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대전사 참마황 - [1]
한국인 게이머들의 영역에서 아린 벌판으로 진출하려거든 백골부대 길드의 영토를 지나야 한다.
저번에는 통과 허가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통과 못 시켜줘.”
류시범의 말에 이미리가 따졌다.
“왜요! 우린 나라를 구하려는······”
“우리도 나라 구할 계획이 있어. 그런데 자네들이 멋대로 지나가게 내버려 두면 계획이 망가져.”
“대체 뭔 놈의 계획이 있는데요?”
류시범이 답한 계획이란 이러했다.
“우린 지금 카르세 유저들이랑 휴전조약을 맺은 상태거든? 거의 동맹에 준하는 조약인데, 같이 북한놈들을 때려잡자는 내용이야. 실제로 우린 지금도 북한놈들과 계속 싸우고 있고.”
“미쳤어요? 지금이 반공 외칠 때가 아닌데!”
“그거야 알지. 그런데도 여전히 북한놈들이랑 싸우는 건, 카르세 놈들을 기만하기 위함이야.”
“카르세 놈들을 기만해요?”
“그래. 카르세 놈들이 이대로 북한놈들과 싸우다 보면 아린 벌판 깊숙이 돌입하겠지? 그때 우린 북한 놈들이랑 동맹을 맺고 카르세 놈들을 기습할 거야. 북한놈들과 함께 양쪽에서 쌈 싸 먹는 거지. 철저하게 궤멸시켜 버리는 거야.”
당연히도 이미리는 군사지식에 문외한이었다. 그런 그녀가 듣기에도 썩 좋은 계획이 아닌 것 같았다.
“기습해서 적 궤멸시켜봤자 별 의미가 없지 않나요? 아스인들 죄다 거지라서 기본 장비나 끼고 있는데요. 죽으면 아무 손실 없이 그냥 24시간 뒤에 부활할 텐데. 차라리 지금부터 북한군이랑 함께 싸우는 게 놈들 막는 데 훨씬 도움 되는 게 아닌가······”
“시간 흐르면 카르세 놈들도 나름대로 장비 충실해질걸? 지금 그놈들 북괴한테서 노획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놈들을 전멸시켜서 그 장비들을 우리가 다 뺏어버리면 전의를 상실하겠지. 그게 가장 정신적 충격이 클 거야.
아무튼 나중에 제대로 뒤통수를 때리기 위해서 지금은 카르세 놈들이랑 동맹 맺고 북괴랑 싸우는 중인데······, 저번에 자네들 통과시켜 줬다가 도시 하나 뺏길 뻔했다며 거세한 항의를 받았거든? 또 그랬다간 동맹 깨질 것 같으니 이제는 통과 못 시켜줘.”
“그럼 우린 어쩌라고요? 이대로 뒤에서 구경이나 해야 하나요? 그거야말로 인력 낭비에 시간 낭비 같은데······”
“정 통과하고 싶으면 우리 영역 말고 딴 데로 가든가.”
“그러려면 보급선이 여덟 배로 길어지는데요. 북한군이랑 합류도 못 하고······”
“무조건 뭉치면 세지나? 아냐. 이 병력이면 각개격파 당하기도 쉽지 않아. 그냥 북한군이랑 따로 싸우지?”
“아니, 보급선이······”
이미리가 뭔가 반박하려는 가운데, 주변에 있던 백골부대 길드원들이 야유했다.
류시범의 부관이 외쳤다.
“이 아가씨야, 우리 길마님 뭐하던 분이신지 모르나? 전 장성이야. 사단장 하시던 분! 전략적 판단을 해도 우리 길드장님이 하시지 어디서······”
그 말이 옳다는 듯, 길드장 류시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말에 확신에 찬 얼굴. 위대한 계책을 품은 장군의 얼굴로 젊은 게이머들을 바라보았다.
젊은 게이머들은 이 노장에게 뭐라 말하려다 말았다.
모름지기 전문가가 권위로 찍어누르면 일반인은 반박하기 어렵다. 이미리와 다른 게이머들은 뭔가 아닌 것 같다 싶으면서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한편 류시범은 근엄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젠장, 어쩌다 이딴 걸 계획이라고 지껄이는 처지가······.’
