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엘프 오림 - [3]
“그래서 그 가온 경께선 지금 독재국가 하나 엎으셔서 바쁘시고······ 그 가온 아니라던 이쪽 가온은 그 시기에 맞추어 며칠이나 접속을 안 했다?”
“그렇다니까.”
“이쯤 되면 대놓고 난 그 가온이에요, 하는 건데?”
“그건 옛날부터 그랬고.”
“아무튼 그 양반 그리 바쁘면······ 좆됐네요. 꼬실 수가 없겠네. 혁명하시느라 바쁘신 건 알지만 다 그만두고 우리 게임 좀 도와주실 수 없나 부탁할 순 없잖아?”
이미리의 말에 강주석은 반박했다.
“아직도 꼬시려는 생각 안 버렸어요? 한국 문제는 한국인끼리 해결해야 한다니까.”
그러나 그리 말하는 강주석도 자신감이 없었다. 그 주변 모두가 그랬다.
참호 너머를 노려보는 한국인 게이머들의 눈엔 피로만이 가득하다.
며칠 전, 걱정했던 대로 보급부대가 공격당했다. 결국 차량에 쓸 기름조차 보급되지 않았으므로 비싼 차량들을 죄다 버리고 움직여야 했다.
벌써 현금 손실이 어마어마한 마당이었지만 그 사실은 당시 누구도 신경 쓸 수 없었다.
결국 모두 걸어서 행군해야 했는데, 이대로 포위되지 않으려면 며칠을 쉬지 않고 걸어야 했다.
군에서 하던 것보다도 힘겨운 행군을 거쳤다.
이 무리에는 군필은 물론 공익과 면제, 여자까지 섞여 있지만 그 시련은 모두에게 공평하게도 끔찍하게 힘겨웠다.
그 고생을 거치고도 아직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좀비 새끼들, 또 온다!”
겨우 쉬나 했더니, 카르세인들이 공격해온다. 소수로, 반복해서 여러 번.
이쪽 장비가 충실하고 더 많이 뭉쳐있는 까닭에 한두 번의 공격을 이겨내기는 어렵지 않지만, 카르세인들은 소모를 걱정하지 않고 거듭해서 공격해온다. 쉴 틈이 없다.
그 탓에 벌써 한국인들은 죽거나 지쳐 일 할 가량이 이탈했다.
언제 끝날지 모를 고생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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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보기에 가히 충격적이었던 재판이 끝난 뒤, 비로소 독재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재판관 역할이 끝난 가온 또한 단상에서 내려와 준비된 상석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독재자를 대신할 인물이 단상 위에 올랐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를 소개하자면 원래 혁명군을 이끌었던······”
기자는 환희했다.
아, 드디어.
광기에 가까운 문화충격의 시간이 지나, 드디어 몰입할 만한 상황이 왔다고 생각했다.
말레키스 혁명의 지도자. 독재자에 맞서 몇 번이고 반군을 이끌어 투쟁해왔으며 저번 반란에서 수감 되었다가 이번에 풀려난 저 노인은 이번에 새로운 국가원수로 추대되었다.
오랜 수감 세월에 몸은 비쩍 말랐으나 정신은 멀쩡한 모양이었다. 단상 위에 오른 그 노인의 눈빛엔 힘이 넘쳤다.
“······제가 여러분의 새로운 통치자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빌어 우선 선언하지요.”
기자는 이 역사적 순간을 기쁘게 바라볼 준비가 되어있었다. 독재자가 패배하고 혁명 지도자가 승리한 상황이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혁명 지도자가 말했다.
“이제 내 말이 곧 법입니다.”
기자가 눈을 크게 뜬 가운데, 사람들은 웃었다.
혁명 지도자가 계속 말했다.
