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17 길드장 강주석 - [1]
「트롤의 유언장, 대필 의혹. 확인한 바에 따르면 쿠타르는 문맹, 집에서 책 한 권 발견되지 않아 (······)」
「쿠타르의 가택에 무단 침입한 기자들, 출국 과정에서 전원 차원문 터미널에서 붙잡혀 (······) 기자 모두에게 고인 모독에 대한 결투 재판 선고, 사실상 사형이 확정된 셈 (······) 각국에서 엄중히 항의했으나 모두 무시당해 (······)」
이번 ‘트롤 사건’이 한국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 실망하게 만들기.
그놈의 트롤링에 한국은 전쟁에 끌려가지 않을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반짝였던 희망이 사라지자 한국인들은 낙심했고, 공포를 느꼈다. 그들의 위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4판타지 온라인에서, 원정을 강행하자는 주장은 이런 위기감에서 나왔다.
당연히도 모든 한국인 게이머가 이 원정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백두 길드는 원정 참여를 거부했는데,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4판타지 온라인에서 소위 원정씩이나 벌이는 것은 그저 마우스와 키보드를 만지작거려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려거든 터무니없이 비싼 계정비를 계속 내면서, 장비값과 탄약값 소모를 감당하며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런데도 참전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강주석은 백두 길드에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전 길드장과 현 길드장이 다시 만나게 되었다.
백두 길드의 현 길드장, 오상덕은 강주석의 제안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과와 협조요청 차원에서 길드에 삼십 억을 주겠다고? 그거 받고 그놈의 원정에 참여해달라?”
“그래.”
삼십 억.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그러나 거대 길드의 입장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상덕도 그 사실을 알았다.
“솔직히 별론데······ 백두 길드에서 약 오천 명이 네 제안을 받아들인다 치자. 그 인원한테 삼십 억을 분배하면? 두당 육십만 원이네. 장비 손실비용 생각하면 너무 푼돈인 거 알지? 그거론 길드 전체를 움직이기 모자라. 가뜩이나 그놈의 원정에 며칠이나 써야 할지 모르는데.”
“그래도 내 전 재산이야. 필요하다면 통장을 공개할 수도 있어.”
강주석의 말에 오상덕이 코웃음 쳤다.
“왜, 그게 전 재산이면 뭐 어쩌라고?”
“내가 전 길드장으로서 벌인 추태에 사과하고, 그때 얻은 이익을 전액 반환한다는 걸 보일 수 있겠지. 그러니까 이번에 내 제안 받아들이면, 그 혐오하는 전 길드장을 알거지로 만들 수 있는 셈 아니냐? 그러니까 제발······”
강주석의 말에 오상덕은 비웃으려다 그만두었다.
오상덕은 그저 한숨 쉬더니 물었다.
“아주 독립투사 나셨네. 나라를 위해 알거지가 되겠다 하고······ 그놈의 전쟁 소식에 그러는 거지? 그놈의 원정 성공하면 참마황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단 말도 안 되는 소릴 믿어서.”
“그래.”
“그 정도로 전쟁이 걱정되면 그냥 그 돈 가지고 이민이나 가지 그러냐?”
“한국인이 돼서 어떻게 그래? 애국심이 쥐뿔만큼이라도 있으면 그럴 수는······”
감동할 만한 발언이었지만, 오상덕은 감동하지 않았다.
“그만.”
“응?”
“그놈의 애국, 애국. 그거 갖고 길드에서 네 뒷담 엄청나게 한 거 아냐? 진짜 엄청나게 욕했는데. 대체 왜 그리 애국 타령을 했는지 길드원들끼리 추측도 해봤고······”
“쫓겨난 길드장에 그리 관심줄 줄은 몰랐네.”
“어지간히 꼴값을 떨었어야지. 내가 기억하기로, 길드 설립할 때만 해도 넌 그다지 애국 투사가 아니었거든? 툭하면 헬조선이니 돈 벌면 북유럽으로 떠야겠느니 그랬잖아.”
“그랬던 적도 있지.”
“류시범 그 양반한테 일베 이미지 덮어씌운 건 또 어째서였냐?”
“백골부대는 설립과정에서 서북청년회와 관련된······”
“뜬금없이 정떡 풀지 말고. 너 이 새끼, 기억 미화했나 보네? 장성 출신 길드장이 경쟁상대로 등장하니까 위기감 느껴서 성장 못 하게 막으려고 여론전 벌인 거잖아, 인마. 괜히 류시범 그 양반이 아직도 네 이름만 들으면 얼굴 시뻘게지는 게 아닌데.”
강주석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런 의도도······ 있긴 했지.”
“그랬던 새끼가 어느새 보니까 남들한테 애국하라며 훈수를 두고 지랄이야. 왜 이렇게 변했을까?”
“그야 뭐······”
강주석의 말을 끊고, 오상덕이 말했다.