실제 그놈의 어설픈 계획이 실현될 일은 없을 것이다.
류시범은 계속해서 길드를 이끌고 조선인민군과 싸울 계획이다. 끝까지 한국인들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아린 벌판으로 통하는 길목을 가로막을 계획이다.
카르세 게이머들이 얼마나 우승에 가까워지든, 류시범은 아직 결정적인 시기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카르세인들이 아린 벌판을 점령한 후일 것이다.
그리하여 참마황은 게임의 보상을 얻어 엘프가 될 것이다.
그때 백골부대 길드원들은 자기네 길드장에게 속았음을 깨달을 것이다. 졸지에 길드장의 매국 행위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알고 기겁할 것이다.
항의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배신한 길드장을 게임 밖에서 찾아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길드장은 국적을 바꾼 지 오래니까.
결국 류시범의 뜻은 변하지 않았고, 한국인 원정대는 이 영역을 지나가길 포기해야 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지금부터 북한군이랑 함께 싸우는 게 나은데······역시 가온 못 데려오나?”
“가온은 또 왜?”
“류시범 저 양반, 가온이 말하는 건 듣잖아.”
누군가의 하소연에 전 백두 길드장 강주석이 끼어들었다.
“아냐, 포기해. 한국의 시련이니 한국인들끼리 이겨내야지.”
“강주석 너 이 새끼, 혹시 가온 그 양반이 저번에 너 엿 먹였다고 생각해서 원한 가졌나?”
“절대 아냐. 나 같은 놈 십만 명보다 가온 그 양반 하나 있는 게 훨씬 든든한 것도 알지. 그래도 어쩌나? 그쪽이 도와주기 싫다는데.”
“그래도······”
“생각해보면 한국인들 일에 아스의 엘프를 끼우는 건 말도 안 됐어. 바랄 걸 바라야지. 자, 이왕 이렇게 된 거 돌아가서 정비나 합시다······”
기껏 꾸린 원정대를 바로 해산하자니 꼴이 우스워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잠자코 후일을 기약하려던 그날이었다.
20시, TV에서 속보를 내보냈는데, 한국인이라면 모두 격분할 만한 소식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애국하기 위해 모인 이 게이머들은, 그 뉴스를 보고서 자극을 받다 못해 초조함을 느꼈다.
뭐라도 바로 해야겠다는 초조함을.
*******
한국의 방송국은 모두 한 가지 선언을 뉴스에 내보내고 있었다.
카르세 연방 장검정권의 선언이었다.
장검정권의 의향을 충실히 반영하는, 카르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가 외쳤다.
「역겨운 배신자요 겁쟁이인 남조선 마족들에게 고한다!
참마황 폐하께서는 일찍이 너희 족속에게 성전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 지엄한 명령에 응하는 것은 너희의 의무였다!
당연히도 해야 하는 그 일에 관대하신 참마황 폐하께서는 보상까지 약속하셨다. 그러나 너희 마족들은 그 은혜에 감사할 줄 몰랐다!
너희 마족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고 그분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참마황 폐하께서 그토록 관대한 제안을 하신 지 시간이 이토록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어영부영 말을 흐릴 뿐 폐하의 제안에 승낙도 거절도 제대로 내놓지 않았다!
참마황 폐하께서는 이 지상에서 가장 고아한 정신과 인내심의 소유자이시지만, 너희의 비열함은 그분의 인내심을 기어이 한계에 도달하게 했다!
그리하여, 참마황 폐하께서 너희 마족의 행패에 분노하시었다! 성스러운 분노에 찬 선언을 하시었다!
폐하의 말씀을 너희 남조선 마족에게 전한다!
곧 있을 성전에 동참할 것인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너희는 확실하게 내놓아야 한다. 한 달 뒤까지!
한 달 뒤까지 너희는 확실하게 대답해야 한다.
중립은 고를 수 없다. 방관도 고를 수 없다.
