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104화 (104/135)

LV.? 대전사 참마황 - [4]

요새 한국인들 사이에서 재의 왕자는 진정한 한국의 수호자쯤으로 통했다.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 한국인들이 불안을 느끼면서도 아직 완전히 절망하지 않은 것은 그 엘프의 존재가 희망을 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번 일 또한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한국인들의 기대 어린 시선으로 보기에, 이번에 재의 왕자가 결투하기로 나선 것은 ‘평화의 사도가 내린 위대한 결단’쯤으로 여겨졌다.

“가온! 가온! 가온!”

한국인 대부분이 그 엘프의 이름을 부르짖는 가운데, 4판타지 온라인의 한국인 게이머들도 이번 일에 환호하고 있었다.

그 가온 본인으로 의심되는 가온이 몇 번이고 제안을 거절하여 야속했던 것은 이미 잊었다.

그놈의 결투가 최대한 빠르게 치러지기를, 그리하여 재의 왕자가 승리하기를 바랐다. 독재자 참마황은 패배하여 죽어버리고, 그가 일으키려던 전쟁의 가능성은 영영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

“불편하신 건 없습니까, 대전사님?”

“없으니 가서 일 보게.”

“제 어찌 감히······”

사제들의 시중을 받으며, 가온은 새삼 부담감을 느꼈다.

이들이 자신을 어찌나 정중히 모시는지.

지금 대전사를 대하는 사제들의 태도에서는 맘에서 우러나온 경의가 보였다.

이번 대전사가 내린 결정을 교단의 일원으로서 대단히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반길 만도 하지. 호위도 폴리모프한 채 할 만큼 교단과 얽히길 꺼리던 대전사였는데. 이번에야말로 복수심 따윈 접고 교단을 위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그리 추측하며 가온은 새삼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온은 그들의 기대에 완전히 부응할 수 없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는데, 한국 국회의원의 전화였다.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승천하신 화로의 사제님께 애도를 표합니다」

엄근오의 말에 가온은 엄숙히 대답했다.

“애도할 것까진 없네. 그가 천국에 간 것을 확인했으니까. 오히려 나야말로 그쪽을 위로해야겠는데. 한국에 닥친 일을 봤네. 실로 유감이야.”

「위로하실 것까지야.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가온 경」

“그래서 전화는 왜? 설마 애도만을 위한 건 아니겠고. 이번 일에 대해 미리 전해듣고 싶나? 참마황과의 결투에 대해서?”

「예, 그래 주신다면야 너무나도 감사히······」

그리 답하는 엄근오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그 감정을 애써 숨기려 하는 눈치였지만 엘프의 귀를 속일 수는 없었다.

“공개된 대로네. 참마황과 나는 싸울 예정이야. 일주일 뒤에 말일세.”

이 순간, 가온은 휴대폰 너머 엄근오의 심장이 박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정말 위대한 결단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야말로 맘을 정하신 것이겠지요? 화로의 대전사로서 말입니다」

“글쎄?”

「주변에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주변 사람들을 물려주실 수······」

잠시 후, 엄근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국에서도 가온 경의 이번 결정에 대단히 감격하고 있습니다. 저흴 통해 경께 제안하길······ 미합중국은 화로 대전사의 뜻을 적극 지지하며, 이후의 행보를 있는 힘껏 지원하고 싶답니다」

가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국이 날 돕겠다고?”

「혹시 그게 껄끄럽다고 생각되신다면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원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미국이 가능한 지원에는 하고의 처치에 협조하거나, 영국과 프랑스를 더욱 압박하는 것 또한 포함돼있다고······」

엄근오는 이 제안이 가온에게 매력적이리라 기대하는 눈치였다. 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하고를 쓰러뜨려? 그랬다간 복수했다며 자랑스러워 할 수는 절대 없겠군. 오히려 아스의 배신자로 몰리겠어.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놈들을 압박하는 데 굳이 미국의 도움까지 필요하지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다며 비웃지는 않기로 했다.

가온은 그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제안까지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이번 내 결정이 맘에 든 모양인데······ 하기야 지금 이 상황이 지구인들로선 너무나도 기껍겠군.”

「기껍다니요?」

“이번 결투가 어찌 되든 이로우리라 기대할 테니까. 결투 결과 참마황이 죽으면 당연히 좋은 일이요, 내가 죽어도 괜찮은 일이라 생각하겠지? 결국 나 또한 잠재적 위협 중 하나니까, 사망한들 해로울 것 없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대답은······」

가온은 한숨 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대답했다.

