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17 길드장 강주석 - [2]
가온을 만난 아타락시아는 싱긋 웃더니, 가온으로서는 반갑지 않은 화제를 대뜸 꺼냈다.
“이번 일 또한 인상 깊었소. 가온 경께서 나서신 이번 일 말이오.”
자기가 가온 경을 흠모하는 엘프란 설정도 잊고, 가온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결국 결투는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요 뭘.”
“그래도 참마황과 결투하려 결심했던 것이 어디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화로 대전사의 이번 결정은 참으로 인상 깊었던 모양이오. 이번에 보니 화로 여신의 신도가 대폭 늘었더군. 이제 아스인 중에서 화로의 신자는 40%를 넘겼어. 온 아스인 중 4% 이상이 이번 일로 화로의 신도로 개종한 덕분이야.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 아니오?”
원래라면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겠지만, 지금 가온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뭐, 병역 기피자들이겠지요. 평화의 신앙을 핑계 삼아 전쟁이 벌어지면 집에 남아있으려는 자들 말입니다. 전쟁이 끝나서 평화가 별로 달콤한 가치로 여겨지지 않게 되면 다시 원래 종교로 개종할 게 분명한 비겁자들입니다. 진정한 신도가 아니니까 순수하게 반길 수 없어요.”
“아니, 내 보기엔 개종자가 나온 것부터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오. 대전사가 신도들을 주변의 핍박에서 보호하리란 의지를 보여줬기에 다들 비겁자라 욕을 먹으면서도 개종할 엄두가 났던 것 아니겠소? 다시 말하지만 참으로 긍정적인 일이오.”
“긍정적인 일이긴······.”
“물론 아쉬운 점이 있기는 하오. 화로의 대전사가 기어이 참마황과의 결투에서 승리했다면 그거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일이었을 테니. 그로써 화로의 대전사가 전쟁광 참마황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증명했을 경우, 화로의 신도는 이번에 늘어난 것보다 훨씬 더 늘어났을지도 테지. 만약 그랬다면······”
가온은 벌써 한숨 쉬고 싶은 것을 참았다.
대전사의 의무를 강조하고 칭송하는 걸 보니 이번에 또 부른 이유는 알 만했다.
“또 평화 어쩌고 하는 제안을 하려는 모양이군요. 이미 거절한 제안을. 실례지만 미리 거절해도 되겠습니까?”
냉정한 반응에 아타락시아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떨떠름하게 말했다.
“뭐······ 이미 거절당한 마당에, 거창한 걸 바라진 않겠소. 원래 제안보다는 훨씬 소박한 걸 해주길 바라서 여기 불렀지.”
“훨씬 소박한 거라. 뭡니까?”
“내 부탁은 이거요······ 게임 속 한국인들을 돕지 않겠소?”
전혀 예상 밖의 제안, 가온은 황당했다.
보아하니 이 드래곤도 자신을 그 가온으로 짐작하는 모양인데. 그러면서도 기껏 하는 제안이 그놈의 게임이란 말인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재의 왕자에게 게임 속 용병 노릇이나 해달라고 부탁하는 상황이라니? 미국 대통령에게 정치 사이트에서 자길 지지하는 댓글을 달아달라 부탁하는 셈 아닌가.
격에 맞지 않는 그따위 부탁을 하는 것은 아마 그 부탁의 효과가 대단히 뛰어나리란 기대가 있어서일 것이다.
‘하여간 죄다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빠져선······’
가온은 이번에는 기어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왜, 그러면 정말 참마황을 늙어 죽게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 겁니까?”
“아니라고 생각하시나?”
“당연히. 여신께 합의 없이 맹세코. 게임에서 뭘 어쩌든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여신께 제대로 맹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타락시아는 흘려듣는 눈치였다.
“뭐,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소? 아무튼 내 부탁은 말했으니, 이제 내가 뭘 줄 수 있는지 말할 차례로군.”
가온은 거절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하리라 했던가?
이번에야말로 캐릭터 성별제안을 기어이 풀어주려는 것인가 기대했지만, 당연히도 아니었다.
아타락시아가 말했다.
“실제론 어떨지 모르지만······ 가온 경께서 품은 복수심은 시간이 흘러 상당히 가라앉았다는 게 정설이지. 후긴에 내린 저주는 거두었겠다, 영국과 프랑스엔 아직 복수한 적조차 없잖소? 그러나 하고, 그자에게만은 여전히 복수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봤소.”
가온은 굳이 불쾌한 티를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직접 일을 저지른 인물들은 죄다 죽고 없는 특정 국가들과 달리, 하고는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겠지. 옛 원한에 관련된 불특정 다수는 용서하더라도, 일을 저지른 장본인만은 결코 넘길 수 없을 거요.”
“그래서, 지금 그 얘기는 왜 꺼내시는 겁니까?”
“일을 저지른 장본인, 가온 경의 원수가 하나 더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요.”
가온의 몸이 굳었다.
“누구?”
이어진 아타락시아의 말에 가온은 눈을 크게 떴다.
“대마법사.”
*******
약 백 년 전, 대마법사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양쪽으로 통하는 문을.