아군이거나 적이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
또다시 말을 흐리지 말라. 그랬다간 적이 되길 선택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뭘 고르든, 즉시 대답에 대한 행동에 들어갈 것이다!」
선전포고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덜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뉴스를 보며 가온은 말문이 막혔다.
“저놈 또 무슨······”
쓸데없이 한국을 자극하지 말도록 겨우 설득해놓았건만, 기어이 또 그러고 말았다.
심지어 이번에는 저번보다도 심했다. 아예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협박 아닌가.
‘아군 아니면 적? 그건 대체 무슨 논리야.’
그 논리는 가장 극단적인 상황, 그러니까 카르세 연방과 한국과의 전쟁마저 암시하고 있었다.
후긴 사람인 가온마저 충격을 받은 가운데, 당연히도 한국인들이 받은 충격은 더욱 클 터였다.
과연 한국인 하나가 바로 연락을 해왔다.
가온의 휴대전화가 구슬피 울었다.
“복동이?”
「가온 형, 뉴스 봤지?」
“뉴스······ 봤지. 왜?”
「도와줘, 제발」
또, 또. 지긋지긋한 저놈의 요청.
그러나 이번에는 차마 화내기 어려웠다. 상황이 상황 아닌가.
그렇다고 승낙할 수는 없었다.
“미안한데, 내가 뭘 어찌 도와주겠냐?”
가온의 말에 이복동이 간청했다.
「직접 와서 싸워달라곤 안 할게. 그냥 류시범 아저씨한테 설득만 좀 해줘. 한국인들 싸우러 가게 길 열어달라고······. 나름 안면 튼 내가 부탁해도 들어먹질 않아」
가온은 류시범이 지금 카르세에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제 누구의 지시를 따르는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미안하다.”
가온의 거절로 통화는 종료되었다.
가온이 한숨 쉬는 가운데, 천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대전사, 지금 오락 속 세상을 걱정할 때가 아닌 듯하노라. 방금 보도에서 무얼 느꼈느냐?’
여신께서 물으시매 가온이 대답했다.
“최후통첩을 날리는 걸 보니, 곧 전쟁이 시작될 것 같군요. 맞습니까?”
‘네 여신이 보기에도 그럴 것 같노라. 크게 걱정하며 묻나니, 가온? 모름지기 전쟁이 다가오면 사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느냐?’
“글쎄요······”
‘전쟁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는 법이라. 그리고 네 여신의 신도들은 전쟁을 반대한다.’
“그러니까, 여신님의 신도들이 곧 공격당하리란 겁니까?”
‘아마 그러리라. 그 불길한 추측을 전제로 묻나니, 내 대전사여. 내 대전사의 복수할 권리와 신도들을 보호할 의무는 서로 상충 되는 것이더냐?’
여신께서는 지금 가온이 평화를 바라는 자들을 보호하길 바라고 계셨다.
가온으로서는 꺼려질 만한 일이었다. 그랬다간 주화파의 이미지가 굳어질 것 아닌가.
가뜩이나 얼마 전에는 평화를 이끌자던 드래곤의 제안을 거절한 마당에······.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가온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 대전사는, 네 여신의 신도들이 전쟁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공격당할 경우 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것이냐?’
“당연한 일입니다. 여신이시여. 제가 평화를 바라지 않는 것과 별개로, 여신님의 신도들을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전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노라고 여신께 따로 합의 없이 맹세합니다.”
여신께서는 어이없어하시는 동시에 경탄하시었다.
‘참으로 종교 배반 적인 맹세로다······ 원래라면 화내야 할 터지만 이번은 그럴 수 없겠구나. 네 여신은 그저 지극한 찬사를 보낼 뿐이다.’
“뭘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여신이시여.”
그렇듯 전쟁이 다가오는 가운데, 평화의 종교는 움츠러들어선 안 되었다.
신도들은 그러고 싶었겠지만 교단은 그럴 수 없었다.
이틀 뒤, 카르세 연방에 있는 화로 여신의 대신전에서 종교 집회가 열렸다.
