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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4판타지-114화 (114/135)

LV.9 빚쟁이 지존무쌍 - [1]

죽여도 피해 없이 부활하는 적들, 수만 명의 카르세 게이머들을 상대로는 정교한 전술이나 강력한 무기 따위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설치만 잘해두면 수백 명을 갈아버릴 수 있는 기관총, 놈들에게 쏘다보니 어느새 적들의 수보다 탄약의 수가 적어졌다. 강력한 항공지원, 이제는 폭탄값도 감당할 수 없었다······.

거의 모든 물자가 바닥난 가운데, 원정대는 고난스럽게 행군할수록 그 수가 줄어들기만 했다.

벌써 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이탈했다. 습격을 받아 죽거나 힘겨운 행군을 따라잡지 못하고 낙오한 것이다.

이렇듯 게임 속에서도 괴로운 마당에 현실에서도 문제가 덮쳐왔다.

“국방부에서 문자 왔어. 예비군들 다 물건 챙겨놓으래.”

“그냥 예비군 훈련하려는 건 아닐 테고······ 우린 특례 안 봐줘? 나라 위해 분투하는 건데.”

“그렇다고 우리만 빼주긴 애매한가 봐. 그랬다간 정말 국가 차원에서 참마황을 늙어 죽게 만들려고 공작했단 게 분명해지는 데다······ 사실 예비군을 소집하기도 전에 이 모든 상황이 끝날 것도 같고.”

“그럼, 여기 까진가······”

이쯤 되면 다들 구국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은 충동이 들 만했다. 정말이지 시련뿐인 나날이었다.

이 고생의 대가로 한국인 게이머들이 거둔 성과는 딱 하나였다.

죽을 힘을 다해 카르세인들과 분투한 결과, 비로소 조선인민군에게서 아군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로써 수십만 병력을 가진 집단과 동맹이 되었지만, 그다지 든든한 상황은 아니었다.

무전 너머 조선인민군 장교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은 이미 거지인 모양이지만 우리도 나날이 거지가 되어가고 있소. 오래 버티기 어려워」

이미리는 한탄했다.

“역시······”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하나요. 카르세 놈들이 우승하지 못하도록, 우리 수령 동지께서 우승하시는 것이야」

한국인 게이머들은 왜 하필 김일성이야? 하고 반문하고 싶었겠지만 정말 그럴 수는 없었다.

이쪽 누군가가 우승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니까. 만약 한국인 중에서 우승자를 내려고 시도했다간 카르세인들뿐만 아니라 조선인민군마저 분노하여 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그래요, 수령 동지께서 엘프가 되셔야 한단 건 알겠는데. 어떻게요?”

「당연히 아린 벌판을 점령해야지. 알다시피 그건 지금 병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거기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거요」

“가온.”

「그래, 그 정신 나간 귀쟁이가 아린 벌판에 떡 하니 지키고 있지. 그 귀쟁일 감당 못 하면 벌판 진입은 꿈도 못 꿔」

“그 정신 나간 귀쟁이, 원래는 어떻게 잡으려고 했는데요?”

「축지법 방지 물건은 알지? 그걸 장착한 병사들이 어떻게든 달라붙어서 발을 묶어둔 틈에 병력을 진군하여 아린 벌판을 점령하려던 거였지. 요새는 그마저 불가능하단 게 드러났지만······」

이번 뉴스마저도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혁명을 사십 분 만에 뚝딱 해버리는 초인이라니? 그런 걸 상대하겠답시고 용을 써온 꼴이 우스워진 마당이다.

「그래도, 이 방법은 여전히 먹히긴 할 거야······ 딱 수십 분! 딱 수십 분 정도만 그 귀쟁이를 한 자리에 묶어둘 수 있으면 돼. 그러기만 하면 우리 병력이 벌판을 점령할 테고, 수령 동지께서는······ 그러기 위해, 당신들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우리한테 부탁하고 싶은 거라니요?”

「그쪽에 기똥찬 칼잡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흉턴 그 종간나가 초빙해온 마스타랑도 대등하게 붙었다고 들었는데. 마스타는 아니지만 마스타 비슷한 실력자라고, 아니요?」

누구를 말하는지는 알 만했다.

이번에도 그놈의 가온 얘기다. 방금 말한 가온 본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우리도 이미 그 양반을 엄청나게 설득해봤지만 죄다 실패했는데요.”

「그러면 다시 설득하시요. 어떻게든 말을 들어 먹게 만들어. 그 말고는 방법이 없잖나? 아주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며불며 매달리란 말이야! 지금 당신네 나라가 위험에 처했는데, 지금이 수단 가릴 때인가?」

그 일갈을 끝으로 무전은 종료되었다.

강주석이 중얼거렸다.

“그래, 조연이나 엑스트라들은 아무리 많아도 쓸모없고······ 스니치를 붙잡아 게임을 끝내줄 주인공이 필요하다 이거지. 당연히 그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고, 심지어 한국인도 아닌······”

한국인끼리 어떻게든 해결하자던 강주석도 이제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우울하게 바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한편 이 상황에 이복동 또한 우울함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김일성을 우승시켜야 한단 말이지? 그리하여 게임을 끝내야 한다고.’

