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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4판타지-113화 (113/135)

그림자 엘프 오림 - [5]

참으로 열성적인 반응이었다. 가온으로서는 절로 미안해질 정도로.

사실 가온은 별 대단한 사명감으로 이번 일에 나섰던 것이 아니었다. 근래 있었던 사건들로 인해 화로의 대전사가 평화주의자이며 지구와의 화친을 꾀한다는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 화풀이할 겸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나섰을 뿐이다.

그런 처음의 무신경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가온은 조금 고심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아예 무관심하게 되었다면 거짓말이겠지.”

그 대답에 오림은 활짝 웃었다.

“오, 조금은 관심이 생겼나! 그럼 뭔가 할 맘도 생겼고?”

그리고 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도 같이 일해보잔 제안을 하려는 것이라면, 저번에 같이 살자는 제안에 내놓았던 거절을 똑같이 해야겠네.”

“아, 그래······. 과거 청산을 한 뒤에야 뭐든 시도할 수 있으리라 했었지. 우리는 물론 존중하네.”

오림이 어색하게 웃는 가운데, 가온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 원수가 하나 더 생겼네. 정확히는 소멸한 줄 알았던 원수가 사실 아직 살아있던 것인데 말이야.”

가온은 오림과 다른 전우들에게 대마법사의 생존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그 원수에 대해 너희는 얼마나 복수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대마법사라······ 우리가 그에게 원한을 주장하긴 좀 그렇군.”

“어째선가? 자네들도 고통받은 당사자였지 않나.”

“우리야 뭐 시련 끝에 보상이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다 거기서의 이백 년 덕분 아니겠나? 온갖 경험이며 놀라운 신성이며, 이번에 대단히 유용하다는 게 증명된 인맥까지 그 세계에 처박혀있던 덕분에 얻었지. 물론 인간 친구들의 최후는 애석한 일이지만, 말했듯 보상을 잔뜩 받았던 우리가 원한을 주장하긴 애매한······”

“하지만······.”

“아, 자네마저 그자를 용서하란 말은 절대 아닐세. 물론 자네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 그래서, 지성이 의견은 들어봤나?”

“그 친구한텐 안 들어봤는데······ 막상 물어보긴 애매하고.”

“왜?”

가온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정황상 지성이 그 친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게 분명하거든. 그런데도 내게 숨긴 모양이라. 굳이 캐물었다간 서로 거북해질 것 같아.”

“그래도 물어보지?”

“뭐, 그래야겠지. 그래서, 이제 혁명도 완수됐으니 떠날 건가?”

“곧. 하지만 당장엔 할 일이 남았어.”

무슨 일이 남았느냐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문이 빼곡 열리더니 한 간호사가 안에 들어왔다.

“선생님들······ 아, 전하? 여기 계신 줄 모르고 감히······”

간호사는 우드엘프들에게 뭔가 말하려다 말고, 가온을 보고서 기겁했다.

오림이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 생각보다 편한 친군데, 그리 벌벌 떨 것 없어. 그래서······ 환자들 좀 봐달라고 요청하러 온 거겠지?”

간호사는 계속 가온의 눈치를 살피며 애써 오림에게 말했다.

“예, 고엽제 뒤집어쓴 친구며 부상 덧난 친구며, 환자가 아직 많아서······ 선생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대화를 들은 가온이 물었다.

“자네들, 사제로서의 일도 하나?”

오림이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 일 중엔 의료 지원도 있거든. 우리도 나름 준신 아닌가? 치유 주문은 꽤 강력하게 쓸 수 있으니 아끼지 않고 쓴다네.”

“그거 훌륭하군.”

“그 훌륭한 일, 이왕 온 김에 자네도 해보는 게 어떤가? 자네는 우리보다 마법적 재능이 월등하잖나. 자네는 아예 병을 고치거나 해독하는 어려운 신성 주문도 쓸 수 있을 텐데, 그 귀중한 능력을 여기서 한번 써보지? 그때 그 세계에서 우리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이제 의료봉사까지 하라고?

