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109화 (109/135)

그림자 엘프 오림 - [1]

아스의 대기와 토양에는 마나가 흐른다.

그 마나를 흡수하여, 아스의 동식물은 성장 과정에서 체내에 마나를 축적한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체내 마나 함량을 보이는 생물은 맨드레이크다.

대기와 토양 모두에서 마나를 흡수해 뿌리에 저장하는 마법 식물, 맨드레이크. 이 식물을 가공한 엑기스는 장복하기만 해도 일정량의 마나 축적을 보장하는 영약이다.

아스의 입장에는 이보다 뛰어난 수출 상품이 따로 없다. 마나가 없는 지구에서는 그 종자를 가져가더라도 맨드레이크를 키울 수가 없으니,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이 와중에 지구에서는 언제나 마법을 쓰고 싶어 하는 부자들이 넘친다.

덕분에 맨드레이크는 꽤 비싼 값에, 키우는 족족 팔 수 있는 인기 상품이다.

아스의 농부들로서는 쌀과 밀 따위를 키우느니보다 맨드레이크를 키워 팔아 그 돈으로 지구에서 식량을 사 오는 것이 훨씬 나았다.

자연스러운 경제 논리로, 대전쟁 이후 아스의 많은 국가들은 국가 경제를 맨드레이크 수출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맨드레이크 공화국’이란 단어는 이런 배경에서 생겨났다. 전 국토를 맨드레이크밭으로 만든 바람에 지구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뿐만 아니라 식량 수입조차 의존하는 국가들에 대한 멸칭이다.

말레키스 공화국도 전형적인 맨드레이크 공화국 중 하나다. 모든 경제활동이 지구 서방에 종속된 나라.

말레키스의 대통령은 이 불안정한 경제 구조를 개선할 생각이 없다.

현 대통령은 이런 나라의 국가원수들이 흔히 그렇듯 독재자요, 독일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의 후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그리하여 지금 대통령의 역할은 그놈의 다국적 기업에 맨드레이크를 싼값에 공급하고 그 대가로 돈과 탄약을 넉넉히 챙겨 받는 것이지, 민생안정이나 복지실현 따위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싼값에 상품을 생산하려면 최대한 저임금을 유지해야 하는 법이라, 대통령은 의도적으로 몇 가지 노동규약을 무시했다.

그 사실이 불만분자들에게는 심히 좋지 않게 보인 모양이었다.

봉기와 반란. 현 대통령의 십사 년 재임 중 반군은 일곱 번이나 발생했다.

그 모든 반군을 대통령은 쉽게도 때려잡았지만, 이번에 발생한 반군은 유독 끈질겼다. 오합지졸에 불과했을 그 반군에는 이번에 구심점이 생겼다.

숲에서 살다 온 웬 귀쟁이들이 반군에 합류해버린 것이다.

그림자 엘프. 그 숲속 귀쟁이들은 일찍이 자기네가 구해냈기로 유명한 체 게바라를 본보기로 삼은 모양이었다.

수십 년 전부터 그림자 엘프들은 그 혁명가가 하던 짓을 똑같이 따라 했다. 자기네와 관련 없는 나라에 침투해서는 같이 투쟁하기.

대통령의 측근들은 이 체 게바라 짝퉁 귀쟁이들을 진짜 체 게바라보다도 더욱 경계했다.

“놈들을 상대할 때는 아주 조심하셔야 하는 게, 그 엘프들은 가온 경의 전우로 유명한······”

“그러니까 그 귀쟁이들 다치게 하면 가온 경께서 텔레포트 해올 것이다 이건가?”

“어쩌면······”

측근의 경고에 대통령은 코웃음 쳤다.

“별 걸 다 걱정하는군. 재의 왕자씩이나 돼서 여기까지 왜 오나? 제 친구들을 그리 챙겼다면 진작 놈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어야 했을 텐데, 그러지도 않잖나.”

그 유명한 회색 엘프가 요새 유독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조심해야 할지 모른다는 경고도 별로 와닿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놈의 회색 귀쟁이가 겁난들 그 조무래기 친구들한테도 겁먹어야 하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대통령은 그놈의 귀쟁이들 또한 그동안 때려잡아 온 반군들과 똑같이 대우했다. 그러니까 강경하게.

놈들이 자리 잡은 마을에 군대를 보내고, 보내고, 또 보냈다.

재임 기간 내내 반군을 때려잡은 솜씨는 어디 가지 않았다. 투쟁 끝에 기어이 대통령이 승리했으니, 얼마 전 그놈의 귀쟁이들과 반군이 숨은 숲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하여 오늘 오후, 신속히 군대를 보내 놈들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제아무리 게릴라의 귀재인 그림자 엘프라 할지라도, 완벽히 포위된 마당에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완벽한 체크메이트. 대통령은 추후 보고를 기다렸다. 지금쯤이면 놈들이 잠복한 숲에다 고엽제를 뿌리고 있을 터였다.

“긴급상황입니다! 놈들을 지원하러······”

그 와중 들려온 보고에 대통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원병력이 도착했단 말이지. 몇 명이나?”

