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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4판타지-105화 (105/135)

LV.? 대전사 참마황 - [5]

신성한 결투 재판에서 합을 맞추자니? 누가 들었다면 프로레슬링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따졌을 것이다.

가온도 황당함을 느껴 핀잔하려다 말았다.

생각해보니 꽤 반가운 제안이었다.

동등한 상대와의, 목숨이 걸리지 않은 대결이란 언제나 실력향상에 이로운 법이다.

가온은 그리 생각했지만 기꺼운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 원한다면야, 그러지.”

가온의 승낙에 참마황은 반색했다.

“검기는? 쓰는 게 좋겠지? 그러는 편이 실전에 가까울 테니까 말이야. 그냥 힘만 살짝 빼고······.”

그러다 다치지 않겠느냐는 걱정은?

원래는 할 필요가 없었다. 둘은 초인 소드마스터요, 실수로 인해 상처를 입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둘 중 누군가가 도중에 음험한 생각을 품는 것이 아니고서야.

그리고 지금, 그놈의 ‘음험한 생각’을 가온은 경계했다. 가온은 이 남자가 대체 뭘 생각하고 지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제안에 조금 긴장한 채, 그러나 역시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

가온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참마황은 싱긋 웃었다.

“칼을 맞대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군?”

참마황이 검을 뽑았다. 그 유명한 참마검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롱소드였는데, 그 평범함은 다음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검신을 타고 백색 광채가 피어오른다.

인간 소드마스터 특유의 검기다.

모든 인간 소드마스터들의 검기가 백색은 아니었다. 칠흑빛 검기도 있었고, 황색 검기도 있었다.

왜 검기 색깔이 그런 식으로 변화하는지는 아직 완전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저 검사의 정신적 요소가 검기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는 설이 유력하다. 종교와 사고방식, 살아온 경험 따위가 검기의 형태에 반영된다는 설이다. 종족끼리의 검기가 으레 흡사한 것은, 한 종족의 사고에는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재를 닮은 회색빛은 무엇을 반영한 것일까? 장례를 집행할 때마다 흩날리던 재? 아니면 단순한 자기 머리칼 색깔?

유일한 종족, 유일하게 화로 교단이 배출한 그레이엘프 소드마스터로서 가온도 검기를 방출했다.

재가 일렁인다.

아스 역사상 유일한, 회색빛 검기다.

그때 백색이 번쩍이더니, 뒤이어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울 준비를 마친 그 순간, 참마황이 신호 없이 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거의 기습으로도 보이는 그 공격은 사실 기습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전투감각이 매 순간을 포착한다. 그렇기에 소드마스터들은 평상시 암살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이번 공격도 그저 인사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온은 내심 놀랐다. 너무 경계하고 있던 탓이다.

놀라움 또한 숨긴 채, 가온은 그 공격을 차분히 받아낸다.

쳐내는 것이 아니다. 흘리고, 받아넘긴다. 적의 칼이 튕겨 나가거나 미끄러져 자기 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상대가 잡은 칼마저, 자신의 지배하에 둘 수 있도록.

모름지기 통치기술은 굳셈과 부드러움을 겸비해야 한다. 검을 지배함도 그와 같다.

가온이 몇 달 전에야 깨달은 사실이다.

강대한 괴물이며 고대의 신과 싸울 때. 무조건 칼을 있는 힘껏 휘둘러야 했던 그때는 새삼 알 필요가 없었던 이치. 그 이치를 반영하여 가온은 칼을 휘두른다.

물론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재와 백색이 뒤섞인다.

두 칼이 부딪친다. 충돌은 검기에 부드럽게 흡수되고, 양쪽 칼은 서로 달라붙은 듯 밀착한다. 바인딩.

교착 상태가 이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힘을 겨루는 시간이 아니다. 서로의 기술을 다투는 시간이다.

“이런 기술, 할 줄 아나?”

참마황은 날밑과 손잡이를 모두 이용해서, 가온의 칼을 감아올린다.

언뜻 보면 평범한 소드레슬링이지만 거기 실린 계산의 절묘함은 실로 놀랍다. 칼이 움직이는 거리며 힘의 배분까지, 모두 철저하고 완벽한 계산으로 이루어진다.

그 놀라운 기술에 가온도 마주 응한다.

같은 기술로 대응한다.