가온은 자원봉사 따윈 비극의 소드마스터의 이미지 형성에 썩 도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평소라면 폴리모프를 하고서야 그런 일을 했겠지만, 이번마저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자네 제안에 계속 거절만 하기도 뭐하군.”

“그러면?”

“내 그러지. 화로의 교도도 늘릴 겸, 오랜만에 사제로서 나서보겠네.”

“잘 생각했네!”

오림이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준비시켰다.

가온은 자신 앞에 선 환자들을 보고 생각했다.

‘반신이 온 김에 아주 뽕을 뽑으려나 본데.’

아주, 아주 많은 환자들. 어딘가에 깁스를 한 부상병이나 파상풍 환자는 물론, 병자며 절름발이까지 가온의 도움을 받으러 와있었다.

그 모두를 치유하는 일은 가온에게 수고스럽긴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온몸이 신성으로 가득 찬 반신에게는 전혀.

“그럼, 손을 내밀라.”

이후로는 종교적인 장면이었다. 치유의 기적을 베푸는 성자와 환자들.

가온이 기도할 때마다 환자는 환자가 아니게 되었다. 파상풍 환자든, 그보다 심각한 환자든 마찬가지였다.

“아, 아아······”

완치된 환자들은 가온의 손을 붙잡고 울더니, 화로의 여신과 그 대전사에게 무궁한 영광을 빌며 넙죽 절한 뒤에야 물러갔다.

그래서 환자 한 명 한 명의 치유에 드는 시간이 늘었지만, 가온은 짜증 내지 않았다.

가온은 전 사제로서 신성 마법의 희소함을 알았다.

자신이 베푸는 싸구려 기적이 저들에겐 싸구려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스에 신의 힘을 빌리는 사제들이 여러 존재함에도 병원은 여전히 잔뜩 필요한 시설 아닌가.

그리고 병원의 도움이든 사제의 도움이든 적절한 때에 받지 못해 죽어버린 아스인은 많다. 말레키스 공화국과 같은 가난한 아스의 국가는 특히 그렇다.

이 와중에 운 좋게 나타난 반신은 얼마나 도움 될 것인가.

가온은 계속해서 환자를 치유하며 생각했다.

자신의 존재는 세상을 더 낫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옛 전우들이 힘껏 노력해왔지만, 아직 큰 진전이 없던 그 일들을 자신이라면 모두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스에 산재한 수많은 문제 중 가장 심각한 몇 개는 이 강력한 반신이 진작 해결해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한 생각들은 구체적인 계획이 아니라 방에 처박힌 폐인이 흔히 하는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망상을 실현해 본 오늘, 가온이 느낀 것은 망상할 때 느끼던 쾌감이 아니라 자책감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 느끼는 그런 자책감.

“화로의 여신님과 그 대전사께 영광이 있으라!”

찬양 기도와도 같은 환송을 받으며, 가온은 텔레포트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여신께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시여? 제가 이번에 느낀 바가 있습니다.’

‘무어냐, 가온?’

‘제가 너무 오래 찌질거린 것 같습니다. 그럴 시간에 더 나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앞으로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여신께서 반색하시었다.

‘그거야말로 네 여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노라!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뭐든 하기 위해······ 한 달 내로 제 맘을 결정하려 합니다. 복수를 해내든, 여신님의 대전사로서 의무를 다하든 간에요.’

‘정말이냐, 가온?’

‘예. 더는 쓸모없는 게임이나 줄창 하며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은 혹시, 사악하며 허무하기 짝이 없는 그 전자오락들을 이제야말로 그만두겠단 뜻이냐?’

가온은 조금 흠칫하더니, 고심 끝에 대답했다.

‘아예 끊는 건 좀 그렇고, 하루 여덟 시간 미만으로 줄이지요.’

보통의 부모가 자식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자길 놀리는 것이냐 성을 냈겠지만, 여신님과 가온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그 말은 곧 내 대전사가 오락하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겠단 말이더냐?’

여신께서 더없는 환희로 가득 차시어 하문하시매, 그 대전사는 신화적일 만치 비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여신께 따로 합의 없이 맹세합니다.’

‘장하다. 가온! 내 대전사는 언제나 네 여신의 기쁨이었음을 선언하노니!’

