽃을 더 세게 피워내기 위해서.
그 마지막 불꽃은 정말이지 화려하게도 피어났다.
다음날, 미국의 한 섬은 늙은 소드마스터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스리마일 원자력 발전소가 붕괴했다.
이때 발생한 낙진은 확실하게 흉턴의 원수들을 괴롭게 했을 것이다.
방사능에 범벅되어 의식을 잃어가던 흉턴 경은 아마 웃었을 것이다. 미 본토에 떨어진 방사능 낙진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원수들을 지옥에 인도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로서는 살아남은 미국인들이 분노하기를, 그러니까 전쟁에 나서고 싶을 만큼 분노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흉턴은 본인이 전쟁을 이끌 염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런데도 전쟁이 다시 일어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흉턴으로서는 아쉽게도, 분명히 미국은 이 테러에 분노했지만 그것만으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는 않았다. 흉턴의 단독행동임이 너무나도 명백했던 탓이다.
「정말이지 시대착오적인 (······) 이 슬픔을 교훈 삼아 우리는 평화로 나아가야 (······)」
심지어 카르세 대통령은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하고서까지 미국에 위로 사절을 보냈는데, 거의 굴욕적이기까지 한 그 위로와 사죄는 카르세인들을 분노케 했다. 심지어 한 조선인마저도.
“저 씹······”
잔뜩 분노한 반지성은 검기를 피워올리고 대통령궁에 쳐들어가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결국 영웅의 마지막 불꽃은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
반지성이 이를 악문 채 문밖을 나섰을 때였다. 정말 대통령궁에 발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반지성은 이제 지긋지긋해져 버린 이 변경도시를 보았다.
그리고 스승의 최후에 의미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
흉턴의 마지막 불꽃은 타고 남은 재뿐만 아니라 잔불을 남겼다. 반지성은 그것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흉턴, 위대한 영웅을 찬양하라!”
카르세 제국은 필사적인 산업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난했다. 그 국민들은 가난과 힘든 삶에 지쳐가던 마당이었다.
사람들은 이 가난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지구에 경멸을, 그곳 마족들에게 마지막으로 복수해낸 옛 영웅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미국이 화를 낼까 두려워했던 카르세 정부는 국민들이 그러지 못하게 막으려 했으며, 이 억압은 되려 반발을 이끌어냈다.
카르세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이토록 나약하게 만든 지구에 더욱더 크나큰 분노를 표출했다.
결국 대통령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카르세 각지에서 흉턴의 추모를 겸한 반(反) 지구 시위가 열렸다. 경찰들이 동원되어 막으려 할수록 시위의 불꽃은 거세질 뿐이었다.
그 험악한 분위기는 이 변경도시를 비껴가지 않았다. 시민들이 ‘찢어 죽여야 할 마족 놈들’이니 ‘제국 시절이 좋았다’느니 지껄이는 가운데, 평소에는 모두의 부러움을 사던 미제 세단은 몰려든 시민들의 방망이질에 찌그러졌다.
한편 도시에서 살던 드워프들도 반 지구 정서가 폭발한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예전에 실패했던 공격에 다시 한 번 나섰다.
지구 문명의 상징쯤 되는 저 사악한 공장을 향해서.
“부숴! 다 부숴!”
이번 습격에 그들은 늙은 기사씩이나 고용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전력들이 함께였다.
“쭈겨어!”
일자리를 잃어 원한을 품은 고블린들, 지금은 늙어 죽고 없는 그들의 후손 고블린들이 이번 습격에 동참했다.
게다가 주변에 살던 인간들마저도. 모두 드워프들과 함께 공장에 쳐들어가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예전, 공장주는 고블린들을 신고한 것은 자기 공장에서 일하고 싶은 근처 주민들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의 뜻대로 해주고 싶어 하지 않았더랬다.
결국 공장주는 주민들에게 보복하겠답시고 새 일꾼을 공장 주변이 아니라 최대한 멀리서 데려왔으며, 결국 단 한 명도 고용되지 못한 근처 주민들은 공해만 일으키는 이 공장을 증오했다.
기계 파괴에 이은 방화는 순식간이었다.
불타는 공장을 보며 반지성은 희열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 반지성은 카르세인들 또한 사실 마족의 문물을 싫어하고 있었음을, 스승의 불꽃이 저들에게 확실한 영향을 주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서로 다투기 바쁜 아스인들은 영웅의 출현과 공통의 적 앞에서는 다 함께 뭉칠 수 있단 것도.
그 모든 사실을 두 눈으로 목격한바,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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