“돈 벌었으니 딴 욕심이 들어서 그래.”
“딴 욕심?”
“명예욕. 그걸 전제로 네 정신 나간 변화를 해석해보자고.”
강주석이 입 다문 가운데, 오상덕이 계속 말했다.
“이 게임 초창기 기억나냐? 게임 이미지 참 최악이었지. 실감 나게 동물 학대하려고 게임 하는 놈, 현실적인 살인을 체험해 보겠다고 게임하는 놈, 별별 정신병자들이 몰려와서 게임 이미지가 너무 안 좋았어. 그래서 이 게임으로 돈 버는 우리도 덩달아 욕먹었잖아.”
“그랬지, 아마.”
“그 와중에 언제 칭찬을 들어봤더라?”
“일본놈들 물리칠 때······”
“그래, 그때 인터넷에 우리 한일전이 소개되면서 인기 좀 끌었지. 일본놈들이랑 그냥 돈 벌려고 싸우는 건데, 그걸 무슨 애국으로 포장할 수 있어서 길드 홍보에도 좋았고, 덕분에 돈도 엄청 벌었고······ 내 보기엔 그때부터 네가 맛이 갔어. 명예가 없는 일로 돈만 벌다가 웬일로 명예 비슷한 걸 얻으니까, 거기 아주 취해버린 거지.”
“난······”
“길드원들은 돈 조금이라도 더 벌고 싶어서 안달인데, 길드장이란 놈은 허구한 날 애국 타령이나 하기 시작한 이유는? 이미 벌 만큼 벌어서 자기만 돈 욕심이 적었기 때문이지.
금전욕은 충족됐으니 명예욕이나 계속 충족하고 싶어 안달 났던 거야. 그러느라 애국, 애국 노래를 부르다 보니 자기 명예욕이 정말 애국심인 줄로 혼동이 온 거고. 내 추측은 이런데, 반박할 거 있나?”
반박하지 못하고, 강주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끔찍한 치욕감.
지금 오상덕은 자신의 모든 행동을 다 헐뜯고 있었다. 이전에 한 일은 물론, 앞으로 할 일도 그리 숭고한 일이 아니라고.
강주석은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참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한참 뒤에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겨우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럼······ 넌 그냥 위선 떨다가 들통나서 쫓겨난 병신인 걸 인정하니? 몇 번이고 말하지만 사실 제대로 된 애국자가 아닌 것도?”
“그래.”
“그럼 다 집어치워라, 응? 지금 전 재산 기부하겠단 것도 내 보기엔 순수한 동기가 아니야. 척 봐도 그동안 하도 욕먹었으니까 기어이 사람들한테 칭송 좀 듣겠단 충동이 생긴 거 같거든? 요새 사이야 최악이었어도 원래 동업자였으니까 나중에 후회할 짓 말라고 충고하는 거야.”
이번에도 강주석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확실히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니지만 뭐?”
다시 한번, 강주석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결론을 내기 위해, 한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다고 별 대단한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왜?”
“동기야 어떻든, 애국적인 일은 맞으니까. 이왕 애국, 애국 떠든 거, 끝까지······.”
오상덕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래서 기어이 정말 전 재산 내겠다고?”
“그래.”
오상덕은 신음하더니, 이번 제안을 일단 길드에 전하기는 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두 길드에 돌아가, 길드원들에게 다들 어찌할 것인지 의사를 물었다.
“전 길드장이 꼴랑 수십만 원씩 주겠지만 어쨌건 자기 전 재산이니까 모쪼록 이거 받고 고생 좀 해달라고 합니다. 다들 어쩔 겁니까?”
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놀랍게도 ‘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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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에는 만 명을 넘던 백두 길드는 지금 육천 명으로 줄어든 마당이었다.
그리고 그 육천 명 대부분이 제안에 동의했으며, 그로써 결정되었다. 백두 길드는 이번 원정에 참여하기로.
암울한 와중에 병력 육천 명이 충원됐단 사실은 한국인 게이머들을 고무시켰다.
당연히도 소문이 흘렀고, 그 소문을 들은 가온은 바로 강주석을 찾아갔다. 가온을 본 강주석은 알거지가 될 예정임에도 반색했다.
“아, 가온 씨! 가온 씨도 결국 도와주시려고······”
“아니.”
“그럼 왜?”
“전재산, 벌써 입금했니?”
“아뇨, 아직······”
가온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취소해라.”
“예?”
“내 몇 번이고 말하지만 그런다고 상황 절대 안 변해. 헛짓으로 전 재산 날리지 마라, 제발.”
가온은 예전에 했던 설명, 그러니까 고작 게임에서 아무리 고생해봤자 현실 독재자가 몰락할 일은 결코 없다는 설명을 반복했지만 강주석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뇨, 제 보기엔 충분히 해볼 만한 일입니다. 이번 일만 봐도 그래요.”
