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대전사 참마황 - [6]
수십 년 고통의 세월이 지나, 마침내 쿠타르가 지구에서 돌아왔을 때, 아스인들은 이 가엾은 트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카르세 연방에서도 경제 발전이니 산업 발전이니 꾀하던 시기였다. 지구에서 조금이라도 더 산업기술을 공유받고 투자를 받으려거든 옛 원한을 잊어야 했다. 최소한 잊는 척이라도 하거나.
억지로라도 옛 원수와 화해하던 그 시기에, 트롤 한 마리의 귀환은 껄끄러운 일로만 여겨졌다.
사회는 물론 주변 사람들마저 이 돌아온 트롤을 꺼렸다.
그 사실을 눈치챈 쿠타르는 옛날에 살던 숲에 돌아가려 했지만, 그곳은 이미 콘크리트가 덮여있었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결국 쿠타르는 나라에서 지급해준 조그만 반지하에서 웅크려 지내야 했다. 트롤 특유의 괴력이 건물을 부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화학적인 냄새가 나는 가공육으로 연명하면서 끈질긴 삶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분께서 돌아오셨다.
이 나라의 진정한 지도자, 참마황 폐하께서 모든 것을 바꿔주셨다.
새로이 수립된 장검정권은 쿠타르에게 더 넓은 집과 조명을 주었고, 그의 고통에 동감해주었으며 언젠가 복수해주리라고 약속했다.
그대로 십 년이 지난 지금, 쿠타르는 참마황을 구세주로 느낀다.
그분께서 한낱 이 트롤을 위해 화로의 대전사와 맞서기로 했을 때는 어찌나 감동했는지.
그러나 감동은 이내 죄책감이 되었다.
“이보쇼, 쿠타르 씨. 당신 애국자로서 정말 실수한 거요······”
간수가 슬쩍 일러주길, 자신이 벌인 일은 그분께서 대업을 이루시는 데 대단히 해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가장 강력한 아군을 적으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이 트롤의 처우를 두고 기어이 결투 재판까지 벌이게 됐는데, 정말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말뜻을 쿠타르는 알아들었다. 자신 탓에 두 마스터가 결투하지 않도록, 몰래 반입된 밧줄로 목을 맸다.
그러니까 쿠타르의 소망은 죽는 순간까지 변함이 없었다. 쿠타르는 복수의 전쟁이 기어이 일어나길 원했다.
그 간절한 소망을 유언장으로 남겼다.
「누군가는 저 같은 트롤이 일개 몬스터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지구인들이 저한테 한 짓은 그저 몬스터 퇴치에 불과했다고.
실제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몬스터를 죽이는 그 일마저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몬스터 소탕이 아스의 자연을 제국주의자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는 식민지 경영 전략에 불과했단 것을 새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몬스터······.
옛 산골짜기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이 신의 자손으로 모시며 제물을 바치던 미노타우로스를 떠올려보십시오.
평범한 아스인들이 맞설 수 없던 그 강력한 존재. 사람까지 잡아먹던 포악한 괴물.
그 크고 강한 몬스터를 총 든 영국 병사들이 와서 쉽게도 쏴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받들던 이 소머리는 별로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었다고. 방아쇠 몇 번 당기면 쓰러질 만큼 하찮은 존재였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문명의 증거인 총 몇 자루를 과시하면서 말입니다.
그로써 제물은 아낄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마을 사람들은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숭상하던 미노타우로스를 잃은 마을 사람들은 더 우울하고 불안해졌을 뿐입니다.
값싼 납탄에 미노타우로스가 쓰러질 때, 그것은 강력한 몬스터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마을 사람들의 지난 숭상이 모두 헛된 미신으로 전락하는 비참한 순간이었습니다.
가치와 믿음의 몰락이요, 정신적 능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미노타우로스와 함께 마을 사람들의 지난 삶도 같이 죽은 것입니다. 같이 패배한 것입니다.
그런 일이 아스의 모두에게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를 보십시오. 다른 세상에 능욕 된 지금의 아스를 보십시오.
장인 드워프들의 걸작은 공장제에 밀린 비루한 잡동사니로 전락했습니다. 웅장한 전투 함성을 외치며 제국 기사들과 겨루던 오크들은 쓰레기나 줍고 있으며, 드넓은 숲을 자유로이 뛰어다니던 엘프들은 카메라가 두려워 조그만 숲에 갇혀 지냅니다.
명예로웠던 기사의 후예들이 정치깡패라며 조롱당하는 가운데, 평범한 사람들의 후예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이전의 삶과 가치를 능욕당한 결과란 이렇습니다. 능욕당한 자들이 비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복수를 원했고, 분풀이로 사제님을 죽였습니다.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에 목숨을 바쳐 사죄합니다.