“일 없다고 전하게. 그리 기뻐할 것 없다고도.”

「혹시 맘에 안 드시는 점이 있었다면······」

엄근오가 당황하여 의문을 표하는 가운데, 가온이 먼저 설명했다.

“자네 눈에는 이게 무슨 세기의 대결쯤으로 보이겠지? 두 소드마스터 중 하나가 죽을 것이며 그로써 아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아니야. 그런 기대 따윈 집어치우게.”

「그렇다면?」

“자네들의 바람과 달리, 이번 결투에서 죽는 소드마스터 따윈 나오지 않을걸세. 그러니 아무런 기대하지 말게. 그 정도로 대단한 결투가 아니야. 애초에 이건 고작 트롤 하나를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문제일 뿐이니.”

상세하게 설명해주었음에도 엄근오는 쉽게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말 그런 이유만으로 두 마스터가 싸운단 말입니까? 트롤 하나 때문에?」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긴 하지. 내가 결투에 임하기로 한 것은 그저 화로의 신도를 보호하기 위함일세. 감히 화로의 신도를 해쳤다간 전쟁하기로 작정했던 대전사조차 자신들의 적이 되리란 걸 보여주기 위함이야. 그게 전부지. 이번 기회에 참마황을 쓰러뜨리겠다든가, 그로써 평화를 이끌겠다든가 그럴 계획은 없네.”

「그렇다면 참마황은······」

“참마황 그자가 결투에 나서기로 한 것도 비장한 결정은 아니지. 대통령씩이나 되어 그리 쉽게 결투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아까 말했듯 이번 결투로 죽는 사람 따윈 나오지 않을 예정이기 때문이니······”

서로 죽일 생각이 없는 소드마스터 둘의 대결에서는 승부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 사실, 소드마스터들 사이에서도 한 수 위라 평가받는 나루만이 친선 대결에서 2승을 따냈을 뿐이란 사실을 가온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렇습니까? 하기야······」

엄근오는 실망한 눈치였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아마 이번 결투는 적당한 무승부로 끝나게 되겠군. 그리 서로 체면을 세우고 일을 끝낼 걸세.”

가온의 말에 엄근오가 물었다.

「그렇다면 변하는 건 하나도 없겠습니까?」

가온은 ‘없다’고 즉답하려다 말았다.

조금 생각해보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있을지도 모르지. 아주 드문 가능성이지만 혹시 내가 이길 경우······ 그렇다고 해서 참마황의 목이 날아가지는 않겠지만······ 더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승리자로서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 있을 걸세. 이후 상황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거야.”

「상황의 주도권이라 하시면?」

“어쩌면 전쟁 계획에도 간섭할 수 있겠지. 예를 들어, 지구 동방의 한 국가를 쓸데없이 자극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도록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네. 더 커진 발언권으로 말이야.”

엄근오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돌아왔다.

「정말입니까? 그건 정말······」

“어쩌면. 물론 말한다고 들을지는 모르는 일인 데다, 애초에 무승부가 거의 확정된 싸움이니까 미리 기대는 말게. 보나 마나 실망할 테니.”

가온이 재차 말했지만 엄근오는 다시 들떴다.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결과야 어떻든, 경께서 본국을 그리 생각해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친우와의 인연만으로 그리 챙겨주시다니요? 이 얼마나 복된 일이지! 하여간 반지성 그분의 존재가 한국으로선 그저 불행 중 다행인······」

그 말을 가온이 잘랐다.

“다행이긴. 반지성의 존재는 한국에 재앙일 뿐이었지. 그것도 아주 끔찍한.”

「전에도 그리 말씀하셨지만······ 어째 평가가 박하군요? 옛 친우를 평하시는 것치고는······」

가온은 이번에야말로 한숨 쉬었다.

“내 여전히 반지성 그를 친구라 생각하긴 하네. 하지만 그 행적까지 좋게 생각할 순 없어. 내 어찌 그러겠나? 추측하자면 베트남전에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무고한 이를 그리 죽여댄 참극을 긍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도 자신을 진심으로 반겨주는 사람들을 죽인 것임에야.”

일찍이 자기 국민에게 환영받긴커녕 적으로 여겨졌던 이 엘프가 그 일을 듣고 어찌 생각했을 것인가. 엄근오도 추측할 만했다.

가온이 계속 말했다.

