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112화 (112/135)

그림자 엘프 오림 - [4]

예의 기업이 계약을 거부한 구체적인 이유는 이러했다.

‘임금을 올려달라니 무슨 소리냐? 애초에 기존 계약은 우리가 직접 현지민을 고용하는 게 아니라 생산된 작물만을 공급받는 형태였는데, 이제는 고용까지 책임지란 뜻이냐?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다섯 배 인상이 말이 되느냐?’

그들로서는 합리적으로 대응한 것일지도 모른다.

맨드레이크를 생산하는 나라야 넘쳐나니 그중 하나와의 계약이 끊긴들 대단한 타격은 아니다. 게다가 한쪽에만 특혜를 베풀었다간 다른 맨드레이크 공화국들마저 모두 같은 계약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기업의 입장에 그럴 수야 없는 일이다.

설령 그렇다 한들 거절당한 혁명 정부로서는 당황스럽다.

이쪽의 뒷배에는 재의 왕자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매몰찬 반응을 보이다니?

“이 자식들이 미쳤나······”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거요! 기자 양반, 지구에 우리 뉴스는 언제 나옵니까? 당신네 세계 사람들도 이 불합리한 사실을 알아야······”

사람들이 분노한 가운데, 가온 또한 기분 좋을 수는 없었다.

여신님의 이름으로 축복한 마당에 벌써 이런 일이 생기다니?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주도한 일임에도 저런 반응이라니, 이쪽 체면을 무시하는 처사다.

그렇다면 체면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직접 그 다국적 기업의 본사에 텔레포트해서는 윗사람들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협박해야 하나?

‘아니면 아예 그네들 사업을 망쳐버릴 수 있도록, 그 기업이 관계하는 다른 맨드레이크 공화국에도 모두 방문하여 같은 일을 벌이는 것은······.’

그리 상상하던 가온은 문득 자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신은 이 모든 일을 벌이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던가. 그저 당장 실현에 옮기자니 뒷감당을 할 엄두는 나지 않아 더 고민해야 할 뿐이다.

‘가온은 이 상황이 기껍지 않노라고 전해야 하나? 너희에겐 일을 수습할 책임이 있으며,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직접 방문해서 항의할 생각이 있다고도······’

그러나 이 역시 껄끄러웠는데, 소드마스터의 방문예고는 거의 살인 협박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자칫하면 양 세계 간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일, 화로의 대전사로서 그러기는 어려웠다.

‘그 우드엘프 양반이 이게 왜 정치적 일이 되리라 여겼는지 알겠네······.’

가온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번 대응에 대해 여신님과 의논하려 했다.

그 와중에 오림이 와서 말했다.

“가온? 자넬 만나길 원한다는 자가 있는데.”

“누구인가?”

“지구인으로 보이는데, 자세한 신분을 밝히려 하지 않네. 그저 이 그저 사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전해달라고만······”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상관없었다. 설령 암살자인들 반신 소드마스터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만나겠다고 전해줄 수 있겠나?”

잠시 후, 가온은 한 지구인 방문자를 맞이했다.

금발에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였다. 그는 만나 뵈어 영광이라 인사를 하더니, 이번 일에 크나큰 유감을 표했다.

“이번 일로 크게 노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번 일로 당장 지구에도 난리가 났지요.”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지구의 여러 국가로서는 어떻게든 잘 보여야 마땅했던, 기껏 평화에 힘쓰는 것 같았던 화로의 대전사를 웬 기업이 자극한 것이다.

“다들 이번 기업의 대응에 기겁하다 못해 분노한 마당입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성난 군중이 그 기업의 본사에 쳐들어가 죄다 끌어내리려 할지도 모릅니다.”

남자의 설명에 가온은 무표정하게, 아무런 어조 변화 없이 물었다.

“그래서 잠자코 있으란 말인가? 그자들의 반응은 실로 모욕적이었다. 그들의 배짱을 이대로 넘겼다간 다른 이들도 화로의 대전사를 무시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

이런 냉담한 반응에도 남자는 위축된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입장을 대신해 사과했을 뿐이다.

“지구인들이 또다시 보인 무례에 새삼 사과드립니다, 전하. 그러나 모쪼록 이해해주십시오. 그 기업의 윗것들은 그저 당황했을 뿐입니다.”

“당황이라. 지구인들은 당황하면 신의 대전사에게 배짱을 부리나.”

