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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4판타지-110화 (110/135)

그림자 엘프 오림 - [2]

대대 병력이 이미 제압되었다 못해 온몸으로 복종을 표시하는 상황이라니?

원래라면 고엽제를 맞아가며 며칠 밤낮을 싸워야 했을 적들, 그 적들은 지금 더워서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이쪽에 엎드려 절하고들 있었다.

“이건 정말······”

우드엘프와 반군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몸 둘 바를 내지 못하면서 숲을 빠져 나왔다.

그 뒤에야 가온은 화염의 벽을 거두었는데, 그로부터 한참 뒤에도 병사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한 방향으로 엎드린 채 경의를 보냈을 뿐이다.

반군이 엎드린 병사들을 포박하는 가운데, 오림이 말했다.

“이걸 단순히 구조라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아무튼 구조해줘서 정말 고맙네. 매번 신세를 지는군.”

가온은 허 하고 웃었다.

“매번 신세를 졌다니? 이번에야 겨우 나선 매정한 놈이니 치켜세울 것 없네. 그동안은 왜 그러지 않았느냐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물론 아니지. 내 어찌 그러겠나? 아무튼 이미 도움받은 마당에 더 신세 지자면······ 모두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때까지만 좀 같이 있어줄 수 있겠나? 감히 재의 왕자와 함께하는데 공격해오진 못할 테니까.”

오림의 부탁에 가온이 물었다.

“피신할 때까지만 같이 있으라니, 왜?”

“구조는 끝났으니 떠나야 할 것 아닌가.”

그 말에 가온은 조금 생각해보고는 말했다.

“아니, 떠나지 않겠네.”

“그럼 끝까지 함께하기라도 하겠단 말인가?”

오림이 놀라는 가운데, 가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번 기회에 경고를 해두고 싶네.”

“경고?”

“내 전우들을 해치려 했다간 현재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리란 경고. 그 경고를 마친 뒤에야 떠나기로 하지. 어차피 경고하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니? 지금 그들이 하려는 것은 국가전복인데?

오림은 그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 일인지 설명하려다 말았다.

떨어져 지낸 세월이 길어 잠시 잊었던 것들을 새삼 떠올렸다.

이 친구는 혼자서 병력 다수를 능가하는 초인이며, 그것도 고대의 신과도 싸웠던 반신이었다.

그런 존재가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장담한다면, 실제로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노력해야 가능한 일인지는 상관없이.

“그래서, 먼저 점령해야 할 시설이 있나?”

가온의 물음에 오림이 대답했다.

“그야 여럿 있지. 위치도 알고.”

“어딘가?”

이후의 일은 지나칠 정도로 일사천리였다.

지정된 장소를 들은 가온은 텔레포트했다. 다른 엘프들을 데리고서, 물리적인 거리를 마구 좁혀버렸다.

이론상 텔레포트는 특수부대원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동수단이다. 텔레포트가 가능한 특수부대원이 거의 없어 일반적인 전술에는 사용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것은 가장 강력한 텔레포터와 특수전 요원들이었다.

이 위대한 텔레포터는 우드엘프들을 각 중요시설에 옮기고 옮겼다. 그리고 옮겨진 우드엘프들은 당도한 시설을 순식간에 점령했는데, 제일 먼저 점령된 시설들은 핵 발사 명령이 경유 될 통신시설들이었다.

그다음에는 공항과 비행장을 점령했고, 그다음에는 고속도로와 차원문 터미널을 점령했으며, 마지막으로는 따로 추궁하여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된 미사일 기지를 점령했다.

이때 우드엘프들은 경비병력과 총격전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중요시설에서 근무할 만큼 거기 있는 간부들은 다들 상황파악이 되는 자들이었다.

재의 왕자가 몸소 출두한 상황에 어찌 처신해야 하는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들 있었다.

“전하, 몸소 행차해주시어 영광입니다! 이 흐리멍텅한 눈에 고귀한 분을 담게 되어 얼마나 기쁜 일인지. 화로의 여신께 영광 있으라······”

그런 식으로 점령을 거듭하여, 모든 도주수단과 최후의 발악 시도마저 봉쇄하기까지는 불과 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제 최종보스만 때려잡으면 되겠군. 생각한 것과 달리 비장함은 없겠지만.”

오림은 다른 반군을 이끌고서 마지막 장소에 향했다.

혁명의 최종목적지, 대통령궁으로.

그로부터 불과 오 분 만에, 재의 왕자가 공화국에 발 디딘 이후로는 불과 삼십사 분 만에 말레키스 대통령궁은 점령되었다.

지구에서 어떨지는 모르지만, 아스에서 한 정권이 전복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으로는 최단기록이 분명했다.