“대체 왜 그랬는지 물었더니, 반지성은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하더군. 조센징은 죽여 마땅한 존재라고. 그러고서 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더군. 그러니 내 이해할 수가 있어야지······”

당연히도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 말을 주의 깊게 듣던 엄근오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가온 경, 혹시 친구분과 나중에 만났습니까? 그 참극이 끝난 뒤에 말입니다. 반지성과······」

“그걸 왜 묻지?”

「경께서 머무시는 요새는 출입구조차 없어 연락할 방법이 없었잖습니까? 당시엔 전화가 설치됐던 것도 아니고요. 전우였던 우드엘프 분들도 경과 연락하고 싶어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들었는데요. 아마 반지성도 따로 연락할 방법은 없었을 테지요, 그러니 연락할 방법이 생겼다면 더 나중일 겁니다. 그러니까, 흉턴에게 패해 어디론가 사라진 후에야······」

가온은 그 추측을 부정하려다 말았다.

“그래. 맞네. 그 후에 따로 연락했지.”

「그렇다면 반지성은 지금도 살아있는 겁니까?」

“왜, 살아있으면 꼬드겨 볼 텐가? 다시 한번 조국을 위해 싸워달라고?”

「가능하다면······」

“헛된 꿈이니 그런 생각일랑 말게. 일찍이 그랬듯, 그 친구는 자네들을 베어 죽이고 싶어 하지나 않으면 다행일걸.”

지금 엄근오는 이 엘프가 정말로 역사적 존재임을, 그것도 한국의 현대사와도 관련된 존재임을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이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온은 더 자세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가온은 원래 이 일을 숨길 예정이었다.

그래서 엄근오가 뭐라 요청하기 전에 딱 잘라 말했다.

“그가 살아있는지 어떤지는 따로 말하지 않겠네. 어차피 그 친구의 얼굴을 자네들이 다시 볼 기회는 없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정신적으로 지친 가온이 다시 차를 홀짝이던 와중이었다.

사제가 하나가 안절부절못하더니, 가온에게 말했다.

“대전사님을 뵙고 싶다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누가?”

“참마황 폐하께서······”

그 순간, 가온은 평소 사람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 유지하는 무표정을 깨뜨릴 뻔했다.

*******

가온을 찾아온 참마황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가온은 웃지 않았다. 이 불청객을 새삼 반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차가운 목소리로 따졌다.

“정말 그래야 했나? 고작 트롤 한 마리 지키겠다고 여신께 그따위로 보답해야 했어?”

참마황은 아주 미안한 표정으로, 그러나 당당하게 변명했다.

“‘한 마리’가 아니야. 그는 수십 년이나 고통받은 아스의 일원이었네. 이제야말로 영광을 볼 필요가 있었어. 살인마로서 처벌을 받는 게 아니라······ 그런데 트롤 한 마리라니? 자네가 그런 차별주의적인 생각을 할 줄은 몰랐군그래.”

“내가 대부분의 오크와 트롤은 말할 줄 아는 몬스터와 다름없고 인간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족속들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딱히 차별주의자는 아닌데.”

진지하게 말한다기보다는 잔뜩 비꼬는 투였다.

이 화로의 대전사가 여전히 분노한 상태임을 재차 확인하며, 참마황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맘에 안 드는 건 그게 다인가? 트롤 하날 너무 감싸서?”

“그것 말고도 많지. 예를 들어 한국······ 전에도 말했다시피 좀 내버려 둘 생각 없나?”

“거긴 왜 신경 쓰나? 전에야 전략적인 요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그다지 전쟁을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따로 연락하는 한국인 몇몇이 있네. 그들이 불합리한 상황을 하소연하는데 말이야. 알다시피 그들이 처한 이 상황과 나도 얽혔는데, 무시할 수가 있어야지.”

그 말에 참마황은 정색했다.

잠재적 적국의 일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말에 화가 났나?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조센징들과 연락한다고? 제발 그러지 말게! 내 자네를 위해 조언하는 것인데, 조센징들은 속이 구더기와 병원균으로 가득 찬 파리와 같은 족속이야. 그것들과 어울리다 보면 정신이 썩네.”

참마황의 말에 가온은 혹시 일베 하느냐 묻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불쾌감을 숨기지 않으며 쏘아붙였다.

“조센징 타령은 됐고. 그래서 여긴 왜 찾아왔나?”

“결투하기로 했잖나, 우리.”

“그건 일주일 뒤였을 텐데?”

참마황은 다시 어색하게 웃더니, 이렇게 제안했다.

“그 전에, 살짝 겨뤄보지 않겠나? 정말 겨룰 때 다치지 않게 서로 합을 맞출 겸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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