“이번 일? 뭔?”
“결투 재판이 취소되었지 않습니까? 그건 참마황의 노화가 심각한 지경임을 증명합니다. 늙은 몸뚱이론 결투에 나섰을 때 패배할 가능성이 크니까 부랴부랴 결투를 취소한 거겠죠. 그러기 위해 트롤도 일부러 죽인 걸 수도······”
말도 안 되는 소리. 가온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어찌 설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참마황이 정정하다 못해 너무나도 힘이 넘친 나머지, 결투 상대를 봐주려고까지 했음을 여기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자기가 그 가온임을 숨기고자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중한 이유가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이유가.
가온은 그저 답답함을 느끼며 따졌다.
“그래서 그 돈을 왜 네가 내냐? 돈을 내도 국가에서 내야지, 왜 개인이 전 재산을 써?”
“정부 차원에서 개입하는 움직임을 보였다간 참마황을 자극할 테니까 정부는 쉽게 나설 수 없죠. 지금도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곤 있지만, 너무 조심스럽게 지원하느라 조금밖에······ 이 지경에 뭔 눈치를 보는지 당최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게 오히려 현명한 행동이야!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정말 게이머들 활약 덕에 참마황이 엘프가 되지 못해 늙어 죽게 생겼다고 치자. 그럼 참마황이 한국인들에게 분노해서 한국을 더 조지고 싶어하지 않겠냐? 그건 괜찮아?”
강주석은 그 말에 반박하려다 말았다. 그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합시다. 가온 씨.”
“그만하길 뭐가?”
“그동안 도와주신 점,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 개인만 해도 엄청나게 도움받았죠. 그것도 아무런 보상 없이 말입니다. 그 정도로 도움받은 마당에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더 도와주지 않으실 거면 방해하진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야, 인마!”
“한국인들의 일입니다. 한국인들이 알아서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령 결과가 안 좋다 하더라도요.”
이후로도 가온은 더 설득하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결국 그날 저녁, 강주석은 백두 길드에 전 재산을 송금했다. 그것은 게이머들에게도 소문이 났다.
강주석의 악명이 워낙 컸던 만큼 소문이 퍼지는 속도도 빨랐다.
“역겨운 새끼, 이번만은 칭찬한다!”
희생적인 결정이 사람들의 애국심을 자극한 것일까? 호응이 꽤 있었다.
자발적인 지원과 기부가 뒤따랐다.
이번에 아예 게임을 그만두기로 한 게이머들, 그들은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도와주기로 했다. 그 게이머들은 아직 처분하지 못한 탄약이며 무기들을 원정대에 기부하거나 현 시세보다도 훨씬 싸게 팔아주었다.
“어차피 헐값 됐는데 뭐. 처분하기도 귀찮았는데 잘 됐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긍정적인 분위기였다. 한국인 모두가 뭉친 느낌.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미 원정 한 번을 실패했단 사실, 이번엔 더 크게 실패할 수 있단 사실은 다들 애써 무시했다.
그리하여 이틀 뒤, 총 삼만팔천 명의 한국인 게이머들은 아린 벌판으로 출발했다.
그들의 목표는 카르세인들과의 소모전에 지쳐가는 조선인민군을 지원하는 동시에 그들이 직접 카르세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전쟁광 참마황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 독재자를 늙어 죽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구국을 위한 원정을 떠났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망상인데도.’
가온은 행군하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시련으로 나아가는 젊은이들. 시련 끝에 그들이 기대할 영광은 거기 없다.
허무, 오로지 허무만이 남을 것이다.
가온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런데도 말릴 수 없단 사실에 우울한 가운데, 원정대의 일원인 이복동이 다가왔다.
“형은 역시 안 도와줄 거지?”
“도와줘도 소용이 없다니까. 복동이 너도 원정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라 몇 번이고 말했는데, 끝까지 말을 안 듣고······”
그러나 여전히 이복동의 맘은 변하지 않았다. 이복동은 기어이 원정에 나서기로 했다. 한 명의 저격수로서.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원래 가온은 이복동이 자신에게 빌붙는 걸 그만두고 자립하길 원했다. 바람대로 되기는 했다. 그러나 자립이 지나친 나머지, 아예 충고마저 무시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문득 이복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그리고······ 제 스폰서가 만나자는데요.”
가온은 혀를 찼다.
“또? 이번 뉴스가 영향을 줬나? 하여간 그 여편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이번엔 정말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 있대요.”
“뭔 제안?”
“그건 모르겠는데······ 아무튼 말은 전했으니 이만 가볼게요.”
기어이 이복동과 원정대가 떠난 뒤, 가온은 한동안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다음에는 하고와 싸웠고, 또 패하여 게임 오버당했으며, 가상현실 기기를 나와서는 그놈의 드래곤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려는지 듣기라도 하고자 텔레포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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