이 게임의 종말을 막으러 왔건만, 기어이 종말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이 만족스러웠던 직업은 끝난다. 편의점 알바가 기다린다.

그렇듯 원래 목적은 이미 망가진 마당이지만 이복동은 새삼 원정대에서 이탈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왕 뛰어든 마당이니, 끝까지 함께하자. 어차피 남 일도 아니고······.

그리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다독이던 와중이었다. 이미리가 찾아와서는 지금까지 지겹게도 했던 부탁을 다시 했다.

“복동 씨? 가온 씨 설득 좀 부탁드릴 수······”

그 요청에 이복동은 힘없이 대답했다.

“알잖아요? 저도 이미 몇 번이고 설득했는데 실패했어요. 게다가 전 여기 원정에서 일해야 하는데요.”

“그래도······”

“그러니 저 말고 딴 사람한테 부탁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저보다 적합한 사람이 있거든요.”

“누구?”

“지존무쌍이라고, 가온 형 게임 친구 있는데, 그 아저씨가 나보다 더 친할 거예요. 자그마치 십 년이나 게임을 같이 했거든······”

이복동은 지존무쌍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이미리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

갑작스럽게 들려온 제안에 지존무쌍은 손을 떨었다.

“설득 성공하면 오천만 원 주겠다고요?”

「예. 그러니까 어떻게든 설득시켜 줄래요? 제발······」

“그래, 시도는 해보겠는데······ 대신 선수금 좀 줄 수 있을까? 천만 원만······”

그 무리한 요청마저 승낙되었다.

이미리는 천만 원을 입금했고, 지존무쌍은 이 행운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받은 돈 중에서 이백만 원을 가온의 계좌에 입금했다.

빌린 돈을 갚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지존무쌍은 살면서 돈을 빌린 적이 많았다. 그중 일부만 갚아도 상대가 자신에 대한 호감을 회복한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었다. 그로써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도.

그러니 빌린 돈보다 큰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출혈은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오백만 원 전부 갚지 않고 이백만 원만 갚은 것도 나름의 계산이었다. 그러는 편이 능력껏 갚는 것으로 보여 더 성실하게 느껴지리란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그 의도는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수화기 너머 가온은 너무나도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입금한 거 봤어! 기특해, 기특해 아주! 솔직히 슬슬 관계 끊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지존무쌍은 속으로 욱하며 물었다.

“그래서, 이젠 관계 계속 이어가는 건가?”

「그래!」

“그럼 다시 베프된 기념으로······ 만나서 술 한잔할래?”

「좋지, 내가 산다!」

그날 저녁, 가온과 지존무쌍은 오랜만에 다시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

안주를 입에 넣으며 가온은 내내 웃었다. 실없이, 너무나도 즐겁게 웃었다.

지존무쌍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왜 그리 좋아한대?”

“댁이 돈 갚아서!”

“이백 받아서 안심했어? 솔직히 못 돌려받아도 상관없으면서······”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성의가 중요한 거지, 이 양반아.”

지금 가온은 돈을 돌려받아서가 아니라 십 년 지기 게임 친구가 자신을 지갑으로 여기지 않는단 게 기쁜 것임을 지존무쌍은 알지 못한다.

어쨌건 상대가 좋아하니 다행이다. 설득이 쉬워질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가온 씨? 같이 게임하던 애들이 말 전해달라는데.”

잠시 가온의 몸이 굳었다.

“설마 같이 싸워달란 건 아니겠지?”

“그거, 맞는데.”

“내가 이걸 몇 번이나 설명하는지 모르겠는데······”

또다시 그 지겨운 설명.

“······그러니까 거절한다고 전해주면 좋겠는데.”

“아니, 아니, 그러지 말고······”

그 간절한 얼굴을 보고 가온은 뭔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찌푸린 표정으로 이렇게 물어오는 것 아닌가.

“혹시 나 꼬드기면 스폰서가 돈 준다고 했나?”

“아니, 스폰서 아가씨는 한국말만 잘할 뿐 아스인 같던데? 그 아가씨가 한국인들 위해 나한테 돈 줄 이유가 있나······”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여전히 불쾌함이 떠오른 가온의 얼굴, 지존무쌍은 속으로 전전긍긍했다.

왜? 돈을 받고 설득하려 한 것이면 기분이 나쁜가? 그렇다면 게이머들이 돈을 주기로 한 것도 숨겨야겠다······.

“그런데 가온 씨, 그네들 부탁 들어줘도 손해 볼 거 없잖아. 이거 최종결전이잖아? 평소에 싸우고 싶어 하던 소드마스터도 잔뜩 나올 거야. 곧 게임 끝날 모양이니 마지막 기회인 셈인데. 참전하는 게 무조건 이득 아냐?”

가온은 그 말에 반박하려다 말았다.