“가장 먼저 세울 법을 말하자면, 이제부터 민주주의니 자유정신이니 내 나라에서 떠드는 족속은 신변의 위협을 걱정해야 할 겁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깔깔 웃는 가운데, 기자도 뒤늦게나마 덩달아 웃으며 생각했다. 새로운 지도자가 참 유머가 넘치는 모양이라고.
‘독재자를 물리치고 새로이 정권을 차지한 혁명 지도자가 권력에 취해 역으로 독재자가 되는 아이러니함을 풍자하려는 모양이지? 자기는 그리 타락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기 위해서······.’
이후로도 혁명 지도자는 계속해서 연설했다.
“반민주(反民主)를 국시로 하여, 이 땅에서 민주주의에 신음한 이들을 인자한 마음으로 돌보리라 맹세하며······”
기자는 그 연설을 처음에는 웃으며 들었지만 나중에도 그럴 수는 없었다.
특정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민주주의를 얼마나 열심히 억압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너무 많이 나왔다. 풍자라 해도 슬슬 지겨운 수준이라, 기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유머가 너무 긴데?”
기자의 혼잣말에 옆에 서 있던 누군가가 대답했다.
“유머? 저 지도자 동지는 전 왕족 출신이긴 한데, 가정환경이 좀 불운했소. 그 탓에 태어나서 농담 한마디 던져본 적 없는 친구야. 지금도 마찬가지고.”
비로소 기자가 정색했다.
마침 혁명 지도자는 왕정복고를 선언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왕이 되겠노라고 선언했다.
“나 진정한 왕이셨던 말레키스 폐하의 후손으로서······ 정당한 왕권을 되찾았음을 이 자리에서 선언하노니, 이제부터 여러분은 내게 종속된 신민이요 내 영토의 모든 땅은 곧 나의 땅이며, 여러분의 재산은 곧 나의 재산이고······”
“아, 정말로 위대하셔라.”
연설을 듣던 노파가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훔치는 가운데, 기자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혼이 나갈 것 같았다.
조금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
“저분은 독재자의 통치를 끝장내려고 자유를 되찾으려던 게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드디어 이 땅에 제대로 된 민주정권을······”
기자의 물음에 남자는 황당함을 표출했다.
“그게 뭔 소리야. 역겹고 고달픈 민주정권을 끝장내려 한 건데?”
“역겹고 고달픈 민주정권이라니요?”
“그 폐해를 봤잖나? 그 민주주의 지도자의 지배하에서 이 땅의 백성들은 억압받고 고통받았지.”
“아니, 그 독재자의 통치는 민주주의와 수천 광년 떨어진 독재였습니다! 전혀 민주주의가 아니었는데······”
그때 남자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 오해를 누가 바로잡아주겠나? 중국 공산당이 행패를 저지르긴 하지만 그건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상과는 동떨어진 결과물이라고, 진짜 공산주의는 사실 좋은 것이라 주장해봤자 지구인들은 비웃을 것과 마찬가지야.”
그 말을 들은 기자는 인터넷에 떠돌던 농담을 떠올렸다. 아스에서 민주주의란 지구에서 공산주의의 위치와 같다는 농담.
그 농담이 이따위로 진실했을 줄은 몰랐다.
기자는 더 자세한 내용을 물어보고자 방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금 놀랐다.
거기 서 있는 것은 우드엘프였다. 지구에도 유명한 그림자 엘프. 그 얼굴을 기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도 오림 경께서는 진짜 민주주의가 뭔지 아시나 보군요?”
기자의 물음에 오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뭐 지구에서 활동한 적도 있으니까. 체 게바라 그 친구가 이 광경을 봤어도 어이없어했으리란 것도 알지.”
“그렇다면 이 광경이 껄끄러우시겠군요?”
그러나 바라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글쎄? 아스 대부분 나라는 민주주의를 억지로 주입 당했고 그 부작용은 별로 민주적이지 않았다네. 다들 그놈의 사상을 지긋지긋하게 느껴. 더 발전된 정치사상이건 아니건, 아무도 반기지 않아.”