문에서 넘어온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아스인들의 재앙이 되었다. 온갖 패배와 굴욕, 침탈과 전쟁에 수십 년 동안 고통받은 아스인들은 대마법사란 명예로웠던 칭호마저 저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마법사 씹새. 하여간 왜 그 지랄을 해가지고, 이딴 사태를 만들어······”
한국인 게이머들이 게임 속 아린 벌판의 끝자락에 또다시 발 디딘 지금, 그놈의 문이 저 멀리에 보였다.
지평선 너머에서도 보이는 거대한 대차원문.
저것이 어찌나 거대한지, 일찍이 저 문을 통해 군대까지 넘어올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거대한 문이 한국에도 생긴 마당이었다. 그 문을 넘어 침략자들이 군홧발로 고향을 짓밟을지 모를 지금, 게이머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행군했다.
언젠가는 현실에서 직접 싸우게 될지도 모를, 아스인들이 도사리는 저곳으로.
*******
“대마법사가 살아있다고? 백 년 전 인간이 어떻게?”
가온의 물음에 아타락시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언데드 리치가 되었지.”
“그렇다면······ 예히나탈에 있나?”
“아니오.”
“그럼?”
“말해줄 수 있지만, 맨입으로 그러진 않을 거요.”
가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어이없는 제안에 따라야 알려주겠단 건가, 지금?”
“그렇소. 고작 게임 좀 하면 옛 친우들의 원수를 갚을 기회가 생기는 거요. 무조건 그쪽이 이득인 제안 아닌가?”
물론 가온은 그리 여기지 않았다.
가온은 말없이 아타락시아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그러나 감정을 담아서.
가온은 초저주파가 철철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방금 그 제안을 평했다.
“웃기는군.”
“뭐가 말이오?”
“모든 게. 평화를 말하면서 복수심을 이용하려 하시는데. 제안하는 본인으로서도 참 웃기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으시나?”
아타락시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불쾌하신가?”
“아주.”
옛 원한을 이용해 조종하려는 이 상황이 심히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어찌나 맘에 들지 않는지, 그 눈에서 살의가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소드마스터의 살의란 드래곤조차도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소드마스터가 바로 눈앞에 있다면 더욱.
“그래서 날 벨 테요?”
아타락시아의 물음에 가온이 비웃었다.
“그럴 필요도 없지. 당장이라도 가서 당신의 비밀을 모두에게 말해버리면 끝 아닌가?”
아타락시아의 동공이 불안감에 흔들렸다.
“약속했잖소? 그러지 않기로.”
“이번만큼은 맹세를 어겨도 용서해주실 것 같군. 게다가 대마법사 그 주문쟁이는 신의 저주를 받은 자인데, 그자가 언데드로 숨어지내는 걸 방조하고 있었다? 그건 모든 아스인과 신들을 정면으로 모욕하는 행위요. 아무리 신을 무시하는 드래곤이라도 그런 짓을 하고서 무사할 거라 생각했나?”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정말 밖에 나가 이 사실을 고할 모양새였다. 정말 그랬다간 몰락이다.
이마에서 땀을 연신 흘리며, 아타락시아는 입을 우물거렸다.
“사실······”
“사실, 뭐?”
아타락시아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결국에는 당장 이 상황을 모면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숨겨온 비밀을 꺼내듯 말했다.
“······신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소. 그들의 묵인하에 살아있는 거요.”
가온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 저주받은 놈이, 언데드로 연명하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고?”
“그렇소. 애초에 대마법사가 당신이 떠났던 세계로 차원문을 연 것은······”
“그만.”
가온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끊은 뒤, 눈을 질끈 감았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애써 가라앉히려는 듯,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서 그 자리에 계속 멀거니 서있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아타락시아가 겨우 사과했다.
“미안하오.”
가온도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말해주시지.”
“거듭 사과하지만, 그럴 수는 없소. 부디 이해해주시오. 나도 쉽게 한 제안은 아니었소. 그자의 생존은 비밀이고,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요. 그런데도 알려졌다간 누설한 자를 색출하려 하지 않겠소? 나도 위험을 감수하고 제안한 거란 말이오. 그러니 너무 노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군.”
가온은 이게 화나지 않을 일이냐 따지려다 말았다.
어쨌건 제 딴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거래를 제안한 것이라면, 이쪽에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을 것인데 그쪽에서 왜 먼저 비밀을 토해내지 않느냐며 따지는 것도 우습다.
결국 가온은 뒤돌아섰다. 그 등에 대고 아타락시아는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거래 제안은 언제까지나 유효하오. 기어이 참마황이 엘프가 되기 전이라면······”
가온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아타락시아의 둥지를 나섰다.
신성을 배척하는 유물이 가득했던 마천루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여신께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시여. 정말 대마법사가 살아있습니까?’
대뜸 던진 그 질문에 여신께서는 놀란 기색이셨지만, 가온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셨다.
‘그렇노라.’
‘어디에?’
‘네 여신은 모른다. 네 여신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모양이지. 아타락시아가 말해준 모양인데, 대마법사 그자에게도 복수하려는 것이냐?’
‘예.’