*******

대통령은 장갑차를 타고 탈출을 시도했다.

멀리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기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십여 분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대통령을 잡기 위해 요란한 수색작전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장갑차라 죽어라 달리던 그때, 가온이 텔레포트하여 차 앞에 나타났다. 좁은 범위에 권능을 퍼뜨렸다.

“뭔······ 아.”

시동이 꺼진 장갑차에서 나온 대통령은 가온을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상황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대통령은 한숨 쉬더니, 비굴하지 않을 정도로만 공손하게 인사했다.

“위명 높으신 화로의 대전사께서 왕림해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을 텐데요.”

저쪽이 먼저 예를 갖췄으므로 가온 또한 정중히 대답했다. 화풀이하러 온 마당이지만 화풀이하면서 굳이 열을 낼 필요는 없는 법이다.

“괜찮다, 대통령. 연회는 다른 자들이 준비하고 있으니.”

결국 순순히 잡혀 온 대통령은 수감 되었으며, 그것으로 끝이었다.

불과 이틀 만에 대통령의 몰락은 말레키스의 모든 이들에게 전해졌다.

다음 날, 새로 들어선 혁명 정권은 전 독재자를 공개적으로 심판하기로 했다.

전 독재자의 최후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 역사적 순간에 지구인도 빠질 수는 없었다. 독일 출신 종군기자 한 명도 부랴부랴 참관했다.

‘대체 뭐가 죄다 이리 빨라······’

이 기자로서는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었다.

얼마 전에 반군이 포위되어 독재자가 기어이 승리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더니, 그로부터 불과 사십 분쯤 뒤에 반군이 승리하고 독재자가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거기에서 불과 며칠 지난 지금은 기어이 새 정권이 들어서게 생겼다.

역사의 흐름에 제트모터를 달아놓은 듯한 이 전개를 기자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지구인들에게는 충분히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정말 충격적인 일은 현장에서 일어났다.

기자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눈에 들어온 장면이란 다음과 같았다.

‘가온, 정말 저기에······’

이 자리의 모두가 한 방향에 절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회색 엘프를 향해 모두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 엘프는 지금 이 자리에 참관인이자 재판관으로 존재했다.

전 독재자의 심판을 저 회색 엘프가 맡게 된 것이다.

지구에서 온 기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혁명을 혼자 성공시켜 버렸다지만 어쨌건 이 일과는 그리 관련이 없었던 인물 아닌가. 그런 인물에게 대체 왜 그런 역할을 맡기느냔 말이다······.

기자가 이 상황을 이해하든 말든, 재판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포박되어 끌려온 대통령은 피고석에 섰다.

당연히도 이 재판은 제대로 된 재판이 아니었으므로, 대통령을 위한 변호사조차 붙어있지 않았다.

대통령은 자신을 스스로 변호해야 했다.

“존경하는 화로의 대전사시여. 당신께 제 억울함을 고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가 억울하다고 생각해주지 않았다.

“뒤져라, 씨발놈!”

“애미 없는 새끼, 너랑 네 마누라 창자를······”

사람들이 야유하는 가운데, 재판관은 이 자리의 소란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가온이 한쪽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 자리의 모두에게 말했다.

“정숙하라.”

기자가 보기에 또다시 믿을 수 없게도, 사람들은 정숙했다. 그러니까 명령 한 마디로, 증오하는 전 독재자가 자신을 변호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소리였다.

덕분에 대통령은 차분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고할 수 있었다.

“제가 참으로 인기 없는 지도자였긴 합니다. 대통령 선거권을 제가 월급 주는 군인들한테만 준 것은 조금 비겁한 짓이었음을 인정합니다. 그 일을 비롯한 여러 조치로 말미암아 국민들이 절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싫어한다 하여 지도자가 무조건 내려와야겠습니까?”

기자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생각했다.

‘당연하지.’

그러나 재판관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온이 말했다.

“그야 아니겠지. 주어진 통치권은 신성한 법이니. 민중의 뜻과는 별개로, 통치할 권리가 있다.”

기자가 기겁하는 가운데, 대통령은 외쳤다.

“그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런데 대전사께서는 기어이 불쑥 찾아와서는 제 권리를 거두시다니요? 이건 참으로 부당하며 무례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온은 어조 없이 대답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난 그대 국민들의 뜻에 따라 자네 권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다. 그대가 내 친우들을 해치려 하기에 막았을 뿐이지.”

“정당방위였습니다! 모름지기 반란은 사악한 일입니다. 그것을 진압하는 것은 제 권리였습니다. 제가 잠자코 있어야겠습니까?”