문득 그 드래곤의 제안을 떠올렸다. 한국인들을 도와주기만 하면 원수 중 하나의 위치를 알려주겠다던 제안.

그렇다면 확실히 한국인들을 돕기로 하는 것이 이득일지 모른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돼.”

“대체 왜?”

“노력하는 젊은 애들을 기만하고 싶진 않아. 안 될 걸 뻔히 알면서 도와주는 척하고 싶진 않네.”

“아니, 안 될 걸 어떻게 확신해? 그래도 시도는 해볼 수 있는 거잖아!”

“확신할 만한 이유가 있어. 너희 한국인들이 모르는 걸 알아서 그래.”

“그 이유가 뭔데!”

“그건 못 말해줘.”

“아, 좀!”

지존무쌍이 계속해서 졸라댔지만, 가온은 묵묵히 들었다. 집요한 것이 평소 같으면 짜증날 만한 상황이지만 지금은 이해해줄 수 있었다.

왜 저리 절실하게 설득하려는지 알 만하다.

한국의 상황은 척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아직 예비군 총동원령은 내려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곧 내려질 모양이다. 길거리에 현역 군인들이 돌아다닌다. 이 주변을 유심히 살피는 그들의 모습은 이 거리가 언젠가 전투 현장이 될 미래를 암시한다.

흉흉한 광경은 그뿐만이 아니다.

연속으로 협박을 당한 것이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친 것일까? 최악의 불경기가 닥쳐온 듯, 저녁 시간임에도 술집에 둘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없다.

심지어 거리조차 텅 비었다.

가온은 특유의 좋은 시력으로, 거리 너머를 보았다.

주변 편의점, 생필품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휴지는 물론 라면이나 초콜릿조차 없었다.

전쟁 전, 종말의 분위기······.

다른 세계 사람이 보기에도 모든 것이 엉망이다.

‘젠장.’

이 장면들을 눈에 담으며 가온은 기분이 좋지 않다. 애써 외면해야 하는 이 상황이 속이 쓰리다.

“절대 안 된다니까. 절대!”

처음에 밝았던 술자리는 우울한 분위기에서 파했다.

결국 지존무쌍은 가온을 설득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수천만 원을 포기할 수야 없는 일이었다. 지존무쌍은 다음 날 가온에게 전화를 걸어 또 설득하려 노력했고, 역시 실패했다. 그다음 날도.

초조한 나머지 식은땀이 흘렀다. 이대로 수천만 원을 놓쳐야 하나?

가온을 설득할 기회가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지존무쌍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알 듯, 한국인 게이머들의 원정은 실패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그놈의 원정대는 와해 될 것이요, 그때 가온을 설득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지존무쌍은 굳은 얼굴, 잔뜩 찡그린 얼굴로 전화를 걸었다.

「누구? 아, 지존무쌍 아저씨?」

“응. 이미리 양? 난데, 이번에 가온 씨랑 대화했거든? 결과 알려주려고······.”

*******

가온은 한숨쉬었다.

매번 거절하는 마당에 속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 미안한 감정이 가온에게 보상할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지존무쌍 그 양반, 요새 돈이 부족한 모양이던데. 그렇다면······“

만약 이대로 게임이 서비스 종료되어, 지존무쌍이 먹고 살길이 끊길 것 같다면, 가온은 그 게임 친구를 따로 챙겨줄 생각이다.

심지어 지존무쌍이 전쟁에 휘말린 한국을 떠나 아스로 오기를 희망한다면 그 요청마저 들어줄 수 있다.

친구인지 아닌지 애매한 사람이지만 어쨌건 십 년 넘게 알아온 사람 아닌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고서야 겨우 기분이 나아졌다. 가온은 억지로 웃으려 애썼다.

그 와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미리의 것이었다. 또 같이 싸워달라 조르려는 것인가?

가온은 번호 차단을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일단 받기라도 하는 것이 예의겠다 싶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들려온 들뜬 목소리.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가온 경!」

가온은 기겁했다.

“내가 뭐 해줬니? 며칠 전에 혁명 성공시킨 거 말하는 거라면 그건 내가 아닌 다른 가온이 한 건데.”

「그거 말고! 우리 돕겠다 한 거요!」

돕겠다 했다니? 가온은 눈을 크게 떴다.

“뭔 소리야? 지존무쌍 그 양반한테 이미 절대 못 도와준다고 설명했구만. 몇 번이고 말했는데 그 말 안 전해줬어?”

「예?」

“응?”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에야 이미리가 어물어물 말했다.

「설득 성공했다길래 성공보수 사천만 원 줬는데······」

바보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가온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미리에게 말했다.

“기다려. 그 돈 당장 받아온다.”

이미리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가온은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 새끼가······”

한편 여신께서는 평소부터 지존무쌍을 혐오하셨다. 그 혐오감이 이번에 정점에 달하신 모양이었다.

‘가온? 이번마저 용서해줄 생각은 아니리라 믿으마.’

그리고 가온이 대답했다.

‘절대 그럴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신이시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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