치열한 소드레슬링이 이루어진 끝에, 승리를 따낸 것은 가온이었다.

재는 살짝 휘날렸을 뿐이지만, 백색 광채는저 멀리 밀려났다.

‘좋아.’

가온은 참마황의 칼을 밀어내면서 자기 칼끝을 공격 방향에 겨누는 데 성공했다. 그대로 찌르려던 순간, 참마황의 재빠른 방어 동작에 막히기는 했지만.

어쨌건 가온은 살짝이나마 우위를 보였음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참마황은? 살짝 밀려 굴욕감을 느끼나?

아니었다. 지금 참마황은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만족스럽게,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보는 사람, 그러니까 가온의 기분마저 덩달아 좋아질 만한 웃음이었다.

참마황이 방금 접전의 감상을 말했다.

“좋아, 아주 좋아.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점인데······”

“뭐가 말인가?”

“솔직히 아주 형편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혼자서 훈련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군? 폐관수련을 정말 훌륭하게 해낸 모양이야. 아주 열심히······.”

이 이야기를 저번에 이미 들어보았다. 소드마스터들이라면 모두 가온에 대해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그렇지.”

가온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그래서 지금 참마황이 왜 저리 웃는지 생각해보았다.

추측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참마황이 갑자기 왜 대련을 하자고 했는지도 알 만했다.

‘원래는 내 실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따로 배려해주려고 했나 보군? 사람들 앞에서 맞붙을 때 망신당하지 않도록 말이지.’

그 예상이 어긋난 지금, 참마황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상대가 생각보다 훌륭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호승심이 자극되어서인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과 동등하다는 사실에 지금 참마황이 느끼는 감정은 안도감이다.

상대가 자신보다 못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감정이다.

그것만으로도 저 남자가 자신을 어찌 여기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까, 적 혹은 경쟁상대로는 조금도 여기지 않았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지금 가온은 온전히 깨달았다. 그리고 느낀 감정에 상대방에게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그저 입술만 조금 달싹였을 뿐이다.

한편 참마황은 호흡을 가다듬더니 검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호기롭게 외쳤다.

“계속해보지!”

다시금 백색 광채가 번뜩인다.

가온은 재를 휘둘러 맞선다. 서로의 칼을 부딪치고 부딪치는 공방이 오간다.

그러면서 가온은 참마황의 검술을 파악한다. 완벽한 카르세 롱소드 검술.

게임에서 상대한 흉턴보다는 살짝 덜 매섭다. 그것은 살기 넘치던 흉턴과 달리, 이 눈앞의 상대에겐 진정한 적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쪽의 실력 또한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가온은 이제 감각만이 아닌, 그동안 익힌 검술을 근거로 전황을 파악한다.

공격선. 서로의 간격. 유리한 위치. 상대의 의도 따위 매 정보를 예리한 감각으로 수집한다.

수백 년 역사 검술의 논리로, 그 정보들을 조합해낸다. 그리하여 도출된 결과에 따라 행동에 나선다.

그리하여 이제 가온의 칼에서 구현되는 것은 그저 눈앞에 닥친 순간을 위한 최선의 수가 아니다. 매 순간의 우위를 점하는 것 이상을 노리는, 그보다 먼 나중을 향하는 동작.

수준 높은 바둑기사처럼, 두 검사는 수십 수 뒤를 내다보며 칼과 칼을 교환한다.

그리고 훌륭한 바둑을 두면서 그러듯, 가온은 지금 이 순간에 즐거움을 느낀다.

막혀있던 머리가 뻥 뚫리는 듯한 즐거움.

분노를 드러내려고 일부러 무표정을 가장하던 그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떠오른다. 그 웃음은 지워지지 않는다.

둘은 그리 즐거이 웃으면서, 한 시간 넘게 싸운 끝에야 칼을 멈추었다.

둘 중 하나가 지쳐서는 아니었다.

가온이 요청했다.

“이젠 왼손으로 바꿔서 해보고 싶은데, 괜찮겠나?”

“왼손으로?”

“그래, 왼손. 그러려면 서로 검기는 안 써야 할 것 같은데? 내 왼손으로는 검기를 쓰지 못하니까.”