“한 명입니다. 그런데······”

“한 명? 혹시 소드마스터가 온 건가?”

“예, 그런데······”

뒷말을 듣지 않고 대통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친 귀쟁이들, 이쪽은 핵이 있는데 어찌 감히? 숲귀쟁이 놈들도 그걸 걱정하는 줄 알았는데 소드마스터를 보내? 이거 서로 막 나가자는······”

“그게, 우드엘프 마스터가 아닙니다!”

“그럼 참마황이 왔다고? 그건 더 말이 안 되잖나. 우리가 사들인 전쟁채권이 얼만데, 게다가 대통령씩이나 돼서 직접 올 리가······”

“그도 아니라······”

“설마 가온은 아니겠고, 그럼······.”

더 보고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측근은 입을 다물었다. 그 눈만 마구 떨었을 뿐이다.

그제야 대통령은 현실부정을 멈추었다.

“가온이 맞나?”

“예······.”

측근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머릿속도 표백되었다.

“맙소사.”

이 와중에 무얼 하라는 지시 따위는 내릴 수 없었다.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맙소사.”

*******

반군의 숲을 둘러싼 채, 숲에서 나오는 모든 것에 총을 쏴갈기던 병사들은 모든 총이 일제히 작동을 멈추자 당황했다.

멍청한 누군가는 때아닌 습기 탓을 하던 그때였다. 눈치 좋은 한 병사가 외쳤다.

“숲 귀쟁이들이······ 궁극기 썼다!”

놀라울 만치 예리한 상황파악이었지만, 그 외침은 소란에 묻혀 주목받지 못했다. 다른 병사들에겐 불운하게도 .

*******

숲에 고엽제를 살포하던 복엽기가 비행을 멈추고 추락했다. 비행기가 추락한 그 자리에서는 별다른 화학반응 없이 낙엽만 마구 흩날렸다.

군용트럭은 갑작스럽게 연료가 바닥난 것처럼 엔진이 멈추었고, 혹시 몰라 던져본 수류탄은 안전핀이 뽑혔음에도 폭발하지 않았다.

다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채면서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 역사적 엘프란, 말 그대로 역사적 존재였다. 평생 현실에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존재.

“뭐야, 대체······”

한편 텔레포트한 가온은 행동에 나서기 전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모든 감각을 발휘했다.

반신 엘프로서의 가공할 청각, 소드마스터로서의 초인적으로 예민한 감각이 어우러진다.

이 순간, 가온은 약 이 킬로미터 반경에 일어나는 모든 소리를 붙잡을 수 있다.

그 귀가, 신경이 그 주변 모든 대화와 발소리를 모조리 포착한다.

수십 초 뒤, 가온은 여기 있는 병사들의 수와 위치 그리고 각자의 역할까지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온은 파악이 끝난 전장을 가로질렀다.

투명화는커녕 폴리모프조차 하지 않고 천천히, 병사들 앞에 걸어갔다.

“저······”

일부러 뛰지 않고 걷는 것은 평소라면 왕족의 체통을 지키고 위엄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우들의 목숨이 걸린 지금은 그런 느긋한 이유가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을 이 자리의 모두에게 보이기 위한 느릿함.

의도대로, 주변 모두가 천천히 걷는 이 회색 엘프를 바라보았다.

“가온······ 경?”

병사들, 지휘관들의 시선이 그 한몸에 쏠렸다. 중대 규모의 시선이 모조리 이 회색 엘프 한 명에게 못 박힌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관심 집중이 가온으로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아직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가온은 여기 모인 모든 병력을 최대한 빠르게 통제하길 원한다.

“여긴 왜?”

이 엘프가 누구인지는 알아도 여기 온 목적은 몰라 어리둥절한 병사들과 달리, 장교들은 들은 바가 많았다. 그들은 저 숲속의 우드엘프들과 여기 출현한 재의 왕자 간의 관계를 완전히 파악한 눈치였다.

“안 돼······”

소령 하나가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뒤돌아서서 부리나케 달아나려 했다.

그러다 눈앞에 있는 가온을 보고서 기겁하여 주저앉았다.

가온은 위아래 턱을 딱딱 부딪치는 소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물었다.

“날 모르나.”

가온은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소령은 그러지 못했다. 무슨 의무감에 넘치는 것처럼 마구 외쳐댔다.

“압니다! 압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나.”

“예! 예!”

소령은 이 엘프가 제 상관인 양 굴기 시작했다.

자기 무전기를 들더니, 모두에게 닦달하듯 지시를 내렸다.

“모두 엎드려라! 어서들 예를 표해!”

자그마치 지휘관 명령이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하나둘씩 허리를 숙이던 그때, 당연히도 모두가 복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 새끼가 우리 대대장님을······”

유독 충성심이 높았던, 그러나 이 엘프를 몰라볼 정도로 멍청했던 병사 하나가 감히 지휘관을 제압한 귀쟁이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화약이 작동하지 않는 지금은 무의미한 행동이지만, 가온은 그런 헛짓거리마저 넘길 생각이 없다.