새삼 평화 어쩌고 하는 가치에 공감하는 건 아닙니다. 화로의 신자들에게 그것은 예로부터 숭상해오던 가치였음을 새삼 깨달았을 뿐입니다.
예로부터 내려온 그들의 가치를 숭상하던 자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오만한 제국주의자들과 같은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우리의 가치는 복수여야 할 것입니다.
여신이시여. 전쟁을 노래하소서」
카르세 중앙방송 아나운서는 트롤의 유언을 참으로 처연하고도 구슬프게 읽어내렸다.
지구인들은 그 유언을 들으며 슬퍼해 주지 않았다. 그저 기대하던 세기의 이벤트가 엎어진 상황에 격분했을 뿐이다.
“미친 트롤 새끼가 뒤져서까지 트롤 짓을 해!”
지구인들이 화내다 못해 흐느끼는 가운데, 아스인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누군가는 그 죽음을 비웃었고, 누군가는 애도했다.
이 트롤을 놓고 결투할 예정이던 두 검사의 반응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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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군, 너무······.”
참마황의 눈에는 실제 눈물이 맺혀있었다. 꾸며낸 감정이 아니라 정말 감정이 북받친 듯했다.
그 슬픔에 가온은 공감할 수 없었다.
“너무 슬플 건 또 뭔가.”
가온의 말에 참마황이 대답했다.
“난 아스인들의 분노를 대변하네. 전쟁의 대전사로서, 그들의 복수를 대신해야 할 의무가 있어. 내 아직 의무를 다해주지 못했는데 먼저 죽었고. 이 어찌 슬프지 않겠나? 내 반드시 그 트롤에게 뉴욕이 불타는 꼴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랬다면 분노로 시커멓게 타버렸던 그 속이 비로소 가라앉았을 것을······.”
“그리 분노할 만큼 마족이 싫었으면 진작 미국에 쳐들어가든가 했어야지. 만만한 사제를 해치는 게 아니라.”
가온의 빈정거림에 참마황은 반박하려다 그만두었다. 그저 한숨 쉬었다.
“그래, 그는 엉뚱한 데 분노를 풀었네.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고. 죄를 지은 것이겠지. 하지만······.”
그놈의 트롤 얘기에 가온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화제를 돌렸다.
“자네도 마찬가지야. 상관도 없는 한국은 좀 내버려 둘 수 없나?”
그 말에 참마황은 슬퍼하던 와중에도 정색했다.
“그럴 수 없네.”
“대체 왜. 이해하고 공감도 좀 해보게 자세하게 설명해볼 수 없나?”
그 요청에 참마황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끝내 설명하기 힘든 듯, 거부를 표시했다.
“아무래도······ 자세히 말할 순 없네. 그래도 이해해주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이유로 한 나라를 괴롭히겠다는 걸 무슨 수로 이해하겠나?”
“이해할 수 없다면 존중해주게. 내 후긴의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잖은가? 그건 자네의 권리였으니까.”
“그리고 한국을 대하는 건 자네의 권리라고?”
“그렇네. 난 권리와 의무 모두에 충실할 것이고, 거기 간섭받고 싶지는 않아. 알겠나?”
그 대화를 끝으로 참마황과 헤어진 뒤, 가온은 속으로 읊조렸다.
권리와 의무라?
가온의 권리는 복수였다. 그리고 의무는, 대전사로서의 의무였다. 여신님의 뜻에 따라 평화를 이끌어 낼 의무.
여신께서는 가온의 권리를 존중하시어 그 의무를 강요하지 않으셨지만, 원한다면 강요하실 수 있었다.
여신께서 명령하시면 가온은 복종할 것이었다.
일찍 잠들라는 명령이 아니라면야, 어찌 감히 여신님의 뜻을 거부하겠는가?
그러나 여신께서는 은근히 당신의 뜻을 따르게 유도하시면서도, 직접 뜻을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그러시는 이유를 가온은 안다.
여신께서 당신의 대전사를 존중하다 못해 사랑하시는 까닭이다.
남녀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자 관계에 가까운 사랑. 그것도 이백 년 가족의 사랑이다.
여신께서는 이백 년 넘게 가온의 정신에서 지내셨다. 그 이백 년 동안 가온이 보는 것을 여신께서 보시었고, 가온의 세계는 곧 여신님의 세계였다.
그리 밀도 높고 길었던 인연이란 위대한 천상의 대신격에게도 각별한 것이었다. 예로부터 소중히 여겨오신 평화의 가치와 대전사의 가치를 저울질할 때, 어느 한쪽으로 확연히 기울지 않을 정도로.
여신께서는 가온을 편애하셨다.