“감히 말씀드리자면, 그들은 배짱을 부린 게 아니라 예상 밖의 사태에 어쩔 줄 몰라서 일차원적으로 반응한 겁니다. 하기야 누가 반신이 자기네 반식민지를 뒤엎었을 경우 어찌 대응해야 하는가를 배워봤겠습니까? 그리 상상도 해보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누구나 바보가 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이런 상황에 어찌 굴어야 하는지 그쪽은 아나?”

“예, 저흰 좀 알죠. 초인과 얽힌 일이 제법 되는 덕분입니다. 아, 아직 제가 어디서 나왔는지 설명해 드리지 않았군요? 감히 대전사께 자기소개를 드려도 될지······.”

“허가하지.”

그 물음에 남자는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직접 입 밖으로 냈다간 신들께서 들으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러니 우회하여 말씀드리자면······ 저희가 드린 제안을 일찍이 받아보신 줄로 압니다. 한국 국회의원을 통해 통해서 말이죠.”

가온은 엄근오와의 대화를 기억했다. 덕분에 바로 알아듣고는 속으로 신음했다.

‘미국 정부에서 나온 인물인 것 같군요. 그렇다면 제가 함부로 말을 섞어서는 곤란할 텐데······.’

가온이 걱정하자 여신께서 말씀해주시었다.

‘아까부터 네 여신이 다른 신들의 시선을 쫓고 있었노라. 그러니 신들의 주목은 신경 쓰지 말고 말을 나누라. 대전사.’

가온은 새삼 여신께 감사를 드리며, 미국의 요원으로 추측되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겐 어쩐 일로? 이미 거절한 제안을 다시 하기 위함인가?”

“아니요. 이번 일을 저희가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감히 대전사께 무례를 끼친 그 기업이든, 곤경에 처한 이 나라든······, 대전사께서 조금도 더 신경 쓰실 필요가 없도록 도와드릴 수 있지요.”

저 남자가 말하는 ‘저희’가 미합중국임을 고려할 때, 그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몇몇 비대칭 전력을 제외할 경우, 아스의 모든 나라를 홀로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그 나라라면 정말 뭐든지······.

“그래, 이번 일에 도울 능력이야 충분하겠군. 도울 의지가 있다는 점이 의외일 뿐인데.”

“의외라니요?”

“왜, 아스의 맨드레이크 공화국부터 돕기엔 지구에는 바나나 공화국이 넘치지 않던가?”

“뭐, 필요한 곳부터 돕는 것이지요······.”

남자는 말을 흐렸지만, 자세한 이유는 가온도 알 만했다.

미 정부로서는 화로의 대전사가 분노하지 않도록 상황을 수습할 겸, 자칫하면 아스에 지구를 증오하는 국가가 하나 더 생겨날 상황을 막으려는 것이리라.

지구의 최빈국들은 설령 서구를 증오하더라도 보다 만만한 자기네끼리 싸우기 바쁘다. 그러나 아스의 국가들은 그러지 않는다. 그들은 신의 명령으로 단결하여 한 방향으로 총과 검을 겨눈다. 그러니 처음부터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지구의 서방국가들이 지난 수십 년간 깨달은 교훈 중 하나다.

“물론 이 나라가 저희 지원을 넙죽 받았다간 미국의 괴뢰 정부쯤으로 여겨지리란 것은 압니다. 아스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기 싫을 테니 어쩌면 저희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겠지요. 그 점에 대해서도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남자가 열심히 설명하는 중, 가온은 말을 끊었다.

“그만. 더 말할 것 없다.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를 모르겠군.”

“경? 저희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물론, 이 나라가 알아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간섭할 이유도 없지.”

당황하던 남자는 겨우 안심했다.

“예, 그럼 말씀드린 대로 하는 것으로······”

“그런데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로서, 이 나라가 왕정으로 돌아온 것엔 별문제가 없다 여기나 보군?”

갑작스러운 질문에 남자는 무심결에 대답했다.

“그거야 물론 유감이지요. 그저 이 나라에도 언젠가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싹틀 토양이 자리 잡길 바랄 뿐입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자기가 말하고서도 놀란 듯, 남자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이 회색 엘프 또한 민주주의라면 질색할 아스의 왕족 아닌가······.

그러나 가온은 남자가 무엇을 입에 담았건 신경 쓰지 않았다.