마침 주변 병사가 허리에 대검을 차고 있었다. 가온은 그 대검을 허락 없이 빌리고서 감히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병사에게 던졌는데, 모두가 지켜보는 마당이었지만 아무도 그 일련의 동작을 파악하지 못했다.

공기를 가르는 대검의 비행은 그저 한순간의 번쩍임일 뿐이었다.

가온은 일부러 느긋하게 움직였을 뿐, 미리 헤이스트 주문까지 걸어두었다. 가뜩이나 엘프 반신답게 초인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가장 빠른 가온이다.

예의 주문까지 걸리면 평범한 사람들은 그 동작을 육안으로 볼 수 없다.

“억······”

그리고 당연히, 여기 있는 병사며 지휘관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병사 하나가 총을 들기 무섭게 그 손목에 대검이 꽂힌 결과뿐이었다.

“씨발······”

가온은 아파서 꺽꺽거리는 병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듣기 싫으면 듣지 말라는 양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그러나 절묘하게 모두의 귀에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움직이지도 말고.”

주변 반응은 지시에 완벽히 부합했다.

좌중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가온은 그들이 이후로도 움직이지 않기를 바랐다.

빠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마법 주문.

허공에서 불 회오리가 피어오르더니, 가온의 눈짓에 이끌려 조종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여기저기 퍼져나간 화염은 벽이 되어 병사들을 둘러쌌다.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입속으로 더운 공기가 빨려 들어갔다.

그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화염의 벽은 번지거나 하지 않고 완벽하게 그 자리에서 계속 타오르기만 했다.

그렇다고 안심하지는 못했다. 최대한 불에서 멀어지기 위해, 다들 중심부로 몰려들어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렇게 병사들을 이 자리에 봉인한 뒤, 가온은 뒤돌아서서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놀랍게도, 아직 전의가 남아있는 용사가 한 명 남아있었다.

분노에 가득 차 소총을 들어 올리는 병사 하나.

“야, 괜―”

가온은 그 콧소리만으로도 놈이 오크임을 알 수 있었다. 종족을 보니 이 나라 국민은 아닐 테고, 고용된 용병일 것이다.

멍청한 오크이므로, 불이 타오르는 상황을 보고 연소반응을 제거하는 권능이 지금 발휘되지 않고 있음을 눈치챈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저 분노에 가득 찬 오크에게는 대단한 생각 따윈 없었다. 당장 굴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가온의 등을 쏘았다.

이 치명적인 기습에 가온은 짜증만을 느꼈다.

웬만하면 살려두었으련만, 지금은 헛짓거리하지 말도록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그 오크는 명예롭지 않게도 등에다 총을 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한 짓 하지 말고 얌전, 억. 엄마······”

주변 병사들이 숨을 삼켰다.

총성이 울린 그때, 마치 총알이 거꾸로 발사된 것처럼, 오크는 자기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걸어가던 회색 엘프가 미리 주워두었던 총알을 손가락으로 튕겼음을, 그 손가락의 힘이 화약의 힘 못지않았음을 알아챌 방법은 없었다.

여전히 인과관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결과만이 보일 뿐이었다.

신이 하는 일은 으레 그렇듯이, 그저 그가 바란 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체 한 구가 생겨난 이후로는 숨소리만이 울렸다.

이제 총이 발사된다는 것을 확인한 마당이지만 아무도 방아쇠에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 그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가뜩이나 총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마당이었다.

병사들은 쓸모도 없는 총 따윈 던져버린 채, 열기에 땀을 줄줄 흘리며 숲속으로 사라지는 엘프를 바라보았다.

그 엘프를 저지할 생각 따윈 이제 누구도 하지 않았다. 그밖에 어떤 행동도······.

아니, 아니었다. 한 병사가 몸을 움직였는데, 공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신이시여, 제 기도를······”

멀어지는 반신을 향해, 한 병사가 절을 올렸다. 화로의 신도였던 모양이다.

그러자 다른 병사들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방금 그 병사를 따라 했다.

모두가 멀어져가는 엘프를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화로의 신도가 아닌 병사들조차도, 그 등에 극진한 예를 표했다.

지금 그들의 눈에 보이는 저 엘프의 존재란 단순한 초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의 존재를 언제나 가까이 여기는 여기 아스인들에게, 저 반신의 존재란 신의 화신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한편 숲속에 들어간 가온은 만나려던 전우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자네? 가온?”

우드엘프 오림을 본 가온은 그제야 웃었다.

“왜, 나 말고 다른 회색 엘프가 또 있기에 헷갈리나? 모쪼록 그랬으면 좋겠는데.”

오림은 그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여기 오지 말랬는데!”

“안 올 수가 있나.”

담담한 말, 오림은 한숨 쉬었다.

“그래서, 바깥은? 여기 포위한 놈들이 자넨 그냥 들여보내 주던가? 그러라고 허락해줬어?”

“내가 왜 저들의 허락이 필요하겠나?”

“아, 그래. 하기야 재의 왕자씩이나 되니······”

“허락이 필요 없긴 자네들도 마찬가지야. 이만 나가지.”

잠시 후, 숲을 나온 그림자 엘프들은 기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