가온은 그 편애를 이용해왔다. 여신께서 따로 명령하지 않으시는 마당에 알아서 의무를 다할 필요는 없다며 합리화했다. 그리고 지금 가온은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 죄책감을 계속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전쟁이 터진 그때마저 헤매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권리든 의무든, 결국에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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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에 모인 게이머들은 한숨 쉬거나 툴툴거렸다.
이미리가 간만에 욕설을 내뱉었다.
“결국 안 싸웠어! 잔뜩 기대시켜 놓고, 좆같애······.”
그 주목받던 결투가 무산된 지금, 4판타지 온라인의 한국인 게이머들은 낙심했다. 어쩌면 결투의 결과로 한국이 구원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기야 일이 그리 잘 풀릴 리는 없었다. 결국 위대한 엘프께서 한국을 구해내지 못했다면, 한국인들끼리 구해내야 했다. 아무리 하찮은 게임 속에서라도.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했다. 지금도 참마황의 영생을 위해 전진하고 있을 카르세인 군대를 막아야 했다. 어떻게?
“여전히 류시범 그 새낀 길 안 열어준다죠? 적절한 때가 아니라면서.”
“예. 그리고 저쪽이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우린 한참이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이 경우, 단순히 가는 길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뿐이 아닙니다. 보급은 훨씬 힘들어질 것이고, 병력충원도 훨씬 힘들어질 겁니다.
게다가 적들의 영역 가까이서 행군해야 합니다. 그러니 툭하면 기습당할 겁니다. 뭘 하려고 하든 훨씬 더 큰 수고를 들여야 할 테고, 훨씬 더 큰 손실을 입을 겁니다. 예를 들어 보급 중에 기습 한 번 당하면 얼마나 많은 돈을 잃을지······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원정을 굳이 지금 가야할까요?”
“그래도 갑시다.”
강주석이 즉시 대답했다. 그러자 한 길드장이 눈을 흘겼다.
“언제나 말은 쉽지. 뭔가 하기는 어렵고. 손해를 감수하기는 더욱 어려워.”
언제나 애국을 떠들면서 성욕조차 못 참은 놈이 어디서 뻔뻔하게 지껄이느냔 비꼼이었다.
그것을 강주석도 알아들었지만, 화내지 않았다.
강주석은 수치심과 자괴감에 눈을 감았다가 한참 뒤에야 뜨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어려운 일, 제가 한번 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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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은 4판타지 온라인의 시내를 걸었다.
길 가다 마주친 한국인 게이머들의 얼굴엔 우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게임에 종말이 다가와서? 아니면 저들로서 간절히 바랐을 결투를 하지 않아서인가?
미안한 일이지만 가온이 뭔가 해줄 수야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뭔가 더 해줄 수는 없었다.
게임에서 도와달라는 것조차도, 응해줄 수 없었다.
그러니 자기 앞가림이나 하기로 했다. 가온은 폴리모프한 채, 업소에 갔다.
그리고 하고와 싸웠다. 검기를 발하지 못하는 왼손으로.
이번에는 한 시간을 버텼다. 그러고서야 게임 오버.
‘저번에 왼손만 썼을 땐 고작 삼십 분 버티지 않았느냐?’
여신께서 놀라움을 표하시는 가운데, 가온도 놀랐다.
“예, 그랬는데 거의 두 배 늘어났군요······”
단순히 버티는 시간의 증가로 실력의 향상을 잴 수는 없겠지만, 눈에 띄게 놀라운 실력 향상이 있었음은 분명했다.
참마황과 겨룬 덕분일 것이다.
가온은 그와 겨룰 당시 자신의 상태를 회상했다. 그때, 가온은 어느 때보다 몸이 가벼웠다. 단순한 컨디션의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반신의 몸은 언제나 완벽하니까.
지금도 몸을 관조하건대, 그때와 별 차이는 없었다.
그저 느낌이 다를 뿐이었다. 지금 가온의 몸은 그때보다 조금 더 무거웠고, 그 약간의 무거움은 심리적인 문제였다.
몸과 마음은 이어진 것이다.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실질적인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교관 그 양반이 말했지. 실력이 늘려면 긴장 좀 풀어야 한다고. 어쩌면 그 말이 옳을지도······’
그리 생각한 가온은 억지로라도 마음을 차분히 가지려 애썼다. 명상하며,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그 와중에 평정을 깨뜨릴 소식이 들려왔다.
게임 속에서 들려온 소식이었는데, 어지간하면 게임 내 일을 무시하려던 가온도 이번만큼은 무시하지 못했다.
“강주석이 전 재산 썼다고? 전 백두 길드장 그 강주석이?”
“예, 원정에 나설 병력 모집하겠다고 삼십억 원을 모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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