‘괜한 수고를 하지 말라, 가온.’
‘용서하시란 말씀이라면······’
‘아니. 그럴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다. 네 여신이 알기로, 그자의 삶이 연장되었음은 신들의 호의가 아니라 저주였노라.’
‘대마법사는 이미 고통받고 있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거기에 내 대전사의 원한이 더해진들 더 고통스러울 것은 없으리.’
여신께서 그리 말씀하셨지만, 가온은 속 편히 넘길 수가 없었다.
새삼 대마법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스의 모두에게 저주받은 그 마법사에 대해서.
그는 아스인 대부분의 원수이지만, 가온의 옛 친구들에게는 직접적인 원수였다.
가온은 자신과 함께 유배되었던 인간 소년들을 기억했다. 자신들을 속여 그 지옥에 보낸 어른들을, 대마법사를 원망하며 죽어갔던 소년들. 그들에게 대마법사는 사기꾼이요, 인생을 망친 원수였다.
가온 또한 대마법사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백 년 동안, 아스의 시간으로는 약 이십 년 동안 다른 세계에 가 있던 가온은 동족이 몰살될 동안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때 동족을 지키고 있었다 한들 함께 죽기만 했을 뿐 아니겠느냐 지적하겠지만, 가온 본인마저 그리 여길 수야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여신이시여······ 저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러면?’
‘어찌할지, 전우들과 의논해야겠습니다.’
가온은 우드엘프들을 만나러 숲에 향했다.
그 숲의 젊은 우드엘프들은 가온과 함께 갇혀있었고, 원한을 공유했다. 그들에게 죽은 줄 알았던 원수가 사실 살아있었음을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숲속을 걷자니 웬 우드엘프 남자와 마주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가온을 본 우드엘프 남자는 당황한 눈치였다.
“가온 경? 연락도 없이······”
“그것은 죄송합니다. 다만 제 친우들이 어딨는지 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드엘프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는데, 가온은 저 우드엘프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와중에 귀가 좋은 엘프답게, 저 멀리 있던 우드엘프가 이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가온 경!”
수풀에서 웬 우드엘프 여자가 뛰쳐 나왔다.
그 나이 어린 우드엘프를 가온을 알아보았다.
“나리 양? 만나서 진심으로 반갑······”
“인사할 시간 없어요! 밖에 싸돌아다니는 오빠들 도우러 온 거죠? 잘 왔어요, 진짜 잘 왔어! 연락도 안 했는데 죽을 지경인 거 어찌 알고 왔대!”
밖에 싸돌아다니는 엘프라 하면 그림자 엘프일 것이다. 가온의 전우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어떤 지경이라고 했나?
“그들이 죽을 지경이라고 하셨습니까?”
가온의 물음에 나리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예! 아까 구조 요청받았어요!”
나리의 말에 난처해하는 우드엘프 남자에게 가온이 물었다.
“숲에 전화기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있긴 한데.”
“그럼 제게 연락해주셨어야지요. 친구로서 제가 도울 수 있게 말입니다.”
가온이 따지자 우드엘프 남자는 마지못해 설명했다.
“그러기가 어려운 게, 그 애들은 소위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는 중이라서요. 그건 알다시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인데, 그런 일에 가온 경을 끌어들이는 건······ 그 애들부터가 절대 가온 경을 부르지 말라고 당부했는데요.”
“그 친구들이 말입니까? 일찍이 위험에 처하면 언제든 부르라 말했는데.”
“차라리 일찍 천국에 가면 갔지, 자기들 탓에 귀찮은 일에 말려들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우드엘프들로서는 종족 차원에서 이쪽을 나름대로 배려한 모양이다. 그걸 알고서 차마 화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새삼 화가 났다.
“정치고 뭐고, 이젠 다 지겨울 뿐이군요. 친구의 목숨이 걸린 일에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습니까?”
가온의 말에 나리가 기뻐했다.
“그럼 도울 거죠?”
“나리야······”
“아저씬 입 좀 다물어봐!”
한편 가온은 여신께 기도를 올렸다.
‘그래도 되겠지요? 아무리 천국행이 확정된 친구들이라 한들,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조금······’
여신께서는 흔쾌히도 대답하시었다.
‘물론이다. 가온. 네 여신이 어찌 말리겠느냐?’
그렇듯 여신께서 허락까지 해주신 마당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물론입니다.”
“멋져요!”
가온의 대답에 나리는 신이 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온의 전우들, 소위 그림자 엘프들은 지금 싸우다가 포위당한 상황이라느니. 구조요청에 다른 엘프들이 도우러 나섰지만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느니.
다 듣고 난 가온은 검을 뽑으며 물었다.
“아직은 안 죽었겠지요?”
“아마!”
그렇다면 차라리 잘 됐다고 가온은 느꼈다.
오늘 있던 일로 기분이 더없이 최악인 마당이다. 이 와중에 수백 년 지기 전우들을 위협하는 적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놈들이 누구인들 화풀이 대상으로 삼기 적절할 것이다.
재가 일렁였다.
검기를 피워올린 채, 가온은 우드엘프 남자가 어쩔 수 없이 알려준 장소로 텔레포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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