‘하고는 어쩔 것이냐? 내 대전사는 그자와의 악연이 정리된 이후에야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 짐작했노라.’

‘예, 옳으신 짐작이었습니다.’

‘하고 그자와 결판을 내려고 현재 노력하던 중이 아니었더냐? 시간을 더 쓰려는 줄 알았건만.’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지요. 반 년이든 몇 년이든, 확실히 이길 실력이 갖춰질 때까지 수련만 쭉 한 끝에 도전할 생각이었는데······ 어려운 시기 아닙니까. 원수 한 놈에게만 무한정 시간을 쏟을 수야 없습니다. 그자와도 곧 결판을 낼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한 달 내로······’

‘네 여신은 대전사의 다짐에 감격하여 천상에 비를 내리고 있음이나, 내 대전사가 그리 급할 것까진 없다고 생각하노라. 내 대전사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 시간이 걸려도 네 여신은 기뻐할 것이니······.’

여신께서 옥루를 흘리시는 가운데, 가온은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무심결에 웹서핑하고자 스마트폰을 켠 그때였다.

문자 메시지가 왔는데, 게임 친구에게서 온 것이었다. 여신께서 대전사의 다짐에 놀라셨듯, 이 역시 가온에게는 아주 놀라운 내용이었다.

[지존무쌍] : 빌린 돈 일부 입금했어... (21:30)

가온은 너무 놀라 통장을 확인해보았는데, 문자는 사실이었다.

지존무쌍에게서 이백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빌려준 오백만 원 중에서 반절 가까이 반환된 것이다!

‘이 양반, 어차피 안 갚아도 될 돈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질질 끌 줄 알았는데 벌써?’

방금 쓸모없는 게임이나 하며 인생을 낭비했느니 자조했던 것도 잊고, 게임 친구가 보여준 의외의 행동에 가온은 웃었다. 진심으로 기분 좋게 웃었다.

*******

미군 기지를 성공적으로 습격한 뒤, 그때 얻은 전리품을 처박아둔 창고가 있었다.

하고는 그 창고에 들어섰다.

전리품 중 하나, 대충 포박되어 널브러진 미국인 여자가 보였다.

IS 대원들에게 잡혀온 그녀는 의사였다. 그녀의 놀라운 의료기술에 IS 대원들은 관심이 없었다. 자기네 하찮은 욕망의 해소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 사실에 하고는 분노했지만, 그 불쾌한 작자들이 어쨌건 아군이었으므로 지금까지는 참아왔다.

오늘마저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너, 미국인 여자.”

자그마치 소드마스터가 자신을 부르는 것임에도 여자의 얼굴엔 별 대단한 감흥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의 생활이 그녀의 감정을 죽인 모양이다.

그 사실에 하고는 새삼 자책하며 선언했다.

“자비를 베풀러 왔다.”

그녀로서는 워낙 기운이 없던 나머지, 그 말의 뜻을 한 박자 늦게 헤아린 모양이었다.

“아······”

아무런 감정이 없던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아오려 했다. 자신을 풀어주려 하는 줄 안 것일까?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막 감돌려던 핏기는 하고의 다음 말에 완전히 사라졌다.

“네가 믿는 신께 기도해라. 이만 죽여줄 테니.”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어떻게든 떼어 어물어물, 힘겹게 애원했다.

“죽이지 마······”

워낙에 힘이 없는 나머지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았다.

그렇다고 엘프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건만, 하고는 못 들은 척 무시하려 했다.

하고가 칼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휘두르기 전, 미국인 여자가 모든 힘을 다해 흐느꼈다.

“하지 마. 죽기 싫어, 살고 싶어······”

그제야 하고는 멈칫했다.

수십 년 전 과거가 생각나는 상황 아닌가. 회색 머리칼의 동족들을 ‘안락사’시켜주었던 그때.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것은 이 상황이 더 음침하고, 지금 자신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뿐이다.

젠장, 역시 그때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년도 바로 죽여버리든 어쩌든, 신념대로 행동했어야······.

이후로는 그저 고요한 가운데, 창고에 휘날리는 어두운 먼지만이 달빛을 반사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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