“하지만, 카르세 연방만 해도 아직도 민주정 비슷한 걸 이어나가는데요. 그건 아스인들이 나름 민주주의에 익숙해졌다는 증거가 아닌지······ 그렇지 않고서야 싫은 걸 계속할 리 없잖습니까?”
“그건 복수의 증거지.”
“복수의 증거?”
“그래, 하이엘프들이 세계수가 있었던 자리에 솟아난 마천루를 부수지 않는 이유와 같아. 맘에 들지 않는 굴욕의 증거를 계속 내버려 두는 건, 그걸 보며 원한을 잊지 않기 위함이야. 원한이 해소되어야 비로소 해체하든 말든 선택하겠지.”
“그렇다면, 복수의 전쟁이 끝나면 카르세 연방은······”
“복수를 해낸다면, 옛 원한을 더는 기억할 필요가 없다면 카르세 연방은 다시 카르세 제국이 되겠지. 참마황은 정식으로 황위에 오를 테고. 어쩌면 영원토록.”
“영원히? 아, 엘프가 되어서······”
기자는 잠시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았다. 늙어 죽지 않는, 신이 인명한 초인이 다스리는 영원한 제국.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아스인들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오림이 말했다.
“그러니 왕정으로 돌아온 저들을 퇴보했다 헐뜯지 말게. 옛 체재를 되살린 저들은 오히려 평안을 되찾은 셈이지. 이게 오히려 만족스러울 거야.”
“아무리 그래도 왕처럼 굴던 독재자가 물러난 뒤에 진짜 왕이 지배한다니? 이건 좀······”
“뭐, 왕이 정 싫어진다면 그때 가서 다시 바꿀 일이지. 아무튼 지금부터 비관할 필요는 없어. 지금은 그저 축하할 때야.”
여기까지도 경사스러운 일이었지만 사실 가장 경사스러울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그들의 새로운 왕은 그들이 바라던 약속을 내놓았다.
“······이제 그대들을 위해 무얼 할지 말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짐은 신민들이 지금 거지꼴을 면하기를 바란다······
하루하루 양식을 사기 급급한 낮은 임금, 몸이 아파 며칠 쉬어야 했다면 빚이 쌓이는 형편없는 대우! 지금까지 그대들이 받아온 모든 것은 노예와 다름없는 대접이었다! 그리고 짐의 신민들이 노예처럼 대접받아선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지구에서 온 그 기업, 마족들의 기업! 그들은 그대들의 값진 노동으로 값싸게 배를 불렸다. 이제는 아니다! 그 기업에 계약을 새로이 요구할 것이다! 그대들에게 배 이상의 대가를 지급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임금 인상! 임금 인상!”“
“다섯 배, 다섯 배는 더 받아야 한다! 그대들은 그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다! 그들은 반드시 이 정도는 주어야 할 것이다! 백작!”
반군 간부들은 제각기 근사한 작위 하나씩을 받은 마당이었다. 백작은 공손히도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그대를 임시 외교관으로 임명하니, 가서 바뀐 계약을 전하라!”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백작은 준비된 노동계약서를 가지고 행차했다. 이 나라에서 맨드레이크를 전매하는 그 기업, 모두가 원망하는 대상이지만 어쨌건 모두가 생계를 이을 돈이 나오는 그 기업의 웅장한 건물을 향해서.
한편 마지막 절차가 남아있었다.
말레키스의 새로운 왕이 엎드려 절했다.
저기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화로의 대전사를 향해서였다.
“왕권이란 모름지기 신께서 내리시는 것임을 압니다. 왕이 될 자로서 자격을 받길 원합니다. 대전사시여, 모쪼록 여신께서 제게 축복을 내려주시도록······”
왕의 요청에 가온은 기도를 올렸다.
‘뭐, 축복하실 거죠?’
‘이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그리 무게 없이 물어야겠느냐? 물론 대답을 내리자면, 네 여신은 기꺼이 그러리라.’