“화로의 신도들이여, 집안에서 불타는 화로야말로 따스함을 아는 자들이여! 전쟁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투쟁이 싫다 하여 숨어서는 안 됩니다.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늙고 지친 성녀는 이번만은 자신의 노쇠함을 잊었다.
이 자리에 모인 수십만 명의 신도들을 향해, 성녀는 확성기 없이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번 시장 선거에서 우리 교단에서 내보낸 수달타 자매가 낙선된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다들 겁을 먹고 집에만 있었기에 그렇듯 참담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번 주말, 우리는 화로의 뜻을 보일 것입니다. 전장이 싫다고, 평화를 원한다고 당당하게 외칠 것입니다! 그랬다가 배신자라 불리는 것이 두렵습니까?”
성녀의 물음에 신도들이 외쳤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번 주말, 평화의 집회에 참여하여 뜻을 보입시다! 평화의 시위행진에 나섭시다! 전쟁을 외치는 자들 사이로, 평화를 외치며 불꽃처럼 나아갑시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돌과 오물을 던지겠지만 아랑곳없이 당당히 행진합시다! 다들 기꺼이 그러겠지요?”
““예!””
이번 대답은 아까보다 힘이 없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화로의 성녀는 신도들을 위로하듯 말했다.
“여러분에게 무작정 희생하라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보호 받지 못한 채 들판에 내몰린 양 떼가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강력한 목자께서 우리를 가호하십니다······”
지금 성녀는 여신의 존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녀의 뒤에 화로의 대전사, 가온이 서 있었다.
그동안 교단의 집회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이 대전사는 오늘도 모습을 숨겼다.
전쟁을 마다하지 않으리라 선언한 주제에 대놓고 평화집회에 나올 수야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채, 뒷짐 지고 서 있었다.
“대전사님? 이 자리에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성녀가 속삭이자 가온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아니, 대전사씩이나 되어 전혀 나오지 않던 지금까지가 비정상이었지요.”
이 와중에 정체를 숨긴 대전사를 알아볼 사람들은 다 알아본 눈치였다. 심지어 평범한 신도들도 여기 누가 있는지 눈치챈 듯했다. 근래 있던 사건으로 가온이 폴리모프의 달인이며, 그로써 정체를 숨기길 즐긴다는 소문이 파다 했던 것이다.
“성녀님과 대화하는 저 사람 혹시······”
수십만 신도들의 시선이 대전사로 의심되는 남자에게 모였다. 하기야 워낙 구경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이 보기 드문 대전사에게, 신도들은 진심 어린 경의를 보냈다.
평소에 대전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기는커녕 복수를 외치고 다니는 인사임에도, 이 대전사가 교단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아스의 모두는 이 대전사가 어찌나 강력한지 알고 있었다. 전쟁을 바라는 자들마저 화로의 대전사를 두려워 했기에, 그들 사이에서 화로의 신도들은 지금까지 박해받지 않고 평화로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 평화에도 결국 파국이 찾아온 지금, 화로의 신도들은 자신들의 대전사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누군가가 외쳤다.
“가온, 화로의 대전사!”
그에 호응해 사람들이 가온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이 자리에 없는 대전사의 이름을.
가온은 당황하는 가운데, 화로의 신도들이 외쳤다.
““위대한 대전사여, 화로를 수호하소서!””
자신을 향해 경의와 기대를 보내는 신도들을 보며, 가온은 생각했다.
혹시 일부러 연출한 상황일까? 가온의 이름을 외치도록 미리 바람잡이를 섞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 여전히 직접 움직일 맘이 없는 대전사의 맘을 움직이기 위해서.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지만, 가온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을 느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가온은 애매한 인물이었다. 평화의 교단에 대전사로서 몸담은 와중에도 복수심을 품었기에, 맡은 바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한편 카메라가 번쩍이고 있었다.
당연히도 이번 성녀의 시위행진 예고는 양 세계의 뉴스를 장식했다. 심지어 대전사로 의심되는 인물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뉴스도.
그리고 가온이 집에 돌아오니, 전화가 걸려왔다.
카르세 연방 국가원수의 전화였다.
「이번 일은 실로 유감일세, 가온」