“검기도 못 쓰는 손으로 왜? 아, 나루님처럼 양손 방출에 도전하는 건가? 손의 감각부터가 꽤 달라서 쉽지 않을 텐데······. 뭐 괜찮겠지. 어디 해보세.”

합을 맞추는 원래 목적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요청이었지만 참마황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참마황은 여전히 자신에게 익숙한 오른손으로, 가온은 왼손으로 칼을 잡았다.

그리고 검기는 방출하지 않은 채, 다시 칼을 섞기 시작했다.

챙챙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는 가운데, 접전이 계속되었다.

훌륭한 검사답게 참마황은 계속해서 상대방의 어깨를, 그러니까 가온의 어깨를 살폈다.

그러다 문득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쩐지 그 어깨에 힘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그리고······.

변화가 생겨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았다. 아까나 지금이나 가온의 검술은 소드마스터의 검술답기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오직 소드마스터만이 알아볼 수 있는 차이가 생겼다.

‘동작이 아까보다 더 경쾌하고 자연스러워진 듯한······.’

칼의 형태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까 흐르던 강은? 언젠가 댐에 부자연스럽게 막힐 것으로 보였다. 이제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강이 끊기지 않는 법. 한순간 세찬 강보다 결국에는 더 많은 물이 흐를 강, 언젠가 바다까지 닿을 위대한 강이 눈앞에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명백한 발전으로 보인다.

참마황은 이 갑작스러운 발전에 놀라면서도 기시감을 느낀다. 이 순간을 어디선가 느껴봤던 것 같은데?

그 익숙함이 참마황에게 즐거움을 준다.

이미 즐거웠지만, 더 즐거워진 참마황은 지금까지도 억누르고 있던 충동을 해방했다.

“더, 더!”

억제에서 풀려난 참마황의 칼, 아까보다 더 매섭고 날카로워진 칼이 가온을 위협한다.

가온은 슬슬 밀리는 것을 느낀다.

방금까지는 발휘하는 솜씨에 제한을 두고 있다가, 상대의 솜씨가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하자 그제야 제 실력을 발휘하는 모양새다.

‘이쪽을 배려해서 힘 조절 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듯 자신을 봐줘야 할 상대라고 생각했던 것은 얼핏 무례한 일이지만, 지금 가온은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다.

살짝 밀리는 와중에도 그렇다.

오히려 지금 가온은 안도감을 느낀다. 자신은 긴장하고 있던 와중에도 상대방은 자신을 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가온은 지금 적이나 경쟁상대가 아닌, 친구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상대와 있을 때는 신경을 세우고 있을 필요가 없다.

안도감이 긴장을 풀어낸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온몸의 근육이 더욱 유연하게 신호를 전달한다.

가온은 이 순간에 순수하게 몰입한다.

왼손에 든 칼을 경쾌하게 휘두른다.

열기를 머금은 재가 황홀하게 빛난다.

참마황이 눈을 크게 뜬다. 대결 중에 또다시 일어난 변화에 감탄한다.

“오······”

그 순간, 가온의 머릿속에서 불씨가 튄다.

이번에는 확실히 착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번 불씨는 저번보다 훨씬 선명하다. 덕분에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

내면에서 번뜩이는 불씨.

불씨가 불꽃이 되기까지는 약간, 아주 약간 더 필요할 뿐이다.

그 조금이 끝내 부족하다면 결국에는 잠시 반짝이고 사라질 뿐이겠지만······.

*******

그리 겨루고 겨루면서, 두 소드마스터는 나흘을 보냈다.

정말이지 가온에게는 즐겁기만 한 날이었다. 경쾌한 발전의 나날.

하고와 싸우는 것은 이로운 일이었다. 실전이나 다름없는, 소드마스터와의 대결 아닌가. 돈 주고도 못 살 그 경험 덕에 눈에 띄는 발전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낫다고 느낀다. 몸으로 느껴질 만한 변화가 있었다.

그 사실을 참마황도 알고 찬사를 보냈다.

“정말이지 훌륭한데? 처음 붙을 땐 약간 차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다 따라잡은 듯해. 이 정도면 정말 결투 재판에서도 서로 봐주는 일 없이 온 힘을 다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러나 실컷 겨룬 보람도 없이, 결투 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투 재판의 목적이 사라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고인이 죽었다.

수련장을 나와 보고를 받은 참마황은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쿠타르가 자살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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