여신의 대답을 들은 가온은 조용히, 그러나 모두에게 들릴 목소리로 선언했다.
“여신의 권한을 빌어, 그대들을 축복한다.”
이때 가온은 그저 담담하게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화로의 대전사께 영광을! 화로의 여신께 영광을―!”“
그러나 그 순간 사람들이 터뜨린 환호에 기자는 귀가 얼얼해졌다. 그는 살아생전 이토록 열광적인 분위기를 또 본 적이 없다.
기자는 새삼 저 엘프와 아스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원래라면 그들이 이루어내야 했을 혁명, 그 역사적 위업을 홀로 이룩해버린 초인을 진심으로 반기는 저들.
왜 그럴 수 있는지 이제는 알겠다.
저들 아스인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지 않는다. 지구인들과 같은 감성을 공유하지 않는다. 초인 하나가 모두의 운명을 결정하는 상황에 거부감이 없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그 사실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고난의 세월이 지나 신들이 그들을 보살폈노라고, 신들이 위대한 대전사를 보내 그들을 도왔다고 믿으며 위안을 얻고 있다.
‘이미 잔뜩 늘어났던 화로의 신도가 이번 일로 더욱 늘어나겠군. 그런데 만약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지구인들은 슈퍼맨이 강림해 불평등한 사회를 뜯어고치겠노라 여기저기 들쑤시면 인간의 자유의지니 뭐니 떠들면서 반감을 품겠지만, 아스인들은 아냐. 신과 초인의 존재에 익숙한 저들은······’
기자가 새삼 그 의미를 고심하는 가운데, 역시나 이 자리에 모인 아스인들은 이 상황을 그 정도로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행차를 끝으로 열광적이었던 대회는 끝났다.
기자는 오늘 본 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지구인들이 덜 황당해할지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워낙에 비정상적인 장면들의 향연이었지 않은가.
그리 고민하다 말고 퍼뜩 놀랐다.
재의 왕자, 가온이 여기 오고 있었다.
물론 이 기자를 보러 온 것은 아니었다. 가온은 자기 친구 오림에게 다가오더니 물었다.
“의외로 그 기업과의 관계는 끊지 않으려는 모양이군? 자네들은 그네들부터 타도하려 할 줄 알았는데.”
“심정적으로는 그러고 싶은데 뭐, 그렇다고 당장 모조리 내쫓을 수 있나? 어쨌건 이 나라 사람들이 당장 가꾼 건 다 맨드레이크밭인데. 당장엔 그걸 팔아야 먹고살 것 아닌가. 그러지 않으면 죄다 일자리를 잃고 굶어 죽을 테니까.”
“체질개선을 하겠다고 당장 유일한 식량인 패스트푸드를 끊을 순 없다 이거지.”
“자네 패스트푸드도 아나? 아무튼 맞아. 언젠가는 차차 관계를 끊어야겠지만 지금은 못 그러지. 당분간은 불편한 공존을 해야 해.”
“뭐, 알아서들 할 일이지. 내가 더 간섭할 건 없으니.”
“그리 말하는 것치곤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 같은데? 재판관을 자처한 것도 그래. 평소 같으면 이렇게 나서지 않았을 텐데.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그야 뭐······.”
기자에게 저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엘프인 그들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탓이다.
그래도 그 표정은 알아볼 수 있다.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있던 재의 왕자의 얼굴, 그 얼굴에 지금 감정이 보인다. 저 엘프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었단 사실에 기자는 놀란다.
한편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해산했다. 정통한 왕이 돌아왔으며 신의 축복까지 받은 지금, 모두가 보기에 이대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백작이 가지고 온 협상 결과에 혁명 정부는 충격을 받았다.
예의 다국적 기업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 다국적 기업이 신정부와의 새로운 계약을 거부한 것이다.
“놈들이 철수를 선언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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