가온이 한국인들과 어울린 시간도 오래되었다. 그들과의 시간은 이 아스 왕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예전에 가온은 게임에서 민주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다가 특정 악명 높은 사이트를 하는 것으로 의심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는 민주주의가 어떻다는 말에 일일이 화내지 않게 되었다.

그놈의 사상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별개로, 지구인들이 그 가치를 어찌나 소중히 여기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온은 한국인들을 존중하듯, 미국인에게도 그럴 수 있었다.

한편 가온의 무심한 반응을 남자는 조심스레 살폈다.

말실수에 대한 반응, 그 반응으로 상대의 현 사상과 사고방식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방금 재의 왕자의 무심한 반응을 통해 ‘역시 재의 왕자는 원한을 상당히 잊었으며, 지구에 유화적’이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지금 해도 될까 안 될까 고민하던 제안을 기어이 꺼냈다.

“거듭 무례를 사과드리며······ 저번에 드린 제안은 앞으로도 유효하리란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경께서는 양 세계의 평화를 위한 교두보가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럴 능력과 위치를 지닌 분이 아니십니까?”

“그럴 의지가 있다고 한 적은 없다.”

“원한이 우선이라 주장하시려 하신다면, 그 또한 저희는 전폭적으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경과 미국은 공통의 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 역시 이미 거절했을 텐데.”

“비난받지 않을 만한 수준의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그자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려드린다든가, 뭐 그 정도로 사소한 도움을······.”

가온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 대화가 녹음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괜히 나중에 책 잡힐 발언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승낙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았을 뿐이었다.

그 소극적 반응에도 남자는 만족한 눈치였다.

“그럼 이만. 아까 말씀 드렸듯 이번 일을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을 만한 조치를 해 보이리라 약속드립니다.”

미국에서 나온 남자는 더없이 정중하게, 그러나 비굴하지 않게 허리를 숙여 절하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로 떠나갔다.

시간이 지나, 남자를 보낸 그 초강대국은 약속을 지켰다.

*******

“과연 여신께서 우리를 보우하신다!”

거절당한 지 불과 반나절 만에, 말레키스 공화국은 승리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옛 동업자를 갈아치우고 새 영업 파트너를 얻었다. 이번 파트너는 저번 동업자보다 훨씬 씀씀이가 넉넉했다.

“웬 국제기관이 제안했다더군. 맨드레이크 농업에 관한 공정무역 등록을 해줄 것이라느니, 그와 함께 말레키스 공업에 대규모 투자를 해줄 것이라느니. 그 투자는 나중에 자립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던데······”

오림이 말했는데, 그도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저 그 관대하고도 놀라운 제안을 독일이 주도하는 무슨 연합이 했단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신들은 물론 그 연합의 뒤에 증오스러운 지구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이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그러나 아스의 한 국가가 자생할 만한 도움이므로, 애써 모른 척할 것이다.

어쨌건 만성적인 가난이란 해결하기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반신이든, 천상의 진정한 신들이든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어려운 일의 해결을 위해서라면 신들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을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하겠군.”

“분명히.”

“그렇다고 교단에 대전사를 보내주십사 요청하면 곤란한데. 화로의 교단에 모든 일을 책임질 능력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번과 같은 지원을 무한정 받을 수 있을 것도 아니고.”

가온의 말에 우드엘프 오림은 당당하게도 대답했다.

“뭐, 그렇다면 대전사 대신 우리가 가야겠지? 그러다 운 좋게 크게 다치면 또 모 반신께서 납실 명분이 될 수도 있겠고.”

어이가 없어서 가온은 웃었다.

그 전우들도 덩달아 웃는 가운데, 가온이 물었다.

“원래는 어쩔 생각이었나? 지금 보니 막상 혁명을 성공시켜도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닌 것 같던데.”

“뭐, 그땐 협상을 질질 끌어야 했겠지. 사실 이번처럼 5배 인상 따위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를 대뜸 하지도 않았을 테고.”

“아, 이번엔 내가 뒷배였기에 바로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다 이거로군. 그렇다면야 오히려 일이 괜찮게 풀려서 다행인데.”

“괜찮게 풀렸을 뿐인가? 내 수십 년간 활동해왔지만 이렇게 일이 이상적으로 해결된 적은 또 없었어! 역시 우리 대장이 나서면 모든 일이 해결된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우리 활동에 새삼 관심이 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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