“내 친우들도 명분을 가지고 반란했던데. 그대가 지구 서방과 제휴했다더군. 지구 제국주의에 협조하고자, 이 나라를 착취한다고 했다. 이 혐의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나?”

그림자 엘프들이 이번 혁명에 끼어든 이유였다.

대통령은 그에 대한 변명을 미리 준비해두었다.

“아······ 예, 제가 왜 친우 분들께 밉보였는지는 알겠습니다. 지구 기업에 의지하는 국가운영이란 확실히 보기 좋은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제가 손잡은 기업은 독일의 기업으로, 대전쟁에서 결국엔 우리 편을 든 ‘덜 사악한’ 마족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고려해주십시오.”

“그래서 그대는 아스의 배신자가 아니란 말인가.”

“예! 그 증거로, 전 심지어 지구에 대한 복수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가 참마황 폐하께서 판매하시는 전쟁채권을 얼마나 구매했는지 아십니까? 제가 마족들에게 판 맨드레이크들은 곧 놈들을 향한 무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어느 교단도 절 파문한 적이 없습니다. 천상의 신들께서도 제 통치방식을 용납하신 게 분명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가온은 그 주장을 곰곰 생각해보려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모두가 애타게 바라보는 가운데,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그 입이 열렸다.

“그래, 참으로 애매한 문제로 보이는군. 쉬이 판단하기 어려워.”

지금 가온은 판단을 유예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얼굴에 희망이 떠오르던 그때, 가온이 이어서 말했다.

“이런 애매한 상황에 적용하기 좋은 관습이 있다.”

그 순간, 전 대통령은 반색하다 말았다.

“좋은 관습이라면, 혹시?”

짐작이 맞을 것이라는 양, 가온은 담담히 선언했다.

“그래, 결투로 결정하지. 그대 통치자로서의 자격을.”

“결투라면 누구와······”

“당연히 재판관이자 이 상황을 주도한 장본인인 나와의 결투다. 참으로 공정한 판단 방법으로 여겨지는데, 아닌가?”

공정? 소드마스터와의 결투가?

양심이 없나?

기자가 입을 쩍 벌리던 그때였다.

대통령은 체념한 듯 눈을 감더니, 기자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었던 그 제안을 승낙했다.

“예, 결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반쯤 돌아버릴 것 같았던 기자는 멍하니 생각했다. 전 대통령이 사실은 검술에 조예가 있었던가? 소드마스터와도 겨룰 엄두가 날 만큼?

당연히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결투가 이루어졌는데, 전 대통령은 검술 실력은커녕 운동부족만 증명했다.

결투 상대방인 가온은 가만히 서 있지만 알아서 패배했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온이 검기도 두르지 않은 칼을 살짝 휘두르자 검을 놓쳤으며 바로 항복했다.

“제가 졌습니다.”

기자가 어이없어하던 그때였다.

가온은 이 모든 것이 우습지 않은지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다.

“정정당당한 승부였음을 인정하나?”

“예, 그렇듯 명예롭게 싸운 패자를 욕보이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그대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기자는 그제야 지금 결투의 관습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강자에게 지나칠 정도로 유리한 관습이긴 하지만 사실 약자에게도 관대한 관습이다. 결투의 패배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는 대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순간 독재자의 망명이 결정된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기자는 폭동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십 년째 독재하며 국민들을 괴롭히다 기어이 사로잡히기까지 한 저 독재자가, 처벌을 받기는커녕 가족들과 함께 재산까지 챙겨서 무사히 떠나게 되었다니? 그게 용납될 리가 없다!

그러나 기자의 걱정과 달리, 분노한 민중의 폭동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그들은 그저 얌전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참으로 자비로우시도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더 나아가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이 상황에 기자는 계속해서 놀랐다.

아무리 저 반신 소드마스터가 무서워도 그렇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있나?

심지어 그 친구들인 그림자 엘프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완벽하다는 듯 웃으며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자는 이 황당한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애썼다.

‘하기야······ 저들로서는 저 반신의 결정이 아무리 맘에 안 들어도 반대할 수 없겠군. 이 혁명은 저 반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성사시켜준 것이니까. 당사자들에겐 아무런 발언권이 없다고 느끼는 모양이야.’

그러나 잠시 후, 기자는 그 추측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기자가 원래 생각했기로, 웬 반신이 와서 혁명을 성공시켜준 이 상황은 혁명의 당사자들에게 순수하게 반길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 해낸 일이 없다면 뭔가 주장할 권리도 사라지는 법.

다들 그리 생각했기에 이 상황을 분하게 여기면서도 잠자코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사실은 그들의 운명이 저 반신에게 넘어간 이 상황에 내심 한탄하고 있으리라 추측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지금 이 상황에 감동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부심까지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기자는 바로 잠시 후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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